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도 정죄함을 받는가?
[질문]
많은 목사님들께서 설교하실 때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사람들도 죽고 나서 우리의 죄 하나하나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작년에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부끄러운 행동들을 했던 적이 있는 데요. 시간을 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스러운 행동들이었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했고 지금은 그런 부끄러운 행동들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천국에서 범죄했던 모습들이 모두 드러날까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는데, 또 어떤 면에는 목사님들께서도 나름 근거말씀을 들어 설교하시는데, 성도들이 구원받고 천국 가서 자기의 지었던 죄에 대하여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십자가 복음의 성격과 천국이 어떤 곳인 줄 정확하게 알면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러한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복음의 본질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구원해주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선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죄를 사함 받는 길은 인간 쪽에선 아예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에 기인한 은혜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영적 상태와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택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이 구원입니다.
또 죄와 무관하게 그것도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구원의 선물을 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제부터 하나님 당신께서 천국자녀로 변화 성숙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맡겨서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확장시킬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구원에는 그래서 항상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죄에서 구출되는 것과 그 후에 선으로 승리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죄의 문제에만 매달립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사실은 동과 서는 절대 만날 수 없음, 던져 버린 까닭은 단지 형벌만 면하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신의 성품에 참예시켜 하늘의 보화를 이 땅에 펼치라고 죄악 된 세상에서 따로 구별하여 불러낸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구원을 주신 후에는 신자의 죄는 더 이상 기억치 않으시고 얼마나 충성하는지만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켤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롬8:1,28,10)
구원은 인간을 묶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을 벗긴 후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주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도무지 없었으나 이제는 의를 인하여 그 영이 살아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요컨대 신자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것이 단순히 이미 선물로 주신 구원을 취소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지옥 형벌만 면해준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당신과 세세토록 왕 노릇하기에 적합하도록 이 땅에서부터 훈련 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고귀한 은혜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든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죄와 사단과 사망에 대해서 넉넉히 승리하라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구원 후에 지은 죄는 단순히 자백 통회만 하면 미쁘시게 다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 많은 이 땅에서도 다시는 정죄하지 않는데 천국에 가서 또 정죄할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정죄란 반드시 징계나 심판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심판은 당연히 없지만 징계도 훈련이 목적인데 천국에선 구원이 완성되었기에 연단이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천국의 특성
다시 말하지만 천국은 신자가 영화롭게 변하여 구원이 완성되는 곳입니다. 칭의가 구원의 형벌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이고, 성화는 죄의 권세를 이겨내려는 진행형 전투라면, 영화는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완전하게 덧입는 것입니다. 죄는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죄가 여파를 미치는 일은 털끝만큼도 생기지 않는(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마지막 때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이지만, 그때까지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며 신자의 영이 가있을 천국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 치라도 악하고 부정적인 것이 있다면 아예 천국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계대결혼 제도를 구실 삼아 부활에 대한 논쟁을 예수님께 걸어왔습니다. 일곱 형제들이 차례로 다 죽는 바람에 기업을 잇기 위해 형수가 시동생들의 아내가 되었는데 부활 때에 어떤 이의 아내가 되는지 물었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마22:30)가 주님의 답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규정, 관습, 제도 등은 다 소용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다부일처(多夫一妻) 같은 형제 사이를 파괴하는 모순되고 부도덕한 관계는 아예 성립조차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죄는 물론 죄와 관련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천국에서도 정죄하여 벌을 준다면, 벌은 안 주더라도 정죄감이 생기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끄러움, 두려움 같은 개인적 감정은 물론 시기, 질투, 분노 같은 상호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악한 생각들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만약 다른 이들 모르게 하나님과 일대일로만 정죄를 받는다 해도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생길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아예 그분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꼭꼭 숨기 바쁠 것입니다. 그분과의 동역은커녕 그분을 향한 찬양과 경배마저 온전하게 되겠습니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7-10)
천국이 타락한 에덴동산에서의 모습을 되풀이 하는 곳이 될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구원이 바로 그 원죄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이지 않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심히 좋았던 타락전의 그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곳입니다. “아담과 아내 그 두 사람이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 육신적으로 벌거벗는다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어떤 부정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완벽하게 선한 것만 있는 곳입니다. 나아가 타락 전 인간 상태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영화롭게 되는 곳이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구원이란?
