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이 부활을 믿었는가?
[질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상황에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사환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이삭과 함께 제사 드리고 돌아오겠다는 상황인데요. 어느 날 영어성경을 보는데 아브라함이 사환들에게 제사 드리러 가기 전에 “We will come back to you"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영어성경이 혹시 번역이 잘못되었나 싶어서 다른 성경역본도 찾아보았는데 niv와 nlt 또한 “We will come back”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돌아오겠다는 말인즉 아브라함과 이삭 두 명이 올라갔으니 돌아올 때도 두 명이 돌아오겠다는 뜻이 되는데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서 이삭(아브라함의 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는.. 아니면 전혀 모르고 이삭이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도 경황이 없어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일까요? 아니면 성경 번역이 잘못된 것일까요?
만약 아브라함이 그저 이삭이 죽을 줄만 알았다고 해도 의문이 드는 것은 여전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4:18-21) :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졌고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했는데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그때도 아브라함이 믿음이 변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물론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25년간 기다려서 얻은 이삭이 혹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또 다른 자식을 사라를 통해서 주실 것이다 혹은 이삭이 죽더라도 살아날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었던 것일까요?
[답변]
비교적 간단하고도 구체적인 문제로 그 정답이 성경에 명확하게 이미 나와 있기에 간략하게 답변 드리겠습니다.
부활을 믿은 아브라함
우선 영어 번역이 맞습니다. 제 다른 글에서 여러 번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만 우리말 어법은 과학적, 논리적이지 않는 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선 본문처럼 단수 복수의 구별이 모호합니다. 또 시제, 태, 가정법의 형식이 다양하지 않을 뿐 아니라 표현마저 애매합니다. 지시대명사나 형용사 부사 등이 서술하는 부분이 명료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애매한 부분이 나오면 가능한 원어성경을, 헬라 히브리어가 아니라면 영어 성경이라도 함께 봐야 합니다. 영어는 헬라, 히브리어와 같은 셈족 언어로 문법 구조가 거의 같고 상당히 과학적 논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번역 상의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한글성경보다 영어성경에 훨씬 적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특정 부분의 뜻이 모호하면 가장 먼저 반드시 다른 부분의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만약 다른 부분에 명확하게 해석이 되어 있거나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냥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구태여 성경 밖의 자료로 혹은 자기 임의로 추측, 사변, 논의, 해석할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본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 성경 구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자신이 한 말을 들 수 있습니다.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22:7,8)
아직 제단을 쌓을 곳에 이르기 전인데도 아브라함은 번제할 양을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13절)를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삭을 두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번제할 어린 양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10절)라는 서술이 단지 칼을 드는 시늉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칼을 머리 위에 치켜들고 막 내리치려는 모습입니다. 정말로 이삭을 단 칼에 죽여 번제물로 바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한 말씀이 절대 빈말이 아닌 것입니다. 심중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 공치사를 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는 번제물을 바치더라도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었을 개연성이 더 높습니다. 히브리서 또한 그렇게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
아브라함이 대체 어떻게 이런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미 죽은 사라의 태에서 이삭을 얻었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에서 난 이삭을 통해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또한 굳게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하나만 보면 무엇보다 성령의 간섭으로 부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아무리 인생 말년에 믿음이 완숙한 경지에 올랐어도 그가 아무 갈등과 슬픔 없이 이삭을 비둘기 한 마리 단숨에 바치듯 한 것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삼일 간의 여정을 가는 동안에 이삭에게 내색은 하지 못하고 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기도드렸겠습니까? 대체 이 일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이삭을 바치기는 틀림없이 바치겠지만 그러고 나면 당신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하룻밤을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지만 아브라함은 사흘간 주야로 계속 그랬을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님은 그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자기가 죽여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시거나 아니면 최소한 번제할 어린 양이 따로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분명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리아 산에 막상 오르고 보니 어린 양이 따로 없으니까 이삭을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더 확실히 붙든 것입니다. 물론 그 산 위에서도 여전히 성령님은 역사하고 계셨기에 그에게 다시 한 번 더 큰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그의 부활 신앙을 확증하고 또 창세기 22;2의 원어가 ‘내가’ 아니라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의 믿음의 위인들도 성령에 따라 행했고 또 그 모든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지 않습니까? 성경 진술 그대로 모리아 산 위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활을 믿은 것이 확실합니다.
