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뜻은?

조회 수 2465 추천 수 27 2012.06.24 15:58:15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뜻은?


[질문]


혹, 어리석은 질문일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사람으로는 아담만 에덴동산에 있었기에 아담 이전의 죽은 사람이 없었으니 아담은 죽는다는 의미를 몰랐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뱀이 여자에게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을 보아서는 어쩌면 아담과 여자가 죽는다는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경관(聖經觀)


결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닙니다. 미처 생각지 못하는 예리한 질문이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질문입니다. 그런데 먼저 집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들이 성경을 보는 성경관(聖經觀)에 따라 그 해석과 적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둘의 실제적 차이가 얼마나 큰지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으로 오류가 없다고 보는 인식입니다. 그 다음은 이런 견해를 전부 혹은 일부 부인하고 각자만의 의견을 갖는 경우입니다. 후자는 더 그러하지만 전자에도 여러 견해가 있어서 일괄적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아주 단순화 시켜 대비하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말씀이냐,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전으로 오류가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당연히 저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며 그 바탕에서 답변을 드립니다.)

질문하신 주제에 적용하면 후자의 입장에선 아담은 최초 인간이었기에 죽음을 전혀 모른다고만 해석합니다. 또 그런 아담에게 하나님이 죽는다는 말을 했다는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나아가 완전해야만 하는 하나님이 그런 모순된 말을 했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거나, 하나님에게 하자가 있을 수 없으니까 인간이 지어낸 가공의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립니다. 어쨌든 성경은 그 안에 담긴 상징적, 교훈적 의미만 참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특별히 그분이 직접 말씀하신 부분에는 더더욱 하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전제로 하고 해석을 합니다. 선악과 사건이 지어낸 설화가 아니라 인류 역사상 특정 장소에서 최초 인간에 의해 실제로 일어난 엄연한 사건(real fact)이자 절대적 진실(absolute truth)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역사성, 진실성, 합리성 등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본 질문의 의도처럼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최초의 부부뿐 아니라 성경을 읽는 후대 독자들을 향해 이미 계시해 놓으신 뜻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셨으면 실제로, 반드시, 마땅히,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또 아담이 비록 죽음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어도 그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떤 방식인지 구체적 경과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음의 의미에 대해 계시해 주신 후에 이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명령이란 즉시 실행을 요구하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깨우치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도 모르는 명령을 어찌 지킬 수 있으며, 그럼 그 명령을 주신 분이 잘못입니다. 선악과 금령은 아담이 듣자마자 얼마든지 준행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던 명령입니다.
        
죽음에 대한 직접적 교육

하나님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아담에게 죽음의 의미를 알게 하셨을까요?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사안을 해석하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행간의 의미를 충분한 개연성을 근거로 추정해야 합니다. 어떤 해석이라도 반드시 논리적 합리성과 일상적 가능성을 가져야할 뿐 아니라, 문맥이나 그 기록이 포함된 성경책(이 경우는 창세기)에서 그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술이나 힌트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나 기독교 교리와도 상충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의미를 알게 하는 데는 직접적 교육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하는 두 방안이 있습니다. 먼저 아담을 앉혀놓고 살고 죽음에 대해 말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조금 무리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면 그렇게 못하실 리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면 성경에 어떤 방식으로든, 최소한 그런 힌트라도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직접 보지 않고는 아무리 말로 가르쳐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정말로 끔찍하다고 느껴야만 선악과를 감히 따먹으려는 생각을 못합니다.

아담더러 죽음을 보아서 알게 하는 데도 하나님이 그의 눈앞에서 다른 동물을 죽여서 보여주는 방법과 자연히 죽음을 목격하게 해서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간접적 방안, 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이 첫째 방안을 택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실제로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낙원에서 쫓아내면서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3:21)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려면 그들 앞에서 어떤 짐승이든 죽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가죽 옷은 타락 후 죄에서 사함 받는 길은 피 뿌림의 제사뿐임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선 대속 제물이 필수적이고 앞으로 저주 받은 세상에서 살아가려 해도 하나님의 보호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뜻을 확실히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죽이는 시범을 보여 버리면 두 번째는 아무래도 교육효과가 약화될 뿐 아니라 그  의미가 중첩 내지 혼동될 우려가 있습니다. 또 타락 전에는 아담더러 사랑과 은총이 많은 하나님으로 알게 해서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생명을 죽이는 시범을 보이면 도리어 두렵고도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심어줍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뜻 안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습니다.(이 부분은 본 홈피의 [성경의 맥을 잡자] 사이트의 글들을 참조 바랍니다.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의 네 주제에 대해 시리즈로 글을 쓰려 계획했으나 아직 창조도 마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아담 이후 인간이 정작 알아야만 하는 사항은 죄에서 구원 받는 문제이며 또 그래서 하나님의 아담 교육도 그 쪽으로 집중되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창4:4) 즉, 양을 죽여 희생 제사를 드렸듯이 말입니다.  

