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조회 수 2972 추천 수 43 2011.03.21 03:04:20
예수님의 비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질문]


예수님 말씀에 비유가 많고 풍유도 있다고 하니까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렵습니다. 제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뜻을 잘 모른 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저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 의미를 모르고 전하면 저도 거짓교사가 되는 건가요? 비유이든 은유이든 방법일 뿐이고 분명히 전달하고 싶은 주님의 뜻이 있으셨을 텐데 여러 목사님들이 설교를 접하면 담임목사님을 통해 혹은 이 홈페이지를 통해 제가 들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설명이 있을 때도 있어서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아니지만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서도, 예수님께 믿음으로 음식을 드린 소년의 마음을, 기적 자체에 대해, 사람들을 많이 먹이고도 남았다는 측면을 각기 다르게 강조하면서 설교하십니다. 비유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상황에 대한 설교도 이렇게 내용이 다양한데 비유로 주님이 가르치고자 하는 뜻이 하나뿐인지 혹은 여러 해석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답변]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내용입니다. 성경해석에 대한, 특별히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해석법을 잘 모르니까 당연히 생기는 의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질문자님이 지적하신 대로 목사님들의 의견이 다양한 것은 좋은데 정확한 해석법을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아 신자들의 혼돈을 더 부추기는 것 같습니다.

거짓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

먼저 답변 드릴 것은 당연히 예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을 모른 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어떤 목사나 설교자라도 100% 완벽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또 했다고 자신해선 안 됩니다. 설령 정확하게 해석했어도 전달 과정에서 표현이 잘못 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도 얼마든지 생깁니다.

그럼에도 설교자는 말씀을 풀어서 가르칠 소명을 받았기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해석한대로 전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파고들며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구속사적 진리 위에 자신의 분명한 신학이 정립되어서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그대로 선포하면 됩니다.

나머지 표현 부족이나, 오해될 여지 등은 성령이 역사하여 바로 잡아 주십니다. 또 그 설교를 듣고 은혜 받을 자는 은혜 받게 하십니다. 인간의 실수를 하나님이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충분이 임하면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반 신자도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할 때에는 남에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비록 부족하고 불완전한 해석이 포함된다 하더라도 본인이 그런 줄 모를 때에 한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로 바로 잡아주시거나, 그 말을 듣는 상대는 무엇이 잘못인지 더 모르니까, 자신의 믿음의 분량만큼의 은혜는 전해받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자신부터 긴가민가하면서 전하거나 가르쳐서는 결코 안 됩니다. 수학선생이  여러 공식을 갖다 대면서 적당히 문제를 푸는 시늉만 하다가 정답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끝내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로 헷갈리게만 만드니 차라리 안 가르치느니 못합니다. 그래도 피치 못해 성경을 풀어서 전해야 할 경우는 반드시 "내 의견으로는 이렇고 저렇다고 생각된다."는 전제를 붙여야만 합니다. 구역성경공부나 큐티 나눔 등에서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남에게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선 평신도라도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대해선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도 새로운 신자가 오면 기본적 교리나 신학부터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도, 전도, 봉사, 헌금, 교제, 교회론 등등 신앙을 실천하는 면에 집중해서 가르칩니다. 제자 훈련도 초반에 교리를 조금 다루긴 하지만 복음에 관해 겉핥기식으로 대충 지나가고 나머지는 거의 교회 일군으로 세우는 훈련에 주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신자더러 성경 전체에 일관된 진리에 관한 맥을 잡도록 해주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 완성으로 구분하여서 각기 세부적인 핵심 교리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도록 성경해석에 관한 원칙들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 각권에 대한 개론도 가르쳐야 합니다.  

