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는 중지 되었는가?

조회 수 3397 추천 수 70 2010.04.22 14:57:24
방언의 은사는 중지 되었는가?


[질문]


오늘 대형 서점에서 기독교 서적을 보다가 우연히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서점에 앉아서 책을 속독으로 보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 아들 옥성호 형제님께서 쓴 책인데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와 비슷한 색깔의 책으로 현재 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반박 글 입니다.

성경의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고린도 전서 12-14장을 상세히 얘기하고 있는데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혹시 목사님께서 이 책을 접하실 수 있으시다면 의견을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얘기하시는 방언과는 비슷한 부분도, 그리고 분명히 다른 점도 있습니다.

[답변]

먼저 방언에 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지만 이미 다른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믿기에 막연히 방언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도 절실하게 소원하지는 않습니다.
- 방언에 관해선 성경(고전12-14장)에 기록된 그대로만 이해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보며 그 이유와 근거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할 것입니다.
- 방언중지론자의 의견 중에 일부 동의하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예컨대 오순절의 방언은 오늘날 이해하고 시행되는 방언과 달리 외국어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 반면에 방언지속론자의 의견 중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컨대 방언을 받아야만 구원 받은 것이라든지, 성령 받아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이차로 방언을 받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것 등입니다.  
- 방언 은사는 중지되지 않았지만 그 은사를 실현하는 데에는 필히 성경 지침에 따라야 하며 특별히 은사자는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만 증거하여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 따라서 교회에서 방언 외에도 각종 은사에 대해 잘 가르쳐서 교인들로 은사를 받고 싶은, 사실은 이미 받은 은사를 발견하고 키워서 실현하고 싶은 소망을 생기게 해주어야 합니다.
- 그러나 방언을 훈련해서 받는다든지, 어떤 특정한 방법대로 따르면 방언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반대합니다.
- 대신에 한 개인이 방언을 받으려 하면 그 전후에 성령 은사에 관한 성경 말씀을 철저하게 가르쳐서 부작용과 폐해를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 결국 방언을 포함해 은사는 구원 받은 신자가 그 믿음을 성숙시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고 각자에게 나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소중히 가꾸고 적극적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실현해야 합니다. 반면에 개인적 이득과 욕심을 위한다면 사용하지 않아야할 뿐 아니라 그 배경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아래의 답변은 순전히 이런 중립적 입장에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중지되었는지 지금도 계속 지속될 수 있는지에 관해선 지금껏 수 없는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또 양쪽 진영 의견들 모두가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논리적 설득력을 갖고 전개되고 있기에 언뜻 다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미 수없이 논의된 내용과 같거나 비슷한 이유를 또 다시 들어봐야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저만의 특별한 이유를 먼저 말씀드린 후에, 옥 형제의 주장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방언 은사 찬성의 현실적 근거

소제목을 현실적 근거라고 붙였듯이 실제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를 살피기 이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1.1. 신실한 크리스천의 방언

무엇보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실제로 방언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구원의 표식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영적 우월성으로 인식해 주위 사람에게 자랑하지도 않고, 자기 개인의 유익과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뜻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히 대화하며 교회의, 여기선 조직체 개별 교회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더 강함, 덕을 세우려 합니다. 주위 사람들과 교회의 영적으로 피폐한 모습을 안타까이 여기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영적으로 위급한 일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못하고 온갖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이들 신실한 형제들이 하고 있는 방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 모두가 악령의 방언입니까? 또 그럼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입니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사단에 넘어간 것입니까? 그럼 사단이 성도더러 새벽기도마다 어려운 자와 교회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도록 시킨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매일 한두 시간씩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도 많은데 구원 받은 신자를 사단이 그렇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No.” 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정신적 장애가 있거나, 감정적 절정(ecstasy)에 이르렀거나, 단순히 어떤 초자연적 기운이 작동했거나, 진짜로 혀를 열심히 굴리는 훈련의 결과로 하는 기계적 언어거나, 심지어 뇌의 손상이 있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일부 그런 근거에서 방언하는 일도 분명 있겠지만 방언하는 신자 모두에게 다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또 열거한 그런 이유들은 방언하는 자는 어떤 면에서건 부족하고 심지어 장애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일종의 정신병자 즉, 증상이 항구화 일상화된 병자라기보다는 심각한 mental problem을 최소한 잠재적으로 지닌 셈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자주 혹은 가끔은 그런 부작용들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최고등 교육을 받아 아주 지성적이고, 건전한 가치관과 사고를 가졌으며,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도 없으며, 오직 성경 말씀 위에 균형 잡힌 신앙을 가졌음에도 방언 기도를 합니다. 정말로 불신자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도해 변화시키는 신실한 성도들과 목사님들 가운데 방언을 하시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방언 은사는 받지 못했는데 남들이 하는 방언을 통변만 하는 은사를 받은 분도 실제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대로의 방언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른 어떤 설명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심지어 사단도 그분의 통제 아래 있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방언 은사가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데 그 모두를 악령의 짓이나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 감정적 작용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옥 형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하려고 방언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히 확신하고 복음 안에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려는 사람에게 방언이 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또 성경은 분명히 성령이 임의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했는데 순전히 인간의 욕심으로 방언을 얻는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해버리면 진짜로 방언하는 자들은 전부 악령의 자녀가가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1.2. 악령의 방언이 있다면?

물론 방언이라고 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아닙니다.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 방언 가운데는 사단이 주는 방언도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 울음 같은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기괴한 행동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또 귀신 들린 점쟁이도 다른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거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를, 주문과는 다른, 주절주절 외우지 않습니까? 모두가 악령이 주는 방언입니다.  

비록 악령이 주는 방언이 있고 또 교회 안에 방언 은사의 온갖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서 성령의 방언까지 배제할 이유와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엄연히 실재하는 현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방언이 성경대로 실행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방언 기도의 유익이 분명히 있으며 많은 신실한 신자와 사역자들이 영적 싸움에 그 은사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악령의 방언이 현재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성령의 방언 은사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와 알곡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공존하지 않습니까? 진짜에는 반드시 가짜가 들어붙게 마련입니다. 기독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까닭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진짜 방언이 있으니까 가짜 방언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악령의 방언만 있고 성령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이들이, 특별히 불신자들이 그들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점쟁이에게 넘어가는 것만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지금껏 계속 있었던 일입니다.

