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과 우상숭배에 관하여
[질문]
1. 장례식과 묵상 기도
목사님의 글 중, "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제사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글을 읽고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저도 제사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핍박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문상을 갔을 때는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보통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정사진 앞에서 향을 피우지 않고 절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진 앞에 꽃을 놓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합니다.
불신자들이 절을 하는 영정사진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 과연 바른 것인지 조금 어렵게 생각이 됩니다. 고인을 위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 앞에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뜻의 기도를 해도 괜찮은 것인가요? 목사님께서는 문상을 가셨을 때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미국식장례에서는 한국식장례의 문상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습니다.
2. 십자가 형상과 성경
예전 일본에 복음이 전해졌는데, 일본 막부에서 기독교인을 탄압하면서 나무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리고 밟지 못 하고 망설이는 사람은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상황에 있었더라면 저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것이 아마 나무십자가가 아니라 성경책이라면 저는 밟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경책 자체에 절을 하고 그것을 우상으로 섬겨서가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책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책 자체가 우상으로 여기지 않지만, 우리가 성경책을 함부로 던지거나 평상시 발로 밟거나 하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경책이 아니고 나무십자가라던가 예수님이 못 박히신 형상이라고 가정을 해보니까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여기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답변]
질문 내용만 보아도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시는 분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인지 몰라도 너무 올곧게 말씀을 따르려다 보니까 때로는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상황에 맞추어 융통성 있게 사고하고 행동할 필요도 있습니다. 성경 진리를 포기 내지 타협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을 해석하여 적용함에 있어서 종교적 경직성은 배제하고 대신에 그 진리가 삶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실제적으로 자신과 이웃에게 끼치도록 지혜롭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익히 아시는 대로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은 신자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형상화한 우상에 절하는 것은 절대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와 매일 마주치며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계명들을 실천해야 할지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혹시 잘못하여 가장 기본적 계명조차 위반하지나 않을지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위반하면 어쩌나 염려할 만큼 우상숭배 할 의도가 추호도 없는 한에는 절차상의 어지간한 오류는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제사보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지 않습니까?
신앙양심상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에 크게 꺼릴 것이 없다면 그 다음에 고려할 대상은 주위 사람입니다. 사람들 눈치를 보아 영합하기 위해 세속 관습을 따라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가 취하는 행동이 불신자와 연약한 신자들 앞에 어떻게 비춰질지 잘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으로 인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교와 그 믿음에 대해 어떤 식의 파장을 그들에게 미칠지 감안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말씀을 지혜롭게 현실에 적용하라는 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의미입니다. 우선 너무 윤리적 종교적 세부 절차에 구애 받지 말고 자신의 믿음과 헌신부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확고한 소명 의식을 갖고 세상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신 질문에 대해 간단히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장례식과 묵상기도
불신자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신자의 자세에 관한 성경적 원리부터 추적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9,10) 우선 신자도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상 숭배하는 불신자와도 교제해야 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7:2-4) 특별히 결혼식 같은 경사보다 장례식 같은 흉사에, 즉 이웃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도와주며 위로하는 것이 더 나은 인간관계를 형성한다고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히9:27) 있습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2,43) 십자가상의 강도가 죽기 직전에 회심하고 예수를 믿자 즉시 천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자마자 생전에 예수를 믿었는지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 둘 중 하나로 그 운명이 갈립니다.
따라서 인간이 죽어서 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돌거나 살아 있는 자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 반대로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자의 이미 정해진 운명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천주교의 연옥이론이나 일부 종교가 죽은 자를 위해 세례나 선행 같은 공적을 쌓으면 영계의 일을 좌우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성경에는 전혀 없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는 죽은 자에게 절해서도 안 되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일도 없습니다.
흔히 신자들도 아무 생각 없이 “삼가 고인의 명복(冥福)을 빈다.”는 말을 곧잘 하는데 성경적으로는 잘못된 것입니다. 지옥 아니면 천국 둘 중 한 곳에 이미 가 있는 자에게 빌어줄 복은 따로 없습니다. 죽은 자를 위해 복을 빈다는 것은 하나님께 지옥의 고통을 줄여달라거나 천국의 기쁨을 배가 시켜 달라는 셈인데 완전 어불성설이지 않습니까? 반면에 “삼가 심심한 조의(弔意)를 표한다.”는 말은 유족을 대상으로 위로하는 말이기에 괜찮습니다.