간접적인 죽음 교육

이처럼 가죽 옷 사건 이전에 하나님이 짐승을 죽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면, 아담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식물을 만드시고 또 인간이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미리 다 조성한 후에야 인간을 창조했습니다.(창1장) 그럼 강우, 안개, 천둥, 번개 같은 일상적 자연현상도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간혹 성경기록에 문자적 논리성을 갖게 하려는 목적에서 강우가 노아홍수 후에야 시작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번개로 인해 땅과 공기 속에 질소가 엄청난 양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번개 후에 공기 중에 새콤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바로 질소 때문입니다. 질소는 식물 잎이 산소동화작용을 하는데 필수적이며, 그렇게 생성된 산소는 인간의 호흡 즉,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기본요소입니다. 결국 식물과 인간이 성장 하는데 번개가 필수적이라는 뜻이 되므로 노아 이전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번개가 아담 시절에도 일상적 자연현상이었다면 그는 번개를 맞아 나무가 부러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수풀 전체가 불타는 너무나 두려운 광경도 목격하고 또 그 후에 시커멓게 그을려 죽은 동물의 시체가 널려져 있는 것도 보았을 것입니다. 낙원에선 처음부터 그런 크나큰 재앙을 허락했을 리 없다고 반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이 때로는 헛발을 디디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아담 자신의 발에 우연히 곤충들이 밟혀 죽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뛰어다니다 넘어져서, 돌이나 나무에 걸려 다치면서 피를 흘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피를 보면 누구나 본성적으로 가슴이 떨리면서 큰 두려움이 생깁니다. 거기다 우연히 죽은 동물 시체에서도 붉은 피가 쏟아졌을 것입니다. 아담으로선 나무나 돌에 스친 상처로 난 자신의 피를 보는 순간 다른 동물의 죽음의 비참함에 그 생각이 미쳤을 것입니다.  

비록 에덴이 낙원이었긴 해도 아담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었고 또 일상적 사고마저 일어나지 않는 무사안일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한 교통을 했기에  낙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당신 대신에 자연을 다스리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모든 피조물들에 이름을 붙이면서(창2:19) 즉, 열심히 일하며 그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가 죽음과 피를 보는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간접적 방안으로 부족하지 않는가?

혹시라도 간접적인 교육만으로는 아담이 죽음에 대해 온전한 인식을 못할 것이라는 염려는 안하셔도 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모든 피조물 안에 창조주의 신성이 드러나므로 그분의 실재와 권능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더러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겠다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온전하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중요한 첫 계명을 그 의미도 모르는 아담에게 주실 리는 결코 없습니다. 서두에서 성경관에 따라 성경을 이해 적용하는 근본적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믿는다면 지금 거론 된 주제도 그분의 온전하심에 비추어보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그분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사실은 잘못입니다. 그런 의심이 들 때마다 일단 완전하신 분이라는 절대불변의 진리를 바탕으로 왜 그렇게 했을 지 따져보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자연의 일상사 가운데서 죽음을 간접적으로 가르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어기면 죽여 버리겠다고 직접 시범을 보인다면 독선적 폭군적 하나님으로 비춰져 아담이 기꺼이 순종하지 않고 무서워서 맹종만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낙원의 주변 환경이 활기찬 생명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모습으로 가득 차있는 가운데, 아주 가끔은 죽음이 불러오는 두려움과 비참함을 깨닫게 함으로써 아담의 자발적 선택으로 첫 계명을 기쁜 마음으로 지키도록 하신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이 지키지도 못할 명령을 주고선 위반하니까 “요놈! 예상한대로 잘 걸렸다. 맛 좀 봐라.”하고 벌을 주었다고 반발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처참함을 아담더러 미리 철저히 알게 해서 쉽게 위반할 수 없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지키지도 못할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가장 근본적 의미는 동산(이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그 나무를 두어서 아담이 언제 어디서나 잘 보이게끔 했습니다. 그  절대적 진리를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보일 때마다 이렇게 아름답고 쾌적한 모든 것을 그분이 주셨음을 깨닫고 모든 경배와 찬송과 감사를 당신께만 돌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브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3:5)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를 잘 새겨봐야 합니다. 보기에도 뛰어나게 아름답고 보기만 해도 저절로 군침이 돌만한 열매를 만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럼 정말 인간이 지키지도 못할 명령을 주신 심술쟁이 하나님이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열매는 아주 볼품이 없었거나 그저 평범했을 것입니다. 선악과는 인간과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상징하는데다, 그 금령을 주신 배경의 의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 됩니다. 인간에게 폭군 독재자 하나님으로 나타나도 안 되지만, 화려하게 치장해서 인간을 오도(誤導)하는 하나님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열매에 혹은 열매부터 아담의 시선을 끌게 되면 자꾸 따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그러지 못하게 나무는 아주 아름답게 만들되 열매는 평범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브가 그 열매를 보고 따먹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죄가 그 심령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그저 평범한 열매였고 나무는 동산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 하나님이 그 점을 싫어한다는 사단의 꾐에 빠지니까 열매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 것입니다. 얼마나 그 열매가 대단한 효능을 지녔기에 그렇게 되는지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고, 거기다 하나님이 싫어한다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럴 수 는 없다고 삐치고 시샘이 생겨서 더 먹고 싶어진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선악과가 비로소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정녕 죽는다는 의미는?