제 뜻은 교회 안의 방언들이 전부 악령이 하는 방언이라고 하면, 혹시 그게 아니라 단순하게 말해 정신이상자들이 하는 방언이라 해도, 거기서 불신자가 영향을 받는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분히 부정적입니다. 미국에서 은사주의자들 집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언중지론자들의 반박 구실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교회 안의 방언이 악령에게만 지배되도록 계속 방관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주님 재림하실 때가 임박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한 명의 남은 자라도 찾고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비록 거짓 사역자와 거짓 성도가 많아도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저주까지 하셨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요23:3) 아무리 흠결이 많은 제도적 교회라도 완전히 사단의 놀이터로 그분이 내어주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령의 방언만 설치도록 방관하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성령의 방언을 지속케 하실 것입니다. 아니 역으로 성령의 방언이 지속되니까 사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 마치 성령의 방언처럼 혼동되는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많이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여전히 세상을 미혹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림 전과는 다를 것이 이제는 그분의 복음 안에 드는 자는 누구나 성령의 무기로 전신갑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신자만이 사단과 대적해 싸울 수 있습니다. 사단이 방해하는 무엇이라도 신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음부의 권세를 얼마든지 깨트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병균에 의한 질병이 아니라 사단이 심어준 질병이라면, 물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특별한 경우에도 가능하지만, 신유의 은사로 사단과 대응토록 했습니다. 악령의 방언이 성행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성령의 방언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점쟁이 앞이나 잘못된 은사 집회에 가서 일일이 성령의 방언으로 전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뜻이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영적 차원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에 방언 기도하는 자가 동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악령의 방언이 있으니까, 대적하라고 성령의 방언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자를 미혹시키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거짓 방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려면 반드시 거의 같은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또 흉내 내고자 하는 모습이 이미 실재(實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 성령의 방언이 이왕에 있으니까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방언해서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악령은 또 주님 오시는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계속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다 그 방식마저 효능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는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누가 봐도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전에는 교회 안에 비슷한 모습을 띈 두 종류의 은사들이, 특별히 방언에서 더더욱 성행하며 병존할 것입니다. 방언만큼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까 그러합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은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부터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관심을 우선 끌게 해놓고 율법에 묶인 유대인들과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불신자들로 영적 차원에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이라고 해서 불신 세상의 형편이 오순절보다 그리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방언 은사는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2. 방언 은사 지속의 성경적 근거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방언중지론자는 그 핵심 근거로 “온전한 것”이 오면 방언이 폐해진다는 상기 구절에서 찾습니다. 온전한 것을 신구약 66권으로 "완성된 성경"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속론자는 그것을 마지막 때의 "주님의 재림"으로 해석합니다. 또 두 진영 다 방언에 관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자기 입장에 맞추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어쨌든 본문대로 정말 온전한 것이 이미 왔다면 방언은 폐지된 것이며, 아직 오지 않았다면 지속되어야 함은 너무나 간단명료한 이치입니다. 따라서 그 책의 다른 모든 부분은 제쳐두고 이 구절에 관한 옥성호 형제의 해석만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정경의 완성시기와 방언의 유효성

그 전에 먼저 따져봐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방언중지론자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알고도 짐짓 간과하는 요소일지 모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시기와 신약성경이 27권의 정경으로 완성되어 인정받게 된 시점의 비교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3-58) 중에 에베소에 체류했던 시기인 AD 55 년  경에 저작한 것으로 봅니다. 신약성경이 현재 27권의 모습으로 공식적으로 확정 된 것은 397년의 칼타고 종교회의에서였습니다. 물론 4세기 초부터 오리겐이 현재 27권을 모두 정경으로 인용했고 또 다른 교부들의 서신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정경화된 칼타고 회의와 바울의 저작시기와는 단지 340년의 차이만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방언중지론자의 “온전한 것”은 정경의 완성으로 아무리 늦어도 주후 397년에는 도래한 셈입니다. 그럼 방언은 아주 길게 잡아야 340년만 유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 밖에 유효하지 않았던 은사를, 말하자면 일부 세대의 일부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유효했던 은사를 성경이 그렇게 많은 구절을 할애해서 설명할 필요가 구태여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혹시 몇 구절 안 된다고 반발할지 몰라도 방언이 신앙의 근본 요소가 아닌데도 그 정도라면 상당히 많은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역으로 따져 만약 방언이 일부 시대와 지역의 일부 사람에게만 유효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너무 많은 언급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경우는 그 배경에 담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별도로 하고 이제는 무효로 된 구절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구약의 정결법과 제사법과 일부 사회법 등이 대표적인 예이지 않습니까? 당시 시대에만 유효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실제 역사 속에서 궁극적인 한 지점 즉,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갔기에 당신의 계시도 그에 상응하여 발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시면 당연히 폐지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 안에 예정되었던 사항이며 또 신약성경이 그런 의미에 오해가 없게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의 진술은 어떠합니까? 학자에 따라 신약성경에도 약 200여개의 예언이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취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스라엘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초림 때에 다 완성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고, 섬기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무엇보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강림하자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초림 전에 성취된 구절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게 된 것은 분명히 성령이 오신 후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예언도, 특별히 요한 계시록의 경우는 더더욱,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 예언이 실현될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오셔야만 완전히 성취되고 혹시 그 전에 성취될 것이 있다 해도 마지막 때에 가서야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에 비추어 보면 방언의 경우 신약정경이 완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분명 신약시대의 믿는 자를 위한 책입니다. 구약이 유대인으로 메시아의 초림을 대망케 만드는 책이었다면, 신약은 새 이스라엘인 모든 믿는 자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케 하는 책입니다. 신약은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모든 지역, 모든 인종의 신자들에게 절대적 진리로서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만 따져 보십시오. 신약성경을 신자들이 제대로 읽게 된 시기가 언제입니까? 잘 알다시피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활자 인쇄술이 발전되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본이 대량으로 출간하게 된 이후입니다. 나아가 책값이 크게 부담되지 않았던 근자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고,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가르쳐지며, 또 대중에게 보급되는 것 전부도 사실은 성령의 간섭 하에 이뤄집니다. 그럼 문제의 고린도전서의 본문 구절도 결국은 현대의 최소한 종교개혁 이후의 독자들에게도 분명히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뜻이 됩니다.  

바꿔 말해 극히 일부 지역과 시대에만 성행하다가 1600여 년 전에 완전히 폐지된 은사를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신자들더러 참조만 하라고 기록되었다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바울 본인으로선 당장 눈앞에 문제되고 있는 사안인지라 당연히 기록했어야 했겠지만 성령님이 곧장 폐지될 은사와 그 의미와 특별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그에게 계시해주고 또 기록하게 했을지는 의문이라는 뜻입니다.

