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기도란 무엇인가요?

조회 수 1770 추천 수 69 2010.01.05 23:27:47
회개기도란 무엇인가요?


[질문]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모두 용수철처럼 자꾸만 죄로 끌려가게 되는데요. 하지만 믿는 이들은 죄를 자백하므로 다시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죄를 아예 안 지으려고 해도 그게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자꾸 죄를 짓게 되는 것 같아요.

죄를 짓고 자백하고, 또 죄를 짓고 자백하고. 이것들이 반복이 되는데. 이런 것을 자꾸만 용서해주시나요? 자백한다는 것은 다음부터 안하겠다는 뜻인데 자꾸 똑같은 죄를 짓는다면 이건 무슨. 주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또 자백하면 용서해 주실 테니 이번만.”  어떤 때는 이런 생각까지 났습니다. 그러다가 이건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면 사탄이랑 다를 게 뭐가 있나 하면서 자책하기도 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올바른 회개란 무엇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고백하기만하면 용서해주시는 건지. (혹시 잘못을 했는데도 자백하기만하면 용서해주신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인가요?) 저는 생각으로  “잘못했다 이건 아니다. 이러면 안 된다.” 라고 인식하고 “주님 이러이러한 죄를 또 저질렀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죄를 자백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또 다른 분과의 교통으로 이렇게도 합니다. 우선 주의이름을 계속 부르면. 자꾸자꾸 부르게 되면 아무생각도 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자꾸자꾸 부르다보면 문득 제가 잘못했던 것들이 떠오릅니다. 최근일이든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든 신기하게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떠오른 잘못들을 자백합니다.  

올바른 회개가 무엇인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 똑같은 잘못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회개해야하는지, 죄 사함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주세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수시로 느끼는 생각을 대변하신 것 같습니다. 이는 오래 묵은 신자일수록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당혹해 하는 믿음의 치부입니다. 아무리 해도 죄를 이겨내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회개마저 올바르게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서라도 쉽게 묻지 못하는 내용을 질문자님께서 아주 솔직하고도 용감하게(?) 털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과감하고도 솔직하게 답변 드리자면 복음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이런 의아심과 당혹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필연적으로 추가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믿음의 출발에 하자가 포함되었으니 신앙상의 단순한 약점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 잘못이 됩니다.

따라서 복음에 대해 신자들이 크게 오해 내지 부족하게 이해하는 내용부터 밝힌 후에, 참 회개는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의미는?

잘 알다시피 요한복음 3:16은 복음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은혜를 진정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믿은 후에 지은 죄도 전부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특별히 최근의 교계 흐름은 죄를 사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만 유독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강조란 여럿 중에 하나를 더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인데도 이제는 다른 사항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복음에서 사랑으로 용서해주시는 것 말고 다른 측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를 철두철미하게 저주한다는 사실입니다. 죄악을 심판하여 당신의 공의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본문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구절을 두고 흔히 어떤 흉악한 죄라도 다 사해준다고 이해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틀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 가장 일차적인 뜻은 물론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악인에게나 의인에게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공평하게 내리십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뒤따르는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부연설명으로 인해 그 구체적인 의미는 신자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죄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죽이실 만큼 철두철미하게 긍휼이 여기셨던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은  독생자마저 죽이실 만큼 세상 죄악은 철두철미하게 저주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라도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흉악한 죄인도 용서해 주시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주하신 죄악만 벌주시면 되지 독생자마저 죽이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죄악은 항상 인간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배제한 죄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이 최초로 원죄를 범하기 이전에 사단이라는 흑암의 세력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담이 그 꾐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죄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란 죄인과 동의어다 시피하며 동전의 앞뒷면처럼 항상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죄악을 심판하려면 따로 그것만 심판할 수 없기에 죄인을 함께 심판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을 다 죽여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아하시고 우주에서 유일하게 당신과의 교제 대상으로 삼아 이 땅을 다스릴 대리인으로 세운 인간을 전부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럼 창조 자체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결국 죄악을 심판하고 죄인을 살리는 길은 즉, 당신의 사랑과 공의를 다 만족시키는 유일한 길은 독생자의 죽음으로 죄악을 저주하고 독생자의 부활로 죄인을 새 피조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컨대 십자가 복음에는 죄인을 살리기 이전에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가 반드시 전제된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만 저주할만한 죄가 있었기에 그 죄를 범한 죄인도 당신의 죽음으로만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독생자 죽음의 전제와 결과

독생자가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죄악의 우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선 더 착하고 덜 착하거나, 더 악하고 덜 악한 서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점수로 치면 빵점입니다.

