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기도와 신비주의 기도의 차이는?
[질문]
학교에서 수업 듣던 중 한 신학과 교수님께서 학생들이 기도만하면 무조건 "그건 신비주의야! 그렇게 기도하면 안 돼!"라며 학생들이 기도하는 것에 대해 계속 주의를 주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신비주의, 영지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믿음으로 기도하다 보면 때로는 일반은총의 경계를 넘어선 기도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도 90세를 넘겨 자손을 위해 기도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도, 그리고 80넘은 노인의 힘으로 덩치 큰 아낙 사람들의 땅인 헤브론 점령을 위한 갈렙의 기도 등의 예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망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신비주의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물론 믿음의 기도와, 신비주의적인 기도와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 애매한 경계선을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믿음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과, 소위 말하는 신비주의로 불리는 기도와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답변]
신비주의 기도와 신비적 기도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신자가 이 땅의 문제를 가지고, 그것도 자신의 것을 위해서 얼마든지 기도해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자기가 계획하여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를 바라며 기도한다고 해서 다 신비주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인데 그분께 못 아뢸 것이 없지 않습니까? 기도란 무엇이든 많이, 단 솔직하게만 아뢴다면 좋은 것입니다. 기도가 대화이기도 한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란 많으면 많을수록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말이 많으면 실수와 잘못을 범하기 마련이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이와의 관계에 해당될 뿐 부모 자식 간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선 더더욱 그러합니다.
물론 무엇이든 기도하다 보면 성경적으로 잘못된 기도나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죽기까지 영적으로 어리석을 수밖에, 최대한 양보해서 완전하게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도달하는 자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자라갈 뿐입니다. 매번 완전히 성경적인 기도를 하는 완벽한 신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아들로선 아무리 어리석은 말이라도, 아니 스스로는 아직 어리석은지 잘 모르니까, 자꾸 아버지와 나눠야지 아버지가 현명하고도 올바른 지혜로 인도하며 가르쳐 줄 것 아닙니까? 또 어리기에 어리석은 말을 하는데 그것을 어리석다고 야단치는 부모도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신비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비가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에 풍성하게 역사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운행자이신 하나님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분께 무엇이든 아뢰면 그분의 뜻대로 응답해준다는 사실이 아주 경이롭지 않습니까? 요컨대 신자가 기도한다는 것 자체만도 엄청난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신비주의”(神秘主義)가 적용되면 사정은 확 달라집니다. “신비적”(神秘的)이라는 말과 객관적으로 정확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주의”(主義, ideology)라는 단어가 붙으면, 사고와 말과 행동에 어떤 고착된 체계가 작동되어 반드시 한쪽으로 경도된 방향성과 열매를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예컨대 공산주의는 인간의 행복은 물질이 가져다주기에 모두에게 물질을 공평하게 나눠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진다는 유물사관이 한 나라와 사회와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신비하고 엄청난 결과로 반응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믿으면 신비주의가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기도의 신비성을 절감하면서 그 신비한 은혜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주 좋은 신앙인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과 그분께 비는 기도가 신비적이긴 해도 신비주의에 묶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초자연적 응답만 원하는가?
하나님에게는 신비성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타 의롭고 선한 속성들이 아주 많습니다. 진리, 생명, 아름다움, 은혜, 사랑, 긍휼, 지혜, 공평, 거룩, 영원, 완전, 주권, 섭리 등등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기도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다른 모든 품성은 무시하고 끝까지 그분의 신비성만 붙들고 기도하면 신비주의가 됩니다.
신비성이란 일상적이지 않고 초자연적인 모습을 뜻하는데, 신비주의란 기도의 과정과 특별히 그 결과가 반드시 기적 같은 모습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구체적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의외로 신비주의 기도를 하는 자들이 꽤 많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든 신자가 기도를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대로 이뤄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그것도 거두절미해서 일부 구절만 해석 적용한 데서 기인합니다. 고의든 아니든 일부 목회자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대표적 예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는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말씀에 상징과 비유가 사용되었다는 점은 감안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합니다. 무엇이든 기도만하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그러지 않는 것은 신자의 믿음이 적어 의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인간이 말로 명령한다고 산이 바다로 던져질 수는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도중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보이는 산은 헤롯 왕궁과 성전이 보이는 예루살렘을 뜻했고, 바다는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산(山)으로 상징한 것은 죄악이 만연하고 형식적 가식적 종교로 부패한 예루살렘 도성이었습니다. 제자들더러 예루살렘의 진정한 회개와 영적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그 산이 바다에 빠지게 된다는 즉,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또 바로 앞의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는 기적과 연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무화과나무도 당시의 부패한 유대종교를 뜻하며 그것이 마른 기적은 그에 대한 주님의 분노를 반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당시 배경과 앞뒤 문맥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으면, 기도만 뜨겁게 하면 산도 바다에 빠지는 기적을 누릴 수 있다는 기도 만능주의 즉,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니까 위에서 설명한 예수님의 뜻에 기초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구절만 완전히 따로 떼어서 해석하고선 기도만 하면 응답되니까 심지어 반드시 이뤄지니 미리 감사부터 하는 기도가 등장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25절) 예수님은 이웃의 용서와 사랑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당신의 뜻에 맞는 그런 기도라야 구하면 받은 줄로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도 내용은 둘째 치고 기도만 하면 무조건 다 이뤄진다는 근본인식이 있으면 신비주의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고 주문(呪文)입니다. 기도 자체가 응답을 받는 자동적 기계적 수단이 되어서 믿음이 따로 필요 없고, 나아가 신자가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먹는 죄가 됩니다.