딱 한 가지 가능성은 후대 사람들더러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 오히려 그렇다고 분명하게 기록했어야 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처럼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신자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는 성령의 온전한 조명을 받으면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의, 단 성령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 십자가 복음 안에 완전히 들어온 자라면, 해석이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고 사람마다 해석이 다 다를 수 있으며 또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한마디로 성경 자체도 존재할 의미가 아예 없어집니다.

어쨌든 최대한 양보하여 이미 1600년 전에 효력이 상실된 방언인지라 후대 신자로 혼동하지 않게 성경에 기록했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서두에서 말한 대로 현재 방언을 하는 모든 신자는 악령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 됩니다. 아무리 감정적, 신체적, 종교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쳐도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령의 통치 하에 있지 않다면 악령의 수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 회색 지대는 성경적으로 없습니다. 신자에겐 매 순간, 매 사건이 다 영적 전투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현재의 방언이 영적으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단순한 현상이라고 우겨도, 진짜 그렇다면 그런 의미 없는 일을 성경이 구태여 그렇게 길게 기록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2.2. 옥성호 형제의 변증에 대하여

방언중지론자 가운데는 옥 형제님이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변증을 하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맹점(盲點)들이, 특별히 논리전개의 일관성이 부족하여 스스로 모순이 되는 진술을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일단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보고 또 그 이유를 성경의 완성이라고 단정해 놓고 해석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런 결함이 노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크게 셋인데 각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2.2.1. 방언과 사랑

첫째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예언, 지식, 방언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전부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셋만 따로 떼어서 말했으니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옳습니다.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항상 전체 문맥에서 살펴야 하고 또 그 문맥이 일차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분별해야 합니다.  

먼저 문제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한다는 말씀(10절)은 사실상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13장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장입니다. 은사의 부작용은 가르치려 했지만 세 은사가 폐지되는 시점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려는 의도가 원저자에겐 전혀 없었거나 훨씬 부차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고린도 교회의 은사자들 가운데 방언과 예언 등은 능하게 하면서도 오늘날처럼 많은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것을 바울은 안타깝게 여겼던 것뿐입니다. 특별히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이 영적 우월을 과시하거나 개인의 유익을 채우는 경우를 많이 봤기에 은사를 사용하되 반드시 사랑에 바탕을 두라고 권면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방언, 예언, 지식 셋이 8절에서 언급된 이유는 꼭 그것만 폐하고 나머지는 폐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장의 1-3절에서 사랑이 없는 은사의 대표적인 예로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 산을 움직이는 믿음, 구제, 심지어 자기 몸을 내주는 것 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8절에서 그 예 든 것 중에서 대표적 예로 예언, 방언, 지식을 사랑과 대비하려고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4:1 절에서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또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3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예언과 방언이 곧 폐지될 것을 예상한 언급이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두고 두 은사를 사용하라는 면에 초점이 가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에서 셋 중에서 지식은 빠지고 방언과 예언만 언급된 이유는 14장은 교회에서 말로 의사 전달하는 그 두 가지 일을 대조해 가르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의도로 저술하다보니까 13:1에서부터 예언과 방언이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비유했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13;8절에선 이왕 앞에서 예로 들었기에 온전한 것이 오면 폐지될 것의 대표라는 의미로만 다시 그것들을 거론한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저자는 지금 방언의 폐해를 예언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저술하고 있으니까 방언과 예언이 자꾸 언급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옥형제의 논리대로 만약 그 셋만 폐지될 것이므로 따로 떼어서 강조했다면 중지론자들은 왜 방언만 집중적으로 문제 삼습니까? 정작 더 파고들어 따져야 할 쪽은 예언과 지식이지 않습니까? 바울도 방언보다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했는데 예언의 폐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셋만 폐지되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반증 아닐까요?

만약 13:10절에서 따로 셋을 구별해서 말했기에 그 셋만 폐지되었다는 논리가 옳다고 치면, 13:13의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왜 다른 은사는 다 없어지고 믿음의 은사만 끝까지 폐지되지 않습니까? 또 그럼 나머지 은사들도 혹시 폐지 시기가 각기 다른 것은 아닌가요?  

예언, 방언, 지식은 특별히 말씀과 연관되기에 성경이 완성되면 없어진다는 논리는 아주 미약합니다. 왜냐하면 12:8-10절에서 각종 은사의 종류를 말하면서 지혜도 지식처럼 말씀으로 분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지식이 폐지되면 자연히 지혜도 폐지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혜란 지식을 삶에 적용해 활용하는 능력이기에 지식이 없이는, 꼭 학술적이 아니라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라도, 지혜가 발휘되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한 마디로 14장의 내용은 방언은 본인만 아니까 교회의 공중집회에선 통변이 없는 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교회에선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4장에서 “예언”은 순전히 교회에서 일상 언어로 설교하고 교육하고 권면하는 언어적 교통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였던 것입니다. 그럼 그런 의미로서 예언은 아무리 성경이 완성되어도 결코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13장은 모든 은사는 영원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은사라는 뜻입니다. 또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셋 다 영원하신 주님을 주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은사가 끝까지 남고 모든 은사가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면, 10절 말씀은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포함한 은사들의 폐지에 대한 구체적 시점을 적시하기보다는 그 폐지가 영원과 관련되어서 이뤄질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입니다.  

2.2.2. 장성한 분량까지 자람과 방언

옥 형제가 든 방언중지의 둘째 이유는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그 때까지 12절 묘사대로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야만 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권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가야만 이루어질 목표를 왜 성경은 미리 이루라고 권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은 완성된 말씀을 통해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 않고 또 더 이상 희미하게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그러나 확실해지고 명료해진 것은 구원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주는 칭의 구원에 관한 측면입니다. 반면에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할 부분은 성화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이 땅에선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언제 완성되었던,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닥치든 간에 성도에겐 항상 미완성의 상태로 남는 것입니다. 성경이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라고 했으니 “온전한 것”이 성경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초점이 어긋난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궁극적인, 정확한 의미로는 이상적인(ideal), 목표이긴 해도 현실적으로는 성취 가능한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곳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기에 최종 목표지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또 상식적으로도 먼 장래에 가서야 완성되는 일이라도, 심지어 자기 생애에는 불가능하지만 먼 후손들이 달성해야 할 일도 얼마든지 선대(先代)부터 목표로 정해서 권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두 쌍의 은유로 부분적으로 아는 지금과 온전한 것이 올 때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이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반면에 그 때는 장성한 사람이 되었고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옥형제의 주장대로 성경이 없어 진리를 모르다가 성경 완성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을 대조한 뜻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부연해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즉, 출생에서 죽음과 영원까지 심령에 가장 깊숙이 숨겨진 것까지 하나 남김없이 속속들이 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도 인간이 주님을 그렇게까지 알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성경의 예언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런 토론을 벌리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주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특별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주님이 우리를 아는 정도로 알게 되는 때는 언젠가 도래합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서 주님처럼 영화로워질 때, 나아가 마지막 때에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이지 않습니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13:12)라는 표현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됩니다.

