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2)
아무리 마지막 심판의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우리의 알 바” 아니지만 자꾸만 알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나, 미리 알아 대비하거나, 보험 들듯 믿겠다는 식의 잘못된 의도가 없어도 그렇습니다. 궁극적인 세상의 종말이 불시에 닥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생애 중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확한 때는 몰라도 최소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마24징) 또 요한사도에게 상징으로 보여준 말세의 여러 징후들이 혹시라도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작금 되어져 가는 모든 상황들을 보면 죄악이 너무나 관영하고 온갖 자연 재앙이 빈발하며 세계 각지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종교적 갈등마저 갈수록 아주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구 온난화나 새로운 세계적 전염병이 생기는 등 한 치 앞날도 장담 못할 만큼 세태가 극히 불안정하다는 두려움이 모두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예언된 징조들 중 일부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마24:7) 일어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계8:8-11)는 구절은 마치 오늘날의 환경오염으로 인한 물 부족 사태를 예견하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종말까지 가는 일곱째 나팔 가운데 절반가량에 이미 도달한 것 같은 시급함이 감지되기도 합니다.
나아가 종말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신자를 격렬히 핍박하는 대환난이 따르며 마지막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성도는 천년 왕국의 통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미 죽은 신자와 그때까지 생존했던 신자에게 궁극적인 육체의 부활까지 임하여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신자로선 그 모두가 감도 잘 잡히지 않는 먼 장래 일 같이 여겨지지만 당장 내일에라도 임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종말의 구체적인 시점은 몰라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순서라도 알았으면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재림과 비교해서 종말적 대사건들의 전후관계가 사뭇 궁금해집니다.
천년왕국의 시기와 순서
예수님 재림과 연결해 천년왕국의 도래시기에 대해선 후(後)천년설, 전(前)천년설, 무(無)천년설 세 가지로 대별됩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학자들 간에도 각기 세분되지만 각각 천년왕국 후에 재림, 전에 재림, 따로 구별되는 천년왕국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 후천년설(post millennial view)은 신약시대의 말기에 교회의 황금시기가 천 년간 이어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는 복음이 온 땅에 편만하게 왕성해지는 엄청난 영적 부흥이 있고, 이스라엘에도 민족적인 구원이 임하는 평화의 시기가 천 년간 지속된다고 합니다. 천년왕국 말기에 짧은 배교의 시기가 있고 선과 악의 세력 간의 극심한 싸움의 시기를 거쳐서 주님이 재림한다는 것입니다. 부활한 모든 이에 대한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통해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고 불신자는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둘째 사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어그스틴, 찰스 핫지, 위필드, 스트롱, 켐벨 등이 동조한 설인데 계시록에 분명히 예언된 적그리스도와 아마겟돈 전쟁과 대환난 등을 경시한 약점이 노정됩니다. 찰스 핫지가 활동하던 19세기처럼 영적 부흥이 일어나고 현실적으로도 인류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지는 낙관주의가 주도하던 세대에 인정받았던 이론입니다.
이보다 더한 낙관주의도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은 없고 인간 이성이 끝없이 개발되어 과학과 문화와 도덕이 최고 절정에 이르면 인간에 의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일을 신자가 믿음으로 주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 스승으로 보기에 성경의 초자연적 계시는 아예 무시한 것입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이를 자유주의적 후천년설(Liberalistic post-millenial view)이라고 합니다.
전천년설은 크게 환난후재림설(post-tribulation & pre-millennial view)과 환난전재림설(pre-tribulation & pre-millennial view)의 두 가지로 나뉩니다. 병기한 영어를 보면 쉽게 구분이 됩니다. 한마디로 전자는 대환난 후에 재림이 있은 후에 천년왕국이 따르며, 후자는 대환난과 천년왕국 둘 다 지난 후에 재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환난후재림설(일명 역사적전천년설)은 신약시대 말기에 비교적 온난한 환난기인 3년반과 극심한 환난기인 3년 반을 합한 7년의 환난시대에 교회도 동참하게 됩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있은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면 성도의 육체적 부활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이 재건되어 유대인의 구원이 일어나며, 이 땅에 의와 평화가 충만해지며 사단은 천년 동안 감금됩니다. 그 후 잠시 놓여서 마지막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여 백보좌 심판을 통하여 영영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는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기워집니다. (이를 주장한 신학자로는 벵겔, 랑게, 알포드, 앤드류스, 래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환난전재림설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인데 공중영접과 휴거를 강조한 것입니다. 우선 신약시대 말기에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면 교회는 7년 환난기를 당하지 않도록 공중 들림을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공중에서 대기합니다. 그동안 지상에선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적그리스도가 패하고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회복됩니다. 그럼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지상으로 강림하여서 천년왕국을 이루다가, 마지막 때에 다시 풀린 사단은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완전한 패배를 당하고 이후 백보좌의 마지막 심판이 있게 됩니다. 그 후 불신자와 성도가 둘째 사망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뉨은 동일합니다. (불링거, 그래이, 블랙스톤, 라일리 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한 설입니다.)
