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헌금대해서는 성경문답 -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꼭 해야 하는가? - 을 통해 대부분 저의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단지 헌금을 하는 방식에 대해 간단히 여쭙고자 합니다.
1. 헌금을 무명으로 하면 성경적이지 않은 것인지요?
헌금을 할 때 봉투에 헌금자 이름을 쓰고, 헌금 시간에 목사님께서 헌금자를 호명하고 축복기도를 해 주시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 내역을 각 개인별로 그래프로 표시해서 붙여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왠지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마음을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고, 또 어떤 경우에는 헌금 액수가 다른 성도들에게 알려져서 민망한 경우도 발생합니다. 목사님께서 호명을 많이 해 주셔야 하나님께서 복을 더 많이 주시는 것도 아닐 것 같구요.
그래서 헌금을 무명으로 하고 싶은데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인지요? (참고로 연말정산용 기부금 영수증은 필요치 않습니다)
2. 헌금에 여러 가지 명목을 붙이는 것이 성경적인지요?
처음 교회 나올 때는 몰랐는데 헌금의 종류가 상당히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십일조, 감사헌금(심방, 개인별 안수 헌금, 생일, 시험, 출장, 여행...), 목적 헌금(선교, 건축...), 절기헌금, 서원(소원?) 헌금, 천번제 등등...
헌금에 이렇게 각종 명목을 붙이는 것이 더 성경적인 것인지요?
3. "성미"의 성경적 유래와 용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답변]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라 질문하신 순서대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무기명 헌금은 비성경적인가?
헌금을 기명과 무기명 어느 쪽으로 해야 하는가는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지 않습니다. 헌금은 외형적으로는 소속 교회에 하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은 무기명으로 했다고 해서 누가 했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 바친 자의 중심에 따라 은밀하게 보응을 해 주십니다. 물론 그 보응 가운데는 축복 뿐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의 사건처럼 잘못된 중심에 대한 심판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러나 가능한 기명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명으로 한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 헌금실적을 발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기명으로 하는 것이 좋은 이유를 한 두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교회에서 헌금 관리하기가 용이합니다. 연말 정산 시에 세금 계산하기가 편리하다거나, 교회가 작정 헌금을 관리하거나, 개인별 헌금 실적을 비교해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독려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뜻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담임 목사나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성도들의 개별적인 현실 사정을 알아 기도해주고 또 나아가 영적인 형편도 짐작할 수 있어 그 믿음을 양육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꼭 헌금 실적이 신앙 수준을 100%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쉽게 예를 들어 어떤 신자가 현실적으로 더 풍요로워졌는데 헌금 액수는 더 떨어지면 뭔가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영적인 침체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기명 헌금은 자신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 항상 떳떳한 자세로 설 수 있는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헌금한 실적을 두고 그 사람의 신앙과 비교해 비난을 하거나 잔소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성경 말씀으로 권면하거나 기도만 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목회자 같이 교회 내의 영적 지도자에 위치에 있는 자만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자신의 침체된 영적 상태를 두고 야단을 치고 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책임을 맡은 자는 결국 신자 본인이라는 뜻입니다.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고 믿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 드림에 대한 진심과 열성이 약해질 소지가 있습니다. 물론 기명으로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꺼이 드릴 바를 다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기명으로 해도 그 진심이 약해지거나 자랑을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며 무기명으로 해도 정확하고 성실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래도 의지가 연약한 존재라 항상 하나님과 교회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설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금연을 결심한 자는 자꾸 주위에 그 결심을 알리라고 합니다. 남들 앞에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이 걸려서라도 금연 결심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헌금 봉투에 자기 이름을 분명히 명기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신앙 상태를 점검하고 다시 회복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다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대한 선한 계획을 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에 바탕을 둔 기도를 간절히 입술로 아뢰기 전까지는 고난 가운데 두시고 또 우리를 향한 계획을 시행하지 않으십니다. 헌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심중까지 꿰뚫어 보시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입술로 고백하기 원합니다. “주님! 지난주 당신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너무 감사하여 당신의 자녀 OOO가 이렇게 헌금을 드립니다.”