나아가 바로 그 앞 절에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고 오해의 여지없이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자란다는 뉘앙스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짝지어 대조하는 대상은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지금과 그 때, 거울과 맞대면, 부분과 온전한 것, 모두가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점차 자라면서 변화 성숙되는 이미지의 대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버렸노라”라는 헬라어도 “쓸모없게 만든다.”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자람의 의미라면 이전 것이 전혀 쓸모없거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전 것에 더 좋은 것이 첨가된 것일 뿐입니다.      

설령 성경이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으로 대조한다고 해서 당연히 성장이라는 개념이 둘 사이에  개입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한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어린아이나, 장성한 사람은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보충 설명해주는 은유(metaphor)에 불과하지 중심내용이 아닙니다. 본문의 표현방식 또한 그러합니다. 성장의 의미를 나타내려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 가면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이라고 이미 다 자란 상태를 은유에 사용했습니다.

요컨대 본문은 완성된 성경을 갖고 신앙성숙 하도록 권면하려는 비유가 아니라, 이 땅과 천국, 신약시대와 재림 후 새 시대를 대조하여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당연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보다는 예수님의 재림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캘빈도 온전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고 강해했습니다.  

2.2.3. 로마서와 방언

옥 형제가 방언이 중지 된 세 번째 이유로 고린도전서 외의 다른 성경에는 방언의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보다 1-2년 후에 저술된 로마서에선 그 교회에 전하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가 방언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로선 방언의 은사는 곧 사라질 줄 예측했기에 고린도전서에 그런 언급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먼저 다른 성경에 언급이 없는 것은 이미 고린도전서에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곧 사라지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무리한 가정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고린도전서에도 기록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후대에 이런 식의 오해와 논란이 없게끔 명료하게 그 뜻을 밝혔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손으로 쓴 편지가 먼 지역의 교회까지 배달되고 또 전 교인이 회람되는 데만도 족히 최소 수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저자들도 그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저작하는 시점에 이미 방언 은사가 곧 사라질 줄 확신, 예상, 최소한 감을 잡은 저자라면 구태여 그것을 편지에 쓸 이유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편지를 읽고 그 의미를 교인들이 충분히 숙지했을 때는 이미 방언 은사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는 뜻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견책해야하는 당장의 필요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혀 틀림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를 고치려는 의도로 이 편지를 저작했습니다. 그 말은 저자인 바울로선 이 편지를 저작할 당시에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성경이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확신 내지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마 바울을 필두로 사도들이 서신서를 저작할 당시에는 자기들 편지가 나중에 수집되어져 정경으로 완성될 것을 알았거나 예측한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 해도 저작 시에 약 3백년 후에 이 편지들이 신약성경으로 편찬 될 것이니 정신 차리고 쓰라는 영감은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전히 수신자인 교회와 개인의 상황에 맞추어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와 믿음만 심어주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 신약성경의 완성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는데도 어떻게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신약 정경의 완성으로 뜻하고 저작했겠습니까? 너무 무리한 억측입니다. 또 후대 사람이 저자도 몰랐던 일을 어떻게 제 멋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에 성령의 은사로 방언을 소개하지 않고 복음만 말한 것은 오히려 당시의 모든 상황과 이치에 더 들어맞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오순절에 성전 순례 온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자생적 교회입니다.(행2:10)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들은 방언과 베드로의 설교만 보고 듣고 간 셈입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모든 소문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럼 바울로선 무엇부터 전해야 합니까?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는 사도들이 처음부터 복음을 제대로 가르칩니다. 오순절 순례객은 방언 현상과 베드로의 일회 설교, 그것도 이스라엘 역사에 간섭하셨던 하나님이 보내주기로 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단순한 내용의 설교만 들었습니다. 당연히 복음의 진리와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했습니다. 방언은 그들이 이미 봤기에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기보다는 구원의 핵심진리와는 상관없으니 로마서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옥 형제의 주장대로 하자면 방언과 함께 폐지될 예언의 은사가 로마서 12장에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6절)라고 소개되어야 할 이유는 전무합니다. 예언은 방언보다 후대에 더 천천히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동일한 문장에서 분석해낸 이유와 근거가 방언에만 적용하고 예언에는 적용하지 않은 셈으로 논리 전개에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을 예측했기에 로마서에 예를 들지 않았다면, 비록 늦게 사라질지라도 예언도 포함시키지 말았어야 합니다.

또 그와는 반대로 사라지지 않을 다른 은사들 예컨대 신유, 통변은 왜 로마 교회에 소개해줄 신령한 은사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까?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방언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일,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방언이 사라지면 통변도 자연히 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통변은 폐지되는 목록(고전13:8)에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은사 폐지 여부를 옥 형제 식으로 단호하고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에서 은사들을 열거한 이유는 바로 그 앞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 안에 많은 지체가 있고 당연히 많은 은사들이 따르는데 여전히 사랑의 바탕에서 실행하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의 많은 종류들을 설명하려다보니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권위하는 자, 다스리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등도 포함시킨 것입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거나 조금이라도 그와 연결되는 예시는 로마서엔 전혀 없습니다.

로마서도 은사를 열거한 직후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다시 강조했지 않습니까? 또 각종 은사를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맡은 직분의 본질에만 충실하여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 자랑이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고 또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두 서신서를 망라한 바울의 논리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옥형제의 주장처럼 1-2년 사이에 방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2.2.4 은사의 본질

옥 형제는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와 거의 같은 반열에 두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완성되었으니 완전히 용도 폐기 되었다는 것은 그 전에는 어쨌든 성경이 맡을 역할을 대신 했다는 뜻이 됩니다. 일종의 절대적 계시이거나 그와 유사한 계시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 세 가지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초대 교회 시절,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초대 교회 신자들은 최소한 이 셋 중에 하나는 받았어야 그분의 계시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사도와 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음으로 계시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초대교회 모두가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다 받은 것은 아니기에 성경은 모든 성도가 이 세 은사 중 하나는 받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그 셋은 계시에 준하는 은사라는 언급은 있었어야 합니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기 전이니까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 셋은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않아도 될 만한 은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12:11)

