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으로 인한 이혼 과연 성경적인가?
[질문]
간음으로 인한 이혼 과연 성경적인가? 많은 교단에서 간음으로 인한 이혼을 인정하는 것으로 아는데 목사님의 해석은 어떠신지요?
[답변]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막10:5-9, 11,12)
질문자께서 궁금해 하시는 것이 마 5:32의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과 막 10:9의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의 두 구절이 서로 상충 되는 것 같다는 것인 줄로 이해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둘 다 맞습니다. 그럼 이혼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몇 가지 먼저 분명히 해 놓을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는 것을 야단치셨으므로 일단은 간음한 것은 이혼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나 간음하면 바로 이혼하라(적극적 명령)는 것이 아니라 이혼해도 된다(묵시적 허용)는 것입니다. 그 말은 또 설령 배우자가 간음 했더라도 이혼 안 해도 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결혼에 관한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과 이혼도 전부 그런 측면에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그 말은 간음 가운데 일회적 단기적 실수나 과오에 의한 간음과 장기적 의도적 간음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이혼해도 된다고 허용해 준 말씀은 가능한 후자의 경우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배우자가 결혼을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아래 사느냐의 문제이지 어떤 경우에는 이혼해도 되고 다른 경우에는 안 된다는 것을 따지는 것은 둘 째 문제라는 것입니다. 벌써 이런 것을 따지는 경지에 이르렀으면 상대에 대한 애정과 하나님의 언약은 안 중에도 없다는 뜻입니다.
1. 기독교의 결혼관
따라서 우리가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크리스찬의 이혼관이 아니라 결혼관입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완전한 결혼의 뜻을 알면 간음과 이혼에 관한 뜻도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전한 결혼의 모습은 창세기 2:22-25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우선 누구랑 결혼 할 것인지는 하나님이 맺어 주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사람이 선택할 지라도 신자는 기도하며 확신하는 가운데 배우자를 골라야 하며 나아가 비록 자기가 선택한 상대이지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장 적합하고 영원한 배우자로 선물로 주셨다는 인식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이 남편과 아내에게 공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 말은 데릴 사위나 처가살이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가정을 책임지고 이끌며 영적 권위를 가져라는 것입니다. 남녀 우월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가정의 대표로 남편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인간적 사고로는 여자가 부모를 떠나 남자의 집으로 오는 것임에도 하나님은 일부러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남자가 또 다른 부모가 되어 가정을 이루라는 의미로 분명하게 남자의 대표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대표는 되지만 여자와 연합하여야 합니다. 성경이 “여자가 부모를 떠나 그 남편에게 복종하여”라고 하지 않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라고 기록한 차이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연합(聯合)이란 말은 주종 (主從), 상하(上下), 우열(優劣)의 종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각의 서로 다른 완전한 개별 인격체가 횡적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둘이 합쳐져야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만 있어선 완벽하지 못하고 부족합니다. 남녀가 능력이나 인격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과 특성만 다르게 창조되었기에 서로 보완 협력하여야 완전한 한 가정으로서 이룰 수 있습니다. 상형 문자인 한자에도 남(男)은 밭에 나가 힘을 써는 사람이고 여(女)는 아기를 업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듯이 각기 가정에서 맡은 역할만 다를 뿐이지 남녀 중 누가 더 뛰어나고 누가 누구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나아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 서로 싸우지 않고 화평 하라는 단순한 의미만은 아닙니다. 가정을 이끄는 방향, 자식을 양육하는 지침 등에 있어 부부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자식을 돈 벌어 출세 시키려 하고 아내는 자식 하고싶은 대로 무엇이든 시키려 한다든지 하면 비록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고 금실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가 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의미는 어떤 이단 종파에서처럼 성 관계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서로 감출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기 이전입니다. 죄가 둘 사이에 개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존심, 체면, 위신, 위선, 가식, 욕심, 고집, 거짓, 사기, 부정, 비밀 등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그것들로 인해 부부 관계가 영향과 방해를 받지 못합니다. 정말 영육간에 완전한 혼연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2. 죄인끼리의 결혼