신자가 불신자를 조문하러 가서 그들 절차대로 향 피우고 절할 수는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잠시 서거나 앉아서 기도로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인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고 해서도 안 되므로 당연히 유족과 자기 자신이 기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유족에 관해선 슬픔을 잘 이겨내고 하루 속히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어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 수 있도록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간혹 불신자를 위해 복을 비는 것은 그 대상자가 아무 믿음이 없어서 실제 응답도 안 되니 소용없다는 식으로 완고하게 생각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틀린 생각입니다. 전도를 위해서라도 부단히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파송하면서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10:12,13)고 당부했지 않습니까? 불신자의 결혼이나 장례 등을 기독교 예식으로 베푸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이지만 기도는 오히려 더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남의 장례식에 가서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고인이든 유족이든 평소 알고 지내는 불신자이기게 조문하려고 들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그들에게 전도를 등한히 했다는 의미인 셈입니다. 그 잘못부터 회개하고 남은 유족이라도 더욱 사랑으로 섬기며 전도하겠다는 헌신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혹시 고인과 생전의 관계에 잘못한 일이 있으면 뒤늦게나마, 그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반드시 유족을 전도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불신자 유족들은 영정 앞에서 잠시 묵도를 드린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리 없습니다. 당연히 자기들처럼 고인의 명복을 빌어준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도 불신자나 다른 종교의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과 동일하다는 것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절 대신에 기도로 그 형식만 바뀐 것뿐이지 그 내용은 고인의 명복을 빈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런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유족에게 장례가 끝난 후에 꼭 찾아뵙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장례를 마친 직후라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입니다. 나아가 유독 기독교인만 특이한 조문 형식을 따르니까 왜 그런지 궁금해 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이 어려울 때에 당연히 사랑으로 섬겨야 하지만 신자니까 무슨 일을 해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영정 앞에서 기도하는 문제에 대해선 너무 경직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고인과 유족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지, 귀신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의미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또 상가나 장례식장에서 유족이 흔쾌히 동의해 준다면 얼마든지 기도해주어도 됩니다. 물론 그 내용은 재차 강조하지만 오직 유족을 대상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육신적인 슬픔을 하루 속히 추스르며 무엇보다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 생겨서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지게 해달라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기도할만한 분위기가 아니거나 동의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나중에 따로 개인적으로 만나 전도하셔야 합니다.
미국의 장례절차
미국은 기독교 국가로 출발했기에 거의 모든 장례절차가 기독교식입니다. 불신자도 주로 교회나 성당에 장례식을 의뢰하며 특별한 거절 사유가 없는 이상 목사나 신부가 집전해줍니다. 미국 목회자들과 의견을 나눈 적은 없지만 틀림없이 이미 죽은 불신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는 유족을 위해서 장례식을 거행해 줄 것입니다.
이곳 교민 사회도 거의 그러합니다. 교민 사회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위치는 단순히 구원을 전하는 영적 기관이 아니라 삶과 교제의 중심입니다. 이민 오면 교회 나가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문화, 언어, 관습, 법률, 인종 등이 다른 이국땅에서 많은 장벽과 애로에 부딪히므로 이민 와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교민들도 거의 기독교식 장례를 치른다는 뜻입니다.
간혹 교인의 불신자 가족이나, 완전한 불신자 가정이 장례를 부탁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원칙적으로 따지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목사가 집전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가장 힘들 때에 도와줌으로써 유족들의 전도에 도움이 되고 또 교민 사회에선 장례 절차를 교회 말고는 마땅히 대신 맡아줄 기관이 없기에 순전히 봉사 차원으로 대개는 그 부탁을 들어줍니다. 만약 한국 같으면 불신자들이 교회에 장례를 맡길 리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미국 장례식은 거의 기독교식이므로 조문객들은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면 되고 또 유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정작 궁금하신 것은 미국도 영정 앞에서 기도하는지 여부일 것입니다. 이참에 한국과 다른 미국 장례 절차의 몇 가지 특징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우선 관의 모양이 다릅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어깨 부분이 넓은 관을 씁니다. 그래서 한국처럼 염(殮)을 하기 위해 시체의 어깨를 억지로 웅크리게 하거나 심하면 뼈를 꺾는 것 같은 일은 없습니다. 편안하게 누운 자세로 관에 넣습니다.