우선 은사는 “성령의 (겉으로) 나타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내면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본인이나 제삼자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나서 자신과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 은사라는 것입니다. 또 각 사람에게 성령이 당신 임의로 나눠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각 지체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방언과 예언과 지식들도 당연히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을 수 있는 은사였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꼭 받아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또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고 했습니다. 방언과 가르치는 말씀(여기선 예언을 의미)을 계시와 분명히 다르게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언이란 장래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도 일부 포함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선 주로 방언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14:22)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제 삼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는 기도이고, 예언은 통용어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예언이 성경 완성으로 폐지 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바울의 초점은 시종일관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방언을 통변자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불신자와 방언을 받지 못했거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영적 지식이 모자라는 자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제거하는데 두고 있습니다. 곧 폐지될 방언이라면 그렇게까지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등도 다른 모든 은사와 같이 이미 계시된 말씀이나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권능이나 은혜를 더 정확히 이해하여서 주위에 증거, 교육, 실천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초대교회에 한해 말씀을 대체할 만한 계시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와 그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설교들만이 성경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이 셋도 문자 그대로 성령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는 한에는 그 은사의 나타남도 계속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악령도 설치고, 악령의 방언이 있는 한 성령의 방언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컨대 방언이 구원과 성화에 절대불가결한 계시의 역할을 맡았기에 성경이 완성되자마자 폐지되어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3. 맺는 말

결론적으로 옥형제가 온전한 때를 성경이 완성된 때라고 든 세 근거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무리하고도 부족한 해석입니다. 방언중지라는 예단된 결론에 맞추려다 보니까 성경을 좁은 시각으로 풀어나간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전의 다른 책들이 참고할 내용이 풍부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안타깝고 유감스럽습니다. 물론 책의 다른 부분까지, 본 논의에선 구태여 다룰 필요가 없었음,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시야를 좀 더 넓혀 주었고, 옳고 그름을 떠나, 또 방언 은사의 부작용과 폐해를 다시 심각하게 지적했다는 면에선 분명 이 책의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대할 때에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온전한 때에 방언, 예언, 지식이 폐해지리라는 말씀의 근본 목적은 그 폐기시점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영원하도고 진정한 사랑의 바탕 위에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그 때를 밝히자면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에 일관된 뜻에 따라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전에는 비록 방언이 폐해가 많아도 지속될 것입니다.

만약에 방언중지론자의 주장대로 성경 완성으로 방언이 폐지 된 것이 옳다면 현재 신실한 교인들이 방언기도를 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성경적이고도 합리적인 해석을 내어 놓아야만 합니다. 아니면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와 같은 크기로 그들은 악령의 부하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정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방언 반대의 주장만큼 예언과 지식의 폐지에 대한 성경적 논의는 따라 나와 주어야 합니다. 예언과 지식이 정확히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폐지되었는지에 관해 그동안 있어왔던 방언의 논쟁만큼 활발하게 전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 주장의 모순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신약성경은 신약시대 즉, 성령시대의 신자를 대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주후의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 항상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이 수없이 남아있습니다. 설령 일부 성취되었다 해도 정확한 의미는 그분이 다시 오셔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달리 신자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 전부를 기록된 내용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함부로 일부 내용을 빼버려선 안 됩니다. 방언을 폐지하면 그와 관련된 고린도전서 12-14장의 일부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게 아니라 후대의 독자에게 경고만 줄 목적이라고 해석해도 누차 강조하지만 현재 방언을 하는 신실한 신자에게 정말로 납득될 만한 확정적인 증거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 안에 양과 염소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성령이 주는 방언과 악령이 시키는 방언이 교회 안에서도 혼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주었습니다. 또 성경은 그 분별의 기준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계 내부에서 서로 방언이 중지되었다 지속되고 있다는 논쟁은 접어야 하고 오히려 이왕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또 그래서 그 폐해를 어떻게 방지할지에 관한 논의와 실천으로 초점이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의 폐해를 스스로 줄이고 영분별을 정확히 해나가다보면, 실현 가능성은 극히 적지만, 언젠가는 이 논의에 대한 모두가 공감하는 확실한 정답도 자연히 얻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알다시피 갈라디아서 5:22, 23절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 안에서의 화합”입니다. 반면에 악령에 넘어간 육체가 도모하는 일은 그와 완전 대조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온갖 악행으로 인한 분열”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있는데 바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그분의 향기를 더 드러내느냐 여부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되 예수님을 더 확실히 증거하며 성도 간의 화평도 더 증진되면 성령의 방언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하면 할수록 은사자 개인이 앞세워지고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면 악령의 방언입니다.

4/21/2010


정순태

2010.04.25 01:36:10
*.75.152.133

목사님! 참 오랫만에 댓글 답니다. ^^
아가페 형제님께서 매우 어려운(누구도 정답을 말 할 수 없는) 질문을 하셨고
목사님께서 좋은 답을 해 주셨습니다.

전반적으로 목사님의 견해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옥성호 형제의 견해의 미지점에 대한 지적에 중점을 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기왕이면 김우현 형제의 견해의 불충분성에 대해서도 함께 다루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귀한 설명을 듣고도 괜히 투정하는 거 같아 죄송합니다. ^^)

암튼, 고맙습니다.

김순희

2010.04.25 12:25:40
*.161.88.93

삼일에 걸쳐 읽었습니다.
목사님의 열심에 머리 숙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성령세례가 곧 방언의 표적으로 나타난다고 배워왔습니다,
아직도 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이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맑은물로 씻겨져야할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도 암튼, 고맙습니다. ^^

운영자

2010.04.26 00:25:53
*.108.161.181

정순태 집사님 !
정말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주님 은혜 가운데 건강하고도 바쁜 삶을 사실 줄 믿습니다.

질문 자체가 옥성호 형제의 책에 관한 것이라 그 쪽만 다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김우현 감독의 "하늘의 언어"는 이전에 대충 훑어본 적이 있는데
온전히 체험 중심으로 간증하는 책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두고 전후 상황을 온전히 지켜보지 못한 제삼자가
구체적인 비평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말씀보다 체험을 우선시하는 은사주의에 대해선
단연코 반대한다는 저의 입장표명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

아가페

2010.04.26 06:30:09
*.250.67.132

목사님 답변 감사드립니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결론을 이미 정해놓고
그 결론에 근거들을 맞추어가는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중에 다시한번 꼼꼼이 살펴봐야 겠습니다.
요즘 개인적으로 하나님사랑을 많이 느끼고
더 알게 해주셔서 행복한 시간들 보내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하나님 사랑때문에
행복하시길 축복합니다^^

이장영

2010.04.27 01:56:33
*.125.125.25

목사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전반에 걸쳐 합당항 이해력임을 확인합니다.
다만 막 16장의 명령에서의 세가지 은사가 로마서에서 빠진 내용에 관하여는
성경적인 근거에서 옥 형제님이 빠뜨린 것이 있다고 봅니다.