세상의 것만 구하는 기도
질문하신 정황을 살펴볼 때에 신학생들이 그런 맹신적 신비주의에 빠져서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니까 교수가 문제 삼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기복주의의 기도와 기복적인 기도로 구분해서 접근하고 적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2-34)
이방인들은 인생의 목표를 오직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둡니다.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이 자신의 안락을 도모하는 방향으로만 일관되게 작동합니다. 그들의 신(神- 사실은 우상에 불과하지만)들도 신자들의 현실적 형통만 보장해주는 역할만 합니다. 결국 세상의 것만 풍성해지는 복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말씀이 이방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복주의가 기독교 안에서도 성행하며 최근에는 대다수 교회들이 표방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자라도 하나님께 현실의 복을 빌 수 있고 또 빌어야 합니다.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해선 안 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으며, 지금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먹고 마실 것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서가 아니라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두라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다면 그 안에서 얼마든지 “세상의 것을” - “세상의 것만”이 아니라 -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자기 계획과 소원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신경을 써야할 측면은 “자기 계획과 소원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포함되느냐?”이지, “세상의 구할 것을 구해선 안 된다.”가 아닙니다.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 안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일상적인 현실 문제가 신자에게도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신자가 세상에서 정말로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거룩하고도 즐겁게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다. 신자가 일생 동안 가난하고 궁핍하며 병에 걸려 고생하고 손해만 보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신자가 한 숨 짓고 울면 하나님은 더 크게 한 숨 짓고 더 슬프게 우십니다. 그분은 신자가 세상에서 권력 명예 지상주의로 사는 것은 아주 싫어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무소유와 염세도피주의로 사는 것도 매우 싫어합니다.
종교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
문제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한다.”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구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가 세상의 것이며 어디부터 하나님의 것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목사님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 또한 종교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도덕적 종교적 모습만 띄면, 아니 꼭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것만”, 아니면 최우선적으로, 강조합니다. 신자가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의로워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신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죄의 본성이 살아있어서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말입니다. 비유컨대 학생이 공부하지 않고 학교에 출석하지 않으면 학생이 아니지만, 학교에 열심히 출석하면 성적에 상관없이 학생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란 간단히 말해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는 물론, 신자가 속한 어떤 공동체에도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거룩한 통치가 임하여 그분의 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신자의 삶을 통해서 주위 모두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정상적인 직업이라면 무슨 일을 해도 됩니다. 모두가 선교사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세속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고 그분의 의가 드러나는 모습을 주위에 실제로 보여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가 교회 안에만 묶여 있으면 아무리 경건해도 종교적인 것이며, 교회 밖에서 자기가 수행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적더라도 자신을 통해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면 신앙적인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 교회로 인도하라는 것만이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은 신자가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서 그 섬김은 받은 이웃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서 그분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과 자신이 하는 세상 일을 통해서 그런 모습이 이뤄지면 신앙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런 목적이 이뤄지는데 분명 도움 되는 일을 아무 사심 없이 준행하겠다면 백억을 달라고 기도해도 신령한 기도입니다. 반면에 이웃이 예수를 알고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일으켜 세워지는 목적이라곤 하나 없이 순전히 자신의 영달과 형통을 위해서만 빈다면 단지 십만 원만 달라고 해도 기복주의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신자에게는 주의(主義)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 하나님 외에 어디에도 적용되어선 안 됩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오직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세상 앞에 드러내는 일관된 한 방향으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신자를 통해 주님의 은혜와 권능이 이웃으로 번져나가서 그가 속한 공동체를 거룩하게 바꾸는 것이 모든 신자의 평생의 소명이어야 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에는 주의(主義)는 붙일 수 없고 적(的)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신비적인 것으로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지만, “도깨비 방망이 뚝딱!” 식으로 무엇이든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신비주의 기도가 되어선 안 됩니다. 또 현실 문제가 신자에게도 중요하기에 기복적인 기도는 할 수 있지만, 현실의 형통만을 목표로 하는 기복주의가 되어선 안 됩니다. 초자연적 은사나 체험을 소망해도 되지만, 초자연주의나 은사주의나 체험주의로 흐르면 잘못입니다.
원칙적으로 신자의 모든 기도는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이 예수중심주의로 완전히 바뀐 바탕에서 해야 합니다. 비록 스스로의 생각으로 소망하고 계획하는 일이라도 그 최종목적과 열매가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가 높아지는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러면 그 내용과 방식과 언어와 상관없이 믿음의 기도인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원리를 모르거나, 알아도 잊어먹는 것이 예사인지라 신자는 무엇이든 기도해야 합니다. 또 신자가 자기 정욕만을 구한 것이 아니라면, 신자의 평생에 걸친 기도를 비롯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성령님이 신자더러 예수중심주의로 살고 기도하도록 깨우쳐주고 바로 세워 줍니다.
12/14/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