중세까지 가톨릭 사제들이 성경책부터 독점하고 신자들은 못 보게 했습니다. 지금 개신교도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습니다. 일반신자의 영적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는데 이젠 성경을 읽고 해석할 줄 아는 방식을 목회자가 독점하고 있는 듯합니다. 만인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선 개별 교회 내에서 피부에 와 닿는 심도 깊은 신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 그렇게 교회 내에서 배운 자들 중에 그 교회의 목회자가 선출되도록 해야 합니다. 일부 미국 교회들이 그러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잘 모르고 가르친 것은 거짓 교사가 아닙니다. 거짓 교사는 진리를 알고도 거짓으로 바꿔서 가르치거나, 아예 이단사설을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교회 안에 핵심 교리를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교단마다 조금 해석이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초교파가 아닌 이상, 자기 교단에서 진리라고 믿는 바를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신자들도 신앙을 주일 설교에만 의존하면, 강해설교를 하는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맥이 잡히지 않고 혼동만 생길 수 있습니다. 또 그저 뜨겁게만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빤한 이야기 말고는 교회에서 배울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로 드신 오병이어의 설교는 셋 다 옳습니다. 한 구절을 두고 핵심 교리에 위배되지 않고 또 본문이 말하는 바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에는 다각도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침 일본 쓰나미를 두고 하나님의 징계, 경고, 사랑의 의미가 다 있으므로 각각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할 수 있는 것 같이 말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신자들에게 이런 혼돈을 주지 않고 정확히 판단토록 기독교 핵심 교리를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 은유, 풍유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법에 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 #29 "등불 기름을 나눠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을까요?"의 글 서론에서 이미 한번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서론 부분만 아래에 인용했으므로 다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에서 비유, 풍유, 은유 등의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성경해석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정확한 구분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비유(parable)와 문학적 기법인 비유(比喩-comparison)와는 다릅니다. 또 비유는 풍유(諷諭-allegory)나 우화(寓話 fable)와도 다릅니다.

먼저 문학적 기법 상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이는 어떤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 등을 더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그것과 비슷한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방식은 직유, 은유, 풍유, 대유 등이 있습니다.

직유(直喩, simile)는 “태양 같이 넓은 마음”에서 보듯이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것인 반면에 은유(隱喩, metaphor)는 “당신의 마음은 태양”이라고 간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마음이 태양처럼 넓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 마음이 태양처럼 넓은 것인지, 밝은 것인지, 뜨거운 것인지 등등 그 자체 표현만으로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앞뒤 문맥이나 전체 스토리에 그 정확한 뜻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풍유(諷諭)는 글자 그대로 원래 설명코자 하는 개념을 속담이나 격언처럼 풍자적으로 비유하여 은연중에 그 숨은 뜻을 짐작하게 하는 기법입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는 것이 풍유로서 남이 잘 하니까 실력도 없으면서 덩달아 따라 한다는 의미입니다.  

대유(代喩)는 사물의 어느 한 특징만을 말함으로써 전체를 대신하는 비유법으로 제유와 환유로 나뉩니다. 제유(提喩)는 사물의 한 부분으로 그 전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할 때에 그 빵은 음식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빵이 없으면 라면 먹고 살면 된다고 하면 틀린 해석이 됩니다. 환유(換喩)는 어떤 사물의 특징을 말함으로써 연상 작용에 의해 그 사물 전체를 인식하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금테가 짚신을 깔본다.”고 하면 금테는 신사를, 짚신은 시골 촌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parable)은 크게 보아 문학적으로 비유기법에 해당하긴 합니다만, 상기의 경우와는 조금 다릅니다. 살펴본 대로 직유, 은유, 풍유, 대유(제유와 환유) 등은 한 단어나 문장 안에서 간단한 개념이나 대상을 빗대어 표현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 내용이나 초점을 충분히 드러나면서 더 명료하게 이해될만한 적합한 이야기로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비유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예화(illustration)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단 그 예화는 구태여 풀어서 설명해주지 않아도 당시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이 익히 알만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상생활의 관습, 문화, 제도 등에 비춘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화(寓話 fable)는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꾸며낸 이야기에 비추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서 두루미와 여우가 병과 접시로 서로 음식 대접하는 이야기엔, 상대의 입장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교훈은 들어있지만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반면에 복음서의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항상 일어나는 일이거나 최소한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일이 비유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 예로 들어서 비유의 특성과 해석법을 간단히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3)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흡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3-7)

