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기질과 죄의 연관성에 대하여?
[질문]
얼마 전에 기질에 관련된 설교를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 바울은 담즙질 등등, 성경의 인물들을 기질별로 얘기하며 기질대로 쓰임 받고 그 기질을 이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장면(마가 전도여행 동행 문제로..)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런데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는데 아무리 기질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화를 내고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든지, 그리고 바울의 행동을 미루어보아 당시 마가를 상당히 껄끄럽게 여기며 마가를 향해 마음을 닫고 있지 않았나 싶은데 그것을 기질로 보아야 할지 죄로 보아야 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 13장 이후로 계속 연약한 자를 받아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마가에 대하여 혹은 바나바에게 했던 행동을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을까요? 아니면 그것은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합당한 것으로 여겼을까요?
[답변]
성경적인 인간 기질론
최근에 심리학이 학술적 체계적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교회에서도 인간의 본질에 관해 가르칠 때에 많이 응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더 깊이 폭넓게 이해한다는 측면에선 상당한 도움도 됩니다. 반면에 인간의 존재론적(ontological) 본질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바에 비교해선 미흡하거나 상충되는 면도 많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해석 강의 설교할 때는 심리학적 인간 유형론은 단지 참고만 하고 반드시 성경신학적 인간론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이 들은 설교에서도 베드로가 다혈질, 바울은 담즙질이라고 분석한 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확실하지 않는 사실을 두고 설교에 마치 검증된 진리인양 선포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가 의학 이론으로 최초로 체계화시킨 기질(temperaments)론도 초기에는 단순히 네 종류로 나눴지만, 최근에는 한 사람이 여러 기질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봅니다. 예컨대 다혈질 안에도 담즙-다혈질, 우울-다혈질, 점액-다혈질 등이 있으며 서넛의 복합적 기질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우리말 속담처럼 사람의 내면은 복잡다단합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양태가 바뀝니다. 성경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마는”(렘17:9)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자연과학적으로 체계화시킬 수는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원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심히 부패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서 생기를 공급받지 못해 죽은 영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기질은 성경적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인지 여전히 잃어버린 자로 머물러 있는 자인가 둘로 나뉠 뿐입니다.
이런 궁극적 영혼의 문제 뿐 아니라 기질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각자가 다 다른 기질을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신 분의 뜻과 계획대로 사용된다면 긍정적 결과를 맺고 그렇지 못하면 부정적 결과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매사에 차분하고 온유한 기질의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서있지 못하면 얼마든지 더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아무리 포악한 기질이라도 주님께 은혜를 입으면 가장 온유한 자로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을 네 기질로 분류하는 것이 크게 보아서 어느 정도의 객관적 합리성을 띄고 있습니다. 또 어떤 기질이 특정한 행동을 유발하는 중요 동인(動因)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언제 어떤 경우에나 결정적, 근본적, 일차적 모티브가, 특별히 예수를 믿은 신자에겐, 기질인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행하는 일에 작동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충실한지 여부입니다. 예컨대 주님을 향한 소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되면 기질적으로 소극적이고 비관적이었던 자도 주님의 일을 행할 때는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 낙관적이 됩니다.
특별히 질문 주제처럼 윤리적 문제와 연관될 때는 기질과는 거의 상관없습니다. 예수 전에는 죄인 줄 모르거나 알고도 죄를 쫓기에 바빴고 즐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고는 죄에 아주 민감해졌고 거룩해지려는 소망과 헌신으로, 비록 그 실천 여부가 더디다 할지라도, 충만해집니다.