인간의 행동, 말, 생각까지 전부 샅샅이 드러나는 카메라로 일생을 찍은 비디오가 있다 칩시다. 세상에서 최고로 칭송받는 의인이라도 하나님과 단 5분도 함께 보지 못하고 죽여 달라고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뜻이 바로 이런 경우이지 않겠습니까?  

바꿔 말해 이런 형편의 인간으로선 어떤 보상, 희생, 수고, 제물, 선행으로도 그 죄얼을 스스로는 갚을 수 없습니다. 질문자님이 주여, 주여 부르면 까마득하게 잊었던 죄도 기억난다고 실토하셨는데 우리 모두의 영적 실상이 그러합니다. 지은 죄만큼 선한 것으로 갚으려면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붙들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 또한 질문자와 똑 같았습니다. 죄 사함의 확신을 얻어 구원 받으려고 반나절도 넘게 모든 죄를 회개했고 이제는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일어서려는 순간 지금껏 회개한 것보다도 더 심한 죄가 떠올랐다고 실토했습니다. 결국 인간 스스로 구원 얻으려는 모든 노력은 허사이며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의를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로마서를 비롯한 신약성경, 아니 신구약 전체 성경이 말하는 바였습니다.

인간의 보상으로 죄 사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원시 종교에서도 오죽하면 인간을 죽여 바치면서까지 죄 사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도 죄의 삯은 죽음으로만 해결된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으로만 죄가 해결된다는 것은 죄 값의 중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질이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죄의 본성에 묶여 있는 존재입니다. 사단에게 그 영혼이 묶여서 어두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죄를 벗어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인식조차 잘 못하고 죄를 즐기며 오히려 선이라고 자랑하는 지경까지 된 것입니다. 자연히 범사를 하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행할 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죄를 벗어날 수단이 전무하기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반드시 인간을 묶고 있는 사단의 권세부터 완전히 깨트려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믿는다는 의미도 가장 먼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두철미 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선 도무지 죄사할 자격 조건 수단이 전무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긍휼만 바란다는 철저한 항복 선언이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자기 일생을 찍은 비디오를 하나님과 함께 보면 그저 숨기 바쁜 것과 같게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빵점이라면 누구를 구원해 주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는 자입니다. 스스로 자기 죄를 갚으려고 나서거나, 그래서 자신의 의를 조금이라도 자랑하려는 자는 여전히 구원에서 먼 것입니다. 인간의 공적으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독생자가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인은 살리고 죄는 저주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믿은 신자의 변화

신자란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이미 바꾸어 준 것을 확신하는 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완전히 옮겨진 것입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는 없습니다. 신자가 온전히 거룩해졌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본성에 묶여 있지만, 자신의 실체가 죄의 본성에 묶인 존재라고 겸손히 인정한 것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고백이 나오게 된 연유도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운 간섭이었습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에 의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준 믿음을 하나님이 거두어갈 리는 만무합니다. 당신의 독생자가 죽기까지 하여 구원을 주셨는데 또 다른 정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죄의 궁극적 형벌인 지옥 심판에서 완전히 면제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간섭하시면 자신의 영적 실체가 시체임을 철저히 자인하게 되고 또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갈망하는 자에게는 성령님이 내주하여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복음을 이해하고 잘 믿어서 천국행 티켓을 획득한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을 얻는데 보탬을 준 인간의 공적이 됩니다. 남보다 영적으로 뛰어나서 복음을 잘 알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그렇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사도들도 성령으로 아니하면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일관되게 강조했습니다. 죄인이라는 존재 전체가 성령의 역사로 중생해야만 합니다.

반면에 신자의 믿음은 그 중생에 결과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반응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그 반응 즉, 스스로 인식하고 붙들어야 할 믿음은 위에서 언급한 십자가의 전제와 결과를 정확하게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어만 합니다.  