전천년설에는 결정적 약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왕국을 건설하여 지상에서 천년을 다스린다는 단서가 복음서와 서신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아가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먼 미래로 연기되어집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재림하여 통치하면 이미 심판이 완성되어 끝나야 함이 마땅함에도 또 다른 백보좌 심판이 천년 후 다시 일어납니다.
그러면 또 의인의 부활은 먼저 일어나고 악인의 부활은 천년 후가 됩니다. 그것도 마지막 곡과 마곡의 전쟁이 끝난 후의 일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의 단 일회적인 재림과 심판을 말하며 심판은 그것으로 종말이 되므로 당연히 의인과 악인의 부활도 일회적으로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재림하여, 첫 번의 수난 받는 종이 아닌 심판주로 오셨기에, 지상에서 천년 왕국으로 직접 다스리면 악인은 한 명이라도 남아 있을 리가 없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마지막에 곡과 마곡의 전쟁이 다시 발발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단을 예수님이 잠시 풀어주고 그 활동을 방치해 두었다가 다시 최후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타당성이 빈약합니다. 요컨대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종말과 심판이 동시에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림도 아닌 재림에서 악의 세력이 성행한다면 그 통치는 불완전하다는 뜻이 되고 결과적으로 예수님도 부족한 주님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무천년설(A-millennialism)은 아브라함 카이퍼, 루이스 벌콥, 헤르만 바빙크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특별한 천년왕국이 지상에 따로 이뤄지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초림 이후에 재림 때까지가 실질적인 천년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보좌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지금도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거룩한 통치를 이루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의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성도를 핍박하는 환난기가 있을 것이지만 성도는 결국 그 마지막 전쟁을 승리하고 이스라엘도 회복될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을 동일하거나, 동시대의 동류의 전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부활한 모든 자에 대한 백보좌 최후 심판은 동일하게 시행됩니다. 당연히 그 전이나 중도에 성도의 휴거나 교회가 공중에서 대기하는 일은 없다고 해석합니다.
한마디로 역사의 말기에 성도가 큰 핍박과 전쟁을 거치게 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성도와 이미 죽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영원한 심판도 이뤄집니다. (참고로 저도 이 무천년설을 지지합니다.)
사단이 과연 무저갱에 떨어지는가?
앞선 답변(1)의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어느 누구도 계시록 해석의 여러 이론들을 확정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런 장래 일에 대한 경륜을 묵시적으로 표현했다는 특성상 인간에 의한 완전한 해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각기 다른 이론들의 장점을 참조하면서 학술적으로도 상호 토론하여 성경에 더욱 근접한 해석을 모색해야 할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특별히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성경적 근거는 계시록 20장에 대한 해석 때문입니다. 이 장은 천년왕국과 재림의 전후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 부분입니다. 이 20장의 해석에 대해선 영국의 강해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로이드 존스의 주장을 충분히 공감하기에 그분의 이론을 근거로 삼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3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부흥과 개혁사 2007년 발간)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계20:1-3)
먼저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문자적으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천사가 마귀를 천 년간 꼼짝 못하도록 만들었기에 지상에선 천년왕국이 가능하며 또 그 후에 잠간 놓이기에 마지막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를 결박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또 천년을 실제적 천년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그 후에는 왜 잠시 놓이는지 등등을 앞뒤 문맥과 성경의 다른 설명들과 연결해서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영적 존재인 사단을 어떤 감옥, 그것도 물리적 시공간에 제한 받는 장소에 감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쇠사슬이나 무저갱도 계시록 전체가 묵시문학임을 감안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다른 부분에선 다 상징으로 이해하다 이 구절만 문자가 의미하는 물질적 실체로 보면 해석의 일관성을 갖지 못합니다. 만약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사단을 천 년간 꼼짝도 못하게 완전 결박하였다면 지상에 천 년간 죄악이 완전히 사라진 후인데, 그것도 예수님이 재림해 통치하고 계시는데 아무리 풀려났어도 어떻게 잠시 만에 악의 크나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성경 다른 부분에서 사단을 결박했다고 표현한 구절들의 뜻도 마지막 때에 사단의 본체를 꼼짝 못하게 무력화 시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초림 때에 이미 사단을 결박했다고 합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가장 뛰어난 영적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배역하다 벌을 받아 쫓겨 나온 때부터 마지막 심판 날까지 사단과 그 부하들을 영원한 결박으로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때 이후 이 땅에서 얼마나 활개치고 있습니까? 여기서 결박은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그때까지 인간을 죄악의 노예로 부리고 있던 사단의 권세를 끊었다는 뜻입니다. 사단을 옥에 가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신자는 예수님의 권능이 함께 하고 성령님이 내주해 있기에 사단에게 더 이상 묶이지 않고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본인의 말씀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12:28,29)
예수님도 귀신을 쫓아내기만 했지 무저갱에 던져 넣었거나 멸절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불신 세상에서 활개 치도록 놓아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축귀사역을 위해선 그 수괴인 사단을 먼저 “결박해야” 했습니다. 결박은 단지 사단의 권세를 묶은 것이지 감옥에 넣어 완전 무력화 시켰다는 의미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전도 여행에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어 기뻐하자 예수님이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10:18)고 말했지 않았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사단이 심판 받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재림 때까지 공중권세를 잡고 있을 것입니다. 대신에 신자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19절) 주신 것이 바로 사단을 결박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절)고 했습니다.
