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음식 대신 젖을 먹는다는 뜻은?
[질문]
신앙의 정도에 따라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젖을 먹어야 하고 장성한 사람은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의미 하는 것일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요? 저 자신을 볼 때 겨우 젖 먹는 수준으로 단단한 식물을 먹을 태세는 아직 안 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생각이 신앙생활을 대충하는 것을 합리화하려는 핑계 같다는 죄책감도 듭니다만...
[답변]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뉘는가?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간혹 상기 구절과 바로 앞의 고전2:14를 근거로 사람을 불신자, 세속적인 신자, 신령한 신자의 세 부류로 나누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바울사도가 각각 다른 헬라원어로 표현했고 그에 따라 영어번역(한글번역 또한)도 다르긴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먼저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은 “natural man”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어의 뜻은 모든 인간이 태생적으로 갖는 기본적 본능 즉, 식욕과 감정 등에 지배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야수처럼 잔인하거나 비도덕적이고 저급한 본성과는 다릅니다. 앞뒤 문맥과 비교해 보면 성령의 간섭이 아직 없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자기 양심과 본성에만 따르는 불신자들인데 그들 중에는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도 많습니다.
셋째 “신령한 자들, spiritual man”(고전3:1)은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난 신자를 말함에 틀림없습니다. 원어도 영적인, 초자연적인, 중생한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육에 속한 것의 정반대의 뜻입니다.
문제는 둘째 “육신에 속한 자”(고전3:1)인데 영어로 “carnal man”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한영사전은 carnal을 “세속적, 육욕적인”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바울이 “육신에 속한 자”를 ‘곧’이라는 등위(等位) 접속사를 사용해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음에도 아직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따르는, 예컨대 재물과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거나 세상의 쾌락을 끊지 못한 신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carnal)”로 번역된 원어는 “육체에 관한, 육적인, 육신의, 동물의”, 또 그래서 “중생치 못한”의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natural로 번역된 원어와 동의어로 육체의 본능에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 또한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로 봐야 합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했는가?
그럼 왜 바울은 육신에 속한 불신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표현했을까요? 자세히 다시 보면 “그리스도 안의”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전자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즉,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 그에게 속한 어린아이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면 조금 다른 의미가 됩니다.
원어 표현에나 영어 번역에선 “in Christ”가 “baby” 뒤에 위치하기에 정확하게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말도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그 순서를 따라 번역했습니다. 그럼에도 “안의” 대신에 “안에서”라고 토씨를 바꾸었기에 오히려 영어번역보다 더 정확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어린아이들보다는 그 뒤의 “대함과 같이”를 수식하는 의미로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고전3:1에서 바울이 대조하고 있는 대상이 불신자, 세속적 신자, 신령한 신자의 셋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통해 그의 권면을 들어야 하는 청자(聽者)는 육신에 속한 자 즉, 교회 멤버이긴 해도 아직 거듭나지 않은 쭉정이 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신령한 자들에게 대하듯이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이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로 대하는 것은 그들의 “신분을 신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대하는 방식을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바탕에서 대하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혹시라도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해서 말하고 있다면 어디까지나 설명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지 신자의 신분에 두 종류가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앞뒤 문맥을 살피면 더 확실해집니다.
먼저 2:11-16까지 두 종류의 사람으로만 나누고 있습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자는 사람의 사정만 안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전도를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4절) 하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해주고 또 깨달아 알게 해서 가르칠 수 있게 해준다(16절)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분파가 형성되어 서로 헐뜯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3:3a)라고 야단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3b)라고 합니다. “육신에 속한”(3:1과 동일한 원어임)자를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 즉, 사람의 영에 따라 세상 지혜를 받은 자와 동격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2:14절에서 말한 “육에 속한 사람”으로 바울은 “육에 속한”과 “육신에 속한”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지금 분쟁하는 자들을 중생하지 않은 쭉정이 같은 신자로 단정 짓는지는 불명합니다. 아무리 사도라도 다른 이의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행하는 모습들은 분명히 불신자와 똑 같다고 꾸짖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울은 신자의 신분을 둘로 나누는 데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일 뿐인데 오히려 나누고 있으니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 지혜로”(3:19,20) 교회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바울이 그들을 정말로 중생하지 않은 불신자로 봤다면 주님의 사랑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대하고 있는 것이고, 반대로 중생한 신자로 인정했다면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로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본문의 뜻에 혼란이 생길 이유는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현재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불신자들과 같다는 것이 바울이 강조하려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인과 용서받은 죄인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하나님은 사람을 그리스도에 속했는지(신자) 아닌지(신자) 둘로만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2-14)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5-18)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효과는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인간의 공로, 자격, 능력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선물로 얻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있을 때에 그 서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어 구원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신자는 아버지와 자녀의 혈연관계가 된 것입니다. 자녀로 삼은 자를 다시 내쫓을 리는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그러나 우리 성품 자체를 완전히 거룩하게 변모시켜 구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죄의 본성은 그대로 두고 그 신분과 위치와 소속만 그리스도 안으로 바뀌었습니다. 흑암에서 광명으로, 죄악에서 거룩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하나님께서 옮겨주셨습니다. 쉽게 말해 신자는 이미 “용서받은 죄인”이고 불신자는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 차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진심으로 항복하여 그분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어 들였느냐 아니냐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은 신자라도 죄의 본성은 살아 있기에 평생을 두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나가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지만 세속 쾌락과 죄악에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가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자라나가지 않고 계속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심판”은 더 이상 받지 않지만, 거룩하고 성숙해지라고 “징계”는 받는 것입니다.(히12:4-13 참조)
요컨대 예수 믿은 후부터 천국 갈 때까지의 성화의 과정에 두 종류 혹은 두 단계의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이와 어른으로” 결코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를 거쳐서 어른이 된다면 그 합격점에 이르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또 하나님도 그렇게 나누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이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정작 바울 사도도 그럴 수 없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다른 서신서에서 강조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될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이 땅에선 완전히 흠이 없이 신령한 신자 즉, 그리스도 안의 어른이 되는 자는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의 어린이일 뿐입니다. 대신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1:12)고 권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농부가 작물을 심고 가꾸듯이 예수 믿은 후의 신자가 자신의 성품과 삶을 의롭게 가꿔서 자라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예수 믿어 사도가 된 후의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는 내용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15:9)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엡3: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한 지체 속에서 죄의 법과 극렬하게 싸우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고 고백합니다.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성화의 완성은 천국에서 이뤄질 것이라는 소망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 같은 자도 평생을 두고 자신을 “그리스도 안의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로 봤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대했던” 것입니다.