그런데 문제는 아담의 원죄 사건 이후로는 모든 결혼이 죄인끼리의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의도하신 완벽한 결혼의 모습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는 서로 이 점을 인정하고 결혼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허물과 약점이 많고 언제든 실수하고 죄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결혼 서약할 때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누군가 결혼을 정의 하기를 매일 새롭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라기보다 매번 서로 용서하고 또 다시 사랑하지 않으면 그 결혼을 제대로 이어가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우리 모두 잘못을 매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서로 숨기는 것 없이 가장 가깝고 사랑해야 할 부부사이가 더 용서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크라테스나 공자 같은 성인이라도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끼리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를 강요하는 계율이나, 무조건 불신자를 미워하고 배척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결과로 수치와 공포를 겪었습니다. 수치는 수평적 인간관계가 왜곡되어 사람사이에 부끄럼을 느끼는 것입니다. 공포는 수직적인 하나님과 관계가 왜곡되어 하나님 앞에 죄책감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담은 이를 스스로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가림으로 수치를 해결하고 하나님을 피해 숨어 두려움을 없애려 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실패했으며 절대 인간의 노력으로 이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셨습니다.(창3:21) 십자가에 흘린 보혈의 피로 구원을 얻고 성령의 임재로 그 영혼이 새롭게 태어난 신자만이 죄의 결과인 수치와 두려움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 죄가 개입되지 않고 영육간에 하나가 되려면 둘 다 예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신자 부부는 죄 안 짓고 서로 싸우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 부부만이 서로에게 죄 짓고 싸운 일들의 앙금을 제대로 씻어내고 참 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죄인끼리의 결혼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불신자끼리의 결혼인데 이도 영육간에 하나가 됩니다. 결혼했으니 당연히 육은 하나 되지만 영도 사단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영끼리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들의 결혼의 목표는 세상에서의 출세와 형통뿐입니다. 자식들도 그렇게 키웁니다. 간혹 화목하고 사랑하는 결혼이 있어도 여전히 인간적인 의를 자랑하는 것 뿐입니다. 아무리 해도 서로의 자존심은 살아 있고 조그만 도덕적 잘못으로도 얼마든지 헤어집니다.
둘째는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입니다. 육신은 하나가 되었지만 영이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인생관, 가치관, 결혼관, 자식 양육 등 모든 면에서 서로의 생각이 맞지 않습니다. 한 이불 속에 자지만 등을 돌리면 지구를 한 바퀴나 돌아와야 만날 만큼 서로 거리가 멉니다. 각자의 머리 속 생각은 완전히 따로 놉니다. 이럴 때는 평생을 배우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모든 것을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며 살든지 믿음을 포기 당하는 수 말고는 그 가정에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자끼리의 결혼입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영과 육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부부 각자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같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결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신자에게 죄의 본성의 찌끼가 남아 있기 때문에 매일 기도하며 주의 보혈로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씻어가며 양보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만으로 결혼 생활이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도 인간인지라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더라도 성령 하나님이 부부의 마음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시고 때로는 강권적으로라도 굽어진 부분을 바로 잡아 주셔야 합니다.
3. 간음과 이혼
예수님은 간음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하셨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마5:27) 여기서 음욕을 품는다는 원어적 뜻은 실제로 구체적 행동을 결행하려고 궁리까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쁜 여자를 보고 건강한 남자로서의 조건 반사적인 생리 반응으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배우자 외의 다른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진지성을 갖고 생각하면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영육간에 하나가 되어야 함에 육은 온전한데 영이 잠시 외도한 것입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육신을 더럽히는 것에만 신경을 써는데 신자는 오히려 영혼이 배반하는 문제를 더 따져야 합니다. 외적으로는 전혀 간음하지 않았지만 정신과 영혼은 이미 배반하여 상대를 자기의 배우자로 여기지 않고 존경과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신자로 교회 중직을 맡은 체면 때문에 또는 하나님 앞에 의무감 때문에 함께 산다면 이는 육적 간음보다 더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때도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까?