먼저 '비유'(parable)는 4-6절까지의 양과 목자에 '비유'(compare)한 '이야기'입니다. 이 진술에서 앞의 비유는 전체 이야기이며, 후의 비유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 그 자체로도 비유법의 하나에 해당하긴 합니다. 이런 혼란을 막으려면 간단히 예화라고 이해하는 것이, 물론 단순 예화가 아니라 실증적 예화이긴 합니다만, 더 쉽습니다.  .

그리고 이 예화 안에도 비유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예수를 믿지 않고 사단에 미혹된 영혼입니다. 또는 이를 성화에 적용시켜서 잠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신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 전체로 보아선, 특별히 이어서 나오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와 잃어버린 탕자 비유와 연결하면 불신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즉 양을 불신자를, 또 목자는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은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화만으로도 대략 그 의미를 알 수 있는데도 예수님은 7절에서 뜻을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핵심 주제 한두 개만 쉽게 이해시켜서 강조하겠다는 당신의 의도를 밝힌 것입니다. 즉 잃어버린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특별히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가장 기본원리는 앞뒤 문맥과 연결되는 핵심 주제 한두 개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핵심 주제는 비유에서 가장 명료하게 나타나는 의미에 근거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 주제는 분명하고도 쉽게 알 수 있도록 드러납니다. 본 비유에선 “잃어버린 양을 목자가 찾았고 기뻐서 잔치 벌렸다”는 것이 핵심 주제이듯이 말입니다.

이어지는 드라크마나 탕자의 비유에도 동일하게 찾는 이는 여자와 아버지였습니다. 동전이나 탕자가 여자와 아비를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또 찾게 되자 기뻐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따라서 이 세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 진리는 죄인이 회개하면, 사실은 하나님이 그 회개를 주도하지만, 하나님이 아주 기뻐한다는 간단한 진리입니다.  

다른 말로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구태여 더 세부적으로 복잡하고도 광범위한 해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비유(예화)나 서술의 세부적 표현마다 영적인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볼 필요나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을 두고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예화이며, 또 그 안에 사용된 비유기법은 다양한데도 오직 풍유를 해석하는 방식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자님이 염려한 대로 한 본문을 두고 설교자마다 해석이 달라지고 심지어 성경이 말하는 바와 전혀 다른 해석도 나올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메었다고 해서 하나님은 불신자나 신자가 회개하면 직접 어깨에 메고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은혜를 주신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비유가 강조하는, 아니 설명하고자 하는 기본 내용이 아닙니다.

또 목자가 가버리면 남은 아흔아홉 마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무심하지 않느냐 의심하는 것도 일종의 그런 해석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한 마을의 양을 전부 모아서 목자들 여럿이서 함께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목자가 가도 나머지 목자들이 있어서 안전합니다. 또 그래서 찾게 되면 저녁에 마을에 돌아와서 목자들끼리 모여 기쁘게 잔치도 벌렸다고 합니다.

나아가 잃어버린 양은 한 마리이고, 남은 양은 아흔아홉 마리나 된다고 수치적으로 비유하여 해석 적용하면 이 또한 오류입니다. 마을 전체 양을 모았으니 잃지 않은 양이 당연히 엄청 많을뿐더러, 여러 목자가 돌보고 있기에 잃어봐야 기껏 한두 마리일 뿐입니다.

