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더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조회 수 1481 추천 수 31 2010.08.31 01:01:02
어떻게 하면 더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성화와 자유의지의 관계)


[질문]


성화에 있어서 신자의 자유의지와 성령의 역할의 관계에 대해 궁금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일하지 않고 주님께서 역사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지금껏 제 마음에 결심하고 노력하면 언제나 끝에 가선 다시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흔히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한 것처럼 선을 행할 능력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물론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님이 저를 인형이나 로봇처럼 완전히 조정하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진정 사랑하기에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자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해주신 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있으면 기존 사람들 보다 조금 더 도덕적으로 나아진 존재가 아니라 완전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셨는데, 전 복음 안에 있지 않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겨집니다.

제가 스스로 통제하려고 하면 언제나 실패가 따르고, 그러면 성령님을 의지해야겠다고 하지만 더 의지하려고 마음으로 결심할수록 계속 낙심하게 되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물론 언젠가 변하시켜 주시리라 믿는 것도 믿음이지만 정말 제가 믿음 안에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예배에서 말씀에 찔리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지만 이내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과연 내안에 성령님이 계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말로는 주님이라고 시인합니다. 말로만 시인하고 삶에서 시인하지 않기에 난 복음 안에 있는 것일까란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가 신자의 노력이고 아닌지? 성령 충만하도록 구하는 노력이 또한 필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모두 주님께서 이루신다고 믿는 척, 사실은 체념하고선 변하지 않는 내 자신을 탓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딱 잘라 말할 수 없겠지만 성화에서 인간의 노력이 어디까지 필요한 것일까요?

[답변]

성화에서 가장 큰 오류


신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의문이자 또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모든 믿음의 세대들 또한 동일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뾰족한 해결책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과연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요? 그래도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만 바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죄와 의지적으로 싸우는 길 말고는 없는 것입니까?

이는 마치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성적이 안 오르는 경우와 방불합니다. 해결책을 구하려면 제일 먼저 원인부터 정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또 원인을 정확히 알려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세밀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예컨대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성적이 안 오른다면 구체적인 원인분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적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면 최소한 남들과 동일한 노력을 한 후에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12:4)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죄와 싸우긴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죄는 반드시 피 흘리기까지 즉,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목숨까지 걸어야 합니다. 평생을 중단 없이 싸워야 합니다.

사실상 모든 신자가 그렇게까지 싸웠느냐 물어보면, 틀림없이 히브리서의 저자도 포함해 어느 누구도 ‘예스’라고 대답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는 가장 원론적인 설명입니다. 질문하신 요지는 어쨌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열매가 없으니 혹시 성령님께 의존을 덜했거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를 공부와 견준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비유입니다. 우선 남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열심히 해야 한다는 면에선 맞습니다. 그러나 학자가 되어 평생을 특정분야 연구에만 매달려야 하는 경우를 빼고는 공부란 항상 상대적 경쟁입니다. 남보다 뛰어나면 일단은 그 상태로도 보상이 따릅니다.

바로 인간사회에서 통하는 윤리관입니다. 남보다 어떤 면에서건 조금이라도 의로우면 의인으로 존경받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바리새인들조차 그런 정도의 의로 만족했으며 일부러 자기 성적표를 사람들 앞에 흔들며 자랑까지 했지 않습니까?  

반면에 참 신자는 일생 동안 공부에만 온전히 매달려야 하는 전문 학자와 같습니다. 그것도 만족할만한 완성된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또는 일정 수준의 업적을 달성하면 오히려 더 많은 미개척 분야가 있음을 알게 되어, 끝까지 학문의 도에 정진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컨대 성화에는 결코 완성이 없기에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닮아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는 소망과 열심을 가진 신자는 무엇보다 성화에 대한 가장 큰 오해부터 버려야 합니다. 성화에 겉으로 드러나는 중간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성화를 자꾸 자기가 정해놓은 실천적인 경건의 모습으로만 점검하려는 성향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범하는 오류입니다.

물론 성화의 열매가 수시로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분명히 옳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성화를 하고 있지 않다고 착각, 오해, 의심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화의 본질이 열매를 맺는 싸움이 아니라 훨씬 다른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서 성화를 이루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공부에 비유하자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또 그렇게 하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는지 모르며 심지어 자신이 꼭 해야 할 공부와는 전혀 다른 공부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건질 자는?