무슨 일이든 이름을 떳떳이 밝힌다는 것은 그 일에 자신이 당당하고 비난 받을 일이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기명 헌금은 하나님 앞에 그런 자세로 헌금하고 있다는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물질에 의해 좌우되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주권적 간섭으로만 살았음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받은 복 때문에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요 행복의 근원임을 스스로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기명을 강요하여 개인별 헌금 실적으로 경쟁을 유발하거나, 많이 낸 사람을 우대하거나 하는 비성경적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나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이 기명으로 할 것인가 무기명으로 할 것인가에 까지 영향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럴 때는 오히려 담임 목회자의 목회 방침과 영적인 지도 전반을 두고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심각하게 재고하셔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교회의 잘못된 헌금 관리에 반발하여서 무기명으로 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신앙상의 모든 의심과 갈등은 신자 개인과 하나님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개인별로 헌금 액수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습니다. 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여 일일이 목사가 축복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헌금 봉헌 시간에 신자가 헌금 봉투에 기록한 감사의 제목을 읽어주는(가능한 익명으로) 것은 일종의 간증(witness)이자 나눔(sharing)이니까 좋은 일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백성을 축복하고 기도해 주었고 하나님도 그렇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면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2-27)
그러나 어디까지나 백성과 하나님의 중간에 선 입장에서 제사장이 당연히 해야 할 바를 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은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제사장은 희생 제물(지금으로 치면 헌금)을 받아 가장 먼저 하나님께 바치고 난 후에 자신들의 몫을 구분하고 때에 따라 함께 나누어 먹었을 뿐입니다.
헌금을 받아 각각 그에 맞는 축복 기도를, 그것도 예배 중에 일일이 호명해 가면서 하면 헌금을 하지 않은 자들은 그런 기도를 받지 못하는 결과가 됩니다. 마치 하나님의 축복이 헌금을 해야만 받을 수 있거나, 헌금을 하면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당신의 주권으로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이 나눠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공적과 선행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뤄지듯이 말입니다.
물론 목사가 헌금한 자에게 축복 기도를 해 주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며 당연히 할 수 있고 또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은밀히 헌금 명부를 보고 가장 먼저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두고 중보 기도하는 중에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헌금 명단과 액수를 비성경적인 목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한, 신자는 기명으로 헌금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자신의 신앙이 올바르게 서있고 특별히 헌금에 대한 생각이 성경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면 무기명으로 한다고 해서 비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또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 헌금에 명칭을 부여해야만 성경적인가?
우선 현재 교회에서 통용되는 절기 헌금, 작정 헌금 등 각종 명칭의 헌금 모두를 신자가 반드시 의무적으로 다 해야 하는 법은 없습니다. 어떤 헌금이라도 신자에게 적용되는 기본 원칙은 자발적으로 자기의 믿음의 분량만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헌금은 신자 스스로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되돌려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자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하는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어떤 규칙을 정해 강권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가 온전한 믿음 위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드리면 하나님은 어떤 명목의 헌금, 얼마의 액수라도 기쁘게 받으시고 또 그 신자를 나중에 어떤 형태라도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꼭 헌금을 한 만큼 현실적인 형통으로 축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심으로 드린 헌금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신자를 대우하실 것인가는 오직 하나님 당신의 주권적 뜻에 달렸습니다. 현실적 축복 대신에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하든지, 신자 대신 신자의 주위 사람에게 복을 주던, 필요하면 오히려 더 어려움에 빠트리시던 간에 반드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며 신자에게 유익이 되는 길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되돌려 드렸으므로 드리는 순간 헌금과 직접 연관된 기대나 해석을 하지 말고 헌금에 대해선 완전히 잊어 버려야 합니다. 헌금이 결코 조건과 결과(드린 만큼 되받는 관계) 혹은 임무와 보상(임무를 완수하면 보상을 받는 관계)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헌금은 신자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들어 와서 그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단순히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낸다는 차원을 넘어서 헌금을 드리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헌금을 드리고 그 후의 바뀌는 인생을 보면서 은혜를 받다가, 차츰 드릴 수 있는 여유와 믿음이 생긴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며, 나중에는 헌금을 드리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며, 더 많이 드리고 싶은 소원과 열심이 생깁니다. 하나님만이 자기 인생의 주인일 뿐 아니라 그분이 바로 삶의 가치요 목적이요 만족이 됩니다.