쉽게 말해 예수 전에는 기질 따라 행동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경우 아무래도 다혈질이 화를 잘 내어 죄를 짓는 확률도 높았고 우울질은 그 반대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기질과 전혀 상관없이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항상 교통하는 자는 죄를 지을 확률이 훨씬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신자의 기질, 믿음, 심지어 평소 성령 충만 여부와도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사태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관련 당사자가 아무리 선하게 행했어도 결과는 부정적일 수 있으며(욥기1,2장처럼), 심지어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경우(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으로 지샜지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듯이)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분노한 원인
바꿔 말해 질문하신 사건을 바울의 담즙질 기질 때문에 일어났다고만 해석하면 크게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 그 기질에 비추어서 죄의 원인과 신자가 따라야 할 교훈을 찾아내면 본문이 말하는 바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 교훈이 충분히 경청할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해도 그러합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중심으로만 해석하고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전에 성경의 기록으로 확실히 검증된 사실에만 기초해야 함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더니 바나바는 마가라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행15:36-41)
우선 바울과 바나바가 양보하지 않고 서로 심히 다투다가 헤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럼 두 사람의 기질이 꼭 같았다는 뜻입니까? 또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가능한 같은 기질끼리는 동역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벌써 본문 자체에서부터 기질론으로 해석하는 데에 무리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그들이 다툴 만했던 근거를 알 수 있는 힌트가 사실은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바로 있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사촌이었습니다.(골4:10)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의 살라미에서 일차 전도 여행을 시작할 때에 그곳에 있던 요한(마가의 히브리 식 이름임)을 수종자로 삼았습니다.(행13:5) 아마도 바나바가 추천했거나, 최소한 바울이 마가를 알게 된 연유가 바나바였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13:13) 그 원인에 대해선 성경은 완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선교 여행을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구브로 섬을 횡단해 바보에서 박수 엘루마를 대적하여 봉사로 만든 사건을 계기로 섬의 총독을 전도했습니다. 그 후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자 요한은 떠나버렸습니다. 마가는 겨우 선교지 몇 군데를 돌자 바로 일행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입니다.
성경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귀책사유를 돌리지 않는 것을 보면 마가에게 책임감과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으로 봐야 합니다. 실제로 그의 기질(바로 이런 부분에선 성경 해석에 기질론을 참조할 만한 합니다.)이 그러하다는 힌트가 성경에 나옵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14:51,52)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중에서 예수를 따르다 들켜서 벌거벗은 채 도망간 자를 성경학자들은 마가로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마가는 베드로와 아주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12:12,13, 벧전5:13 참조) 마지막까지 따라 나선 이가 바로 베드로와 마가였는데 마가는 중도에 들켜서 도망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 저작 당시의 독자로선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데다, 저자 자신을 나타날 때는 이처럼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요21:24 참조)
마가는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따를 정도로 성격이 급하면서도 또 잡히자마자 이불을 두고 벗은 채 도망치기 바쁜 것으로 보아 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겁이 많은 자들은 인내치 못하고 쉽게 포기하기에 대체로 책임감도 결여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자신의 기질 때문에 바나바와 싸운 것이 아니라, 마가의 기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극력 반대한 것입니다.
앞에서 위에 인용한 본문에 결정적인 힌트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어느 구절이겠습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여행의 목적을 말했습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마가와 동행했던 최초의 선교지인 구브로 섬과 밤빌리라의 버가도 행선지에 포함됩니다. 구브로는 몰라도 버가의 교회나 교인들은 마가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중도하차한 사건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차로 선교했던 교회를 믿음 위에 다시 든든히 세우려는 계획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그곳 신자들로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바울 일행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점을 염려한 것입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사촌인 마가를 두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헤어지고 마가를 데리고 처음 마가를 수종으로 택했던 구브로로 돌아갔습니다. 구브로는 마가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바울은 마가와 동행해선 구브로와 버가 쪽으로는 갈 수 없다고 고집하면서 실라를 택해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던 것입니다.
바울이 마가를 용서할 수는 없었는가?