모리아 산은 골고다 언덕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서 부활을 확실히 믿었다는 성경의 진술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목적한 바를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이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을 바친 믿음을 우리도 본받자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쉽게 간과해 버리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은 주지하셔야 합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사라가 경수가 완전히 끊긴 후에 이삭을 잉태한 것을 실제 체험으로 겪었기에 하나님은 죽음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도 부활시키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험은 생물학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중에 사라가 잉태한 성격기록의 진실성을 더 확증 짓는 사건이 됩니다. 쉽게 말해 사라의 잉태를 체험하지 않고는 아브라함이 절대 이런 부활을 확신하는 자리에까지 이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4:17-22)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아브라함이 떠나온 갈대아 우르가 우상숭배의 온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르라는 이름이 불(火)을 의미하듯이 자녀들을 산 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 말년에 이른 아브라함에게 혹시라도 이전의 잘못된 관행의 영적 영향력이 그 믿음에 남아 있는지 확실하게 점검한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그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혀 주저하지 않고 바쳤기에 이전 습성이 남았으리라 쉽게 단정해선 안 됩니다. 신에게 자녀까지 바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고의 정성과 열심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방 풍속으로는 그렇게 바쳐서 신으로부터의 반대급부도 최고로 끌어내자는 계산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서로 주고받자는 최고급 수준의 계약인 셈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그런 마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이삭을 바치라고만 했지 그 반대급부로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겠다는 이전의 약속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아브라함 쪽에서 보면 사실 그 명령은 거부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백세에 그것도 25년간 온갖 사연과 기다림 속에 얻은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을 달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명령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거꾸로 따지고 들어도 온당한 것 아닙니까? 심지어 끝까지 거부했어도 이삭을 하나님이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만에 하나 죽이더라도 사라의 죽은 태에서 다시 아들을 주실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가 명령대로 순종한다고 해서 자기에게 현실적으로 득이 될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순종했다는 사실 하나만 남을 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외아들이라는 최고 큰 것을 받았는데도 어떤 보상을 주지 않음으로써 과연 당신만을 진심으로 사랑할 것인지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외아들을 바치게 한 것은 절망적 상황과 여건에서도 하나님만 경외할 것인지도 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르에서의 우상숭배와는 정반대가 되는 신앙 내용을 점검하되 자녀를 바치는 동일한 형식을 통해서 시험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브라함이 정말로 외아들을 하나님과 일대일로 맞바꿀 수 있는지 또 그렇게 바쳤기에 마음 한구석에 조금이라도 당신께 바라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우상숭배 풍습과 그 안에 담긴 신과 거래하려는 의미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모습을 재연케 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깨닫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서 전혀 그런 낌새가 없었고 대신에 칼을 들고 아들을 단번에 내리치려는 순종만 발견했습니다. 당연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면서 그 번제를 중단시켰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사자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해서 한 수양이 수풀에 뿔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케 했습니다. 사실은 그가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그 자리에 있었지만 수풀에 가려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이런 믿음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몇 번의 신앙 훈련이나 간절한 기도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일시적 감동에 겨워 떨면서 비몽사몽간에 해치운 순종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의 수많은 실패와 환난을 겪은 결과였습니다. 인생 말년에 지난 삶을 전부 아우르는 하나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온갖 고민, 갈등, 분노, 의심, 불신, 불만 등을 하나님께 들고나가 쉴 새 없이 씨름했었고 또 환난과 문제들에 파묻혀 고통과 슬픔으로 지샌 적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간혹 굳건한 믿음으로 승리한 적도 있었지만, 연약하고 무능하며 죄악과 유혹에 넘어가 쓰러진 적이 훨씬 더 잦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생 여정 중에 인간적 현실적 대안으로는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았으며 구원의 산성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뿐이더라는 한 가지 확실한 진리는 깨달았습니다. 당장은 이해가 잘 안 되더라도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일단 그분께 순종하는 것만큼 인생에 확실한 대안이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외아들을 바치라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주저 없이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바친 것만큼의 보상을 전혀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했다는 사실에서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세 번째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이 바친 것에 비례해서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역으로 따지면 하나님 쪽에 전적 재량을 온전히 드리겠다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을 바라거나 그것 때문에 그분을 찾지 않고 오직 그분만 경외하고 사랑하겠다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선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다다른 온전한 믿음의 경지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번제물로 바치라면 외아들마저 얼마든지 바치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보면 바로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일을 마음 놓고 맡겨서 크게 쓸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이 믿음은 또 골고다 십자가의 예수님에게까지 연결됩니다. 신자가 예수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 사실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라함과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원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구원과 구원 이후의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 대한 전적인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자기가 갖고 있었던, 사실은 사단에게 놀아나고 있었던 주권을 온전히 포기하고 십자가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한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그럴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인간 쪽의 어떤 조건, 자격, 공적, 선행, 의, 심지어 믿음조차 예수님 앞에 자신을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먼저 죽으신 그 온전한 사랑을 보고 깨달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인간 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적용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이셨으니 내가 이제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알게 되었노라.” 단순히 글 바꾸기 놀이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숲 속에서 미리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어린 양 대속 제물을 발견하자 곧바로 이런 고백을 진심으로 했지 않겠습니까? 모리아 산이 실제로 약 이천 년 후의 골고다 언덕과 그 위치가 동일하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께 전적 주권을 돌려드려야 비로소 그분이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까지 죄인들을 위해 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최초의 구원에서만은 오히려 그 순서가 반대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생명을 인간을 위해 먼저 바쳤습니다. 그래야만 인간 또한 자신의 생명을 진짜로 바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야 구원이 성립되며 또 그러면 부활에는 자연히 연합되어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 후에는 물론 아브라함처럼 신자가 언제든 자신을 먼저 그분께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예수님 외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사나 죽으나 자기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더러 이삭을 바치게 한 것이 단순히 하나님 명령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본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에 관한 수많은 예언과 표상이 있지만 이 사건만큼 문자적으로도 일대일 대칭이 될 정도로 정확하고도 세밀한 계시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기록 목적 또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3/19/2009
이삭을 바칠 때까지 아브라함이 겪은 수 많았던 의심, 분노, 아픔, 고통, 고난들과의 씨름, 오히려 넘어지고 실패하기 일수였던 그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활신앙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배웁니다.
사라의 죽었던 몸에서 이삭이 출생되기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잔잔한 숨결이 마치 곁에서 들리는 듯, 삶속에서 다정스레 늘 이야기하시고 계심을 너무도 확실하게 체험했기에 부활신앙을 갖게되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랑하는 아들을 칼로 내리치려할 때의 심장은 얼마나 녹아내렸을 것이며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을 수 있길 얼마나 바라며 기도했을런지요.
모리아 산에서 바쳤던 순종, 골고다에서 우릴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맘은 어찌나 아프셨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