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요?(2)

조회 수 869 추천 수 33 2011.01.21 20:00:55
3. 구약 다윗의 기도는 오늘날 성도들의 기도와 별로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 다윗은 아버지 하나님께 다 구한 것 같은데 바울의 기도에 비하면 세속적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


많은 신자들이 크게 오해하는 측면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신자가 현실적으로 풍요롭고 형통하는 것은 아주 싫어하고, 오직 영적으로 경건하고 의로워져서 이웃과 사회를 위해 썩어 없어지는 밀알만 되라고 강요 내지 명령하는 분인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관점에서 현실의 형통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혹은 저급한 신앙처럼 간주합니다. 그렇다고 그 반동으로 현실적 축복을 얼마든지 마음 놓고 구해도 된다든지, 혹은 하나님은 현실적 영적 축복을 다 주시길 원하신다는 식의 해석도 틀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당면 과제를 외부의 먹고 사는 일과 내면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추구하는 일, 둘로 나누어서 신앙도 그에 맞추어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플라톤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둔 철학이나 종교가 감당할 영역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영혼육이 하나가 된 한 인간의 전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느냐의 문제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목표, 가치, 의미는 물론 그 방식까지 주님이 살았던 것과 같아지고 또 평생을 두고 그렇게 걸어가는 싸움입니다.

그러면 정신적 영적 충만함은 당연히 따라옵니다. 또 현실적 풍요나 궁핍도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보조 수단일 뿐이지 결코 목적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으로 쟁취 내지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추구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가라는 곳으로 그분의 방식대로 가다보면 자연히 드러나는, 걸어가는 동안에는 궁핍과 풍요 둘 중 어느 쪽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결과일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일에 장애가 된다면, 그것이 진짜로 물질적 궁핍이나 현실적 환난이라면 당연히 제거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또 그 반대로 물질이 진짜로 더 많아야 예수님의 빛을 더 드러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수천만 불이라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그분의 빛과 향기는 물질이나 고난과 무관하고 오히려 신자가 궁핍하고 연약할 때에 더 잘 드러나긴 하지만 말입니다.  

말하자면 신약 성도도 얼마든지 현실적 궁핍과 환난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은 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개별적인 여건, 사건, 문제, 환난, 상처, 질병, 궁핍, 부족 등의 회복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 같아 보이는 다윗의 기도도 자세히 살피면 마찬가지로 특정한 사건을 두고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없다 뿐이지 바울도 그런 기도를 실제로는 수도 없이 많이 했을 것입니다. 로마로 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겠습니까? 장막 만드는 일로 선교 비용을 충당했기에 텐트가 잘 팔리도록,  때로는 후원 교회들에서 보내주는 헌금이 부족하지 않도록 기도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기도는 이미 구약의 기록만으로 충분했기에 구태여 신약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바울이 저작한 신약성경은 전부 교회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에 자신의개인적 기도를 기록할 이유도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편지를 읽을 성도들의 개별적 필요를 바울이 알고 있는 한에는 그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해주었을 것이지만  그 서신에 일일이 담을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는 모든 서신의 서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고 문안했습니다. 바로 자신에게 베푸신 것과 동일한 주님의 은혜를 받아 평강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이라 구원의 은혜는 이미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은혜를 본 주제와 연결하면 어떤 것을 뜻할까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秘訣)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자신의 현실적 형편이 궁핍하든 부요하든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는 주님의 권능만 붙들고 있으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더라는 그런 은혜입니다. 현실의 형통은 신앙에서 수단과 결과일 뿐, 목표는 예수의 증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선 다윗의 기도도 사실은 동일했습니다. 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편 23편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님이 함께 해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단순히 현실적 형통을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원수의 목전(目前)에서 주께서 상을 베푸셨던 상은 상(償 -reward)이 아니라 상(床-table)입니다. 원수가 눈앞에 있을 정도로 군급한 상황에서도 주님이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주셨다는 뜻도 있지만, “머리에 기름 바름”은 주로 성령 충만을 뜻하므로 그분과의 관계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위험이 닥쳐도 여호와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의 기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적으로, 그것도 마치 눈으로 보듯이 생생하고도 세밀하게 예언한 시편 22편을 필두로 복음의 진리를 예시해 놓은 내용이 꽤 많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지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영적 실체를 정확히 깨달아서 여호와의 긍휼이 아니고는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실제로 고백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세속적인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의 주제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너무나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개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25:7,11) -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길 간구하면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해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악이 중대해서 자신의 공로로는 도무지 사함 받을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한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려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6) - 모든 죄가 주께 대한 죄로서 주님만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했다는 것이 그 죄의 근원을 모친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원죄 하에 태어난 하나님과 멀어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주께만 범죄했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8-14) -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의 복음 그 자체입니다. 자기 죄를 따라 벌을 주지 않고, 오직 당신의 크신 인자로 죄를 멀리 옮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체질이 진토이므로 즉, 우리 스스로는 그 죄를 도무지 지울 수 없고 죄의 본성을 타고나 평생을 죄 가운데 지내는 존재이므로 당신의 긍휼로 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의 관계를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는 설명 외는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자동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질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바라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이 완성된 뒤의 인물입니다. 그것도 복음의 진리를 풀어서 설명할 자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 받은 후에 그분의 권능과 은총 속에서 제자로 살아가는 길에 관해 변증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자연히 그의 기도는 영적 문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고 또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경에는 그런 기도만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류 구속 계획을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구약 시대 인물들은 신약시대 신자처럼 예수라는 인물과 그가 하신 사역을 통해서 그 계획을 명료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같은 경우에 일상 겪는 일들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그분의 긍휼하신 구원에 관해 점차 깨달아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개별 사건을 두고 현실적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로 복음을 간접적으로, 어렴풋이, 미리 맛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그런 기도를 성경에 기록케 했던 것입니다.  