또 다른 예들을 봅시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임금이 쫓겨난 것은 세상에서 완전히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임금으로서 능력과 권세만 박탈당한 것뿐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히브리서 기자도 예수님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기만 했는데도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없어진 것도, 완전히 결박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바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 사도 또한 예수님의 초림 시에 마귀가 아닌 마귀의 일에 대해서 “멸했다”는 표현을 사용했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계시록 20:1-3은 예수님의 초림 시 영적 영역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문자적으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사단의 권세가 이전처럼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게 만든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는 자는 영원토록 구원이 보장 완성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천년이 차도록”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국은 열방의 이방족속들입니다. 당신의 보혈의 공로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시고 이방인도 하나님과 화목시켰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골2:15)습니다. 정사와 권세는 악한 천사들 즉, 마귀의 부하들을 지칭합니다. 죄악의 배후에 사단의 흉계가 있음을 십자가에서 만천하에 밝힌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 되신 예수를 알면 죄와 죄책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 바로 사단을 결박했다는 본질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을 주라 시인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신자는 사단을 결박할 권세를 이미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단은 예수님 초림 때에 이미 결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새롭게 무저갱으로 떨어질 일이 없습니다.
사단이 잠시 놓인다는 의미는?
그럼 사단이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 후는 신약시대가 끝날 무렵 즉, 인류 역사가 종말을 고하며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직전을 말합니다. 사단이 무저갱에 빠져 완전히 무력화 된 것이 아니라면 이 또한 다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사단이 다시 지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단이 비록 그 정체가 드러나고 예수 믿는 자를 다시는 종으로 부려먹지 못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멸망하는 자들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며 신자들도 유혹 훼방하고는 있습니다. 계속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사단의 활동이 마지막 때에 가선 일시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큰 위력을 드러내며 더욱 활발해진다는 뜻입니다.
가다라 지방의 군대 귀신을 쫓아낼 때에 귀신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예수님의 초림 때에 사단은 아직은 자기가 심판받을 때가 아니라고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혹시 심판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괴롭게 하려고 온 것인지 궁금해졌던 것입니다. 그럼 재림 때에 사단은 완전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또 다시 천년 동안 묶어 놓았다가 잠시 다시 풀어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잠시 놓인다는 것은 쉽게 말해 사단도 이제는 자신이 심판 받아야 할 때가 된 줄을 직감하고선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를 괴롭히는 행태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당하게 할 때에 처음에는 승리한 것처럼 좋아하다가 철저한 패배를 당했던 전철을 사단 스스로 되풀이 할지 모릅니다. 갈수록 믿는 자가 줄어들고 세상에 불법이 횡행하니까 아주 기세등등하게 설치다가 사단 또한 불시에 완전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마지막 때에 세상은 사단 앞에 거의 굴복하고 끝까지 견디어 남는 신자는 극소수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진행은 초림 때와 마찬가지로 기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분의 하시는 일이 항상 그러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심판인지라 더더욱 믿음의 옥석을 가려서 심판의 공평성, 정확성, 완전성을 높일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2:6-8)
우선 사단이 여전히 활동하며 세상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지만 하나님이 막고 있다고 합니다. 성령의 권세를 갖고 있는 교회가 죄인들의 완전한 멸망을 막고 있고 또 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사단의 권세는 신약시대 내내 결박을 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사단을 완전히 옮길 때에 이르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최후의 발악을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강림하여 완전히 폐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재림 때에 사단을 폐한다는 것입니다. 재림 후에 다시 사단을 풀어주어 세력을 모으게끔 기다렸다가 또 다른 최후의 전쟁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천년왕국은 시작되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계20:4-7)
천년왕국 즉, 신자가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게 되는 기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구절인데 그 순서를 해석하는 결정적인 키가 됩니다. 천년왕국의 시기를 언제라고 말합니까? 첫째 부활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고 합니다. 분명히 둘째 사망이 오기 전이며 사단의 권세가 절정에 오르기 전입니다. 단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이후입니다.