회심 후 오로지 주님의 일에 헌신한 사도 바울도 우리와 동일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그래서 그가 얻은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 예수님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이뤄지는 칭의의 구원 뿐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성화되는 구원도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 잘 믿으면 성화도 잘 이루어져 그런 갈등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간절히 기도하면 예수님이 선하게 살 소망과 의지와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이 또한 원론적으로 옳으며 신자들이 객관적 교리로는 잘 이해하지만 실제로 해석 적용하기가 힘듭니다. 지금 예수님 잘 믿고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했는데도 이런 의문이 생겼지 않습니까?

바울은 우리와 동일한 갈등을 넘어서 더 부정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그런 갈등에서 빠져 나오게 해줄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했지 않습니까? 의의 열매는 잘 맺지 못하면서 여전히 죄는 짓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는 얼마든지 죄를 지어도 된다든가, 스스로 죄를 마음껏 지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완전한 성화는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선 어떤 믿음의 위인도 성화를 완성시켜 주님처럼 바뀔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유일할 해결책이 된다는 뜻을 이렇게 부연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예수 믿었으니 죄와 전혀 무관한 성자로 바뀌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지옥 형벌에서 완전히 면제되었고 그 취소도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신자는 이미 바뀐 자신의 신분과 자격과 특권에 대해 절대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성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자기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려는 결단과 실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열심히 믿고 기도하며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부터 허물어트려야 합니다. 진정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따르려 해야 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천국 가게 되었으니 안심하고 의를 이루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기에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붙잡혀 있을 필요 없이 안심하고 진정한 소망과 감사와 열심을 갖고 기꺼이 의를 이루려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처음에는 우리처럼 의의 열매는 잘 안 맺히고 도리어 죄가 나타나니까 크게 갈등했지만 십자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감으로서 그런 혼동, 의심, 불안이 제거됐던 것입니다. 때로 육신이 연약하여 죄의 법아래 있어도 자신의 전부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음을 너무나 확신하기에 그 마음이 평강해졌던 것입니다.  

성화의 구체적 모습

사람은 누구나 마땅히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와 아무 연관 없는 불신자 중엔 신자보다 의의 열매를 더 잘 맺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신자의 성화는 달라야 합니다. 불신자보다 질과 양으로 더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열매에 초점이 가있으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멀어질 수 있습니다. 신자가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싸움은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로 맺는 열매라고 해서 또 다시 큰 종교적 업적이나 어떤 초자연적 경건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이해해선 안 됩니다. 주님과의 교제와 동행이 가장 우선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구원 이후의 삶의 전부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령의 법아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의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을 여기기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바울은 성화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지 완성을 향해 갈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중점적으로 하는 일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미 했던 일 즉, 뒤에 있는 일은 실패였던 성공이었던 반드시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성화의 열매가 열렸던 아니 열렸던 전혀 괘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잊어버린 유일한 목적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뒤에 것에, 경건했던 범죄 했던, 붙잡혀 있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결국 바울은 오로지 최종 목표만 바라고 나아간데 반해 우리는 자꾸 중도에 맺어지는 작은 열매에 집착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정했거나 추정 기대한 목표치와, 예컨대 성경통독, 금연금주, 새벽기도출석 등등, 비교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 최종 목표를 완전하게 달성할 수 있다고 자신했거나, 그럴 수 있는 성격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푯대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에게 올라가야만 완전히 달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16절)고 덧붙인 것입니다. 신자가 성화의 완성을 소망하여 열심히 나아가려 노력은 하되 완성 자체에 관심을 둘  필요가 전혀 없고 사실상 점검할 수 있는 방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때에 당연히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이 땅에선 지금 어느 곳까지 다다랐는지, 아니면 아직 다다르지 못했는지 따지지 말고 주님 따라 단번에 많이 걸을 생각도 말고 한 걸음씩 떼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뒤에 한 일은 잊고 오직 앞의 푯대만 향하여 가라고 했으며,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그대로 행하라는 두 권면을 연결시키면 성화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재 다다른 곳의 질과 양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의롭게 살고 있느냐보다는 과연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한마디로 성화의 본질은 열매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거기다 뒤에 한 일은 잊고 앞만 보고 간다고 하므로 이전에도 방향은 지금과 똑 같았다는 뜻이 됩니다. 만약에 뒤에 한 일이 다른 곳을 향했다면 뒤에 한 일을 단순히 잊기보다는 아예 방향을 바꿔서 가야 합니다. 바울은 구원 이후에는 땅에서 취득하는 상은 전혀 쫓지 않고 오직 하늘이 내려주는 상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따라서 성화란 예수 믿고는 그 전과는 완전히 뒤바뀌진 인생의 목적 및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늘로 향해 중단 없이 걸어가는 여정이지 얼마나 많은 의의 열매를 올렸는지 업적을 따지는 경쟁이 아닙니다. 의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늘로 향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진정으로 하늘로 향해 가고 있으면 의의 열매는 성령이 “금할 법이 없도록” 절로 맺게 해주십니다.

