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뜻은?
[질문]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면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요? 또 신앙의 선배님들(목사님, 신학자 etc)의 책을 참고하는 것이 평범한 성도인 저에게 어느 정도의 큰 유익이 될 지 궁금합니다. 단어나 배경지식에서 막히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책을 찾아보고 전문가에게 묻는 것이 성령의 조명으로 읽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요?
[답변]
성경을 읽기보다 공부하라.
답변부터 먼저, 그것도 한마디로 줄여서 드리면 성경은 진짜 학교에서 공부하듯이 읽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읽는다는 것도 사실 그러하며, 선각자들의 책도 섭렵해야 하며, 궁금한 것은 관련 자료를 찾고 전문가에 물어야만 합니다.
바꿔 말해 성령의 조명으로 읽는다는 것이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읽으면 막히는 단어나 구절 하나 없이 술술 다 이해되고 심오한 영적 진리가 깨달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더라도 여전히 공부하듯 성경을 읽어야만 합니다.
모두가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전체를 일관하는 주제와 줄거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또 그 가운데 하나님이 진짜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 계시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최근 유행하는 말로 성경을 관통하는 맥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작금 잘못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하니까 단순히 성경의 구조나 줄거리만 배우고선 마치 맥을 잡은 양 간주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차례를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쉽게 비유하면 어떤 소설의 작가 신상명세, 저작년도, 차례, 심지어 줄거리 등은 꿰뚫고 있어도 막상 읽지는 않아 과연 작가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전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무엇보다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성경은 전체 줄거리는 물론 각 책의 주제와 연결하여 연구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핵심교리를 먼저 따져봐야 합니다. 말하자면 신학교에는 가지 않아도 성경을 통해 신학을 공부해야만 합니다.
최근에 신학은 물론 교리마저 배울 필요가 없는 양 가르치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교리를 모르고 성경을 읽는 것은 수학공식은 전혀 숙지하지 않은 채 어려운 수학 교과서를 읽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선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그렇게 읽는, 아니 눈으로 훑어가는 신자가 꽤 많습니다. 신구약이 왜 나눠있는지, 또 각 책이 뜻하는 핵심 주제는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 성경저작 시점과 현대와는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차이가 커서 그 배경에 관한지식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공부하지 않고 읽으면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선각자의 책도 읽고 궁금증이 일 때마다 관련 자료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책이나 자료들이 의미하는 바가 일치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비슷하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정반대의 주장도 있으며 그야말로 백가쟁명입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진짜 맥을 잡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교단마다 차이를 보이는 세부적인 교리에 신경 쓰지 말고 큰 줄거리부터 잡아가는 것입니다.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예수님의 구속과 마지막 날의 완성이라는 네 가지 거대담화(mega narrative)로 구성되어 있다는 면에 착안해야 합니다.
우선 창조와 타락에 관해선 교단 간에 신학적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차이가 있으면 바로 이단으로 떨어집니다. 구속에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측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믿음을 강조하는 측으로 나뉩니다. 이 둘에 관해선 함께 배우되 스스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필자는 전자를 적극 옹호합니다.)
마지막 날의 완성에 관해선 사실상 어느 교단도 정확하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완성 담화야말로 전체 줄거리만 알아야할 부분입니다. 대신에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고 항상 경성하며 대비하는 신앙자세는 확립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비록 글 올리는 것이 더디긴 해도 이 홈피의 “성경의 맥을 잡자” 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조명
공부하듯이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성령이 아무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도 열심히 하면 공부 안 해도 성적 올라간다는 식의 너무나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성령은 분명 인간의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게 해주며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높여줍니다.
물론 그 전에 성경에 대한 자신의 모든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정말로 겸비하게 들으려는 자세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 읽기 전에 잠시 기도해야 합니다. 또 열심히 공부하되 배운 것을 묵상하며 읽어야 합니다. 이제 성령이 성경 읽기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라 추적해 봅시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0,21) 예언이라고 해서 단순히 미래 일을 계시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것이 예언이기에 베드로 사도는 지금 성경의 모든 구절에 관해 말한 것입니다.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이 천주교처럼 사제 즉, 교회만 성경 해석권을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신교에 적용하면 목사의 의견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그 해석이 각양각색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석자 자신의 사상, 철학, 편견, 선입관, 욕심 등을 개입시켜 곡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모순과 오류는 없는지 점검하기 위해서라도 성경연구를 전문적으로 하신 분의 책과 의견을 참조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저자가 성령의 영감(靈感, inspiration)으로 기록한 것이기에 당연히 독자도 성령의 조명(照明, illumination)을 받아 해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명은 말 그대로 빛을 비추어 훤하게 보이게 해준다는 것인데 성령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면서 성령이 와서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 가르쳐 주신바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예수님은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되, 특별히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섬기시고 가르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사역의 의미를 알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했던 선택된 몇 사도들에게 그 의미가 정확하게 계시되게 함으로써 성경을 저작케 했습니다. 또 동일하신 성령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님을 간접으로 대면해야 하는 독자들에게는 그 의미를 밝혀줍니다.
