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가 성경적으로 옳은가요?
[질문]
살아있는 사람과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예수님 재림 때 다 같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휴거가 성경적으로 옳은가요? 그 근거로 드는 살전 4:15-17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답변]
데살로니가전서 4:15-17의 의미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5-17)
마지막 날에 주님이 재림할 때에 전 세계의 신자들이 일시적 전체적으로 (은밀하게) 사라진다는 휴거(携擧, rapture)라는 용어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신학용어에 성경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삼위일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본질과 속성과 권능에서 동일하지만 위격만 다르다는 것은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설명했기에 성경에 없는 용어라도 오히려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휴거도 성경이 지지하는 개념인지 여부부터 살펴봐야합니다. 휴거를 주장하는 쪽에선 상기의 말씀을 가장 큰 근거로 삼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에 이미 죽은 신자나 그 때까지 살아남은 신자들이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이 말씀대로 될 것을 가리켜서 휴거라고 칭합니다.
성경은 가장 먼저 또 반드시 문맥상 의미의 흐름에 맞추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바로 앞에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절)고 했습니다.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중부정법을 사용했기에 강력한 긍정을 뜻합니다. 그렇게 강한 어조로 전제한 긍정적 의미는 자는 신자들은 “소망 없는 다른 이”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니까 전혀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분문에 이어지는 구절도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절)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은 상기 본문(14-17절)에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서두(13절)에서 제기한 문제를 이어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그 가르침에 의거하여 슬퍼하지 않도록 서로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자는 자들에게 대해 걱정하게 된 원인은 크게 둘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재림이 당대에 이뤄진다고 오해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마24:34)는 예수님의 두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이미 아래에 링크 된 글에서 다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당대에 주님이 급박하게 다시 오시면 이미 죽은 신자들이 혹시 주님을 맞지 못하거나 신령한 육신으로 바뀌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AD51 년경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저작한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지(AD30-33년 경) 한 세대가 채 지나기 전이라 한참 이 문제가 신자들 사이에 큰 관심거리가 되어있을 때입니다.
둘째로 AD 2세기 유대인들의 문헌인 에스드라2서는 마지막 날에 생존해 있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보다 더 복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에스드라2서는 데살로니가 전서보다 훨씬 뒤의 책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말관은 유대인들 사이에 대대로 내려온 것이지 AD 2세기에 새롭게 대두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 당시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신자들도 그런 잘못된 사상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본문의 주제는 이미 죽은 자들도 주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자와 똑같이 일시에 신령한 육체로 부활되어서 주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영원한 통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물리적 방식이나 그 때에 신자들이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지에 관한 설명이 아니므로 이 말씀으로 휴거를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중 들림을 말한 적이 없다.
문제는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는 말씀의 해석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의 구체적인 물리적 상황은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도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완료되었어도 제자들은 구약예언에 대해서 정확히 깨닫지 못하다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성령이 와있으니까 신약성경의 종말에 관한 예언은 해석할 수 있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초대교회 때는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사도들이 목격자요 참여자였기에 구약예언과 비교해서 분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종말과 주님의 재림에 관해서도 그 때 가서 모든 것이 완료된 후에야 비로소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중영접 여부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이 말씀을 상징으로 보느냐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이느냐로 정해지는데 저는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난해한 문제일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거해야 하고, 특별히 당신의 재림에 관한 것이므로 바울의 진술보다는 더더욱 그래야 할 것입니다. 휴거와 연결될만한 주님의 말씀 둘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29-31)
먼저 예수님은 당신이 다시 오실 때에 천사들을 보내어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뜻 휴거를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만 엄밀히 살피면 신자들을 모은다고만 했지 그 장소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라는 표현이 문제가 되지만 천사들이 활동하는 영역인지 신자들이 거주하는 혹은 모이게 되는 장소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만약 신자가 거주하는 장소라면 하늘에 있는 성도 즉, 이미 죽은 신자들만 부활에 참여시킨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거기다 땅에 있는 성도를 하늘로 끌어올린다고 해석될 소지는 전혀 없는 표현입니다.
결국 이 말씀도 상징적으로 단순히 주님이 재림하면 모든 신자들의 구원을 완성시킨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앞부분에서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것들도 상징적 묵시적 표현이지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한 자리에서 한 청중을 대상으로 행한 한 문단의 말씀 안에서 상징적 표현과 객관적 설명을 혼합해서 사용할 리는 없습니다. 듣는 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오해와 혼란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원칙도 강조하려는 주제만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지 부차적인 설명에 연연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바벨론제국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사13:10, 34:4) 주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바벨론이 멸망할 때 실현된 예언으로 그 때에 그런 자연현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사탄의 왕국이 멸망할 것을 동일한 표현을 빌려서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하늘에서 모은다는 것도 일시에 신자들 모두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를 상징한 것이지 물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말씀이 아니라고 해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17:34,35)
둘째로 휴거와 연결해 살펴볼 예수님 말씀인데, 그 앞에서(22-33절) 설명한 내용을 실감나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의 심판 때처럼 세상 사람들이 죄의 노예로 묶여서 세상쾌락만 탐닉하고 전혀 회개할 생각도 못할 때에 당신께서 불시에 신속하게 오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결론도 그래서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맺었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적 생명을 보전하려는 자는 영적생명을 잃지만 그와 반대로 살아가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비유로 강조하려는 주제는 재림 때에 대피할 만한 – 시간적 간격이 길어서 뒤늦게나마 회개할만한 여유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할 당시에 이미 소지하고 있는 믿음에 따라 사람들은 구원과 심판으로 바로 나눠지지 제 2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시에 임하여 믿음 여부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진 대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신다는 의미로 데려감(구원)을 얻고 버려둠(심판)을 당한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상기 본문에 공중으로 들리어진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관해 가르치신 내용은 간단합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초림 때의 비천한 모습과는 달리 마지막 심판을 위해 오시기에 영광중에 누구나 확연히 알 수 있는 모습으로 불시에 오셔서 당신을 순전히 믿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영원한 구원과 심판 둘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제 2의 기회는 없으며 그 오시는 시기와 방식은 아무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중에서 영접한다고 표현한 이유는?