한 마디로 복음은 영원토록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 천국은 죄와는 전혀 무관한 곳입니다. 목사님들이 가끔 죽은 후에도 정죄 받는다는 뉘앙스로 설교하며 근거로 삼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3:12-15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래도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전체 문맥상 이 말씀은 일반 성도보다 전문 사역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당시 고린도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파당이 생긴 것을 견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경고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가 복음을 전도할 소명을 받았기에 광의로 모든 성도에게 적용해도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일차로 주님 재림 시에 관한 말씀이지만 천국에 가있는 성도들 모두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공력이 나타나 터 위에 세운 것을 다 태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상급을 주려는 것입니다. 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주려면 죄를 따져야 하지만, 상급을 주려면 주님을 위해 일한 것을 계산해야 합니다. 천국에선 신자를 향한 또 다른 벌이, 단순히 부끄러움만 느껴도 벌은 벌임, 개입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또 아무리 터 위에 세운 것이 다 타서 없어져도 그 남아 있는 터가 무엇입니까?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절) 먼저 사역자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즉, 오직 순전한 십자가 복음 위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혹시라도 인간적 의나 욕심으로 사역하는 잘못을 범하면 불에 다 타서 없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구원은 얻되”라고 선언합니다. 터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해를 받으리니”라고 해서 다시 벌을 받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터 위에 세운 것들이 사역자 스스로는 주님을 위해서 잘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주님은 오직 순수한 동기로 순종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제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급이 줄어드는 손해만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상급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불 가운데서 구원 얻는 것 같으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질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상급이 주어질 구체적 상황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항상 성도 한 사람과 일대일 인격적 대면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보는 데서 등수를 매겨 포상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성도들 간에 수치, 자랑, 시기, 질투 등을 유발하는 차별적인 상급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일대일로든 공개적이든, 상급을 차등 있게 주신다 해도 천국성도들의 마음에는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지상에서 지은 죄도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령한 방식으로 우리 내면이 예수님의 심장처럼 바뀌어져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어떤 일이 있어도 성도 간에 서로 진심으로 격려,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미 확보된 면류관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 사랑을 잃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는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터 위에만 서있다면 어떤 큰 업적을 쌓지 않아도 면류관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아니 어떤 핍박에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공력이 나타나 불로 태워도 남아 있을 정금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신자의 공력이자 면류관을 주시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이 땅에서 사역할 자에게 주는 경고 내지 권면입니다. 또 천국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는 원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역자는 인간적 의에 사로잡히지 말고 또 자기를 앞세우려는 죄의 본성에 지지 말고 복음을 순수하게 지키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선 오직 예수님만 머리로 삼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이 재림하실 때에도 불에 타지 않을 당신의 금은보석 열매를 당신께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가 정작 염려할 것은 천국에서 다시 정죄 받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 반대로 정죄가 없으니 마음 놓고 살아서도 안 됩니다. 바울처럼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주님과 한 걸음씩 동행만 하면 됩니다. 그분의 터 위에 그분의 열매를 맺히게 하는 것뿐입니다. 천국의 상급을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아니 면류관은 이미 확보되어 있기에 별달리 상급을 소망하지 않고 주님께 순종만 하면 됩니다. 이 땅에서 그분과 동행하고 있으면 그것 이상의 상급이 없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령한 기쁨과 위로와 능력이 넘치게 됩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 상급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보지 못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체험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한다면 바로 그것이 천국과 같다는 뜻입니다.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대로 말입니다.
또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비록 때로는 죄로 쓰러지고 넘어져도 주님을 따르겠다는 순수한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또 잘못을 깨닫는 대로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당신과 원수 된 상태에서도 전혀 죄를 묻지 않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어떻게 되었든 순수하게 주님을 따르려 평생을 노력한, 비록 그 열매는 적어도, 당신의 자녀를 다시 정죄하시겠습니까? 너무나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십자가상의 강도가 의의 열매는커녕 회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주님과 함께 낙원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재판받겠습니까?
천국에선 부정적인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계4:10) 여기서 이십사 장로가 천사인지 성도인지 해석상의 난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모든 성도는 천국에서 면류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받은 면류관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고 합니다. 원어의 의미는 진짜로 “던지는”(casting) 것이 아니고 “가만히 내려놓는”(lay down) 것입니다. 면류관을 받아도 도무지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벗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 어린 양을 향해서 거룩, 거룩, 거룩 찬양만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천국에 또 다시 정죄와 그에 따른 벌이 있다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지 않습니까? 또 이런 놀라운 복락이 확보된 우리로선 이 땅에서부터 호흡이 있는 동안 찬양과 감사와 경배만 그분께 올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9/21/2010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으시겠다 하셨는데, 사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조차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거운 물체를 만드실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설령 하나님 쪽에서 우리의 죄과에 대한 기억을 지우실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과와 나쁜 기억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죄책감과 미움과 시기와 원망 같은 나쁜 감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우리를 괴롭힐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기억을 못하는 쪽은 우리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기억들을--감정까지 포함하여--다 지워 버리시고 오직 좋은 기억만 남겨 놓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깨선 물론 우리의 죄를 다 기억하시지만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다 사하여 주셨기에 더 이상 거론하시지 않을 것이고요.
사람들에 따라 천국에서의 그 상태를 앞당겨 경험하며 살기도 합니다. 상대가 내게 잘못한 것은 다 잊어 버리고 잘한 것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술 좋은 "천생연분" 부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지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겁니다. 상대가 내게 잘한 것은 다 잊고 못한 것만 기억하는 사람들이요. 소위 "평생웬수"로 살아 가는 부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옥을 앞당겨 경험하며 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고 보니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 선한 것이,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고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 악한 것이, 나쁜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