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옛날에 제가 학교에서 '하얀 거짓말'에 대하여 토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얀 거짓말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분명히 선한 거짓말은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목사님께서는 '하얀 거짓말'일지라도 거짓말이기에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선한 거짓말이기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되어 있는 주제입니다. 분명히 거짓말은 하나님이 금하는 죄이지만 살다보면 선의의 거짓말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나님의 자녀가 거짓말을 한 너무나 대표적인 사례가 성경에 둘, 신구약에 하나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창성해지자 두려움을 느낀 바로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렸습니다. 바로가 추궁하자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출1:19)라고 거짓말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벌을 주기는커녕 산파와 이스라엘을 함께 축복하여 오히려 더 강대하고 왕성케 했습니다. 분명히 거짓말을 했음에도 말입니다. 그럼 선한 거짓말을 하나님이 인정하며 때로는 상까지 주신다는 뜻이 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한 첫째 이유는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위한 거짓말이었고 그것도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거짓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선한 목적만 아니었습니다. 결코 간과해선 안 되는 사항은 만약 탄로가 나면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아니 죽어야만 하는데도 상대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 한 것입니다. 이차대전 때에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거짓말한 네델란드인의 경우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둘째 거짓말은 그 유명한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사건입니다.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같은 일행인지 물었는데 그러면서도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수제자이면서도 세 번이나 거짓말했습니다. 출애굽 때의 산파와 정반대로 자기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나 공산당의 기독교 박해 때에 믿음을 부인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할 목적이므로 일종의 하얀 거짓말이긴 합니다.
이 두 거짓말에서 따져봐야 할 흥미로운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산파는 분명히 사전에 거짓인 줄 알고도 고의로 행한 반면에, 베드로는 얼떨결에 순간적으로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온 거짓말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둘째, 셋째 부인은 거짓인 줄 알고도 행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두 거짓말 방식의 윤리적 선악을 따져 점수를 매기자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그 의로움으로 우열을 나누려 들면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시도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 은혜의 복음과 반하는 행위구원을 도모한 것이 됩니다.
요컨대 성경에 기록된 이 두 대표적 거짓말은 타인이든 자신이든 정말로 생명이 걸렸던 케이스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남을 살리는 산파의 거짓은 하나님께 상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자기 목숨을 건지려 했던 베드로가 사후에 통곡하며 철두철미 회개했기에 주님이 용서해주셨고 여전히 수제자의 소명을 맡겼습니다.
우리가 일상 행하는 하얀 거짓말은 이보다 그 수준이 훨씬 낮습니다. 남의 유익을 위한 경우도 종종 있지만, 서로의 관계가 껄끄러워지지 않게 하려고, 내 부끄러운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기 싫어서, 단순히 체면을 살리거나, 나중에 귀찮은 경우를 모면하려고 등등의 이유들이 대부분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거짓말은 신자라면 하기 전부터 혹은 얼떨결 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앙양심이 작용하거나 성령의 억눌림이 있게 마련인지라 나름의 반성과 회개를 합니다.
문제는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또는 이웃과의 교제를 선하게 이끌려는 목적의 하얀 거짓말을 과연 어느 범위까지 해야 하느냐 여부입니다. 이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기준을 정할 수 없습니다. 또 각 케이스마다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다 달라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정죄 비방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 동기에 선한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신자가 얼마든지 하얀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출20:16) 성경은 분명히 재판에서 자기의 유리함을 위해서, 이웃의 것을 뺐기 위해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19:8) 재판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분명히 율법이 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율법을 온전히 이룰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예수님은 형제에게 말로서 하는 폭력도 살인죄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우선 행동뿐 아니라 말이나 생각으로 짓는 것도 엄연히 죄임을 설명하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죄에서 완전히 의로운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기에 율법은 은혜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 질문과 연관해서 우리가 잘 따져봐야 할 과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신자가 하얀 거짓말하는 것과 말로서 이웃과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쁜가?" 말로서 하는 폭력 중에는 거짓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고 상대를 깨우쳐 교도하려는 동기로 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말하는 방식으로만 보면 거짓말보다 선하지만 파급효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선의의 거짓말은 형제간의 유익이라도 낳지만 말로서 하는 폭력은 예수님 가르침대로 형제를 살인하는 셈입니다.
