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범한 죄를 어떻게 씻는가요?

조회 수 2447 추천 수 75 2009.12.20 15:14:58
신자가 범한 죄를 어떻게 씻는가요?
(자위와 도적질의 죄에 관해)


[질문]


(1) 오늘  공부도중 성욕이 너무나 강하게 끓었습니다. 주 이름 부르면서 “전 성욕을 못 이깁니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셔야합니다. 올바르게 이끌어주세요.” 하면서 기도하면서 버텼습니다. 그러다가 이 홈피서 봤던 글에 자위가 나쁜 이유가  행위자체에 있다기보다 행위도중 생각으로 간음하는 그러니까 다른 여성을 생각하며 성행위를 상상하는 그런 사고행위가 나쁘다는 것이고 그것이 죄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도저히 버티기 힘들어서 “좋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행위로만 하자”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주 이름을 부르면서 설정했습니다. 성욕이 해결되고 나니까 이성이 찾아오더군요. 이것이 잘한 일인가 하고요. 그렇지만.. 저로선 이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저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p.s 옳은 행위든 옳지 않은 행위든 성경에서는 부부간의 성관계일 경우라도 설정 후에는 몸을 씻으라고 하셨기에 저 또한 몸을 씻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충고 부탁드립니다.

(2) 고등학교3학년 시절  저에겐 한참 영적 방황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갑자기 찾아온 도벽에 의해  친구의 전자기기를 훔치게 됐습니다. 몇 개월 지나고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천연적인 제 자아에는 뭔가 거부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깝기도 하고 이제 와서 돌려줘봤자 욕만 먹을 것이라고 하고.. 그런 고민을 하다가 잠시 생각의 구석에 묻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영적 회복을 아주 약간이나마 경험하고 기도를 하던 도중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서 한참 고민을 했는데,  어릴 때 읽었던 성경에서 누군가가 남의물건을 훔쳤으면 7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께 말했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하기로 생각했습니다.

학교로 찾아가 그 얘의 집주소를 알아내어 우편함에 사과의 편지와 함께 물건과 그에 7배에 달하는 돈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려고 하는 것이 어떤지..  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올바른 길을 알려주시고, 어린 믿는 이를 가르쳐주세요.

p.s  현실적으로 7배에 달하는 돈이 있질 않습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매달 갚아줘야 할 것 같은데..  일시불로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지.. 이것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편지에 이름을 써야할까요?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충고해주세요. 과거의 죄를 어떻게 씻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질문의 내용을 보아서 참으로 연약하며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 질문 둘을 주셨지만 함께 답변 드리는 까닭은 신자가 지은 과거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공통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에 대한 원론적인 답변을 드리고 각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구원과 죄 사함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것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엡1;17, 골1:14)는 뜻입니다. 또 “죄 사함”(forgiveness)이란 죄에 대한 적절한 대가가 지불됨으로써 하나님이 죄인에게 부가했던 형벌을 철회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대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사함을 받아야 할 죄는 우선 영혼이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원죄입니다. 구원이란 그래서 그분을 외면, 부인, 저주했던 바람에 죽을 수밖에 없던 형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그 대속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고 칭해주신 것입니다.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형벌이 예수를 믿는 순간 영원토록 완전히 제거됩니다. 사단의 노예였다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또 윤리적인 죄도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데서 생긴 것이기에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함께 사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뿐 아니라 현재에 짓는 죄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포함됩니다. 그런 개별적인 죄들로 인해 이미 얻은 구원이 결코 약화, 수정,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선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9)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2:13)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구원만 얻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모든 죄”에서 사함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사항은 예수를 믿은 후에도 각 개별적인 죄들로 인한, 영원한 형벌은 제거되었지만, 징계는 받습니다. 물론 범죄한 일 하나 하나마다 즉각적으로 견책이 따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먼저 자진해서 회개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회개를 더디 하면 신자를 믿음 안에서 거룩하게 세우기 위해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징계를 가합니다. 이는 벌이 목적이 아니라 순전히 신자의 성숙을 위한 것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4-8)

하나님과 신자는 이미 부자관계로 맺어졌습니다. 그 관계는 절대로 바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아비로선 아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오히려 징계를 가하는 것입니다. 믿은 후에 지은 개별적 죄에 대해서 신자는 결단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본인이 그분의 자녀다워지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아직 살아있는 죄의 본성