쉽게 말해 주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교제가 깊어지면 그저 말씀보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즐겁습니다. 현실적으로 갖춘 것 아무 것이 없고 심지어 죽을병에 걸렸어도 주님의 임재하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참 자유 함을 누리게 됩니다. 헌금도 바로 그런 차원에까지 이르러서 기도하듯이 말씀 보듯이 드리며 드리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 나라에 이미 들어 와 있으면서 그분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차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신자가 교회 안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헌금은 십일조와 주일헌금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선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도 이견(異見)이 있습니다만 성경적으로 따져서 분명히 신자가 반드시 해야 하는 헌금입니다. 하면 복(다시 현실적 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받을 뿐 아니라, 십일조를 할 수 있을 만큼 믿음이 자란 것이 더 큰 복이며, 나아가 재물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고백이자 헌신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를 바치는 것 자체가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며 그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외에 나머지 절기와 온갖 명목의 감사 헌금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하시면 됩니다. 꼭 더 많은 종류의 감사 헌금을 더 많은 액수로 해야 하거나,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증거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일 헌금과 십일조 외에도 특별히 감사의 고백을 더 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무슨 명목으로든지 본인이 알아서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입술로 진정한 고백을 할 때에 더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가 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나 목사가 헌금을 더 거두고 경쟁을 유발하려고 일부러 온갖 명목을 부쳐 감사 헌금을 하라고 강요해선 절대 안 됩니다. 또 그런 의도를 내포하면서도 엉뚱한 다른 (성경) 말씀으로 포장해서 권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남에게 억지로 감사하라고 다그치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란 어디까지나 본인의 속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야 참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감사합니까?” 라고 확인하거나, “감사하세요!”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절기 헌금이나 서원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 절기에 더 감사하고 싶거나, 어떤 목적과 계기로 더 깊은 헌신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본인에게 합당한 명목을 붙여서 하면 됩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헌신하겠다는 의미에서 기명으로 헌금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신자 스스로 여러 다양한 명목을 부쳐서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반면에 교회가 주일과 십일조 헌금 외에 여러 명목으로 헌금을 내라고 하면 결국 비정기적 혹은 비정상적으로 헌금을 더 많이 걷어야겠다는 노골적인 표현이 됩니다.
특별 작정 헌금의 경우는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일천번제의 예물처럼 교회의 유익이나 자신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개인적인 목적으로 작정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 되었던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신자 개인과 하나님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헌금이 이뤄지며 또 어떤 명목이든 교회로선 일반 회계에 포함시키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끔 교회가 특별히 작정하는 헌금이 있습니다. 교회의 경상적 예산만으로는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예를 들어 성전 수리나 건축을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 특별히 따로 헌금을 더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유다의 요시야 왕이 퇴락한 성전을 수리할 때에 별도 헌금을 하도록 한 선례가 있습니다.(왕하12:4-16)
이때는 그 헌금이 따로 더 필요하게 된 사유나 하고자 하는 일의 당위성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입증되고 나아가 합법적 절차(성경의 규정 뿐 아니라 조직체로서 교회가 가진 정관 등의 규정에 부합한)를 거쳐 성도들 간에 합의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일단 작정 헌금(Special Fund Raising)을 하기로 전 교회적으로 결정이 되면 소속 교인이라면 비록 마음에 들지 않은 결정이라 해도 자기의 마음의 원대로 성의껏 작정하셔서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직분에 따라, 재산 정도에 따라 작정 액수를 차등하게 혹은 전교인 숫자를 단순히 산술 평균해 균등하게 정해 주어선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선교나 구제처럼 지정해서 헌금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주일 헌금과 십일조 외에 전회중의 동의 없이 혹은 목사나 당회 독단으로 어떤 명목을 추가로 지정해서 헌금하게 해선 안 됩니다. 반면에 국내선교 주간, 해외선교 주간처럼 특별한 행사가 있는 주간의 주일 헌금을 그 명목으로 돌리는 것은 좋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려면 재정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교회라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개인이 임의로 구제나 선교 등 그 사용처를 지정해서 헌금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한 삼가야 합니다. 교회란 예수님을 머리로 모신 신령한 조직체입니다. 조직이라는 면에 있어서 헌금은 반드시 그 공동체의 전체적 계획과 소명에 따라 운용되어져야 합니다. 또 신령한 공동체라 성령이 언제 어떤 일을 갑자기 시킬 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의 진정한 소원으로 하는 일이지만 개인이 임의로 사용처를 지정하기보다는 공동체의 비전에 동참하고 또 때에 맞춰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주일 헌금과 십일조 생활에는 등한히 하면서 가끔 내는 헌금을 특정 용도로만 지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또 교회 방침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매주일 내는 헌금과 십일조마저 지정 명목으로 해선 차라리 그 공동체의 일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신자 개인이 지정하는 헌금은 평소 때 헌금을 성실하게 내는 자가 여분의 돈으로 그것도 진지하게 기도하여 확실한 응답을 받고 하시되 소속 교회에 내어서 교회 이름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결론적으로 헌금에 명칭을 다양하게 붙인다고 해서 비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명칭을 붙이는 주체와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구약의 제사에도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 등에 따라 드리는 헌물의 종류가 달랐습니다. 신자가 어떤 명목으로도 감사와 서원 헌금을 해도 됩니다. 작정(성전 이전과 건축 등)과 지정(구제와 선교 등) 헌금도 신자와 교회 다 그 명목을 붙여도 됩니다.
