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에 대한 두 가지 추가 질문
추가 질문 (1)
운영자님, 운영자님이 목사님이신 것 같아 그냥 목사님이라 호칭하겠습니다.
저의 질문에 대한 긴 답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성령이 주신 지혜라는 것도, 온통 성경만 인용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사상 찰학 선입과 자화상이지 않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님의 믿음이 적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 인간의 한계가 그렇게 만들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저를 세례주시던 권목사님도 목사님과 거의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요. 아니 내가 젊었을 때였지만 권목사님은 목사님보다 더 성경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가 세례받은 지 15년 정도 지난 후에 신문에서 보았는데 이단의 괴수래요.
그것이 나의 신앙의 4번째 질문이지요: 지독히 성경적인 사람은 이단이 될 수 있다(?) 권 목사님이 가지셨던 성령이 주신지혜는 능히 모든 것을 이겨냈을 텐데.. 그러면 그가 말했던 성령이 주신 지혜는 단지 자신의 생각이었나? 권목사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애플의 예라면 나의 4번째 질문에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그 예가 좀 적절치 않아 문제이긴 하지만.
1) 절대 진리는 밖이고 안이고 따로 없어 보입니다.
2) 내부 사람이 잘 볼 수 있다는 생각은 꼭 맞은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보통의 경우 밖에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가 있다는 것이 통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 나를 세례를 주었던 권목사님도 내부 사람이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이 이단으로 가는 통로였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 외 많은 질문들이 있으나: 두 가지밖에 없다, 회심, 신학적 체계, 불완전한 인간, 성경의 핵심 진리, 다양한 해석, 정통신학, 기독교 역사의 의미, 삶에서 믿음을 적용 실천하는 문제 등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질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추가질문 (1) 대한 답변
제가 염려했던 그대로 평행선을 달리듯 서로 겉돌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했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사상, 철학, 선입관, 자화상이지 않느냐?"고 반문하시면 저로선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구원과 믿음의 과정에 개입하는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 성령의 거듭남, 성령의 깨우침 등도 결국은 인간의 지정의적 활동을 통해야 하는 것은 분명 옳습니다. 인간이 목석(木石)처럼 가만히 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뿅”하고 믿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 쪽에서 마음을 열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하고, 영원해 대해서 묵상 추구하며, 성령의 음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인간의 지적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또 그런 과정에 자신의 사상과 철학과 선입관과 자화상 등이 성경을 접근, 분석, 이해, 판단, 적용하는데 부정적 혹은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정의적 활동 영역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자기 생각에 도무지 예수를 인정할 수 없으면 안 믿는 것입니다. 또 그 반대로 자기가 판단하여 예수를 인정하고 동의하여 믿기로 결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은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믿음과는 별개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머리로만 믿은 것에 불과합니다.
님께서 문의하신 주제는 자신의 사상, 철학, 선입관, 자화상이 투영된 각자만의 예수 상(像)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갖게 되는 예수 상은 그분과의 인격적 대면 체험을 통해 성령이 심어주는 것입니다. 내가 쌓아놓은 사상을 통해 내가 정립하는 예수 상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지정의적 영역 안에 그 믿음이 생기긴 해도(사실은 인간의 생각을 통하지 않는 믿음이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음),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동원해 자기가 그려내는 초상화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심어주는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인생의 극적전환이 따르며(혹은 통해서이며), 그 후로는 성경을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 이해되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 믿기 전에 쌓아 둔 자신의 사상과 철학은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를 믿는 믿음에는 인간의 지정의적 활동은 동반되지만, 인간적인 사상과 철학은 배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동원해서 성경을 공부하는 도중이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어느 순간 성령의 간섭이 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구절이 정말로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으로 들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그 동안의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저절로 인정하게 되어 그분 앞에 완전히 항복하게 되는 회심, 개종,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자아가 철저하게 부서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후로는 예수님과 성경을 보는 관점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자기 사상과 철학을 동원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오히려 성경을 곡해하게 된다는 것도 자연히 알게 됩니다. 