그러나 문제는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등졌던 자리에서 이제 그분의 은혜 가운데 들어왔다는 신분의 변화일 뿐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완전히 깨끗케 되어서 즉,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자라서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생생히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피 흘리기까지 평생을 두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에서 거룩해지는 구원은 신자 책임 하에 스스로 이뤄가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물론 성화도 성령님의 도우심에 힘입어서 해나가야 하지만 그 도우심을 구하는 것까지는 신자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죄인 줄 모르고, 아니 오히려 선이라고 착각해 즐겼던 모든 잘못들이 왜, 어떻게 죄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죄를 지어도 더 부끄럽고 두려워집니다. 이전에는 흑암 가운데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아무리 흙탕이 튀어도 더러운 줄 몰랐으나 이제 흰 옷으로 갈아입었기에 아주 작은 흠도 확연히 눈에 뛰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때로는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은 죄에 대해선 신자 속에 있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기에 구체적 원인도 모른 채 영적으로 눌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성령님이 신자로 죄를 짓게 만들 만한 사람과 사건과 환경을 미리 막아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당신께서 신자를 더러움에 계속 방치해 두실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예수 믿기 전에는 죄인 줄 알고도 아무 가책 없이 죄를 지었고, 나아가 그 죄를 즐겼으며, 심지어 선이라 믿고 그 죄를 함께 짓지 않는 죄를 정죄까지 했습니다.(롬1:32) 완전히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후에는 질문하신대로 자기 본성과 힘껏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넘어가 짓는 죄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또 싸우다 졌으니 더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14-23)  

바울조차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는 독신으로 선교 여행을 감당했으므로 질문자와 같은 어려움도 겪었을지(?) 모릅니다. 결국 신자가 된 후에도 비록 이전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어쨌든 죄를 짓게 됩니다.    

이미 지은 죄의 처리법

그럼 이미 지어버린 죄를 신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너무나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는 아비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아들이 아비에게 그 잘못을 이실 직고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아비가 이 외에 따로 더 요구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도 아들을 징계하는 아비를 생각하며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당부한 말씀 바로 앞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12:3)

그 일차적인 뜻은 믿음의 경주에서 당하는 핍박과 환난을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며 참으라는 것입니다. 또 죄에 대해서도 주님처럼 죽음으로 맞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겪는 핍박이든, 환난이든, 죄든 간에 그로 인하여 낙심치 말라고 합니다. 주님이 이미 신자가 겪을 그 모든 상처, 고난, 죄악 등을 십자가에 다 지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범죄로 인해 자기 영혼의 가난함을 애끓듯이 탄식 한 후에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7:24-8:2)

예수 믿은 후에도 그분의 십자가에만 다시 의존하여 그 죄책감을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육신과 심령이기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용서해준 그 은혜밖에는 기댈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어떤 회개 정화하는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개별적 죄에 대해서도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에겐 이미 성령이 내주해 있기에 정작 해야 할 일은 성령의 법에 사로잡혀 육신의 일보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고(8:3-8) 덧붙인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6-10)

신자가 죄 지으면 예수 믿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빛 가운데 행하면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신자가 선행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으면”이란 뜻입니다. 그럼 믿은 후 성화과정에서 지은 모든 죄도 그분의 피로 깨끗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단 주님이 미쁘신 분임을 즉, 그분이 십자가에 모든 죄를 이미 감당하셨기에 신자가 비록 큰 죄를 지었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너무나 크신 긍휼로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가운데 자기 죄를 자백해야만 합니다.

신자가 된 후에 어쩔 수 없이 지은 죄를 사해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미 모든 죄책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에 따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자 스스로 판단하여 행하는 어떤 행위로도,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해도, 죄를 씻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2:16-19)  