막 16장의 명령이 세계 만방에의 복음전파의 명령이시고,
그 표적으로서의 은사였습니다.
방언이 그 지방언어임에도 동감합니다.
약 3년 경 후에 쓰인 롬 10:18에서 복음 전파의 사명이 완료되었음이 입증되기에, 롬 12장의 은사장에서 빠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고전 14:15에서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셨지요?
'영으로 기도하고, 이해력으로 기도하며,
영으로 노래하고 이해력으로 노래한다'고 말입니다.
목사님이 인정하시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방언'은
천사의 언어라고 보면 어떠하신지요?
그리고 통역의 은사가 있어야 하겠지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하니까요.

막 16장에서나, 행 2장에서의 소위 방언은 그지방의 외국어임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한 것이구요.
샬롬!

mskong

2010.05.02 13:32:18
*.113.153.73

목사님...샬롬...잘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chung s kim

2010.05.05 15:38:28
*.232.45.53

안녕하세요 목사님 아름다운 교회 김 정석 집사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와 보았는데 방언에 관한 목사님의 명쾌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글을 쓰실려면 보통 일이 아닐텐데요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요 승리하시길 기도합니다

차선미

2010.09.15 14:47:14
*.68.62.250

글의 내용이 온전한 것의 도래가 예수님 재림이냐, 성경의 완성이냐에만 집중이 되어 있네요. 그부분은 사실 해석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데요. 사도시대의 방언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외국어 였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실제로 은사가 중지 되지 않았다하더라도 사도시대의 외국어 방언의 형태는 오늘날 볼 수 없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사도행전2:8~12절에 걸쳐 무려 16곳의 구체적 지명이 언급되며 그지방 언어로 다 알아듣는게 되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구절을 읽을때 오늘날 통역되지 못하는 그래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당시의 성령의 인도하심의 방언과 다른 것은 사실 아닌가요?

Steve

2010.10.24 05:04:10
*.169.220.60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몇몇 부정적인 견해 동감합니다.

저도 오래 전에 방언 은사를 받으려면 안수 기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기에 그 당시 영적 은사를 열렬히 사모하던 때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스폰지 처럼 흡입할 때라서 아무 저항없이 한국의 FG Church에서 오셔서 안수 기도를 받는 곳에 들어 가서 '한 단어를 계속 반복함'으로 튀어 나오는 (혀가 뒤틀리어 터져 나오는 ) 방언 은사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에 성함을 댈 수 있겠지요...그런 얼마 후 이 천석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서 방언을 얼마나 잘하는지 들어 보자고 하셔서 회중 앞에 나가서 방언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기뻐하시는 방언 기도를 하있고 있다고 격려까지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억지로 방언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의미를 모르는 말로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것이 좀 내키지 않았고 이상한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말씀은 제가 그 이후 미국 목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배워 또 믿고 있는 말씀을 함께 공유하고자 옮겨 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특히 14장에서 주고자 하는 교훈은 교회에서 준행해야할 원칙들을 가르치는 장인 것을 우리가 바로 인식할 때 방언이 어떤 목적으로 구약에서 신약에서 사용되었는지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래의 말씀으로 방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영적 은사 : 방언, 예언, 지식은 언제까지 남아 기능할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영적 은사인 방언의 은사와 예언과 지식의 은사가 끝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판 성경에는 폐하고 (예언) 그치고 (방언), 폐할 것 (지식) 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도 바울이 기록할 때 사용한 그릭어 원본에는 방언은 끝날 것이고 (παύω – pauō = to cease) 예언과 지식은 효력이 없어진다고 하는 동사를 (καταργέω katargeō= to render idle, unemployed,

inactivate, inoperative) 사용하였다.



왜 같은 의미의 뜻을 전할 것이라면 각기 다른 동사를 사용하였을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들어 알고 있듯이 모든 학문에 띄어난 천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천재성을 나타내기 위해 일부러 다른 단어를 골라 사용한 것일까? 대답은 ‘아니다’ 이다. 왜냐면 성경은 철저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하나님의 계시하심이기 때문이다. 단지 기자들은 도구에 불과했다. 이는 기자들이 마치 로봇처럼 받아 쓰기를 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분별하여 자신의 스타일에 따라 기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때 원어에 근거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교사님들은 원어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사역이 주님께서 귀하신 보혈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 앞에서 오류 없이 올바로 ‘그 양들을 치는 것’이 아닐까?

모두가 다 원어에 정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어에 근거한 말씀의 연구를 토대로 말씀 준비를 해서 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고린도전서를 공부할 때 특히 영적 은사에 대해 공부할 때는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든다. 어떤 것이 참 하나님의 가르치심인지 목사님에 따라서, 교회에 따라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가르치기 때문에 혼동이 되는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즉 모든 정경이 다 갖추어진 교회 시대에도 그 방언의 은사가 담당할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예언의, 지식의 은사는….언제 폐하여졌는지 아니면 언제 폐하여 질 것인지? 온통 희미하기만 하기 때문에 어떤 가르침에 따라야 하는지 ….?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러 가르침으로 주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혼동 속에 남아 있게 하시는지….? 과연 이 광야에서 외치는 참 하나님의 소리는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우리는 목사-교사님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영혼을 구하고 양육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애쓰는 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는 하나님 앞에 오류 없이 하나님의 양들을 잘 치기를 기원한다. 가끔씩 강단에서 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잘 못 선포하고 있다고 다른 목사-교사님의 사역을 지적하는 말을 들을 때 마다 주님의 양들은 어리둥절해 하기도 한다.

이는 당연히 순수한 복음을 고수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비 해 두신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 즉 한 진리의 말씀, 한 성령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모든 종들의 입을 통하여 올바로 선포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려야 할 것이다.



지금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보는 방언을 하는 교인, 교파는 하나님 말씀에 맞지 않다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단지 신학적 배경에 의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방언, 영적 은사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적 은사 즉 방언을 말함으로 오용 혹은 남용함으로 자신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월등하다는 우월감을 가져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또 남들이 다 하니까 그 대열에 빠지기 싫어서 혹 구원이 없지 않을까 두려워서 흉내 내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방언에 대한 이런 견해도 있음을 나누고 싶어 이 블로그에 실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그 배경에는 새로 입교한 고린도 교인들이 지금까지 믿고 지켜왔던 그리스 신들에 대한 예배, 제사 의식을 영적 은사와 혼동하여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특히 디오뉴소스 (Dyonisus)의 주신제는 여러 의식 중에서 가장 감정적이고 흥미로운 의식이었다. 포도주의 신으로 황홀경을 유도하는 거의 광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이 예찬자들은 부녀자가 주이며 가정이건 일이건 팽개치고 산중의 예배장소에 몰려와 지팡이와 횃불을 들고 원을 그리며 난무하였다. 열광적인 입신 상태를 수반하였다.