바울이 겨우 한 번 잘못한 마가를 용서해주지 못하고 바나바와 헤어질 정도라면 너무한 것 아니냐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울에게만은 해당되는 견책이 아닙니다. 바울로선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짓는 기준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엡3:8,9a)
바로 오로지 십자가 복음을 증진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불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사망과 생명의 냄새를 피우는 데에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과 사건을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의 기준으로만 판단했습니다. 마가도 전도 여행에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또 당시 선교 여행에 마가 같은 사도들의 수종이 담당했던 기능을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여행 일정과 재정 등의 실제적 일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입니다. 둘째는 여행일지나 전파된 말씀을 기록하는 서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눅1:2참조) 둘 다 복음 전파하는 것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아주 강한 책임감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마가를 자격 미달로 본 것입니다. 개인적 감정, 편견, 선입관을 가졌거나 자신의 기질을 다스리지 못해서 마가를 배척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자신의 사촌이기 이전에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이지 않느냐고 용서해 주자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바울로선 하나님의 일을 함에 그런 정도의 정신 상태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둘 다 분명히 선한 동기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가를 안 받아들인 것으로 비난 받아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바나바도 그런 바울을 용납하고서 자기 의견을 양보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나아가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느 쪽이 더 선한 동기에 가까웠는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목적 지향적이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지녔고, 자신이 모든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담즙질 성향에 바울이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서신서. 특별히 로마서를 볼 때에 철저히 세밀하게 분석하는 우울질의 기질도 다분한 것 같습니다. 한 가지 기질로 사람을 절대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나바와의 논쟁에서 끝까지 양보하지 않은 일에 분명 자신의 담즙질 기질도 일부 작용했겠지만,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우선주의가 가장 큰 동인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울이 논쟁 당시나 그 후에 자기의 주장과 그 결과로 이뤄진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졌으리라는 판단은 섣부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사건 당시나 직후에는 그로선 정당한 판단으로 행동했다고 자부심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마가와 다시 화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확실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속담처럼 말입니다.(골4:10, 몬1:24, 딤후4:11 참조) 물론 성경에는 그 동기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마가가 복음서를 쓸 만큼 이전과 달리 영적으로 완전히 성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와 기질
우리도 적성, 성격 테스트 등을 통해(최근에 여러 방식으로 고안되어 있음) 자신의 기질을 알아서 평소 성격이나 정신 상태를 조절하는 데에 참조할 필요는 있습니다. 심지어 한방에서 말하는 사상체질도 연구하여 육신의 건강을 증진하는 한 방편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기질과 체질을 잘 다스리지 못해 죄에 빠지거나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평소에도 조심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습니다.
그럼에도 누차 강조하지만 기질론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편으로 참고만 해야지 그에 (주로) 의존해서 사람을 판단하거나, 특별히 설교에서 설명을 위한 참고 자료라면 몰라도 중심주제로 인용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 있는 기질과 밖에 있는 기질 둘로 나눠서 판단해야 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신자가 된 후에도 생각보다 심히 복잡, 치사, 음흉, 위선, 가식, 교만, 거짓, 악함, 더러움으로 차있습니다. 단순히 넷으로 나눈 기질로는 결코 충분한 분석과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신자에겐 여전히 부패했던 영혼의 잔재가 생생하고도 끈질기게 남아 있기에 평생을 두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며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멀리 해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의 존재론적 본질은 불신자 시절과 크게 변함없지만 그래도 불신자는 갖지도 알지도 못하는 신자만의 특권이 하나 있습니다. 선한 소원을 심어주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시는 이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각까지 감찰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범사가 주님 손에 달렸기에 신자는 무엇에든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되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겸비하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을 하나님이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자녀삼아 주셨다는 이미 확정된 사실에만 두어야 합니다. 그 사랑에서 끊을 것이라곤 이 세상에는 단 하나도, 당연히 나의 기질과 성격과 건강도 포함해, 없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주님 은혜로 못 바꿀 기질과 성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뿐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사건의 교훈으로 익히 배워왔다시피, 설령 무엇이 되었든 신자 쪽 원인으로 큰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기질과 상관없이도, 비록 평소에 참조 적용할지라도,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그분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바울이나 바나바는 기질 때문에 싸워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둘 다 선한 동기로 다퉜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적 시각으로는 분명히 그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선 당신의 나라를 더 확장시키는 방편으로 사용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적 시각으로는, 제 판단에는, 인간의 기질은 세 가지로 나눠져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 안과 예수 밖의 두 기질 중에서, 예수 안에 있는 자를 그분과의 관계가 바로 서있는지 여부로 다시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첫째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과 반대편으로 서있는 기질(불신자), 둘째 그 방향이 하나님 쪽으로 돌려졌지만 아직도 완전한 예수 중심이 되어있지 않는 기질(이 사건 당시의 마가), 셋째 그 방향도 하나님 쪽이고 온전히 예수 중심으로만 이미 바뀐 기질(다마섹 회심 사건 이후의 바울)이 그것입니다.
10/24/2010
저는 그런 상황에서 오늘 국이 맛있죠? 하면서 국이던 건더기건 한국자 얼른 퍼주거든요.
더 받으러 오는 사람이 극소수이기 때문에 국이 모자랄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집사님 기질은 저와 달랐던 모양입니다. 기질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은연중에 화내고 꼭 저러고 싶을까? 하는게 아직 저의 모습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