한마디로 성령은 성경독자로 예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특별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 받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또 책망 받는 내용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다는 것인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죄와 심판에 대한 책망과 그에 따른 십자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깨우침이 없다면 성령의 조명이 없었다고 보면 됩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를 간절히 했어도 그러합니다. 또 역으로 아무리 주석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연구를 많이 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해석하면서 인간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처세술, 죄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하나님께 복 받는 내용, 현실 문제를 해결 받는 믿음, 인간사회에 타협 융화되는 방안 등이 강조되면 성령의 조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기독교 서적이나 전문가의 조언도 바로 이 기준으로 정확한 해석인지 여부를 점검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과 성경 독자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책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창1:1) 그 목적은 예수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계22:21)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따라서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오직 예수님만 깊이 알아나가게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마스터키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구절을 어떡하던 예수님과 연결된 상징, 예표, 대언하는 것으로 억지로 해석 적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원리로만 다스린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예수님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자에게 주는 가장 신령한 은사를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바로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3:14-17)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성경을 열심히 배울 것을 권합니다. 또 배운 바대로 확신을 가져야 하며 확신한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특별히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므로 후대의 신자들도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배워서 그렇게 해야 할 이유로 크게 셋을 들었습니다.
우선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기독교만은 배워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난 후에 배워서 그 진리를 알게 됩니다. 물론 성경을 배우는 중에도 믿어질 수 있지만 온전히 믿어지고 난 후라야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진리에 대해 더 명료하게 이해되고 믿음을 실제 삶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 품성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케 하며 모든 삶의 지표로 삼아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말씀을 등한히 하면 절대로 신자가 거룩하게 변화되지도, 믿음으로 성숙되지도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자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신자가 행하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 말씀을 배우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며 나아가 실제로 헌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자신이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의미와 목적과 결과를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의 성품에 참예하며 하늘의 보물을 이 땅에 옮겨 쌓기 위해서 주의 제자로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현실적 일을 감당하더라도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가, 최소한 그러고자 하는 소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성령의 조명이 없이 성경을 눈으로 훑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성령이 우리 내면의 영에 실제로 작용하는 과정과 모습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주는 말씀을 들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졌듯이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주님을 향해 가슴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경은 반드시 공부하듯이 파고들며 읽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선각자의 책과 전문가의 의견을 함께 참조하면서 읽으셔야 합니다. 물론 성경 전체를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통독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몰라도 일단은 통독을 하셔야 합니다. 당연히 성령의 조명이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통독 전에, 최소한 그와 동시에 성경의 핵심교리를 배우셔야 합니다.
자신이 성경을 바르게 배우며 제대로 읽는지는 앞에서 설명 드린 근거에 따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 그분이 과연 누구신지, 인간으로 오셔서 섬기고 가르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그 결과 인간에게 어떤 은혜와 권능이 임했는지, 복음 안에 든 자에게 어떤 변화가 임하는지, 그래서 말씀을 통해 배운 핵심 진리들이 실제로 자신에게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따져 봐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선 머리 둘 곳도 없이 좁고 협착한 길을 걷더라도 예수님만 따르겠다는 소망과 헌신이 생기지 않았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이 임해 영적 분별력이 생기도록 진심으로 다시 간구해야 합니다. 독자의 심령에 예수님의 십자가 영광의 광채만이 가득 차도록 해줄 때만이 성경은 성경으로서의 온전한 가치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는 소망이 생긴 것이 죽은 영혼에 성령이 간섭하여 일어난 중생이라면, 성경을 읽고 배우면서 그분을 따르는 삶에 실천 헌신하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에게 성령이 조명한 역사입니다. 요컨대 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이야기였듯이, 그 독자도 마땅히 자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예수여야만 합니다.
8/20/2010
말씀의 진수를 속시원히 풀어주시는 목사님(그래서 별칭: 태산북두님^^)이 계심에 더 좋습니다.
'성경의 맥을 잡자'를 순서대로 차근차근 정독해 봐야겠다는 생각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