바울이 공중에서 영접한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제가 부인 반대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구체적으로 모르기에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저로선 그 말씀을 상징적 의미로 본다는 것으로 그에 대한 근거를 추가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살아 남아 있는 자”라는 표현은 분명히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수백 수천 년 정도로 오랜 기간이 지나면 신속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없어집니다. 그럼 모든 죽은 성도들은 부활이 보장된다는 식으로만 아니면 그런 의미를 더 중점적으로 설명하면 되지 구태여 살아있는 사람과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상기에 설명 드린 바울이 강조하려는 주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음부에 들어가서 마지막 날의 부활까지 아무 의식 없이 잠을 자듯이 기다리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죽은 자라고 하지 않고 “자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나사로를 소생시키는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이 죽어도 사흘은 그 영혼이 떠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종말관에 따르면 결국 바울 당대에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는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은 상태인데 당장 오늘이라도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떻게 되나 염려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이 그 이별을 너무 아쉬워하면서 하늘만 쳐다보자 천사가 이렇게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 주님은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행1:10)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 반대 순서로 공중에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부활 육체는 썩지 않는 신령한 모습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15:42-49) 특별히 그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49절) 이런 표현을 한 까닭이 부활에 관한 영적진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신체는 시공간에 갇힌 물질계에 전혀 제한받지 않는 모습이었기에 비유하자면 마치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신자의 부활신체도 주님의 경우에 비추어서 하늘에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간주했을 것입니다. 먼저 죽어서 지하 음부에서 자고 있는 신자들도 마지막 날에 그런 신체를 입고 공중으로 올리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절차이리라 짐작했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일시에 주님을 맞이하려면 공중영접이 가장 좋은 방안이긴 합니다. 아마 바울도 그런 뜻을 강조하려고 그렇게 설명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이 땅까지 다 내려오시어 모든 신자의 구원을 완성시키려면 주님이 일일이 찾아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신지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대로 하늘에서 천사를 시켜서 얼마든지 땅에 있는 모든 신자를 신령한 육체로 일시에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사들을 보내어 택한 자들을 모은다는 것도 사실상 그런 뜻이지 않습니까?
물론 바울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라고 설명한 의도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문자적으로 공중 들림이라고 해석하려면 나머지 부분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상기 말씀에는 재림 때 부활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 후에 이 땅에 내려온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럼 성도들이 구름 속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공중 들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 4:15-17은 일차적으로 바울이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을 위로하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공중 들림에 주목하기보다는 단순히 주님이 큰 영광중에 다시 오시면 모든 성도들이 일시에 부활 신체를 입는다는 의미로만 받으시면 됩니다. 요컨대 저는 바울이 그런 표현을 한 것은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하여서 동일한 유비를 사용한 것이라고 본다는 뜻입니다.
(2/2/2022)
다시 말씀드리지만 종말의 시기는 물론 그 방식을 아무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기에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대하되 언제 주님이 재림하시든 신경쓰지 말고 매일매일을 종말처럼 여기며 깨어서 기도하며 복음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저는 초림과 재림 사이가 천년왕국이라는 무천년설을 지지하는데 그 순서는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 초림 - 천년왕국(신약시대) - 7년(기간은 구체적으로 모름)환난 - 주님의 재림 - 백보좌 심판 - 영원한 천국 혹은 지옥입니다.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상기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한마디로 제2의 회개할 기회는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너무 내용이 방대하며 이미 전문가들이 책으로 많이 저작해놓았습니다.)
칼럼 잘 읽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단적인 사상인지는 아닌지 모르겠는데요, 종말의 순서가... 1) 공중재림(휴거) -> 2) 7년 대환란 -> 3) 아마겟돈 전쟁에서 예수님 재림으로 승리 -> 4) 천년왕국 -> 5) 인류에 있어서 마지막 곡과 마곡의 대전쟁 -> 6) 백보좌 심판(최후의 심판) -> 7) 영원한 천국 OR 영원한 지옥으로 알고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이단적인 사상이 더해진거같은 느낌이 솔직히 많이 듭니다.
목사님께서 무휴거랑 무천년설을 지지하신다면 성경적으로 봤을때 종말 순서를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1) 몇년동안 지속되는지 모르는 대환란 -> 2) 예수님 재림 -> 3) 백보좌 심판(최후의 심판) -> 4) 영원한 천국 OR 영원한 지옥으로 정리할수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