길이 다르면 도착지도 다르다.

신자나 불신자나 하나님이 심어주신 당신의 형상을 닮은 도덕성 즉, 양심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 수준은 사람마다 달라도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려는 기본적 소원은 때때로 갖습니다. 나아가 죄든 현실의 고통에서건 궁극적 구원을 얻고자 하는 갈망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종교인들의, 아니 종교를 갖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구도(求道)를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모든 인생의 출발점과 목표지는 같습니다. 누구나 보편적 의미에서 죄는 버리고 의를 행하여 궁극적 구원을 얻었으면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죄의 출발점에서 의의 목표지로 향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아무리 소원을, 그것도 아주 강하게 갖고 있다고 해서 하나뿐인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절대 목표지점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 길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율법을 지킬 자신이 있으니 영생을 얻는 방도를 가르쳐 달라는 부자청년 관원, 둘 다 실패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출발점과 목표점은 같았지만 가는 길 즉,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섰고 특별히 그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아닙니까?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라면 그 인생의 걸어가는 방향이 불신자와는 완전히 달라야, 아니 이미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다시는 뒤바뀌지 않습니다. 신자의 형편과는, 특별히 성화가 진행된 질과 양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진동치 못할 영원한 하늘나라를 이미 받았습니다.

한번 얻은 구원은,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인생을 걸어가는 방향이 반대로 바뀌지 않기에 출발할 때에 목표로 삼았던 지점에 반드시 도착합니다. 불신자와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합니다. 단지 현실에선 그들과 함께 가시적 물질적 시공간에 살고 있기에 그 도덕적 양태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에선 신자와 불신자는 엄청나게 크고도 절대 서로 건너갈 수 없는 간극으로 벌어진 위치에 서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한 쪽은 동으로, 다른 쪽은 서로 향해 정반대로 걸어가니까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거해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동에서 서가 멀듯이 아예 던져버렸지 않습니까?

신자가 설령 성화의 열매를 잘 맺지 못하고, 때로는 사단의 유혹에 져서 죄를 짓고 있어도 처음부터 걸어가고 있던 바로 그 영원의 길 위에서 주님을 향해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또 얼마가 되었던 그만큼 그 길을 이미 걸어온 것입니다. 나아가 앞으로 그 길을 걸어갈수록 협착해지고 험난해서 더 자주 넘어질 수 있습니다. 사단의 방해는 더 극심해질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일단 그 길로 들어선 신자는 죄악에 대해 아주 민감해집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흑암 속에서 까만 옷을 입고 있을 때와 빛 가운데서 흰 옷을 입고 있는 차이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큰 얼룩이 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아니 모두 까만 옷을 입고 있는데 조금 희게 보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얼룩으로 비취고 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흰옷을 입고 있는지라 아주 작은 먼지만 묻어도 신경이 쓰이고 빨리 털어버리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를 믿고 나면 자연히 이전보다 회개가 더 잦아집니다. 또 그러니까 신자가 되었어도 왜 아직도 이 모양인가라는 회한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그런 죄책감과 실망이 자주 들수록 더 정상이며 성화를 이뤄나가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실상 목표지도 다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불신자와 신자가 목표로 삼는 지점조차 다릅니다. 이미 말한 대로 불신자도 죄에서 벗어나고 절대적 진리를 깨달아 구원을 얻고는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죄에서 벗어나려는 가장 큰 이유는 공동체의 보존과 유지입니다. 상호간에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여서 이 땅에서 함께 잘 살자는 것이 우선적 목표입니다.