성경을 볼 때에 우리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살펴야 합니다.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 까지 실제로 적용 시킬 수 있는 매뉴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간음을 했을 때 이혼해야 하느냐의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따져야 합니다. 과연 부부가 서로 자기 배우자에 대해 얼마나 헌신하고 정결을 유지하고 있느냐는 참으로 본인들끼리 아니고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심지어 당사자들도 잘 모를 때가 더 많음), 신자의 경우는 사회적 도덕적 규범의 잣대로 들이대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 관계 아래 함께 들어간 똑 같은 죄인으로서 불쌍한 영혼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간음하면 이혼을 해도 좋다고 허용했어도 한 마디로 딱 부러지게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원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대 이혼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신자가 어떤 생각과 목적으로 결혼 생활을 영위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결혼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까에만 신경을 써도 여전히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음해도 좋다고 허용하신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따라 이혼 증서만 주면 이혼을 밥 먹듯이 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집안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손님 접대를 미진하게 했다는 구실로도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상대의 잘못을 꼬투리 삼아 정죄하고 이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인 결혼이 인간적 실수나 죄로 인해 파기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적 잘못 중에 단 하나 예외로 간음만은 이혼해도 되는데 그것은 본인들 스스로 그 언약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것도 하나님과 절대 이혼하지 않겠다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결혼하는 순간 자기 몸과 마음과 영혼이 서로 상대의 소유가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각자가 자기의 전존재를 하나님 앞에 바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간음은 상대에게 속한 소유권을 스스로 빼앗아 온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를 거부하고 죄악과 사단을 향해 뛰쳐나간 것입니다.
만약 간음한 연고 외에 이혼 증서를 주어 이혼하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혼 당한 배우자는 여전히 이전 배우자의 소유이며 하나님과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이혼 증서를 주어 공식적으로는 이혼 된 상태이고 또 재혼이 허용되지만 재혼하는 순간 그 재혼한 상대와 실제로 육체적인 간음을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 원리를 더 확장해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상대가 일시적 과오나 죄로 육체적 간음마저 저질렀는데 그 간음만을 꼬투리 삼아 이혼한다 칩시다. 성경의 문자적 해석만으로는 이혼해도 되지만 잘못을 범한 배우자가 여전히 현재의 배우자를 사랑하고 용서를 빌며 이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이혼을 해버리면 내용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저질렀던 동일한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그 이혼 당한 배우자가 다른 상대와 재혼을 하게 되면 영적인 간음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말해 배우자가 간음했을 때 이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꼭 이혼해야 한다 혹은 이혼해선 안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가 절대 인간의 지정의로만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성령님의 인도와 간섭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것과 일흔 번씩 일곱번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말씀이 간음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만에 하나 정말 상대가 고의적으로 언약 관계를 파괴했고 하나님 앞에 잘못을 구하지도 않고 도저히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피해자인 자신도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가 되지 않고 갈수록 그 관계가 더 악화 되고 끝까지 상대가 회개하고 돌아 오는 것을 기다릴 자신이 없다면 이혼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사람으로선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새롭게 변화시키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회개하고 돌아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확신과 용서할 용의가 있다면 끝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간음했다는 사실 하나로 상대를 보아선 안 되고 배우자 또한 죄인이며 불쌍한 한 영혼이라는 인식을 결혼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지니시고 매일 주님 안에서 새롭게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간음에서 자유로울 자 없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막론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 부부가 항상 생각하고 결혼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말씀은 따로 있습니다.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남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공히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부부란 하나님 앞에 결혼 서약을 하는 순간 천국까지 함께 가는 계약을 상대 뿐 아니라 하나님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이어가는 가장 큰 힘은 서로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며 결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모든 목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결혼 생활을 가장 먼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어 꾸려나갈지, 상대의 잘못과 죄도 어떻게 판단하고 처리할지, 간음을 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있습니다. 부부란 항상 함께 천국 갈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잘못도 이것에 영향을 주거나 방해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고 십자가에 단 한 마디 항변하지 않으시고 죽으시면서 오히려 자기 대적들을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빌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1/6/2004)
*** 어떤 회원님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경우에도 이혼하지 말고 끝까지 참아야 하는지 물어왔습니다. 그에 대해 드린 답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신자라도 정상적인 부부생활과 가정생활을 도무지 영위할 수 없는 폭력과 알콜 도박 마약 중독 같은 경우는 이혼해도 됩니다. 그럼에도 간음과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간음은 아내에 대한 완전한 배반으로 예수님도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반면에 나머지 잘못들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여러 개인적 환경적 요인들 때문에 자신에게 범한 죄들입니다. 그래서 잘 설득하든지 안 되면 당분간 별거해서라도, 필요하다면 법원의 접촉금지 명령을 받아서라도, 치료 회복하는 기회는 주어야 합니다.(간음한 남편에 대해서도 아내가 이런 기회룰 주어서 용서해줄 수 있다면 성경적입니다.) 아내로선 간절히 끝까지 기도하고 치료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내의 그런 성의와 제안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고칠 가망성도 보이지 않으면 남편과 가장으로서 책임을 전혀 지지 않고 가정을 깨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아내는 가정, 자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부득이 이혼해도 됩니다."
(11/2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