가장 먼저 죄를 철저하게 저주할 수 있어야, 아니 실제로 저주해야만 합니다. 죄가 인간을 묶고 있는 힘이 얼마나 끈질기며 사단의 흑암의 세력이 얼마나 음흉하고 강한지 그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악이 너무나 싫고 더러우며 추하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라고, 비록 죄를 짓지 않는 실행은 더딜지라도, 철저하게 혐오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나면 성령님이 내주하기에 자연히 죄악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됩니다. 행동뿐 아니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죄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알게 모르게 지었던 죄도 다시 떠오르고, 나아가 전혀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부분까지 죄라는 인식이 들게 됩니다. 신자 속에 있는 성령이 죄를 자인하고 회개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본인은 죄의 본성에 묶여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나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구원 이전에는 죄를 깨트릴 수단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죄인 줄도 모르고 즐겼지만 구원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죄를 이길 수단이 인간에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신자에게 성령을 내주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죄를 이겨나가라는 것입니다. 또 얼마든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 그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구원 이후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짓는 개별적 죄는 신자 스스로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어 심판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면 복음을 온전히 잘 모르거나, 어쩌면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온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용서 되었으니 자백만 하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신지라 죄를 자백만 하면 죄 사함은 당연히 받습니다. 더 이상 정죄는 결코 없습니다. 진정한 자백이라면 개별적 죄에 대한 징계도, 하나님만의 또 다른 계획이 있지 않는 한에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자백하여 죄 사함만 받은 것이지 자기에게 영적 변화, 정확하게는 영적 성장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이왕에 지은 죄의 뒤치다꺼리만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 “I am sorry!"만 하고 치운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같은 죄를 두고 계속 사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죄를 반복해서 범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회개(repent)는 뉘우쳐 돌이키는 것입니다. 뉘우치는 것은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것은 잘못된 길을 가다가 그 잘못을 깨달았기에 U-turn 하여 바른 길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이 있어야만 바른 회개입니다. 한자말로 따져도  회개(悔改)는 “뉘우칠 회”와 “고칠 개”가 합쳐진 것이지 않습니까? Sorry 하고 치우는 것은 십자가 복음에서 사랑의 하나님만 붙든 것뿐이지 공의의 하나님과는 아직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양쪽으로 뻗은 손 중에 하나만 만진 것입니다.    

죄 사함에 묶이지 말라.

바꿔 말하면 신자는 오히려 죄 사함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 사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히 다 이뤄졌습니다. 그 은혜를 믿는 신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은 더 이상 없습니다. 개별적, 습관적, 누진적 죄에 대한 징계도 어디까지나 신자의 성숙을 위한 목적이지 심판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죄 사함을 받아야겠다고 덤비는 것은 오히려 어떤 면에서 앞으로도 계속 죄를 지을 것을 미리 작정은 안했을지라도 최소한 예상하고서 혹시라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끊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붙들려고 하면서도 실은 제대로 붙들기는커녕 깨닫지도 못한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나아가 반드시 죄 사함의 구체적 절차를 알아 행하겠다는 것 자체로 인간이 이룩한 의로운 공적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 사함도 신자의 공로에 결코 의존하지 않습니다. 오직 독생자의 죄를 사하는 보혈을 의지하는 신자에게만 죄 사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 이미 완벽하게 이뤄졌으므로 죄의 고침에 주력하겠다는 헌신과 실천을 신자에게서 보시길 소원하십니다.  

말하자면 개별적 죄를 사해달라고 자백하는 기도는 어디까지나 자백이지(confession) 회개가 아닙니다. 또 다시 죄를 짓지 않겠다는 기도를 하고서도 자꾸 동일한 죄를 짓게 되면 하나마나입니다. 진짜로 “Sorry!"만 연발한 것입니다. 그런 기도도 여전히 일종의 서원기도이지 회개기도나 회개 자체가 아닙니다.

회개는 기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면서 부단히 노력하며 싸워야 합니다. 회개는 행동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신에 대한 죄 사함이 완전히 이뤄졌음을 확신하기에 이제는 개별적 죄를 고치는 일은 자신이 도맡아 실천해야 합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 죄에서 뉘우쳐 고침은 신자에게 달린 것입니다.  

