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과 염소는 누구인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31-46)
[질문]
위의 말씀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궁금한 것은 위의 구절 속에는 선을 행하고 알지 못하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과 선을 행하고 아는 왼편에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말씀에서 바른 선(지극히 작은 자에게까지)을 행하지 않아서 이렇게 양과 염소로 나뉘어 지는 것인가요?
[답변]
양과 염소로 나뉘어지는 기준의 핵심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것 같습니다. 특별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 염소로 구분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심지어 불안을 야기시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누구나 길거리나 지하철 같은 데서 자주 마주치는 걸인들에게 돈이 있으면서도 적선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느끼는 양심의 가책은 둘 째 치고 마지막 심판 때에 그런 것이 문제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마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의심이 생길 때는 한 번 역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말씀이 그런 경우를 상정한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는 단언컨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선행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당연히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참 신자라면 더더욱 나서서 도와야 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도울 마음도 생깁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구원 받아 영생을 확보한 자라도 죄의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히 거룩한 성자로 변하지 않았으며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처럼 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고 있는 자입니다. 말하자면 목사라도 그런 걸인을 만나면 자기 바쁜 일이 먼저 생각나 귀찮아 할 때도 있고 심지어 자기 돈이 아까워 주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대신에 베드로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갈 때에 날마다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행3:6)고 말한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이 말이 구제와 선행을 부인하거나 기독교라는 종교체계를 강조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구원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그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와 같은 영적 불구자인 모든 인간을 일으켜 세우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진정으로 영접한 자는 구원을 얻고 마지막 심판 때에도 양의 자리로 나뉘어집니다.
앞의 두 질문과 마찬가지로 문화, 문맥, 주제라는 세 관점에서 이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할 것은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설명하시면서 두 가지 반대되는 사물과 일을 대조 시키는 기법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무엇과 무엇이 비교되었는지 잘 분석해야만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1. 문화적 관습
본 비유는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비유가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비유적인 요소라곤 단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 짓는 일 뿐입니다. 비유의 특징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 가운데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가 추출되어져야 하는데 본 비유에선 그런 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관습을 아는 것과 실제적인 해석과는 크게 연관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당시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 없이 섞여 지내다 잠 잘 때는 목자가 그 둘을 구분했습니다. 양은 추위에 강하고 염소는 약했기 때문에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재워야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문화적 관습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현실에선 염소를 따뜻한 곳에 재웠지만 본문 비유에선 구원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심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이 비유가 갖는 진리는 마지막 심판 때에 정확하게 영생과 멸망의 둘로 정확하게 양분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심판과 구원 외의 제 3의 자리가 없습니다. 나아가 인간에게 더 이상 유보나 연기가 불가능하며 또 다른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즉각적인 심판과 구원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양을 오른 편에 두고 염소를 왼 편에 둔 것은 구약시대부터 오른 쪽은 영광과 존귀와 생명과 힘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입니다.(출15:6, 욥30:12 등 참조) 반면에 왼편은 저주와 사망과 미련함과 힘의 상실을 상징했습니다.(삿3:15, 전10:2 등 참조)
그러나 평소부터 양이 선한 동물이고 염소는 악한 동물이라는 의미는 전혀 없으며 단지 흰색 양과 검은 색 염소를 대비해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징적으로 비교한 것 뿐입니다. 양이 선해서 흰색이 되었거나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뜻이 생명이요 선이라는 의미로 흰 양을 비유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행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로 온순한 양을 예로 든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구원과 심판 둘로 확실히 나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목자가 양 떼와 염소 떼로 나누는 행위에 비교시킨 것 뿐입니다.
2. 문맥에서 제기되는 문제
본 비유는 종말을 나타내는 마태복음의 5가지 비유 중 마지막이자 결론에 해당됩니다. 주제는 심판과 구원의 표준과 근거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에는 각각 상반되는 기준이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기준에 안 맞으면 심판을 받는 것이고 심판을 받는 근거에 해당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전혀 반대되는 두 부류의 사람을 대조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부류의 사람을 나누는 기준을 단순히 적은 일에 충성했느냐 안 했느냐로 나누는 것은 이 비유를 표면적,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무엇과 무엇이 대비 되었는지 잘 분석해 보기로 합시다.