율법의 의를 온전히 지켜서 구원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기에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원리는 예수 믿은 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신자에게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십자가의 의를 믿는 믿음만 보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제대로 잘 지키지 못하여 율법에 따라) 죄인으로 나타나면” 십자가는 무용지물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죄를 짓게 하는 자”가 될 수는 결코 없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를 씻으려면 반드시 예수님께 입술로 구체적으로 자백하며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다시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어떤 공적이나 선행을 앞세워선 안 됩니다. 심지어 자백하고 회개했다는 사실조차 자신의 의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백과 회개는 반드시 자신의 영적 도덕적 실체가 너무나 가난하고 연약함에 대한 속에서부터 저절로, 믿은 후에는 사실은 성령님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지만, 끓어오르는 애통함이어야만 합니다. “저의 심령과 육신이 너무나 곤고하기에 주님의 긍휼 외에는 소생할 길이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는 절규여야만 합니다. 성전에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의 모습같이 말입니다. 이것 외에는 신자가 이미 지은 죄의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자백이 끝이 아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부터입니다. 자식을 징계하는 아비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잘못을 범하면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라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다시 범하지 말며 나아가 더 선하고 성숙해지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9-13) 징계를 주는 아비의 뜻은 자식이 고침을 받고 곧은 길로 행하여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아 더 이상 육신을 좇아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영을 좇아 영의 일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2,13)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치유하신 뒤에는 꼭 죄를 다시 짓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했지 않습니까? 죄의 용서는 당신의 몫인 반면에 온전히 회개하여 고치는 일은 신자의 책임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 은혜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영단번(永單番, Once-for-all)의 구원이 이뤄졌습니다.(히7:26,27/9:11,12) 모든 죄에 대한 사함이 이뤄졌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신자는 사단의 노예 신분에서 주님의 은혜의 나라 안으로 영원히 옮겨졌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까지 다 사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계속 지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목적을 그 바로 앞에서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하나님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려고 은혜의 나라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씻어내는 방안에만 신경을 쓰기보다는 더 이상 그 죄를 짓지 않고 나아가 주님을 닮아 더욱 온전해지는 길로 매진해야 합니다. 주님께 자백하여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영단번의 용서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꾸 다른 방식의 죄 사함을 구하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의 의를 축소, 변형, 왜곡 심지어 부인하는 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혹간 그런 의식까지 없었다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앞에서마저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앞에서 말한 대로 심지어 회개의 행위마저 그럴 수 있음, 자랑하려는 교만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자백과 용서는 물론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죄책감으로 두려움과 수치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사단에게 넘어가 십자가를 부인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공로를 예수님의 의보다 앞세우려는 어떤 사고나, 말이나, 행동은 바로 이단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으며 또 그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도 하나님께 저주 받을 것이라고 확언했지 않습니까?(갈1:6-9)

자위의 죄에 대한 소견

신자와 죄 사함에 대해 위에서 간략히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두 질문에 대한 구체적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위가 죄가 되는 까닭은 과녁을 벗어났다는 죄의 원론적인 뜻에 기인합니다. 사랑하는 상대와의 교제가 수반되지 않고 혼자서 일방적으로 어떤 여자를 상상하며 성적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욕이 불일 듯 일어나는 청년기에는 신자라도 어쩔 수 없이 자위를 할 수밖에 없음도 부인할 수 없는 솔직한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 죄 사함을 위해서 설정한 몸을 씻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자기 행위로 십자가 은혜를 대신하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부부간에도 설정한 후에 씻으라는 것은 복음이 오기 전에 성행위의 성결함을 강조하려는 율법의 규정이었을 뿐입니다. 또 당시의 불결한 위생 상태를 감안한 규정이기도 합니다.

복음 안에 이미 들어온 신자로선, 또 위생 상태가 아주 양호해진 현대에,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이 마음가짐을 다시 하겠다는 뜻으로 꼭 그러고 싶다면 말릴 수는 없지만 위에서 설명한 죄 사함에 대한 성경적 원리는 충분히 인지하시고 그래야 합니다. 그런 씻음이 이미 범한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은혜 외에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확신은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자위에 대한 이해를 조금 넓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위행위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성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성(性)은 종족보존만이 목적이 아니라 부부간에 영육 간에 완전히 하나가 되는 사랑을 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숭고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역한 바울조차 부부는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고 권했던 것입니다.(고전7:5)  

고급한 지정의를 부여 받은 인간은 자칫 서로 더 깊은 상처와 눌림과 고통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가 오히려 더 쉽게 그 사이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껏 사랑하게 함으로써 그런 위험을 방지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으로 인해 아주 미워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주 사랑할 수 있는데, 전자는 죄가 되며 후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것입니다.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은 언제든 성행위를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라도 성욕을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셈입니다. 성욕이 넘치는 청년기라도 운동, 취미, 직장, 공부, 선행 등 다른 일에 모든 정신을 쏟아 넣어서 습관적 자위에 빠지는 죄를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물은 발정기에는 반드시 성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성이 종족보존만의 뜻인 동물은 절제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지만, 사랑의 목적을 겸하는 인간의 성은 절제되어야만 합니다. 절제되지 않은 무분별한 사랑은 방탕한 죄일 뿐 사랑이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위를 범했다 해도 너무 죄책감에만 묶여 있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반드시 지금보다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주님 앞에 솔직히 자백하고 고치려 노력해야 합니다.