신자가 정작 열심을 갖고 평생 동안 추구해야 할 것은 죄 사함이 아니라 선의 실천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죄악에 대해 신자 스스로 철저하게 저주해야 합니다. 아직 행동으로 온전히 이겨내지는 못할지언정 말입니다. 물론 어떤 신자도 죽을 때까지 완벽하게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죄에 대한 철저한 저주만이라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나아가 죄를 아주 혐오하고 저주한다면 동일한 죄를 습관적 반복적으로 지을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그것이 끊어져야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조금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날마다 자라가는 것입니다. 자백만 하면 그런 자람은 없고 한 자리에서 계속 맴도는 것입니다. 고쳐야만 자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회개를 기도가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행동을 고치려면 그 이전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신자의 경우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이므로 그분께 먼저 용서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첫 번째 순서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자백하는 기도에 해당될 뿐입니다. 물론 그러면 그 개별적 죄에 대한 사함은  즉시 이뤄집니다. 아니 심지어 자백의 기도를 못하고 넘어가는 죄도 상당히 많습니다. 솔직히 거의 대부분이거나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깨닫게 하거나, 깨닫지 못해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 주지 않습니까? 성령을 보내신 또 다른 이유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고백하거나 죄 사함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작은 죄 하나부터 실제로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죄 사함이 이미 완료 되었음에도 그에 연연하는 것은 자칫 사단의 음흉한 계교에 넘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신자란 죄 사함의 절차를 따져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이겨내지 못해 습관적으로 짓는 죄에 대해 과연 내가 얼마나 혐오 분노 저주하는지 진짜 솔직한 내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죄에 대한 저주가 부족하다면 죄의 본성이 그만큼 덜 씻어진 것이므로 그 가난한 영적 실체를 주님 앞에 꺼내 놓고 예수님 보혈의 공로를 새롭게 더 입혀 달라고 간구하셔야 합니다. 믿은 후에도 여전히 내 심령 전체가 너무나 연약하며 비참함으로 인해 애통해 하며 주님의 십자가 긍휼만 갈망해야 합니다.

그 간구가 진정한 것이라면 주님은 당연히 십자가 복음의 깊은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해주실 것입니다. 죄의 본성에 눌려 있던 신자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셔서 죄에 대한 혐오감을 아주 크게 증폭시켜 주실 것입니다. 신자더러 스스로 노력하여 그 죄를 이겨나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심판을 거두어 달라는 의미에서 죄를 사해 주십사하는 회개는 신자에겐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대신에 신자를 성숙시키려 주시는 징계는 당연히 달게 받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부자관계는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징계 받고 용서를 빌고, 아니면 죄 짓고 용서 비는 일만 자꾸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죄 사함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다 이루셨으니 신자에게 남은 책임은 열심히 노력하며 자라가는 것뿐입니다.      

1/5/2009

사라의 웃음

2013.04.01 00:03:10
*.109.85.156

회개에 대해 자세히 분명히 설명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잦은 뒤뚱임 넘어짐으로 괴로와하면서도 자주 그 넘어진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될 때, 그 실망감이란...정말 스스로에게 너무도 화가나고 스스로가 너무 밉고...그러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성령님이 조명해 주시는 죄악을 고백하고 다시금 죄성을 버리는 것이 맘뿐이 아니고 행동으로 옮겨지며 조금씩 자라나감이 중요한 일임을 배웁니다.

영적시체, 영적 점수 제로인 자가 오로지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의 은총을 받고선 그 은총 자랑하기 바빴던 입술, 그 자랑위에 저도 얹혀놓곤 또 자랑하던 모습, 그리고 십자가 은혜 받은 것을 영적 우월감 마저 갖고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다라고 또 자랑, 자랑, 자랑...투성이였던 제 모습.

그리곤 성령님이 한숨 쉬시면 제 죄성은 눈을 감고 그저 뒤뚱이고 그저 넘어지고 또 슬퍼지던 부분들...

이처럼 흉물스런 모습들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께 죄송스럼과 감사함을 올려드리며 이런 모습일지라도 이렇게 이렇게 조금씩 자라가길 소원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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