따라서 한국처럼 시체를 천으로 둘러 감지 않습니다. 대신에 사체에 방부제를 넣고 오히려 깨끗하게 화장을 시킵니다. 그리고 정장(正裝)을 입혀서 관에 안치하고선 뚜껑을 덮지 않습니다. 장례 예배 때에 View라고 해서 모든 조문객들이 관 앞을 지나가면서 고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염을 하여 입관한 후에는 미처 도착하지 못한 유족조차 고인을 볼 수 없는 한국과는 이점에서 아주 차이가 납니다.
묘지는 도시 안에 공원처럼 꾸며져 있어서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공원묘지에는 장례예식을 치룰 수 있는 대소형의 식장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였던지라 거의 모두 교회 스타일이지만, 최근에는 모든 종교인들이 자기들 식으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단순한 강당 형식으로 만들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관시에는 묘지 앞에서 예배를 드린 후 유족이나 조문객들을 전부 돌려보냅니다. 땅 밑으로 하관(下棺) 하는 모양을 보여주지도 않고 보지도 않습니다. 장례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 가까운 사람을 땅 밑에 묻는 것인데 그 절차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대개 장례 예배는 세 차례로 나눠 드립니다. 죽은 직후 가족들이 목회자를 불러 가정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또 일반 조문객이 View를 할 수 있는 정식 장례 예배는 교회나 장례식장에서 주로 장례 당일에 드립니다. 고인과 그리 가깝지 않고 볼 일이 있는 조문객들은 하관 장소까지 따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마지막으로 묘지 바로 옆에서 하관예배를 드립니다.
한 마디로 미국 장례식은 거의 모두 종교적 의식으로 드려지기에 조문객은 그 절차에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혹시 다른 종교 의식 장례에 조문하러 간 기독교 신자는 양해를 구하여 예식에 참여하지 않고 끝날 때까지 그 장소나 곁에서 따로 기다리다가 마지막 View할 때만 참여하면 됩니다. 따라서 그 View 할 때나 따로 기다리는 동안에 위에서 설명한 대로 유족과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영정 앞에서 절하거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사항은 교회에서 장례 예배를 드리고 묘지로 향하는 자동차 행렬을 경찰 순찰차가 앞뒤로 호위해 준다는 것입니다. 묘지로 가는 모든 차에 “Funeral"(장례식)이라는 붉은 스티커를 붙여서 장의차를 선두로 일렬로 따르게 한 후, 다른 교통을 차단하면서까지 소통이 원활하도록 정리해 줍니다. 미국에서 가장 교통이 혼잡한 LA의 고속도로에서도 종종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한국도 여건이 허락하면 본받아야할 좋은 제도인 것 같습니다.
2. 성경과 십자가 형상
이 질문이야말로 폭넓게 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일본에서 십자가를 밟지 않는 신자를 핍박했던 사건은 당시 상황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17세기 초 일본에선 약 15만 명이 순교했는데 그 전부가 자비에르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사역으로 개종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더 열렬히 성상(聖像)을 숭배했고 그 중심에 당연히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일본 천주교 신자들이 십자가를 밟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밟는 것과 같았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더러 예수님 대신에 로마 황제를 주(主)로 시인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자신들의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 막부는 천주교 신자들이 십자가 형상을 바로 예수님과 동등하게 숭배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입니다.