또 그러니까 더더욱 주님 안에서 믿는 자매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온전한 사랑으로 섬기는 가장 기초적인 교회를 이 땅에 세워야 합니다. 바울은 혼인하지 아니하는 자들과 및 과부들은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혼자 지내기를 장려했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9)고 권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진짜로 재림이 자기 세대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군대나 형무소 같이 한 쪽 성의 사람만 장기적으로 집단 수용시키는 곳에선 동성애의 죄가 발발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다른 방식으로 그 성욕을 조절할 수 없다면 오히려 자위를 하는 것이 동성애 죄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위까지 성의 부차적 선물로 주었다거나 용인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현실의 고난이 인간의 죄악으로 생긴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이다시피, 자위나 동성애 또한 인간 죄악의 결과적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자위든 동성애든 심지어 살인의 죄도 예수님의 보혈 앞에선 얼마든지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침을 받아서 더 거룩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위에 묶이면 그 죄에도 묶이며 또 죄 씻음의 절차에 너무 예민하게 신경 쓰게 되는 법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용서를 다 이루신 주님을 바라 보셔야 합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셨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의 창조에 담긴, 특별히 인간의 성에 부여한 놀라운 은혜를 깨달아 누리셔야 합니다. 건전하며 아름다운 성으로 주님이 맺어준 돕는 배필과 정말로 성결하며 즐거운 사랑을 영위해야 합니다.  

도둑질 한 죄에 대한 소견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19:8) 세리 삭개오가 혹시 과거에 세금을 많이 거두어 착복한 일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예수님께 맹세했습니다. 이는 출애굽기의 도적질에 관한 율법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출22:1-4)

즉 도적질 한 것은 원칙적으로 두 배를 갚으면 됩니다. 소나 양을 다섯 혹은 넷으로 갚으라는 것은 당시에 목축이 주업인 이스라엘의 형편을 감안하면 단순히 도적질한 것이 아니라 생업의 수단을 훔친 것이기에 더 중하게 갚으라는 뜻입니다. 삭개오가 자신에게 혹시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한 것은 그 죄를 그만큼 중하게 여기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7배로 갚겠다고 서원한 자는 없습니다.

물론 도적질한 것은 호리라도 남기지 말고 갚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훔친 것의 가격에 이자까지 가산하면 때로는 수십 배도 될 수 있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5,26) 호리(毫釐)라도 남김없이 다 갚으라는 말은 깃털만큼 작은 액수라도 남의 것은 탐하지 말라는 한자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첫째가는 원칙은 성도가 주님 앞에서 먼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로는, 아무리 7배를 갚아도, 온전한 죄 사함이 될 수 없습니다. 액수를 많이 갚으면 더 죄가 잘 씻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주님의 십자가 의에 위배됩니다. 예수님의 의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당장 몽땅 죽어 마땅하다는 진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범한 죄에 대한 사함도 이왕에 떠올랐다면 주님 앞에서 먼저 회개함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떠오르지 못한 죄도 사실은 더 많다는 뜻입니다. 또 기억났으니까 호리도 남김  없이 즉, 이왕이면 많이 갚으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정작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호리라도 갚으라는 주님의 권면 바로 앞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익명의 편지와 함께 큰 액수로 살짝 갚는 것보다 그 형제를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 서로 간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 더 중한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보다 형제와 화목하는 일이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꼭 7 배로 갚고 싶다든지, 또 그러려면 할부로 갚아야 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좋은 방식이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여전히 주님의 공로보다 인간의 율법적 도덕적 행위에 집착하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적질 한 것은 갚기는 갚아야 하되, 그보다 상대를 찾아가 이실직고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리고 나선 그 처리는 상대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어쩌면 상대는 벌써 잊었거나,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도 모르거나, 이미 돈으로 보상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그렇게 용서를 구한 것만으로 너무나 감사히 여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만 따져도 설령 상대가 돈으로 갚으라고 요구한들 7배까지는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은 두 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미리부터 어떻게 7배를 갚을지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궁극적인 뜻은 가장 먼저 성도가 당신과의 관계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 길은 믿은 후에도 주님의 십자가의 의를 붙드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되면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랑과 권능을 주위에 증거하고 나눠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확장시켜 나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 간에, 혹은 성도와 불신자 간에 주님의 은혜가 교통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참된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고 섬겨서 영적 연합이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 의의 실천은 그 다음 문제이자, 그런 영적 연합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12/1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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