또 요한이 천국에 가서 본 광경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목 베임을 받은 자가 목이 없는 기괴한 상태로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도 분명히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라고 했듯이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말합니다. 순교를 당했거나 믿음을 온전히 지킨 자들의 영혼이 몸까지 부활되는 최후의 심판 때가 오기 전에 천국에 가 있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천년왕국은 이 땅이 아니라 오히려 영계 즉, 천국에서 이뤄집니다. 그것도 이미 이뤄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순교자를 비롯한 온전한 구원을 얻은 영혼들이 천국에서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함께 이미 (천 년 동안)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천 년은 당연히 문자적 천년이 아니라 예수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그 때와 기한은 얼마가 될지 아무도 모르며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나머지 죽은 자 즉, 불신자는 첫째 죽음을 당한 후에 영으로 지옥에 가있습니다. 아직 육신의 부활을 겪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몸이 부활하는 마지막 때에는 영영한 불 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을 당할 것입니다. 반면에 이마와 손에 우상의 표가 없고 대신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침을 받은 신자는 그들과 동시에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옮겨짐으로써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 년이 차매, 즉 예수님이 재림하기 직전에 사단은 심판을 감지하여 최후 발악적으로, 아니면 이 땅을 독차지할 것처럼 기세등등하여 설치게 됩니다. 바로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의 의미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신자를 극렬히 핍박하는 대환난이 닥칠 것입니다. 사단은 지상에서 예수 이름과 그 신자를 완전 멸절시키기 위해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일”(8절)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9절) 던져져 영원히 결박될 것입니다.
요컨대 천년왕국 후에 바로 최후의 심판이 있고 모든 인간의 육체의 부활이 따르고 영영한 구원과 둘째 사망으로 나눠집니다.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께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4-26)
다시 말하지만 천년 왕국은 이미 하늘에서 이뤄지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단을 완전히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셈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발악이든, 착각하여 기세등등하든 마지막 때에 잠시 풀어주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도 사실은 불법의 비밀 즉, 사단의 흉계와 농간은 이 땅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단을 묶는 열쇠를 지닌 교회에 의해 그 힘이 억제된 상태였을 뿐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敵)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2:18)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 사도가 자기 당대에 이미 적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단의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다. 사람들로 예수를 모르게 하기 위해 골고다 이후로 계속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적그리스도를 보내어 미혹케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최악, 최대의 적그리스도 모습을 입고서 그 스스로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종말의 진짜 징조
예수님의 초림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다른 말로 심판은 마지막 때까지 유보된 것입니다. 지금은 그래서 은혜의 시대입니다.
따라서 재림은 당연히 세상을 심판하려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전혀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악인들이 멸하는 것을 두고, 물론 사단의 심판은 예외지만, 즐거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도 단순히 그 때까지 죄를 안 짓고 전도 같은 주님의 일을 많이 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도록 자신부터 아름답고 거룩하게 가꾸며 예수님처럼 영화롭게 될 자신을 간절히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한 죄인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면 죄의 형벌에서 영원토록 완전히 면제됩니다.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심판을 두려워할 근거 자체가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다른 말로 신자는 종말의 시기와 방식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아직 그리스도 은혜 안에 들어오지 못한 미혹된 영혼들에 대해서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노예로 묶고 있는 세상 쾌락과 죄악과 그 배후의 사단과 마지막으로 멸망당할 원수인 사망을 예수님처럼 자기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저주해야 합니다. 또 하늘과 땅의 권세가 이미 함께 하기에 그것들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바꿔 말해 천년왕국의 시기와 방식, 휴거와 공중영접, 재림의 시기, 대환난의 실상, 마지막 전쟁의 구체적 양상, 백보좌 심판, 심지어 천국과 부활에 관한 시공간적 양태에 대해 염려 걱정은 물론 호기심과 관심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지금 자기에게 붙여준 일과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기만 하면 됩니다. 생명을 주신 이에게 돌려드리는 그날까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 복음의 향기를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종말의 징조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여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모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허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3:1-5) 현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죄악의 만연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윤리적 죄악이 아닙니다. 부모마저 거역하고 무정하며 사나워진다고 합니다. 사랑이 실종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완전히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종교의 껍데기만 남아 있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보려야 찾지 못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인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 영적인 흐름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종말에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지만 단지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8-12) 불법이 성하며 즉, 진리가 실종되고,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계시록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
결국 계시록은 신자에게 인류가 비극적 종말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가고 있다는 역사관을 제공해줍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유토피아가 건설되리라는 장밋빛 환상을 절대 거부합니다. 선과 악의 세력이 번갈아 승리하며 자꾸 순환된다는 원형적 역사관도 부인합니다. 창조주이신 당신을 배역했음에도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죽이신 그 은혜 앞에 인류는 끝까지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필연적인 그리고 마땅한 순서로 마지막 심판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계시록에 기록된 일들이 반드시 실제 이 땅에서 가견적(加見的)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 신자에 대한 극심한 핍박과 환난, 마지막 때에 성도와 불신 세상의 전투, 예수님의 재림, 모든 이의 육체적 부활, 백보좌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영생과 불 못으로 나뉨의 순서로 진행될 것입니다.