앞에서 양을 찾아 어깨에 메었다는 부분을 적용 강조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찾은 그 한 마리는 당연히 어깨에 메고 오지 가만 걸어가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이미 마을로 돌아간 다른 목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어깨에 메고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예화 자체에서 핵심 줄거리도 아닌 너무나 지엽적인 서술일 뿐 아니라, 전체 문맥이 의미하는 바와도 하등 상관없는 해석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자들은 항상 자기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라 주님이 강조하는 초점을 아주 쉽게 알아들었습니다. 반면에 위에 설명드린 몇 가지 예처럼 불필요한 해석이나 오해는(풍유적 해석이 불러오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당시의 역사, 문화, 관습, 제도, 기후, 지리 등을 철저히 연구하여서 이런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해석으로 가르쳐선 안 됩니다.  


************ 참고 ******************

#29 "등불 기름을 나눠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을까요?"의 글 서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당신만의 특유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비유의 특성과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그 해석법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답변한 내용이 객관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질문자께서도 스스로 점검하실 수 있고 또 추가적인 의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 비유와 수수께끼

비유란 화자(話者)가 어떤 객관적 진리를 설명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빗대어 표현하는 양식입니다. 주로 직유, 은유, 속담, 설화 같은 문학적 수식법을 동원합니다.

비유에 대비해 수수께끼는 그 이야기와 표현법이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사사기 9:1-21에는 세겜의 시민들이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삼자 이 소식을 들은 요담은 ‘숲속 나무’의 수수께끼로 그들을 꾸짖는 내용이 나옵니다. 숲속 나무들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순서대로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청하니 가시나무는 자기의 권세에 나무들이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동의했습니다. 요담은 세겜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가장 못한 사람을 왕으로 뽑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나무들은 이야기 속의 나무들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수께끼에 해당합니다.

이에 반해 비유는 예를 들어 누룩의 비유(마13:33)에서처럼 떡을 만드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떡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비유의 대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고 항상 현실에서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수수께끼는 듣는 사람의 자유로운 상상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의 범위 이상으로 해석을 확대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비유의 주제와 큰 줄기만 붙들어 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지엽적인 내용과 세밀한 표현에까지 억매여선 안 됩니다.  

2.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뜻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비유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니이까?”(마13:10)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1-15)고 대답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려고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말씀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자와 전혀 그렇지 않고 반대하는 자로 확연하게 둘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스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려고 비유 속에 비밀장치를 했거나 수수께끼 같은 난해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명대로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으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비유의 주제를 한 마디로 천국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비유의 주제가 단순히 도덕적 계명처럼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또 말씀하신 당사자의 권위도 당연히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완악한 자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대신에 마음이 순수하고 가난한 자는 구태여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석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구약성경을 꿰뚫고 있었으며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열심이었습니다. 율법을 성실히 준수했던 당시로선 가장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도덕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자기들더러 외식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며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한다는 주님의 지적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 가운데 숨어 있는 천국의 비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단 한 번도 헛되고 그른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고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차원의 도덕을 가르친 주님을 자칭 도덕군자들이 앞장서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교만한 그들로선 비유의 주제인 천국을 못 알아 듣기도 했지만 자기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예수님 당신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진리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는 자만이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이는 오늘 날의 독자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신자라면 그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천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의 비유는 지금도 여전히 비유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만 열어 놓은 것이지 심판과 구원이 종결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주님의 통치는 마지막 때까지 연기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뜻 그대로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관한 비밀이 열릴 것이지만 완악한 자에게는 감춰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기 싫어서나 소수의 사람만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원하며 또 그 동안 심판이 취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라도 예수님의 모든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3. 예수님 비유의 해석 기준

비유가 갖는 문학 기법상의 특성과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신 뜻을 종합해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가 비유를 해석하는 객관적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표현에 천국에 관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배경은 항상 메시야의 구원과 더불어 새롭게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주님 나라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말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현실에서의 지엽적인 문제에 제한시키려는 해석이나 적용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거의 모든 비유가 사전에 어떤 질문에 대답하거나 어떤 상황이 전개되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앞 뒤 문맥을 살피고 제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해석이 그런 질문과 상황에 벗어난 것이라면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잘못 파악했거나 해석이 틀린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셋째, 비유에 동원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당시의 역사, 지리, 문화, 풍습 등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알아 당시 상황을 재현한 후에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비유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보편적인 상황과 실제로 가능한 사건을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낡은 술 부대와 새 포도주의 비유에선 당시의 포도주 저장하는 법을 모르면 정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3/20/2011