또 영적 구원을 추구하는 자도 있지만 그것마저 자기 평강을 위한 것입니다. 마음에 불안과 혼란을 제거하여 이 땅에서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는 방식도 자기 힘에만 의존합니다. 도덕과 중용의 실현, 물질과 정욕의 절제, 정신 훈련과 비움, 진리의 깨우침과 절대적 존재의 탐구 등에 정진하며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신자의 목표지는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부르신 자의 부르심의 상입니다. 바울이 이미 했던 일은 잊고 앞만 보고 향했던 그 푯대가 어디였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빌3:10,11) 바로 부활의 영광이었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맺히는 성령의 열매가 바울의 최종 목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신자는 이미 얻은 천국시민권을 들고서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대행연습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최대한의 희생적 선행을 본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여서 그분의 인도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성화도 사실은 신자가 아니라 주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화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끄시고 완성시킵니다. 구원(칭의)은 성화를 시키기 위해서이고 또 성화는 반드시 영화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 셋을 따로 분리해선 절대 성립이 안 되며 반드시 그 순서대로 이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시행하시는 일이 성취되지 않고 땅에 떨어지는 법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을 성경이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또 그래서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가 “항상 (주님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성화의) 구원을 이루라”(빌2:12, 괄호 안은 필자가 추가한 것임)고 하면서 그 방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절) 하나님이 성화의 소원만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자 안에서 그분이 성화를 이뤄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너희로 행하게 하신다.”고도 말합니다. 현실에서 실제로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신자 자신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말의 근본 뜻도 성령으로 인해서 성령이 신자에게 맺히게 해주는 열매입니다. 신자에게 맺히는 열매 자체가 성령은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완전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역할도 맡지 않고 능력도 발휘하지 않고서 내주할 리는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 혼자 힘쓴다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도 당신께 붙어 있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가지는 뿌리와 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가 맺히지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항상 가지 끝에 열리지 뿌리나 줄기에 달리지는 않습니다. 성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신자의 자발적 의지적 동참 하에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성화와 자유의지

문제는 이런 원리는 어지간한 신자라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분명 예수님께 붙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런데도 과실을 잘 맺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말 어디까지 우리 의지가 행해야 할 일이고 어디서부터 성령이 해주시는지 참으로 애매합니다.  

무엇보다 주지해야 할 사항은 성령은 절대 신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신자 스스로도 자기 내면의 영적 실상을 명확히 감지 인식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성령과 의지의 역할을 정확히 구분 지어 할당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도를 하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바로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피 흘리기까지 의지적으로 악과 싸우며 의의 열매를 맺는 수 말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 흘리는 싸움을 하기 전에, 또는 동시에, 반드시 앞에서 지적한 성화에 대한 오류만은 제거해야 합니다. 잘못된 원인을 정확히 알면 해결책은 거의 자동으로 도출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신자가 자유의지를 동원해 노력할 일은 마땅히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긴 하지만 그전에 오해를 제거하는 일에도 마땅히, 아니 더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려는 노력은 지금껏 어지간히 했고 또 앞으로도 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자가 성화를 자꾸 실패하고 실망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성화에 대한 오해는 제거하지 않은 채 즉, 성화를 잘못 알고서 성화를 이루려니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서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또 하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는지 모르며 심지어 자신이 꼭 해야 할 공부와는 전혀 다른 공부를 하고 있는 꼴”이라고 비유한 이유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성화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성화의 초점을 방향에 두지 않고 열매에 두었습니다. 따라서 중간 목표를 이루었는지 자꾸 점검하려 들지 말고 예수님과 교제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바뀐 나의 신분, 위치, 특권 등을 수시로 재점검 확인해야 합니다. 그분의 너무나 놀랍고도 크신 은혜와 권능에 대한 확신 위에 서있어야 합니다. 주위의 어려운 환경은 물론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한 실망감으로도 주님이 나를 붙드시고 있는 그 사랑에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잘못은 성화를 신자 스스로 정한 목표를 자기 노력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종교적 노력이었을 수 있음,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성화는 신자의 전인격체를 성령의 신령한 간섭으로 거룩하게 바꿔 나가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특별히 그 완성이 보장된 부활의 영광을 향해서 그분이 이끄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주님을 위해서 어떤 도덕적 종교적 열매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아주 세밀한 부분에까지 풍성히 받아서 누리려고 해야 합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곳을 찾아서 기꺼이 동참하며 그분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고 그분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 발휘되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자신의 전부를, 생명까지 완전히 주님께 내어드리는 싸움부터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당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즉 그분과의 교제와 동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하는 싸움부터 해야 하는 것이 성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된 후에 성령의 인도를 구하면 주님이 성화의 열매를 맺도록 모든 소원, 열심, 능력, 여건, 사람들을 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한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能力)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선을 행하고 의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는 간구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풍성한 영광과, 그분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지혜와 계시를 받도록 즉, 하나님이 너희더러 알게 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 성화의 출발이자 주님께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성실히 따르고 뜨겁게 기도하며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해서 그분께 당연히 붙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됩니다.    