심판관인 왕이 자신에게 잘했기 때문에 구원을 준다고 했습니다.(35,36절) 그러나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왕에게 잘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습니다.(37.38절) 그러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바로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그 뜻을 풀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40절) 그들이 처음에 부인한 이유는 자기들로선 왕에게 직접 잘한 적이 없기에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 왕은 자신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에게 직접 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적은 자에게 잘한 것이 바로 자기에게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판 받은 자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왕이 자신에게 잘못했기에 심판을 준다고 했습니다.(42,43절) 그러나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은 왕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습니다.(44절) 그러자 또 다시 왕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들은 왕에게 직접적으로 잘못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 왕의 기준에 반발했습니다. 그에 대해 왕은 자신의 의미하는 바는 자기에게 직접 잘못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적은 자에게 잘못했느냐를 따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대조해서 분석해 보니 이 비유가 적은 자에게 선을 베풀었느냐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 이해되십니까? 그것은 이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의 일부분이자 두 종류의 사람들이 행한 행동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입니다.
지금 왕은 당연히 심판관이신 하나님이자 예수님입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고백한 대로 하나님에게 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일을 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적은 이들에게 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심판 받은 자들은 하나님에게는 아주 잘했습니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좋고 하나님의 일도 많이 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종교적인 형식과 외식적인 율법 준수에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하고 입으로는 열심히 불렀지만 막상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등한히 했거나 종교적 책임을 다해 하나님의 보상을 받으려는 목적으로만 선을 행했다는 뜻입니다.
3. 주제로 살펴 본 비유의 참 뜻
그럼 이제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명확해졌습니다. 평소에 불우한 이웃과 형제들을 돕고 섬기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일을 함에 세상에서의 어떠한 칭찬도 바라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상도 전혀 바라지 않는 겸손한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으로 선행과 구제를 하며 하나님 앞에선 의인인체 자랑하는 뻔뻔한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눅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참조)
그러나 단순히 선행을 하느냐 아니냐는 행위만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근본적인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오른 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겸손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데도 겸손과 교만의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가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과 정성의 크기만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 겸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때에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철저한 자각과 그런 고백을 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자 진리입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한 자의 특징은 어그스틴이 말한 대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직 겸손입니다.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위선적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겸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여 그 분 앞에 절대적으로 겸비해졌기에 사람 사이에도 자동적으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단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계명을 지키거나 인간으로서 도덕적인 책임감과 양심을 만족시키는 의미로 선행을 해선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형식적, 종교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거듭남이 없이 자신의 결단만으로 예수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선한 삶을 살기만 하면 천국 간다고 착각하는 자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일 대 일로 만나 하나님께 항복하기 전까지 그만큼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에서 뜨거웠던 자가 없었습니다.(빌3:5,6) 그러나 그에게 오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자각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인식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7-9)
예수님을 만나 세상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여겨졌기에 세상의 칭찬이나 심지어 하나님의 보상마저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자신을 평가해 주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세상적으로는 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 같이 아무리 작은 자에게도 충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자신이 이전에 행했던 의는 단지 율법에서 난 것이지만 지금 자기가 하는 모든 행위는 오직 하나님께서 난 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의 도덕적 종교적 열심으로 선을 행했지만 이제는 예수라는 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가 금지할 법이 없이 저절로 열린다는 것입니다.(요15장, 갈5장)
4. 결론
결론적으로 본 비유에서 예수님이 제시한 구원의 기준이 얼마나 선을 충실하게 행하느냐 보다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 항복하여 진정으로 낮아졌는가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자연히 이웃에게 충실하게 되며 또 그것이 절대로 자신의 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자신의 삶 자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간 자는 세 번 놀란다는 크리스찬 조크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꼭 와 있어야 할 바리새인처럼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없고 있어선 안 될 죄인인 세리는 와 있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천국에 와 있음을 놀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본 비유의 뜻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양으로 분류된 사람은 왕에게서 나에게 잘해 구원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저는 주님께 잘한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놀래며 부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항상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평생을 산 자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웃에게는 주님께 하듯이 진정으로 사랑한 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 자는 비록 가끔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 항상 이웃을 사랑하지는 못해도 근본적으로 자신을 세상의 배설물로 여기기에 이웃에게 예수님의 심장을 갖고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우선 순위나 중요도의 차이를 두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둘째는 첫째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한다고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또 하나님을 잘못 사랑하는 자도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은 이 두 계명을 정확하게 같은 것으로 본 자이며 염소는 첫째 계명만 중요하게 보았고 그것도 형식적, 종교적으로만 지킨 자라는 뜻입니다. 적은 자를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구원의 기준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자연히 적은 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께 항복한 자 즉 참 신자만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우편으로 분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