김유상

2011.03.22 00:24:51
*.234.18.85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주관화하려는 포스터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에 따르는 사람들은, 글의 저나자 말의 화자의 본 의도보다 그 글을 읽는 독자 그 말을 듣는 청자의 독자적 해석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어떤 글이나 말의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누구의 해석이 옳은 해석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각자 믿기 나름이지요. 교회 안에도 이런 견해가 스며 들어 있는데도 안타깝게도 그것의 정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꼭 그렇게 해석해야 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누가 확신할 수 있단 말이야? 각자 해석하기 나름인 거지. 그들은 이렇게 주장을 펼칩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요? 곱씹어 보면, 그 말은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하나님 의중을 알 수 없기에 해석하는 자가 하나님 노릇하겠노라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모르게 하시기 위해 비밀스럽게 말씀 하신 경우조차 별도로 제자들에게 그 숨은 뜻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고자 하는 진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못 알아 듣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행의 책무를 면해 보겠다는 심산에서 입니다.

물론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알려 주시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르면 됩니다. 밝히 알려 주시지 않은 것을 알려 하다 보면 이단으로 빠질 우려가 큽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라면 무슨 수를 동원하셔서라도 반드시 우리로 알게 하실 것이니, 알려 주시지 않은 것은 겸허히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둡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겐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 사람에겐 저렇게 말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각자의 필요와 형편과 수준에 따라 달리 말씀하지 않으시겠느냐?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A는 B다라고 하시고, 저 사람에게 A는 C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만약 저 사람이 A는 B다라는 말을 알아 들을 수준이나 형편이 아니라고 판단되시면, 저 사람에게 그 대답을 유보하실 것입니다. 나중에 알려 주마, 아직은 네게 그 대답은 일러. 참고 기다려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더러는 이슬람이 믿는 알라 신과 유대/기독교가 믿는 여호와 신이 같은 신이라 믿습니다만, 위의 이유로 그 둘은 같은 신일 수가 없습니다. 설령 이슬람의 뿌리가 아브라함의 서자인 이스마엘이라는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제 생각엔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뿌리일지언정 이슬람이란 종교의 뿌리는 아닙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과 성경의 내용은 아주 상이하며, 많은 부분 그 가르침과 명령이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슬람이 믿는 신과 유대/기독교가 믿는 신은 다른 신입니다. 이슬람은 마호멧이 만난 알라라는 신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유대/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다른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본 질문으로 돌아 가서, 올바른 해석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까닭은 듣는 이로 하여금 더 쉽게 이해랄 수 있게끔 하시고자, 또는 사안에 따라 알쏭달쏭하게 하시고자였고, 후자의 경우엔 별도로 주님께서 직접 그 비유를 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의도는 확실합니다. 당신의 의도를 모두가 (혹은 선별된 소수가) 제대로 알아 듣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알아 듣고 요한은 저렇게 알아 듣고 빌립은 또 저렇게 알아 듣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A는 B다라는 말씀을 숙지한 다음 그 말씀을 좀 더 깊이 묵상하던 중에 그 속에서, A'는 B'다라는 교훈도 얻어낼 수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다른 곳에서 B는 C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라 아하, 그렇다면 A가 C일 수도 있겠다 묵상하고 연구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다 부차적이고 부가적인 것이지 그것이 본 뜻을 밀어 내어서는 안됩니다.

목사님의 충분한 설명이 주어졌음에도 사족처럼 이 글을 다는 까닭은 성경 해석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교회 내에 침투되어 있음에도 전혀 제재나 경계를 받지 않고 있는 데 대한 위기감 때문입니다. 눈 부릅떠야 합니다. 속고 있지 않은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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