그러나 개인이 할 때는 반드시 평소 일상적 헌금을 충실히 드리는 자가 기도하여 확답을 받고 하셔야 하며, 교회가 할 때는 반드시 적법한 절차에 따라 회중의 동의를 얻은 후에 시행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가 되든 교회가 그런 명칭을 헌금을 강요하거나 경쟁을 유발하거나 교회 내에 차별을 조장하려는 목적으로 해선 절대 안 됩니다.
3. 성미(聖米)의 성경적 유래는 무엇인가?
구약의 제사법에서 제물 내지 십일조를 땅의 소산물로 바치는 제도에 근거하여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 있었던 특유의 제도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일 년에 한 차례 이십 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자가 반 세겔씩 내는 성전세(출30:13)를 제외하고는 땅의 소산과 동물 제물로 바치게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 다시 땅의 소산이나 짐승으로 바꾸어 바치도록 했습니다.(신14:24-26, 마21:120) 한마디로 성전 예물은 돈(헌금)이 아닌 물건(헌물)으로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물론 당시는 화폐제도가 완비되어 있지 않았고 또 농업과 목축업이 주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하나의 손상 없이 흠이 없고 가장 좋은 것을, 그중에서도 초태생(初胎生)으로 헌물을 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바치게 하면 그것을 확인할 재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고급으로 받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신자가 당신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신6:5)한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또 특별히 초태생은 신자가 가진 것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을 대표해서 드린다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전래된 초창기 약 100년 전의 한국도 산업이 거의 농업뿐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쌀은 주식이자 경제 거래의 기본 단위로까지 통용되었습니다. 모든 경제력 수준이나 가치가 쌀로 측정 되었고 아주 부자라야 삼시 세끼 쌀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쌀은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 그 자체로 어떤 면에선 삶의 목적이자 가장 귀한 가치를 지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쌀을 헌금으로 바친다는 것은 성경대로 땅의 소산이자 가장 귀한 것으로 바친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나아가 쌀이 수입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할 때라 주부가 밥을 지을 때마다 그중의 1/10을 따로 떼어내면 바로 그것이 십일조였습니다. 그래서 쌀은 쌀이되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쌀이라는 의미에서 성미(聖米)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교인들이 주로 쌀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한 구태여 성미로 헌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시골에서 신자가 성미로 십일조나 헌금을 대신하면 교회로선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만, 교회에서 구태여 성미로 바치라고 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가정주부가 자발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에게 밥을 지을 때마다 감사하는 의미에서 조금씩 떼어서 기꺼이 바치겠다면 그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을 것입니다. 바치는 자로선 하루 세 번씩 자동으로 신앙을 점검하고 다짐하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눈에 보이는 특이한 헌금이라 다른 분에게 도전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5/15/2006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헌금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들을 많이 하지만, 헌금은 당연히 필요한 것입므로 믿음의 형제들은 절대 헌금때문에 시험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인간적으로 해석(사용)하다보니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믿음)과 연관지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