반면에 개신교 측에선 어떤 형상도 숭배하지 않으며 십자가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상징일 뿐입니다. 나아가 그 십자가 형상마저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십자가 목걸이 자체가 악령을 막아주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간주하면 벌써 그것은 우상으로 변모 된 것입니다.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는 락밴드나 갱들이 치렁치렁 달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적으로는 예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우상이란 깎아 만든 것이냐 여부보다는 하나님을 대신하는지, 특별히 구원을 주는 능력에서, 따져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돌이나 금속으로 깎아 만든 것이 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니고 있어야만 안정감, 만족감, 심지어 형통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면 바로 우상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돈, 지위, 권력, 학식, 명예 등에서 자신의 안전, 만족, 행복 등을 구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질문자님께선 십자가는 형상으로 깎아 만든 것임에 반해 성경은 성스러운 책이라는 대비에 너무 관심을 쏟은 것 같습니다. 성경도 당연히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점치듯이 무작위로 성경을 펼쳐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면 성경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았기에 우상으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말씀을 액자에 넣어 집안 곳곳에 치장해야만 뭔가 믿음이 살아나고 마음에 안정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역시 우상입니다. 성경 책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보고 귀신을 향해 든다든지 하는 웃지 못 할 경우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성경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그것도 믿음을 가진 신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읽을 때에만 권능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기보다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난 예수님, 즉 하나님을 믿었지 않습니까? 지금도 성경이 금지된 곳에선 말로 전해들은 복음만으로 믿음이 생기고 또 자라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중국이나 이슬람 국가에서 성경을 소지하면 사형시킨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성경을 끝까지 숨기거나, 그럴 수만 있다면 가장 좋지만, 적당한 곳에 버려야 합니다. 혹시 자진 신고하면 모든 형벌에서 면제해 준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때는 기독교 신자로 낙인 찍혀 나중에 닥칠 온갖 박해를 각오해야 하니까, 아무도 몰래 내버리는 것과 어느 쪽이 나을지 현실적으로 잘 검토해야 한다는 문제가 따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있었던 순교처럼 십자가 형상이든 성경이든 예수 믿는 신앙을 완전히 포기시키는 수단으로 동원된다면 목숨을 버리더라도 믿음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 자체 혹은 십자가 형상만을 문제 삼을 때는 둘 다 과감히 버릴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그것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신자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심겨져 있는 믿음까지 없앨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둘 중에 소중한 비중을 따지자면 질문자님 생각대로 성경이 십자가 형상보다는 앞섭니다. 쉽게 말해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지역에선 십자가 형상은 스스로 없애버릴 수 있지만 성경만은 끝까지 숨겨서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가 형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신자라면 하나님 말씀을 항상 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 단지 예수님을 위한 회상과 헌신을 촉구하는 용도로만 쓰인다면 그 형상도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사항은 만약 목숨과 믿음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무력으로 강요당하는 경우에 신자가 목숨을 택했다고 해서 과연 정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정말 그 믿음에 변함이 없는데도 단지 육신적으로 너무나 큰 공포에 질려 그랬다면 연약하긴 마찬가지인 다른 인간이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는, 순전히 신자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 속한 문제입니다.
연쇄살인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인도 십자가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엎드리면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까? 또 구원을 받은 후에 지은 죄도, 성령을 고의로 훼방하는 죄 말고는, 다 용서해주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사람들 앞에 입술로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으면 당신께서도 그 신자를 시인하지 않겠다고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근본적으로 복음을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여기며 삶에서 그 믿음을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십자가를 밟거나 성경을 불태운 자들의 경우 그 행위와 영원한 구원의 문제는 참으로 미묘할 뿐 아니라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 그 신자가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면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얼마나 가슴을 치며 통탄해 하겠습니까? 아무 박해가 없을 때 태어나는 후대의 신자나 심지어 당대의 불신자들 앞에서 얼마나 멸시를 당하겠습니까? 십자가를 밟는 당시도 속에서 흐르는 눈물과 그 마음이 남들이 볼 수 없었을 뿐이지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최종적 구원은 그 심령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신자는 질문자님처럼 말씀에 따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그런 훈련을 철저하게 해서 항상 경건이 말보다 실제적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 그런 자라야 막상 순교의 위험이 닥칠 때에 성령의 안위와 권능에 의지하여 과감히 목숨 대신에 믿음을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극단적 경우가 아니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곳에 사는 신자라면,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복음의 큰 틀 안에서 오직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이런 유사한 문제들에 관해 지혜롭게 분별하시면 됩니다. 온전한 믿음과 헌신이 되어 있다면 세부적 절차보다는 상대의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에 당연히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이런 고백처럼 말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9/22/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