만약 성경에 구약의 그런 점진적인 예시와 예로 든 다윗의 시편들이 없었다면 즉, 바울의 교리서신만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4 복음서가 있긴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굉장히 난처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어떤 신령한 신학자라도 정확히 풀어낼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구약에서 인간의 창조와 타락에 대해 하나님과 연결 지은 사전 설명이 신약의 세배나 될 만큼 충분히 있었기에 신약 교리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인간적 사색, 탐구, 직관, 명상, 철학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의 더럽고 어리석은 심령을 씻으신 후에 영적 통찰력을 부어주셔야만 말입니다.  

구약성도는 현실적 기도만, 신약성도는 영적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바울도 개별 사건과 정황에서 현실적 간구를 수도 없이 드렸습니다. 또 다윗도 비록 예수 전이긴 해도 현실 사건을 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조금씩 깨달아나갔고 자신이 분명하게 의식은 못했지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예수를 예언하고 십자가 복음을 예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후인지라 자신의 구원에 감사하면서 복음이 이 땅에서 실제로 완성되는 일을 위해서 주님께 헌신하는 기도부터 먼저 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 온전히 붙들린 자로서 인생 전체를 걸고서 자신의 일관된 목표와 소명의 달성을 위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신약 성도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할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한 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듯이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오늘날 신자도 현실적 문제를 무엇이든 구해도 됩니다. 단 그리스도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종교적 도덕적 의나 업적을 세우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모든 현실 문제도 주님께 받은 일생의 소명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만 해결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주님의 부르신 뜻에 맞게끔 변화되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끔 자기의 모든 것이 그분께 실제로 온전히 바쳐져야만 합니다.


4. 창조주 하나님, 노아의 방주, 홍해의 기적은 믿어지는데 예수님의 대속, 부활 등 더 큰 기적에 대해서는 감사의 마음과,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아직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 질문의 뜻은 창조주 하나님은 믿어지는데 구속주 예수님은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전자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후자가 함께 따라야만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후자가 우선이자, 핵심이자, 본질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전자는 세상만사를 움직이는 주관자가 인간이 아니라 이 땅을 만드신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후자는 자신의 더러움을 깨끗케 씻어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켜서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 일군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 즉, 자신의 실체를 움직이는 주관자가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유감스럽고도 불행한 사실은 작금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전자에 관한 믿음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인생이 자기 계획대로 잘 되지 않고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기에 그분에게 의지하겠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올바른 믿음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 존재보다는 자신의 외부에 형성되는 여건의 풍요와 골치 아픈 사건들의 해결에만 즉, 현실적 형통에만 모든 관심이 쏠린 것입니다. 인생이 자기 계획대로 잘 안 풀린다는 의미가 사실상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필연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존하되 아무래도 자기 뜻대로, 더 빨리, 더 풍성하게, 더 편안하게 이뤄지기 위해선 그분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인식이 생깁니다. 또 그래서 그분의 마음을 어떻게 하든 사로잡기 위해서 선행, 봉사, 헌금, 심지어 예배나 기도도 그런 목적으로 행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의탁하되 자기가 그분께 바치는 것에 비례해서 자기 소원하는 바를 받아내자는 믿음입니다.

이는 구태여 기독교 신앙을 안 가져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2) 이 땅의 물질적 풍요는 불신자들의 삶의 목표입니다. 또 그 목표를 이루려고 그들도 자기 신념에 의지하거나, 우상숭배 혹은 관념적 종교든 간에 나름대로 기도합니다.

물론 그런 기복적으로 주고받는 믿음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서 그 품성이 선해지며 거룩하게 살려는 순수한 신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창조주만 믿는 구약 식의 도덕적 회개와, 예수를 믿는 신약 식의 영적인 회개 둘로 나뉘며 그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세상에 있는 죄가 인간 밖에서부터 인간을 충동질 하여 인간으로 나쁜 행동을 함으로써 인간은 죄인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나쁜 행동들을 고치면, 다른 말로 율법대로 온전히 따르면 구원 받습니다.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구원관입니다.