게다가 또 Cebele – Attis cult (큐벨레-아티스 집단의 예배) 는 마치 실성한 자의 모임처럼 무시무시하고 예리한 음과 절규 또는 목소리를 주장하는 귀신에 의해 말하는 알지 못하는 이상한 소리 (mysterious jargon), 드럼과 북소리, 울리는 꽹과리 소리 등이 모두 같이 섞여서 온 천지를 진동시키는 예배가 그 당시 고린도에 만연해 있었다. 얼마 전 까지 그런 신비스러운 제사 의식에 젖어 있던 새로 입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영적 은사인 방언이 그러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상기되었을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도 매우 유사한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결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함부로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영적 은사인 방언은 복음을,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하신 약속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알 때 지금은 더 이상 방언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12절 말씀에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즉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장 10) 에서 온전한 것 즉

형용사τέλειον은 완전한/온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 보다 Completed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즉 성경이 완성될 때를 말하며 그때에 부분적으로 하던 것들이 없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τέλειον 에 대한 Lexicon의 뜻 풀이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뜻이 있는데 이 구절에서는 1번 혹은 2번의 뜻이 더 합당할 것이다

1) brought to its end, finished

2) wanting nothing necessary to completeness

3) perfect



사도 바울 자신도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전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 12절 말씀에서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 기록하였다.



성경 기자들 즉 누가, 요한, 야고보, 마태, 마가 등은 성령님의 영감으로 계시하시는 말씀을 기록은 하였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 전체를 다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바로 그 때란 성경이 다 완성될 때를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 9, 10절 말씀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 밝히고 있듯이 예언과 지식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약 40여 년간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증거되었으나 그들은 그 복음을 거절하였다. (그들의 영적 타락으로 나라가 멸망 당함을 경고하신 이사야서에서의 경고하심과 같이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그 때를 상기 시키셨다)



이사야 28:11 말씀에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이사야 28: 18 "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하나님의 경고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로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으로 주님의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상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그러하지 못했다.



결국 AD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군단에 의해 예루살렘은 멸망하였다. 방언은사의 기능은 여기까지 일 것이다. 마치 이사야서 에서 언급한 그 방언의 기능처럼……. 하지만 예루살렘 멸망 이후 (AD 70년) 하나님의 복음은 계속 전해져야 하기 때문에 예언과 지식은 성경이 완성될 때까지 그 영적 은사는 남아 있어야만 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9,10)



이 두 영적 은사는 성경이 완성되었을 즈음부터 (사도 요한의 마지막 책 즉 성경 맨 나중에 집필된 책인 요한계시록이 완성되었을 때부터) 그 영적 은사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어 얼마간 기능하다가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now -ἄρτι- I know in part, but then I will know fully just as I also have been fully known.) (고린도전서13:12)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But now -νυνὶ- faith, hope, love, abid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고린도전서13:13)



위의 열거한 말씀 에서 12절의 NOW (ἄρτι) 와 13절의 한국어 번역본에는 없지만 영어본과 원본에는 NOW (νυνὶ) 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단어다. 9절과 10절 그리고 11절과 12절은 대구법 또는 히브루 어법인

Hebraism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한 구절이 다른 구절을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어렸을 때와 장성한 사람, 희미한 것과 얼굴과 얼굴을 대함, 과 같이 9절과 10절을 11절과 12절에서 다시 바쳐주고 있다.



그래서 12절의 NOW는 지금 당장 즉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책을 기록하고 있을 때를 말하며13절의 NOW 는 시간의 제한을 덜 받는 즉 교회 시대의 전 기간을 가르치는 보다 넓은 의미의 말이다.

앞에 언급된 3 가지 영적 은사는 성경이 완성될 때는 그 기능은 성경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 은사는 일시적이나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인 미덕의 사랑은 영원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사랑이 없이는 순교하여도,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어 구제하더라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며 영적인 삶에 아무 유익함이 없다고 하였다. 영적 은사가 나를 위대한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즉 VIRTUE LOVE (미덕의 사랑) 를 올바로 알아 나날의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웅이요 영적 거인이 되는 길이다.

운영자

2011.08.16 18:26:19
*.104.239.214

차선미님

[최근댓글] 사이트가 개설되기 전에 댓글을 달아주셔서 지금껏 댓글이 달린지도 몰랐습니다. 최근에 상기 글의 주제가 된 옥성호님의 방언에 관한 책을 회원 한분이 게시판에 추천을 해주었기에 제가 이 글도 함께 참조로 읽어보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들어와 보고서야 아래 Steve 님의 댓글과 함께 비로소 읽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관련 답글이 늦어졌음을 사과드린다는 뜻입니다.

오순절의 방언은 외국어 방언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제 해석은 조금 다르지만 통역이 필요 없는 외국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참고로 “거꾸로 읽는 성경” 사이트의 # 108 “사상 최대의 부흥 집회”(행2:1-13) 사도행전 강해 6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외의 나머지 사도행전의 방언에 대한 기록에서 방언이 외국어였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경우는 없습니다. 또 외국어가 아닌 방언도 많았기에 바울이 통변의 은사가 있으며, 공적 예배 중에 통변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라고 권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시 회중에게 익숙한 헬라어나 아람어 대신에 구태여 먼 지역의 외국어로 방언을 하게하고 또 그 지역 언어에 능통한 자를 통역으로 세워야 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요? 그리고 외국어 통역이라는 것은 성령이 은사로 일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 교육과 훈련의 소산입니다. 통변의 은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은 방언이 여러 외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자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특별한 언어라는 반증입니다.

지금은 그런 외국어 방언이 없어졌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실제로 제가 담임했던 교회에서 젊은 청년이 중국어로 방언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영어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할머니가 영어로 방언했다는, 본인보다 바로 곁에서 듣고 그 의미를 쉽게 알게 되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드물긴 하지만 분명히 통변의 은사를 가진 자가 있습니다. 또 드물기에 공적 예배에는 사용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는 것이며, 또 그래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신 은사인 것입니다.

