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습니다.
[질문]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다.”는 진리가 크리스천의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저는 이 명제가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거의 매일 하나님이 선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심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쉽사리 가슴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이 명제가 해결이 안 되는 상태이기에 많은 상황 속에서 신앙의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이 믿어질까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품고 있는 의문입니다. 신앙연륜이 오래 되고 주일마다 그런 내용의 설교를 듣고 계속 성경을 배우는데도 뭔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과제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신실하시다”는 명제부터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분의 선하심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명제는 분명히 진리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분이 나에게 (나와 내 주변의 사람이나, 내가 행하는 일이나, 내가 처한 상황 등에서) 선하고 신실하게 대해주셨는가라는 차원으로 바뀌면 제대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게 역사해주셨다는 체험이 거의 없으니까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대체로 어려서부터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거나, 부모나 학교에서 폭력적인 학대를 당했거나, 학업 이성교제 취업 결혼 등에 큰 실패를 겪었거나, 신체적으로 오랜 지병 내지 불구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물론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는 자 중에도 세상의 부조리나 큰 재앙을 보면서 그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사악한 자가 형통하고 의롭고 정직한 자는 손해만 보며 작금의 펜데믹이나 기후재앙 같은 사태도 가난한 나라의 피해가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모든 모순적인 상황에서 손 놓고 방치하는 것 같으니까 그분의 선하심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으면 하나님이 개인이든 인간사회든 오직 풍요로고 즐거운 일들만, 그것도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생기게 해주어야만 그분을 선하게 여기겠다는 뜻이 됩니다. 처음 교회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해서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신앙연륜이 늘어날수록 응답되는 기도보다 그렇지 못한 기도가 더 많으니까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도 서서히 없어지고 기도하고 싶은 생각조차 시들해져버립니다. 이런 식의 신앙적 사고는 엄밀히 말해 인간이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먹겠다는 뜻입니다. 인간 자신이 그분 앞에 어떤 자세로 서야할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범해도 그 사랑하는 마음에는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훈육의 목적으로 자식에게 일부러 어려움을 허락하고도 짐짓 모른 척 할 수 있습니다. 자식보다 인생경험이 훨씬 많고 자식의 성격이나 자질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잘 알고 있으므로 종합적 장기적 관점에서 자식에게 유익한 길로 이끌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런 이치를 미처 알 수 없는 어린 자녀는 한동안 친부모가 아닌지 나는 주워온 자식인가 의심 내지 원망합니다. 성인이 되도록 부모와 사사건건 의견이 달라 싸우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본인이 결혼해서 자식을 키워보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고 지금껏 자기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전혀 변함이 없었고 날이 갈수록 더 사랑해주신다고 실감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실감나지 않아도 어리석은 인간 신자가 그분의 심오한 뜻과 완벽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 그분이 선하시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부모와는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지전능하시고 신자 인생에 대한 거룩한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완벽한 계획이 신자에게는 현실적으로 때로는 고난과 불행으로 때로는 평안과 풍요로 다가옵니다. 나아가 그분께 받은 은혜는 대체로 기억하지 못하고 힘든 일만 또렷이 곰씹는 것도 신자의 또 다른 어리석음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신자들이 사고의 순서를 거꾸로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인 줄을 아니까 또는 그 점에 대해 최소한 의심은 하지 않으니까 비록 내가 지금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에 처해 있지만 틀림없이 선하게 행하시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어야만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나에게 선하게 행해주어야만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할 수 있다고 고집합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나와 일절 연관시키지 말고 따로 떼놓고 정말로 선한 존재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가 되어야 부모 심정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신자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직통으로 계시해주지도 않기에 인생만사를 주관하시는 그분의 구체적인 뜻을 잘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천 년 전 유대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잠시 은총을 베푼 후에 금방 하늘보좌로 돌아갔습니다.
그럼 하나님 그분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라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철학이나 도덕교과서처럼 읽고선 관념적으로 그분을 파악해선 안 됩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가 실제로 이 땅과 자기 인생에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따져보고 나아가 스스로 시험도 해봐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잘 관찰해보십시오.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하도록 장엄하며 완벽하게 정밀하지 않습니까? 미국의 그랜드케년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등만 봐도 위대한 창조주는 살아계시고 인간에게 정말로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가 태양에 조금만 가까이 가면 모두 타서 죽고 조금만 멀어지면 얼어서 죽습니다. 정말로 꼭 있어야 할 위치에서 정확하게 자전 공전하고 있으며 공기 물 중력 음식재료 등 인간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들을 전부 무료로 공급해주십니다. 지금의 기후재앙은 물론 사회적 부조리들은 인간이 서로 먼저 탐욕을 채우려다가 일으킨 인재(人災)일 뿐입니다.