거기다 신자들이 솔직히 선의의 거짓말과 말의 폭력 중에 어느 쪽을 더 많이 행합니까? 아무리 따져도 후자입니다. 그럼 신자가 정말 더 괴로워하고 반성해야 할 것은 선의의 거짓말보다 말로 상처 주는 일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거짓말이라는 형식만 가지고 다른 이의 행위를 정죄 비난은 물론 판단 심지어 그 동기의 온전한 이해조차 못합니다.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복까지 주시고 성경에 명확히 기록된 이스라엘 산파 같은 하얀 거짓말을 우리라면 과연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거짓인 줄 들통 나면 내가 죽어야 하는데도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의로운 자는 너무나 드뭅니다. 당장 저부터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런 판국에 우리가 하얀 거짓말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그 적법성을 따져 신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계명으로 추가할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적 유전과 계명으로 사람에게 짐을 지운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다시 범하는 꼴이 됩니다. 단순히 거짓말이라는 형식 때문에 신자가 행해선 안 되는 악이라고 규정하겠다면 우리 인간의 연약함, 어리석음, 죄의 본성, 등등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입니다. 또 그에 반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자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라면 이 주제를 두고 정작 행해야 할 것은 우리는 올바른 하얀 거짓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너무나 죄 많은 인간이라는 철두철미한 회개입니다. 또 베드로를 주님이 세 번이나 사랑으로 용서하고 품어주었듯이 아직도 죄 중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십자가 복음 앞에 완전히 겸비하게 감사 항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선한 동기를 가졌다면 거짓말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거짓말을 해선 안 됩니다. 항상 진리만 말할 수 있도록 당연히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이룰 자는 없습니다. 신자는 항상 인간의 연약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복음의 은혜로움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서 행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산파와 똑같은 조건과 여건에 처해졌다면 당연히 거짓말 했을 것 아닙니까?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악을 행치 않으려 노력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면 자연히 악은 물러갑니다. 그런 맥락에서 신자라면 선의의 거짓말을 행치 않는 것보다 말로서 형제에게, 심지어 배우자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 주는 일부터 당장 금하고 항상 남을 살리고 복 돋워주는 따뜻한 칭찬의 말을 입에 달고 있어야 합니다.
8/16/2015
시훈 형제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시로 죄의 법에 잡혀가는 저의 너무나 연약한 모습을 보고 괴로워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롬7장 참조) 그럼에도 그런 죄책감이 든다는 것 자체가 조금씩 우리 심령이 거룩해져 간다는 증거입니다. 또 그런 죄책감으로 인해 조금씩 고치려 노력하고 일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를 알기 전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많이 선해져 있습니다. 비록 괴롭다 할지라도 낙심치 말고 주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데 위로 인도 능력을 주려고 성령님을 내주케 하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렇게 괴로워서 질의하신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님의 인도입니다. 성령님이 앞으로도 조금씩 주님을 닮아가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절대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망해서 그 자리에 주저 앉거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우리 앞의 푯대만 바라보고 군사처럼 운동선수처럼 날마다 한 걸음씩 전진하시기 바랍니다.(빌3:12-16) 그런 맥락에서 지난주 저의 설교 "대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의 의미"(레위기 강해#5-레16:20-22)를 꼭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시훈 형제님 죄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는 부분까지 너무 세밀하게 따지고 드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율법주의적 신앙에 젖어있었는데다 형제님 특유의 강박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지속적으로 상담과 치료를 잘 받고 있는지 조금 염려됩니다. 무의식 중의 죄에 대해서 성경문답에 최근에 올린 아래의 글을 다시 참조하십시오.
하나님은 신자의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이 순전하면 결과가 조금 잘못되거나 심지어 인간의 윤리로 죄로 보여도 아무 문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십니다. 그 인자와 긍휼에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자꾸만 인간의 시각과 관념으로, 특별히 인간의 상대적인 윤리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넓고 오묘한지 깨달으십시오. 또 그 깨달은 주님의 사랑이 정말로 그러한지 실제 삶에서 기도하면서 하나씩 체험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샬롬!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에 관해?
목사님 평안하신지요 시훈입니다.
벌써 한국은 타오르던 무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짙네요. 쌀쌀하네요.
모쪼록 살고계신 미국에서도 늘 강건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름아니라, 장난으로 하는말들은 어떨까요
만우절에 장난식으로 하는 거짓말이나 친목이나 사귐을 위한 유머 (있지 않은 사실을 지어내는 종류들)
이러한 것들도 죄에 해당될수 있는걸까요. 하나님께선 좋아하지 않으실까요..
즉 남을 진정으로 속이는게 목적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거짓이나 놀림이 들어갈수 있는것들요..
참으로 애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