현재 행해지는 모든 방언을 다 수집해서 일일이 언어학자에게 단순 외국어인지 아닌지 검사시킬 수는 없습니다. 가능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방언 중에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 사단이 흉내 내게 만드는 것, 심지어 반복 훈련으로 하는 것, 종교적 감정적 엑스타시에 빠져 아무 의미 없이 내뱉는 주절거림 등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충분히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드린 말씀의 요점은 방언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인정하자는 뜻입니다. 참고로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으며 그리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방언 은사자들의 잘못과 부작용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실한 신자와 목회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방언을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고 보지 않습니다. 또 ‘온전한 것’의 도래가 정경의 완성이기에 방언이 중지되었다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 타당한 해석이 불가능한 이상 방언중지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래 Steve 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글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운영자

2011.08.16 23:44:16
*.104.239.214

Steve 님

위의 차선미님과 같은 이유로 답변이 늦어졌음을 사과드립니다.

인용하신 미국목사님의 원어 분해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당시의 고린도 지역의 난잡한 영적 은사에 대한 상황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저로선 온전히 납득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말로 ‘온전한’으로 번역된 헬라원어의 뜻이 ‘완전’(perfect)보다는 ‘완성’(complete)로 보아야 하기에 “정경의 완성”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설령 완성으로 해석해도 그것이 구원의 완성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꼭 성경의 완성으로만 해석해야 된다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고 또 그리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더 이상 불완전한 것이 필요 없도록 만드는 것은 오히려 마지막 때가 아닐까요?

성경을 볼 때 당연히 원어를 분석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성경저자의 의도나 앞뒤 문맥에서의 뜻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원어분해에만 매달리면 자칫 그 원어 자체의 문자적 의미에 묶이거나, 또 그래서 아주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해석에 집착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가 과연 정경의 완성인지 마지막 때인지는 헬라 단어 "온전한"의 의미보다는 전체 문맥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3절에 우리말 번역에는 없지만 now가 들어있는데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그런즉”으로 번역됨) 그것이 시간의 제한을 덜 받는 교회 시대 전기간을 가르치는 넓은 의미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 하나로만, 또는 앞의 now와 연결하더라도 방언의 중지를 표명한다는 확정적 의미나 단서를 발견하기 힘든 것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분이 해석하신 일차적인 의미 그대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지금, 즉 단순히 영원한 현재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습디다. 구태여 따로 더 확장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즉(now) -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now)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제 뜻은, 위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사도가 10절에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기록한 의도가 방언, 예언, 지식이 그치거나 폐해지는 시기를 정확히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 장은 아무리 신령한 방언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 중에 사랑이 최고라는 말로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한 구체적 설명(4-8절)을 중간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의도는 반드시 은사는, 특별히 방언과 예언과 지식은 사랑에 바탕을 두고 행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14장의 서두를 어떻게 이어갔습니까?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바라는 것은 크게 둘입니다. 방언보다는 예언을 특별히 사모하되 방언도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부정하지 않았고 예언은 두 번이나 “특별히”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강조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방언과 예언이 폐지될 것을 예상했다면 할 수 없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결국 12장 이후의 은사에 관한 진술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두고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증진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목적으로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을 해석하는 더 결정적인 힌트는 바울이 12절에 사용한 용어와 표현법에서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화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여기서는 분명히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13:12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거울로 보는 것”이 전서에선 희미하게 보는 것으로, 반면에 후서에선 명확하게 보는 것으로 부연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의 요점은 수건을 벗은 얼굴이 바로 그러하듯이 공통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하고 보는 데에 있습니다. 따라서 한 구절이 천국의 영광을 말한다면 다른 구절의 뜻도 동일하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한 저자가 동일한 표현법을, 그것도 같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간에 방언에 관해선 이런 해석상의 의견 차이들로 인해 중지인지 지속인지 어느 누구도 확정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비추어서 해석하면 됩니다. 방언의 부작용과 폐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혹은 폐지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면 자칫 성령의 역사와 성경의 기록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방언이 외국어 방언이었기에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더 이상 소용이 없고 그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방언의 한쪽 기능에만 포커스를 맞춘 셈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기능 말입니다. 만약에 그 주장대로라면 방언이 중지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에는 분명히 신령한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기능도 있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말씀 전파와 기도 둘로 나뉘는데 기도하는 기능은 아무리 성경이 완성되어도 중지될 수 없는 사역 아닙니까?

방언은 구원에 관한 핵심 진리가 아니고 단지 믿는 자들 사이에 덕을 세우고 또 사역을 효과적으로 하라는 뜻으로 일부 교인들에게 성령님이 주관하여 나눠 주실 뿐입니다. 방언의 중지냐 지속이냐를 따지는 이런 소모적 논쟁으로 교파와 교인들 사이에 틈과 상처가 생기게 된다면 그 정답이 무엇이냐를 떠나서 오히려 더 심각한 오류가 될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바 요점은 결코 중지론자를 비방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엽적 해석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저는 방언 은사를 자랑하고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적극 반대합니다. 저는 단지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겸손하게 인정하자는 뜻일 뿐입니다.

이왕에 자신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여기는 자는 성경을 정말로 열심히 묵상 연구하여서 그 주신 뜻대로 진짜 겸손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방언 은사를 받았든 못 받았든 모든 신자는 온전한 것이 와서 주님의 영광을 얼굴을 맞대면하여 바라볼 때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자신이 이미 받은 다른 은사와 재능을 사용해서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일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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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뜻은? [2] 운영자 2010-08-21 1383
196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4] 운영자 2010-08-09 1281
195 베드로와 안드레 중에 누가 형인가요? [3] 운영자 2010-07-14 1344
194 하나님은 왜 미리암에게만 벌을 주셨는가? [6] 운영자 2010-07-13 8562
193 이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운영자 2010-07-07 1591
192 예수는 선하지 않는가? [3] 운영자 2010-07-06 989
191 마가복음 10:29-30이 기복신앙을 옹호하는가요? [4] 운영자 2010-07-01 1233
» 방언의 은사는 중지 되었는가? [11] 운영자 2010-04-22 3397
189 거듭난 자의 영은 어떤 상태인가요? [1] 운영자 2010-03-14 1815
188 성령이 오셔서 세상을 책망한 내용은? [2] 운영자 2010-03-11 6200
187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어기면 어떻게 되나요? [4] 운영자 2010-03-07 9783
186 무슬림에 대한 세 가지 질문 운영자 2010-01-16 1322
185 회개기도란 무엇인가요? [1] 운영자 2010-01-05 1774
184 신자가 범한 죄를 어떻게 씻는가요? 운영자 2009-12-20 2447
183 사대(四代)가 왜 430년인가요? [1] 운영자 2009-11-23 2933
182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1] 운영자 2009-11-09 1728
181 나다니엘이 그리스도라 고백한 이유는? [3] 운영자 2009-11-01 6641
180 백세에 아이 낳는 것은 예사였지 않습니까? [1] 운영자 2009-10-27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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