젖과 단단한 식물
살펴본 대로 바울은 사람을 사람의 영으로만 행하는 육(육신)에 속한 불신자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신령한 자 둘로만 나누고 있습니다. 따라서 젖과 밥(단단한 식물)도 엄격히 따지자면 이 일관된 의미에 맞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젖은 세상 영을 받아 사람의 지혜로만 행하는 육에 속한 자가 받을 말씀입니다. 밥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성령의 지혜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신자가 받을 말씀입니다.
전자는 후자의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깨닫지도 못하고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할 수 있다”(2:14)고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밥을 줘도 못 먹고 젖만 받아먹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3:2) 그럼에도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대하듯이, 아니면 그들을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로 보았다 해도, 복음의 핵심 진리(밥)를 먹여주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바도 동일합니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2,13) 젖을 먹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다시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의의 말씀(십자가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복음을 듣긴 들었어도 성령의 거듭난 체험이 없는 자입니다. 엄격히 말해 불신자인데 젖을 먹을 수준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사항은 젖과 밥은 사실상 설명의 편의를 위한 대조적 비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사람에 따라 그 내용이 결코 달라질 수 없습니다. 불신자나 신자나 항상 듣고 배우고 깨우쳐야 할 것은 예수님의 대속적 은혜와 권능일 뿐입니다. 구태여 구분을 하자면 우선 불신자에게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집중해서 전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이미 거듭난 신자는 믿음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지혜와 죄악과 싸워 이기는 말씀의 능력을 배워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에게 어린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없듯이, 이 또한 단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비유에 불과함, 신자가 듣고 배울 말씀의 구분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을 오직 예수님의 은혜 중심으로 읽고 묵상하며 깨우쳐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시대적 공간적 차이나 신학적 용어 등에서 어려운 것은 전문 목회자의 도움을 얻어야 하지만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는 성령의 간섭이 우선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이미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초신자반, 제자반, 사역자반으로 나눈 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실제 적용을 위해 편의상 나눈 것이지 없던 믿음을 새롭게 생성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믿음을 견고케 하여서 죄악과 흑암의 세력을 잘 이겨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신자를 통해 누룩처럼 세상에 번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 생명
이미 예수를 믿은 신자(believer after born-again)를 어린 신자와 성숙한 신자로 나누고 젖과 단단한 식물로 구분해 말씀을 먹어야 한다거나, 신자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며 하나님의 뜻과도 상충됩니다. 단 교회 교인들 중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church member before born-again)들도 많이 있으므로 초신자 반에서 이신칭의에 관한 교리부터 가르칠 뿐입니다.
사실은 이런 복잡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비유 그대로 어린아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나는 젖 먹는 것이 너무 좋아서 평생 자라지 않겠다는 어린이는 없습니다. 지체나 뇌성 불구자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에는 말입니다. 어린이일수록 더욱 알고 싶어 하고 어서 빨리 자라고 싶어 합니다. 집요할 정도로 질문을 많이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청소년 때는 속히 어른이 되고 싶어 미칩니다.
아이가 무지해서, 교만해서,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성장을 지향합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자라고 활동합니다. 식욕, 성욕, 지식욕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로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활용하면 아주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과하지 않게 발휘하고 충족시켜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게 자기 뜻대로만 그것들을 사용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육(육신, natural, carnal)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어 거듭나는 순간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 또한 당연히 성장을 지향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비록 현실의 삶이 고달프거나 세상의 악이 유혹하거나 자기 속의 죄성과 게으른 습성이 그 성장을 지연 내지 방해를 할지언정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싶다는 소원은 분명히 있습니다. 신자마다 실제로 헌신하여 성장을 이뤄내는 정도만 다를 뿐입니다.
문제는 성령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신자의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헌신과 실천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은 물론 그 성장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정체해 있을 때에는 성령의 안타까운 탄식과 간구만 있을 뿐입니다. 신자가 말씀과 기도를 등한히 하면 영적으로 뭔가 갈급하고 심지어 눌리는 느낌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장하라는 성령의 깨우침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질문자께서 인정하셨듯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바울의 아래 권면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그 일에 등한히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7/17/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