선악과 금령의 의미에 대해선 [성경의 맥을 잡자] 사이트에서 3회에 걸쳐 이미 다룬 적이 있습니다. #26 “심술쟁이 하나님? - 선악과에 대한 첫째 의문”과, #27 “선악을 아는 것이 왜 나쁜가? - 선악과에 대한 둘째 의문”과,  # 28 “인간이 과연 영생할 수 있었을까? - 선악과에 대한 셋째 의문”이 그것입니다. 구체적 의미는 이 세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금령의 의미는 말씀 그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육신은 물론 영혼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죽음의 올바른 의미를 밝힌 명령입니다. 육신의 살고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벗어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인간 창조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교통하여서 이 땅을 그분 대신에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기 심령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바로 자신의 그 존재 목적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라면 하나님과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분을 믿을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 살다 죽는 것으로 끝입니다. 육신적으로 무병장수를 넘어 불로장생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됩니다. 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지고, 또 이 땅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그분의 뜻에 맞추어서 살아갈 이유라곤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청지기 역할을 감당할 존재로 그 분에 의해 심히 아름답게 창조되었음을 확신하는 인간이라면 오직 그분과 교통하며 그분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고 또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원숭이는 물론 아메바를 조상으로 둔 물질에 불과한 존재로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짓입니다.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해 본들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외시킨 인생은 이 땅에서 실재해야 할 목적과 의미는 물론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기에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물질에서 진화된 물질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정의(定意)하기에 이미 돌멩이나 다름없습니다. 항상 실상은 죽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금령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참 죽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분과 분리되는 죄를 범함으로써 육신적인 죽음도 임한다는 뜻입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이 들자, 불순종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 염려하시고 낙원에서 내보낸 뒤에 생명 나무로 가는 길도 막았습니다. 실제적 육신적 죽음도 임한 것입니다. 타락한 채로 영생해버리면 하나님으로써도 인류를 구원할 방도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짐승을 잡아 최초 인간에게 가죽 옷을 손수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전히 당신의 일반적 은총 가운데 보호를 받을 것이며, 하나님 당신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는 천국에서의 영생을 보장한 것입니다. 나아가 여자의 후손이(예수) 뱀(사단)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창3:15, 원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 전체를 구속하실 것이라는 약속까지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항복하고 엎드리면 당신의 자녀로 삼아 새로운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제 2의 선악과 명령이 되며, 또 선악과 명령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시매 그 분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예수님이 오신 모습도 아무 볼품없고 아주 평범했습니다.(선악과가 볼품없으리라고 해석하는 성경적 근거임)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더러 강제적으로 혹은 현혹하여 당신을 따르게 하지 않습니다.

최초 인간 아담 때는 죄가 들어오기 전이라 자기 자유의지로 선악과 금령을 기꺼이 따르게 했습니다. 살펴본 대로 충분히 따를 수 있는 여건을 다 마련하고 죽음의 의미도 확실히 알게 한 후에 기쁨과 감사 가운데 순종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인간들은 죄로 그 영혼이 타락되었기에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2의 아담이자 선악과로 오신 예수님은 성령의 간섭으로 그 영이 새롭게 거듭나야만 당신을 구주로 모실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또 그 약속대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육신적으로 살아 있는 것과는 별개로 정녕 죽는다는 것이 선악과 금령의 뜻입니다. 또 하나님이 인간이 그 진리를 충분히 알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모든 여건과 가르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나아가 순종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지만 인간은 자신을 최고로 높이며 스스로 이 땅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탐욕으로 육신적 영적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의 의미는 이미 세 번이나 다룬 적이 있어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에 초점을 맞추어 답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성경이 그분의 온전하신 말씀임을 확신하면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계명의 온전함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무조건 그렇게 믿고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그분의 온전하심 가운데 온전히 서있어야만 성령의 조명이 올바르게 이뤄지기에 성경에 관해 생기는 어떤 의심과 질문에도 충분한 개연성과 합리성을 갖춘 해석과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6/2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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