정말로 성경을 성경에 의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절대 진리는 성령의 거듭남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와야만 알고 소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대한 인간의 지적 한계를 인정한다면 절대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선 더더욱 성령의 간섭이 필수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경(기독교)이 말하는 궁극적 진리는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서만 죄에서 구원 받아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란 자기 죄를 스스로 절대 씻을 수 없다는 영적 한계가 인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죄 때문에 영적 무지라는 인간의 한계가 생긴 것입니다. 그럼 반드시 성령의 간섭으로 그 죄를 씻어주어야만 성경과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는 인간의 영적 한계 또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박광태님 귀한 질문을 주셨지만 온전한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실은 어떤 인간도 그럴 수는 없기에 님께 성령의 중생함의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4/27/2012
추가질문(2)
1.죄송합니다. 너무 과격한 질문을 드려서, 그러나 저는 저의 믿음에 대해 항상 가혹한 질문을 하는 버릇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질문은 저에게 하는 그리고 저를 세례 주셨던 권목사님에게 드리는 질문이거든요. 제 대답은 예, 그렇다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사 나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신 권목사님이 자기생각을 다 버리지 못했음에도 다 버렸다고 생각했고, 온전히 성경 안에 거하지 못했음에도 온전히 거한다고 생각하고, 온전한 믿음이 없었음에도 온전한 믿음에 있었다고 생각하신 것이 권목사님을 이단으로 인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분으로부터 내가 나를 완전히 못 버리고, 온전한 믿음도 없으며, 온전히 성경에 거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고백한다는 뜻으로 그 질문을 드렸습니다.
2. 저는 목사님의 답에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마음을 열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하고, 영원해 대해서 묵상 추구하며, 성령의 음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인간의 지적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라는 말씀은 내 생각이 성경적일수도 있겠구나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성경적인가를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요.
2-1 애플 같은 예를 주신 것이 나를 세례주신 지극히 성경적인 권목사님이 이단으로 빠지신 사건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을 주었습니다. 그것이 목사님과 대화중에 일어나 성령의 터치하심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3. “자신의 사상, 철학, 선입관, 자화상이 투영된 각자만의 예수 상(像)을 가져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라는 글은 저의 의도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보셨다면 제가 잘못 쓴 것입니다. 저의 글의 의도는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 개인 체험 속에서 자기 생각이 투영된 예수의 상을 저는 가지고 있고, 목사님은 아니라고 말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3-1. 오강남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자기 생각을 버려야하는데 버려지지 않는다고 고백했다면, 나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싶다는 뜻입니다.
4.” 한마디로 기독교의 절대 진리는 성령의 거듭남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와야만 알고 소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도 물론 동의합니다. 단지 제가 항상 온전한 믿음 안에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이고, 많은 그리스도들이 항상 온전한 믿음 안에 없지않느냐고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5.어쩌면 자기 생각(자신의 사상, 철학 선입관, 자화상)에 대한 정의가 평행선으로 가는 대화의(제 생각에 아니지만)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목사님의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추가질문 (2)에 대한 답변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절대 과격한 질문이 아니었으며 저로선 전혀 괘념치 않기에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예민하고 심각한 질문을 주셔도 됩니다. 거기다 저와의 인식차이가 조금씩 좁혀지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각자가 자신만의 예수 상을 가질 수 있지 않느냐에 대한 반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어 회심할 때의 상태와 그 성경적 의미에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의 영적 실체를 정확히 깨닫고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체험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 체험이 꼭 극적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본인만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적하신 대로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지 않는 자가 교회 안에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온전한 믿음은 없이 단순히 교회의 멤버인 종교인들과 실제로 성령으로 거듭난 온전한 신자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교회행사에 성실히 참여하고 종교적 언행을 하며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기에 아무도, 심지어 담임 목사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물론 온전한 신자라도 일단 믿고 난 후 세월이 흐르면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이 많이 퇴색될 수 있습니다. 이전의 본성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성경적 의미나 자신의 바뀐 신분, 자격, 위치를 잊거나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나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며 주위 성도들과 교제를 나눔으로써 다시 첫 사랑의 감격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다 또 다시 넘어지고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해 자신의 구주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면, 이것은 신자의 한계입니다.