실제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롬6:11)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권하기 바로 앞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12:3) 의의 열매가 잘 맺히지 않는다고 낙망하기 전에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그분이 고통을 당했으니 나도 고통 당해야지라고 결단을 다시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절) 예수님이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고 모든 고난을 참았듯이 신자도 어떤 방해와 핍박이 있더라도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을 상을 바라보고 앞만 향해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가 바로 예수님이기에 그분과 교제 동행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인도가 자신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죽이고서 가만히 있으면 의의 열매가 저절로 맺히게 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란 도리어 신자의 자유의지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또 더 활발하게 작동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의 모든 마음이 항상 예수님께로만 향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은 이미 실제로 완전히 살아난 자로 여겨야 합니다. 목표지가 천국임을 진짜로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길 위에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며 무엇보다 주님이 이끌고 계시기에 영화롭게 됨에 절대 실패가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앎(장래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이미 영화에 들어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의 바탕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잘 믿어서 이 땅에서만 남들보다 선해지고 교회에서 칭찬받는 직분자만 되려 하지 말고 천국 성도로 실제로 살아야 합니다.

요컨대 성화의 본질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도 가장 먼저 이런 오해를 바꾸고,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그 깊고도 풍성한 의미를 재확인하며,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실제로 받아 누리려는 데에 먼저 동원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여서 우리 의지력으로 의의 열매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 맺게 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모두 부수고 깎아서 내어드리는 데에 의지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남은 죄의 힘은 여전히 치사하고 완악하며 밖에서 훼방하는 사단의 세력도 아주 음흉하고 교활하며 강력합니다. 흑암의 세력을 절대 얕보아선 안 됩니다. 그러나 너무 겁을 낼 필요 또한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단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합니다. 분명히 성화의 과정 중에서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신자 자신의 의지 하나만 따로 떼어내면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그리스도 복음의 놀라우신 은혜 안에 자신을 온전히 의지적으로 담기게 한다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습니다. 주님도 전적으로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만 바라보았기에 골고다까지 올라가서 피 흘리며 죄악과 사단과 사망에 승리할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8/30/2010

운영자

2010.08.31 01:09:03
*.108.173.248

김주혁 집사님!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아주 광범위하게 다루어야 할 내용이고
또 시리즈로 글을 쓸까 하는 생각을 하느라 조금 더 늦어졌습니다.

이 사이트에 시리즈로 벌려 놓은 것도 여럿 있는데다
그 마무리는커녕 업데이트도 못하고 있는데
또 다른 시리즈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서
사실상 깊고도 많은 내용이긴 하지만 최대한 압축해보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성화에 대해서
차분히 자세하게 글을 써봤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간직한 채 말입니다.
잘 읽어보시고 추가로 의문나는 사항이 있으면
부담갖지 마시고 언제든 다시 질문해 주십시오. 샬롬!

강진영

2010.08.31 15:34:24
*.138.195.241

아멘입니다. 목사님.

앎이 전제되지 않은 성화의 노력은 결국 율법적 삶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고,
여김의 믿음이 없다면 자신의 신념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성화시리즈가 정말 기대됩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김유상

2010.08.31 19:19:57
*.234.54.11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고민이고 품고 있는 의문일 것입니다. 저 또한 자주, 내가 믿는 사람 맞아? 자문하고 남들에게 제 부끄러운 죄를 들키지나 않았을까 전전긍긍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하심에 의지하며 떨치고 앞으로 갑니다. 사실 박 목사님의 대답대로 이 부분에선 결코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 깨끗해질수록 조그만 오점도 크게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선우

2010.08.31 21:53:35
*.50.223.63

'성화'라는 미명하에 공들인 탑처럼 쌓아올린 나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기까지 제게는 많은 난관과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었습니다. 제 이런 경험은 '마음의 죽음'이라는 간증글을 통해서 피력한 바 있었습니다. 이를 말씀 안에서 시원하게 풀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순태

2010.09.01 13:49:19
*.75.152.231

참 어려운, 그리고 누구나 안고 있는 고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나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성화란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비록 그것이 성령의 열매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아마도 성화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목사님의 설명(바울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럴 듯 싶습니다.

성화의 본질이란 열매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과, 자신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Steve

2010.10.24 04:10:50
*.169.220.60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배워 믿고 있는 성화에 대한 말씀을 공유하고자 제 블로그에 실은 말씀을올립니다.
참조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인이 어떻게 성화될 수 있을까?



