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위해 가족을 버린다는 뜻은?
[질문]
마가복음 10장 29절 말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버린다.”는 뜻을 지금 시대에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요?? 정말 가족을 버려도 되는 것입니까?
[답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10:29,30)
성경 해석의 가장 흔하고 큰 오류
예수님이 부모 형제자매 자녀를 버리라고 하는 본문의 권면에 대해 많은 신자들이 질문자와 동일한 의문을 갖고 혼돈스러워합니다. 목사에게 물어보면 종교로 인해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이 우선이기에 교회 생활에만 충성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가족 간에도 영적으로 도무지 화합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신자 목회자 공히 성경을 해석함에 가장 자주 범하면서 제일 중대한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곡해를 낳는데도 미처 그런 인식조차 못합니다. 단순히 문자적 의미로만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의 경우도 문자적 의미로는 삼위 하나님의 성품은 물론 인간사회 상식과도 분명히 상충 되니까 예수님의 진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것입니다.
그 잘못은 바로 전체 문맥의 대의(大意)와 주제(主題)와는 비교하지 않고 특정 구절만 따로 떼어서 보는 것입니다. 화자(話者)가 같은 장소와 동일 사건에서 죽 이어서 말한다면 당연히 한 가지 특정주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해도 그 주제를 발전시키든지 반대의미를 대조하든지 간에 주제를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질서 없이 섞는 경우는 정신 나간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본체로서 인간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 진리를 계시해주러 오신 예수님은 더더욱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전체 문맥이 어디인지부터 찾아야 합니다. 한 사람 (이후 관원이라 칭함)이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절)라고 질문한 것이 발단이 되어서 31절까지 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전체 문맥의 대의와 핵심 주제를 찾아야 하는데 본문을 국어공부 하듯이 그 내용을 체계적으로 구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문단 17-22절에선 예수님과 관원과의 영생 얻는 방안에 관한 대화입니다. 둘째 문단 23-25절에선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가기 힘들다고 낙타와 바늘귀 비유로 가르친 것입니다. 셋째 문단은 26-31절까지 제자들이 그럼 대체 누가 천국갈 수 있는지 물은 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결국 17-31절까지 핵심 주제는 영생을 얻는 방안입니다.
이렇게 간략하게만 살펴봐도 부모 형제 자녀까지 버려야 하는 것은 영생 얻는 길과 연관된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느냐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그렇게 버린 자는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말씀의 구체적인 뜻을 찾기 위해 전체 문맥의 흐름을 조금만 더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대화와 가르침의 흐름
첫 문단에서 관원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는 선행 율법 구원관에 바탕을 둔 질문입니다. 주님은 그 질문하는 의도에 맞추어서 십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관원은 그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합니다. 그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면 예수님도 선행구원관을 인정한 셈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고(구원을 얻고) 그런 후에 당신을 좇으라고 말합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해서 구제를 최고의 강도로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선행으로 따지면 이미 일등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고 제자들도 그런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면 대체 누가 얻을 수 있는지 의아해했지 않습니까?
관원은 재산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띄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는 이미 돈이 주는 편리와 안락과 안전에 완전히 물이 들어 있습니다. 전 재산을 팔면 일시에 그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또 그런 뜻에서 둘째 문단에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전 재산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좇을 수 있는지 물은 것입니다. 돈과 하나님 둘 중에 정말 너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셋째 문단 서두에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자신합니다. 사실 그는 재산을 다 팔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뒤에 남겨 두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다윗 왕 때처럼 회복시켜줄 현세적 메시아로 알고 좇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스승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작정은 전혀 하지 않고 완전히 무력하게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만 살려고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대화를 거치고 나서 주님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 형제, 자매, 어미, 아비, 자식을 버린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세상의 소유를 다 팔고 구제를 해야만, 혹은 가족은 완전히 내팽개쳐야만,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 활동에 전념해야만 구원 얻는다는 뜻은 당연히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참 이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열쇠는 이 논의가 시발된 첫 사건에 들어있습니다. 관원은 예수님더러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단순히 한 의로운 인간 랍비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곧바로 그 호칭이 틀렸음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단 한 명도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관원더러 나를 인간 랍비로 보고 영생의 길을 물으면 인간사회에서 통하는 구원의 길밖에 못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당신은 선한 랍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여 하늘 보화를 얻는 일”과 “가족을 버리고 당신을 좇는 것”을 동격으로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뜻이 거의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의 지적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선할 수 없으니까 “무엇(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최고의 선을 행해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는 선은 결코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지만 막상 전 재산과 하나님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니까 재산을 택했지 않습니까?
인간 세상에서 가장 의롭다는 이 관원조차 선행으로 도무지 구원을 얻지 못하면 인간 중에 율법 준수로는 어느 누구도, 현장에 있던 열두 제자를 포함해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의아해 한 것입니다. 또 그에 대해서 주님은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성령이 간섭하여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신 뜻이 바로 이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고 또 십자가에서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본체로서 세상에서 인정받는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마가복음10:17-31절까지 연결된 이야기의 주제는 영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가족을 버린다는 뜻은?
지금 세 문단에서 공통적으로 세상의 것을 버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는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으니 인간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 자신의 무가치함을 겸허히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그분의 긍휼만 바라며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형제 자녀 부모마저 버린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이 세 이야기 전체의 공통주제도 십자가 복음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종교적 관행과 계명이 다르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 형제 자녀를 사랑, 존경, 섬기지 말라는 의미 또한 전혀 없습니다. 가족 간에 종교로 갈등이 일어나면 그들을 외면해도 된다는 의미도 없습니다. 이는 구약시대나, 예수님 당대나, 지금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것(특별히 재물과 인간의 선) 둘 중에 자신의 안전을, 특별히 구원을 어느 쪽에 의존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인간적 관계 정을 모두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셋은 당시로선 인간의 안전, 만족, 기쁨을 줄 수 있는 자원입니다. 그런 세상 속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고 따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기독교라는 종교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당신을 순전히 따르는 당신의 백성으로만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항복하는 자로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 본문의 뜻입니다.
그런 자는 금세에서 형제, 자매, 모친, 자식,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과장법을 사용해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결코 구원 받지 못함을 강조한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지 못한다는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 믿었다고 가족 수자나 소유한 땅이 백배로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피로 혈연관계가 된 새 가족이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합니다. 종교가 다른 가족으로부터 핍박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은 그 신자들도 필연적으로 환난과 박해로 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 믿는다고 현실적 축복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하므로 궁핍과 환난이 끊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고 주님만 따르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부자 관원은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하나님을 외면하고 세상의 돈과 인간의 공적을 택한 것입니다. 이 답변을 염두에 두고 전체 문맥을 다시 천천히 묵상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9/2/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