다른 말로 스스로의 도덕적 노력만으로 하나님의 합격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교만입니다. 율법을 가장 잘 준수해 세상에서 최고 의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저주까지 받으며 정죄당한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후자는 자기 안에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죄의 본성이 있기에 나면서부터 죄인이고 그 본성을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앨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새로운 영을 심어주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져야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철두철미한 죄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힘입는 성령의 중생(重生)하시는 은혜만 바라는 믿음입니다. 즉 인간이 구원을 쟁취하려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대속하려 내려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율법으로는 죄의 저주만 더할 뿐이고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몽학선생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믿는 신앙으로는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그 기본적 신앙 위에 십자가가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믿음은 절대자 하나님과 절대적 인격적 관계를 맺어서 그 관계 안에서 평생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그런 관계를 맺는 첫걸음이 바로 성령의 거듭남인데 이는 자신의 영적 실체가 정말로 더럽고 추한 버러지 같아서 죽어 마땅하다는 고백이 저절로 새어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롭게 해주시는 십자가 공로 말고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진짜 믿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고백은 실제로 예수님과의 인격적 대면이 이뤄져야만 가능해집니다.

물론 온전한 중생을 거친 신자 가운데도 말씀과 기도에 등한하거나, 현실의 문제와 고난에 잠시 관심이 팔리는 바람에 하나님과의 온전한 영적 관계가 일시적으로 굽어질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첫 사랑의 십자가 구원 감격을 잠시 혹은 오래 동안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열고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 반드시 신자 안에 내주하신 성령이 그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믿은 후에도 영적 회개를 거쳐야만 받을 수 있는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신자라도 앞선 질문의 답변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현실의 힘든 문제에 대해 울부짖으며 기도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합니다. 단 하나님과 거래하는 심정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오직 예수만 모시고서 그분 뜻대로 살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본 성경문답에서 가장 많이 다뤘습니다. # 209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 178 "예수 십자가와 인간의 관계는?", # 125 "인격적 만남이란 무슨 뜻인가요?", # 48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 # 38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는가?" 등의 글들도 함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질문자께서 이런 중생의 경험이 없다면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절실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성경공부를 해보시길 권합니다. 물론 그 전에, 또 성경 공부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을 사복음서는 물론 구약의 창세기, 출애굽기와 병행하여서 공부하십시오. 하나님은 한 개인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점진적으로 베푸십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로 오직 예수라는 고백이 나오게끔 하실 것입니다.  

1/21/2011

- to be continued -

김순희

2011.01.22 12:29:34
*.165.73.38

저의 경우 죽음보다 고통스런 현실로 인해 힘을 다해 기도하다가 주님 앞에서 오히려 나의 경악할
죄악을 보았습니다. 무서워서 너무나 무서워서 떨고 있을 때 그 보혈, 마치 그냥 스쳐 지나갈까 봐
나의 죄가 너무도 커다랗고 무거워서 그냥 지나칠까 봐 정말 간절히 간절히 보혈을 의지할 때 나에
게 적용되는 그 보혈의 그 포근함, 그 고마움을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첫사랑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죄사함의 기쁨과 감격은 마치 휴거한 자처럼 기뻐 어쩔 줄을 모르
겠으나 현실의 고난을 어떻게 해석해얄지 참 어려운 과제는 여전 했었습니다. 그 때 성령님의 손에
이끌리어 이 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처음 읽은 글이 팔복강화였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나의 현실의
고난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온전히 가르치는 참 목자를 만남이 너무도 큰 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못 가르쳐진 성경이
얼마나 신자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지요.

이 곳의 글들의 지고의 복,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삶에 적용하도록
배우고 있기에 저는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

왕개미

2011.01.22 12:35:16
*.128.70.7

가끔 듣는 남가주서머나 교회 김성수 목사님 설교가 이제 거부감이 사라질것 같습니다.
성경의 맥을 잡자에 실린 글중에서 오늘 청지기에 사명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목사님,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3.05.11 22:31:33
*.109.85.156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셨으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저의 죄대로 처치하셨다면 산산이 부숴져 먼지되어 버렸을 터인데, 예수님이 친히 오시어 대신 죽어주시고 저의 죄악을 대신 갚아 주시었기에 그 은혜를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을런지요. 그럼에도 자주 도덕적 행위에, 또 자주 종교적 열심에, 신앙의 정도에 등등으로 시선이 머물고 있는 저임을 고백합니다.

죄로 완전히 물들어 버린 자에게 썩지 않는 생명 주시려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짐짓 외면하곤 자신의 공로 혹은 도덕적, 영적 죄책감에 시선 머물며 상벌을 헤아려 보는 이 죄의본성들, 그럼에도 사랑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긍휼하신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축복을 또 베푸시고 또 흩뿌려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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