교인들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저런 짓은 하지 않는데….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실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평가할 때 쓰는 말인데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사이에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가시켜 주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리고 의인이라고 칭하신다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성경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제 신자는 하늘 나라의 왕족으로 위엄을 가지고 근엄하게 살아야 가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신자들 즉 천국의 왕족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의전/법도/예절 (protocol) 인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익혀야 합니다. 그 세세한 예절은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양반은 아무리 바빠도 뛰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의 삶 속에서도 신분이 있는 삶들은 나름대로 예절이 있어 그대로 따르는데 하물며 천국의 왕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그런 법전 / 의전 – PROTOCOL 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프랑스 황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기요틴 (Guillotine) 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때 결코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왕족답게 (왕족답게 protocol을 지키며 살아온 습관대로) 죽었다는 말이 있듯이 어떠한 상황 변화에도 마음에 변동함이 없이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 또한 하늘나라의 왕족으로서 살아나가야 할 덕목이 됨을 우리 신자들은 배워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강한 능력의 팔로 지켜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다면 전쟁에 참전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고 하면서 조그마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징징거리지는 않는지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설령 강한 징계 아래 놓여 있다 할 지라도 신자들은 징계가 축복이라는 말씀을 믿으며 감사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왕족으로서 의전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징계가 하나님의 말씀 – 왕족으로서 그 의전을 잘 배워 올바로 지켜 행하는 길로 나오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을 배워 알아 감사 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즉 우리 몸 속에 죄의 본성이 살아 움직이는 동안에는 완전히 그 의전을 잘 지켜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한 이유가 바로 육신이 죽지 않는 한 우리 몸 속에서 왕 노릇 하려는 죄의 본성이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 (Sanctification)는 신자들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본분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믿음을 고백한 모든 신자들을 하늘나라의 왕족들로 인 쳐주심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로 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거룩할 수가 있습니까?



아래 3 단계를 걸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9)



첫째로, 위치적 성화(Positional Sanctification):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리에 두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치적으로(신분적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이 지니신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체험적 성화(Experiential Sanctification):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짐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해 나감으로써) 성경의 교훈의 말씀이 우리의 혼에 흠뻑 스며들 때 성령 충만 하여져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과 함께 행하며 그리고 사탄의 생각인 인간의 선악을 대체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2:16).



셋 째, 궁극적 성화(Ultimate Sanctification): 하늘 나라의 왕족들인 신자가 이생을 마쳤을 때 (이 때는 우리 몸 세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본성들이 모두 소멸된 상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부활된)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활한 하늘 나라의 왕족으로서 육체적으로 그와 같이 될 것이며 주님 재림 때에 그의 개선식과 대관식에 참여하도록 예비되며 그리고 영원한 그의 신부가 되는 완전한 자격이 갖추어 지게 됩니다 (빌립보서 3:20-21; 요한계시록 19:6-9).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 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는 삶이 되라고 권면하십니다.



비록 교인으로서의 삶은 실패 (Loser) 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은 자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인을 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손에서 뺏어 낼 수 없다고 하셨듯이 여러 차례 구원의 확증을 일러 주셨습니다. 그 실패자들은 다만 하늘 나라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과 완전한 성화를 혼동하여 이따금씩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를 구세주 되심을 믿음으로 얻은 구원) 로마서 8장 34절 이하의 말씀에 따르면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구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 구원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 입니까!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은혜가 자라나도록 말씀을 열심히 배워 실천하여 체험적 성화(Experiential Sanctification)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성화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반영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사라의 웃음

2013.04.15 22:15:52
*.109.85.156

의의열매를 맺으려하는 것이 아니고 오해된 부분이 무엇인지를 먼저 해결함이 중요한 일임을 배웁니다. 방향, 그 방향에 서 있는 것,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곳에 서 있는 것과 한 걸음씩 떼며 걷는 길에서 잦은 쓰러짐도 있고 죄책도 있고 이런 저런 아픔과 갈등도 있지만 십자가 보혈로 거듭난 신자들의 걷는 길은 예수님 품 속인 것을 알고 뒤엣 것은 잊고 다시 십자가 앞에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는 이 커다란 은총을...

한 올, 한 올 수놓아지 듯 성화에 대한 바른 말씀들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간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없었던가, 자주 이 글을 읽으며 궁금했던 부분들, 또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수시로 점검해야겠습니다

모루두개

2024.03.02 02:22:07
*.97.127.172

"성화의 본질은 열매가 아니라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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