또 상징과 계시가 다중의 의미를 지니는 특성상 4장에서 19장까지의 기록은 인류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기록된 순서대로 진행이 되는지 동일한 사건을 반복해서 설명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동일한 일들이 반복해서 진행되면서 갈수록 그 강도가 세어진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예컨대 일곱 인을 떼는 것과 나팔을 부는 것과 대접을 쏟아 붓는 것은, 각기 심판의 계획(인)을 세우고 경고한(나팔) 후에 실제로 시행하는(대접) 것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또 지난 역사를 돌이켜서 현재 상황과 연결해 보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경고, 징계를 반복하면서 그 강도를 높여 왔고 종국의 심판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류 역사가 계시록 4-19장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역사의 외적 물리적 현상으로 계시록의 상징에 끼워 맞추기는 너무나 힘듭니다. 대신에 신자가 종말에 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정작 가장 중요한 사항이 따로 하나 있습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2:3,4)
최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기독교 안에서 배교한 자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그분과 같은 능력을 나타내며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많은 교인들도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배도란 기독교 내에 있던 자가 배반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가 부인되는 일이 일어나면 실질적인 종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더 강조될 수 있습니다. 유일한 참 생명이자 진리이자 구원의 길 되시는 예수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초림은 하나님이 당신을 알게 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골고다 이후로는 인류더러 그분의 십자가 앞에 모두 엎드리라고 초대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부인되면 당사자인 예수님이 다시 오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도덕적 죄악은 인간이 모인 세대와 장소에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또 그런 죄악으로는 경중이나 우열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구원해주려 하신 것인데 그마저 부인하면 남는 것은 심판뿐입니다. 물론 십자가 안에 들어와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둘째 사망으로 떨어질 염려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 신자가 할 일은 정해졌습니다. 복음을 순전한 복음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핍박과 환난이 닥쳐도 사도가 전해주지 않는 다른 복음을 부인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받으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7,8)
참신자라면 성경의 절대적 무오성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 됨만을 언제 어디서나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배도하는 일이 자꾸만 반복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이미 수도 없이 나타난 것입니다. 언제든 최고의 능력을 지닌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단계가 무르익어 갑니다. 종말은 분명히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입장은 애매해집니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이 땅의 황폐함을 깨끗케 해달라는 간구가 절로 나옵니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집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4,8,9) 바울이 고백한 대로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신분과 위치에 이중성이 있습니다. 이 땅에선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이미(already) 실현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만 완전히 완성된 천국에는 아직(yet)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구원 은혜에 동참한 자는 지금 현재 땅에 있거나 죽어서 그 영이 하늘에 있거나 천년 왕국에 이미 속해서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재림 시에는 그분의 심판의 권세에도 참여하여 둘째 사망을 맞보지 않으며 새 하늘과 땅에서 세세토록 그분과 진정한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계시록이 신자에게 가르치는바 역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보혈의 권세와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어 “끝까지 견디는 자”는 천국의 영광이 이미 보장되어 있고 언젠가는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자연 재앙이나 인간 죄악이 아무리 관영해도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 복음이 약해지거나 상실되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신자가 관심을 가질 바도 종말의 시기와 방식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면서 모든 이 앞에 십자가 참 생명을 중거하는 것뿐입니다.
9/7/2009
끝까지 십자가 복음만을 붙들겠습니다!
복사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