신자는 자기 자신도 진지하게 잘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한 생명을 주시고 첨단문명이 발전되어 살아가기 너무나 편리한 이 시대에 한국 같은 선진국에 태어나게 해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현재의 현실형편이 너무 힘들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불만을 가진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 고달픈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런 생각이라면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에 그분의 선하심을 논할 의미도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본인은 아무 죄 없는 피해자로서 계속 억울하게 손해와 고통만 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또 엄밀히 따지면 본인에게도 많은 잘못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선 결코 의롭다고 자신할 수 없으며 나 또한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에게 상처나 피해를 입혔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일일이 처지하지 않으시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순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천국영생을 주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무엇보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과 각 개인을 다스리는 원리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분 통치의 첫째 목적은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부적 환경을 풍요롭게 마련해주고 각 개인을 출세 형통시켜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죄에 찌들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서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자라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그대로 세상에서 소외된 불쌍한 자들을 돕게 하고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실천해서 불신자들로 하나님을 알도록 이끄는 당신의 동역자로 세우려는 것입니다.(엡1:3-14)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하는 데에 당신께서 판단해서 신자에게 꼭 필요하다면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고난도 허락합니다. 무엇보다 신자가 돈과 쾌락과 죄악을 쫓는 불신자들과는 반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노라면 세상으로부터 온갖 음해 모략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으니까 누구나 행하는 부정부패에 참여하지 않기에 아무래도 현실적으로는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것들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며 오히려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박해라면 더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아래의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새롭게 바뀐 신자인생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빌3:7-9)
바울은 이 고백에 바로 이어서 오로지 천국 부활의 영광만 바라보며 매일매일 이 땅의 고난을 이겨내며 맡은 소명을 실현하려고 묵묵히 최선을 다한다고 덧붙였습니다.(10-16절) 현실의 삶은 계속해서 매우 힘들어도(고후11:16-33) 그리스도만을 보배로 품고서 그 외에는 다 해롭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투옥되어 십자가처형을 앞두고도 환난 중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4:4)고 권면했습니다.
요컨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그분을 따라가게 된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현실의 고난과 궁핍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에 대한 원망이 생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금방 그런 의심을 씻고서 천국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진리를 확신하기에 현실에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기는커녕 고난 가운데 오히려 더 충만하게 그분의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평생을 괴롭혀온 지병을 낫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으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크게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8-10)
거기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신자들이 때로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지만 그때마다 신자에게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주십니다.(롬8:26)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 의심이 불현 듯 생겨도 결코 그 안에 완전히 빠져서 주저앉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렇게 연약한 신자를 당신께서 온전케 해주시는 데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요컨대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정말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는 그분이 선하시다는 진리를 절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에 현재 내게 일어나는 이해되지 않는 개별적인 고난 중에도 반드시 그분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을 성경진리에 비추어보면 그분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최소한 그분의 선하심을 완전히 확인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질문자께서 “매일 하나님이 선하시고 사랑 그 자체이심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 가치관, 인생관 등을 바꾸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일에는 성령의 역사가 따라야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신자 본인이 의지적으로 결단 시행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인격적 체험적으로 만나서 그 십자가 사랑부터 온전히 확신해야 합니다. 또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무익하며 온전히 죄의 덩어리로 구원 받을 자격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고 처절하게 실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단 한시도 살 수 없습니다라는 확고한 고백부터 있어야 비로소 그분의 사랑이 성령의 역사로 신자의 심령에도 온전히 채워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라도 죄나 욕심에 쓰러지고 넘어질 때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란다는 분명한 인식이 생겨야 합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는 것이라.”(갈2:20)고 고백한 내용이 신자의 삶에도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그분의 선하심을 내가 현재 처한 현실적 위치 신분 여건을 풍요롭게 해주거나 최소한 고난을 없애주는 데서 찾으면 안 됩니다. 고난이란 신자라도 절대 비켜가지 않고 평생토록 그치지 않으니까 새로운 고난이 닥치기만 하면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머리로만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믿어선 그 진리가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네 복음서를 비롯한 성경에서 하나님 그분이 정말로 어떤 분이며 죄인은 물론 특별히 당신의 자녀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깊이 공부 묵상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실 하나라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그 깨달은 영적 진리대로 본인이 순종해야 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29,31)고 약속하셨는데 실제로 그렇게 해보셔야 합니다. 주님의 선하심은 주님이 계시하신 말씀대로 행할 때에만 맛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질문에 답변 드리자면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진리를 흔들림 없이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에서 실제로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그분 가르침대로 순종할 때에 그분의 선하심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길 외에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기도해서 응답되면 그분의 선하심에 대해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분이 나를 알고 있고 동행해 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9/1/2022)
목사님 항상 어리석은 질문에도 명쾌한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만과 교만이 많습니다. 주신 답변을 묵상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