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에 관한 세 가지 의문
[질문]
선교단체에 가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 땅 끝까지의 개념과 히브리서 13장 13절 영문 밖의 개념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있는 곳인가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면 주님 다시 오신다는 건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나요?
[답변]
- 땅 끝은 어디인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님이 땅 끝이라고 했을 때는 지리적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이라고 점층 되는 표현법을 사용했습니다. 자기가 속한 지역(예루살렘), 자기 나라(유대), 이웃 나라(사마리아는 유대와 이웃한 북이스라엘로 앗시리아와 혼혈족이 되었다고 유대인들이 경멸함), 땅 끝(먼 여러 나라들)의 순서입니다. 인종적 개념을 더 중시했습니다. 요컨대 문화, 언어, 종족을 뛰어넘는 전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절대로 차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특정한 한 곳을 지정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꼭 멀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구는 둥글기에 사실상 정해진 땅 끝도 없습니다. 일부 영어 성경에 복수로 번역되어 있다시피(to the ends of the earth)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모든 지역입니다.
또 구약적인, 다른 말로 유대인적인 개념에서 원방(땅 끝 나라)은 적국을 말합니다. 따라서 대적과 원수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거리로만 따지면 예루살렘에서 출발하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다시 그곳으로 오는 것이 가장 멉니다. 그럼 논리적으로는 자기 등 뒤가 됩니다. 평소에 무관심했고 소외 배척했던 곳들도 땅 끝입니다.
모든 신자는 주님으로부터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마28:19,20) 그러나 모두가 해외선교사로 헌신할 필요는 없습니다. “땅 끝”은 이처럼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모든 지역과 사람으로 해석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언어가 같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전도(evangelism)인데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문화 언어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선교(mission)라고 구별하는데 그 지역의 문화, 관습, 언어를 교육받은 전문가라야 할 수 있습니다.
해외선교사들은 그래서 가장 먼저 현지어를 습득해야 하고 또 현지어로 성경을 번역하여야 합니다. 만약 현지어로 번역된 성경이 이미 있다면 예수 십자가 구원진리를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복음으로 변화되어 주의 종으로 헌신한 현지인을 목회자로 세워서 그로 교회를 개척 확장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 영문 밖은 어디인가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그런즉’으로 시작했으니 반드시 앞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9-12절에서 구약의 제사제도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제사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도 강조합니다. 아직도 십자가 공로 외에 다른 인간적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약제사는 단순히 예수 십자가의 모형일 뿐이고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은 넘치도록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11절에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짐승의 시체)는 영문밖에 불사름이니라.”고 합니다. 바로 십자가 대속구원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대속구원)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2절) 여기서 성문 밖은 골고다 언덕입니다. 골고다에서 흘리신 피로 구원을 이루었고 인간의 몸을 입은 그 육신은 골고다(영문 밖)에서 짐승이 불사름을 당하듯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13절)라고 말합니다. 능욕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십자가 수난입니다. 영문 밖은 골고다로 상징되는 즉, 죄인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14절)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천국 영광이 기다리고 있고 이 땅은 잠시 머물 곳이므로 주님처럼 세상의 어떤 능욕이라도 기꺼이 감수하고 죽음으로 영혼구원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10, 11, 12절이 평행되는 구절로 “성문 밖과 영문 밖”은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 “영문 밖”은 예수님의 대속죽음을 실감나게 짐승의 불사름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수식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신에 본문의 주제는 순교를 각오하며 영혼 구원에 매진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 같은 다른 교훈에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문 밖은 복음이 안 들어간 지역을 뜻하기보다는 오직 순전한 십자가 복음을 죽음을 무릅쓰고 힘써 전하라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타당합니다.
-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주님이 다시 오시는가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원칙적으로는 그러하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선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는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자기들 언어로 성경을 갖지 못한 2천여 미전도 종족들의 언어로 성경번역 작업을 지금 활발히 벌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든 나라가 기독교 선교사 비자를 내어 줄 때라고 구체적으로 적용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채 번역도 되기 전에 일부 종족들이 멸종하기도 하고, 모든 나라가 선교사 비자를 자유롭게 내어주는 일은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벌써 이런 현실적 측면만 따져 봐도 문자적 적용은 무리일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을 인간이 측정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상기의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써 모든 이가 복음을 들어야한다는 당위성과 들었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래서 끝이 오기 전에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소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재림의 때는 오직 성삼위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신자들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질 때까지는 심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최대한 많은 죄인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그분의 작정과 모순 상충되는 점이 전혀 없이 인간들이 완악하게 십자가 사랑을 외면 거역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때가 차면 다시 오실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이 재림의 때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퍼져 다들 예수를 믿을 때에는 사실상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땅에 십자가가 완전히 부인 되고 예수님 사랑을 전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때에는 다시 오셔서 마지막 심판으로 세상을 종결지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종말의 때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람들의 죄에 대한 인식이 옅어지다 못해 모든 인간 행위가 아예 죄로 간주되지 않는 시점이어야 합니다. 또 그런 영적 흐름에 거스르는 극소수의 신자들이 세상(마지막 적그리스도)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상기 말씀 앞의 4-13절에서 그런 내용으로 말씀하셨고, 특별히 마지막 13절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끝까지 복음 지키며 그 은혜와 권능 안에 살아야할 뿐 아니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때쯤 되면 복음 안에 살기만 해도 복음은 전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해 재림의 때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앞당길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해외 선교에 매진했다 할지라도 종말의 때에 단 한 치도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더 많은 죄인이 구원 받기를 원하셔서 당신만의 긍휼로 참고 계시고 이미 불법의 비밀이 활동해도 성령의 기운으로 막고 계신데 그 종말의 때를 신자들이 앞당기려 드는 것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당장 주변의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친지들 중에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많은데 주님이 당장 오시면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며 그들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입니까? 현재의 너무나 타락한 죄악과 영적실상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애통해서 순간적으로 마라나타 주님 어서 와달라고 한탄하는 것은 몰라도, 신자들만의 영광스런 구원을 바라며 다시 오심을 재촉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신앙입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속히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요한 사도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극심한 환난과 박해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견디는 힘을 주려는 뜻입니다. 신자들더러 종말을 앞당기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9/30/2016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 라멕, 소돔과 고모라가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