반면에 온전한 중생의 체험을 하지 못하고 머리로만 기독교 교리를 믿는 교회 멤버들도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리마저 동의하지 않고 단순히 교회라는 공동체가 좋아서 참여만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는 이미 구원 받은 자라는 착각마저 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교회가 잘못 혹은 부족하게 가르친 이유가 가장 큽니다.
님처럼 비록 아직까지는 자기 생각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지만 예수님에 대해 정말로 온전히 알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면 아주 바람직한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읽으면서 누군가 잘 인도해주실 수 있는 분과 일대일 교리 공부를 해보시길 감히 권해 봅니다. 마음이 열려 있는 이상 분명히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적 인격적으로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열린 상태로 성경을 읽는다는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흔히들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으라고 말합니다. 그 권면은 완전히 거듭나서 전혀 의심이 없는 신자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자 할 때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그렇다고 믿고 싶은 열망, 혹은 안 믿어져도 일단 의지적으로 믿으려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논의로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자신의 사상과 철학과 선입관 모두를 완전히 옆으로 제쳐두고 우선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배워보라는 뜻입니다. 물론 아주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일단 성인이 되면 무엇을 배워도 자신의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구구셈을 배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어른도 핸드폰이 맨 처음 나올 때는 완전 백지 상태에서 매뉴얼이 설명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먼저 믿어진 후에 성경을 접했었는데, 백지 상태에서 그 말씀들을 배우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외부에서 듣던 기독교와 내부에서 배운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생생하게 깨달았습니다.
질문하신 주제가 성경을 인간의 선이해(先理解)나 선지식(先知識)을 갖고 대할 수밖에 없기에 예수 상도 각자가 다르게 가지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모든 이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인간 스스로의 지정의 활동과 성령의 깨우침을 구분해야 한다고 답변드렸습니다. 또 인간 생각만으로는 성경과 예수 상을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드렸던 답변 글은 저로선 최선을 다해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설명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저로선 그 주제에 대해 인간의 말로 추가로 더 깊이 설명드릴 재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연 제 말이 옳은지 여부를 실제 실험에 옮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아주 어렵긴 하지만 완전히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 보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가능한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또 그런 노력을 한 번쯤은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어차피, 그 표현에 조금 어폐가 있지만, 성경은 아무 변함없이 우리 앞에 영원토록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역사상 성경을 저주하고 없애려 많이 시도했어도 지금처럼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인간의 이해나 믿음 혹은 오해나 불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내 존재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능력을 가진 절대적 진리가 되거나, 아니면 끝까지 나와 아무 상관없는 오랜 종교경전에 불과해질 뿐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결과 즉, 완전한 믿음과 완전한 불신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간의 어정쩡한 단계도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의 필터를 사용해서 예수를 대하면 평생을 두고 랍비 예수로만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진공 상태로 대하는 자에게만 깊은 속내를 드러냅니다. 진리를 내가 찾아 내가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생각 내지 고집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진리 되시는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그분이 나를 변화시켜 주길 소원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답변에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저는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체험했고 또 그 체험 후에 성경의 진리 됨을 성경 그대로 받아들인 바탕에서 드린 설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그 답변의 적실성 여부 또한 체험으로만 실증(實證)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다시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상당히 어렵겠지만 완전 백지상태에서 성경이 말하는 예수 상을 그려보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저의 지금 생각을 물어오셨는데 솔직히 저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을 잊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의 절대성, 영원불변성,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능력과 은혜 등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바에 대해 의심이나 불신을 해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아직도 제 속에 펄펄 살아있는 죄의 본성 때문에 그 진리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는 자주 있어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감히 이 홈페이지를 통해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고 성경을 가르친다고 나서는 이유는 결코 제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경과 예수님의 절대적 진리 됨을 진짜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저는 항상 큰 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혔으나 완전히 회개한 자의 심정에서 그 죄를 도시락을 싸들고 경고하고 말리러 다니는 셈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온전히 깨달았고 또 그분을 개인의 구세주로 모시고 살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제 옛 본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자주 죄를 범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분의 십자가 긍휼만 날마다 순간마다 소망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너무나 뻔뻔한 신자이자 목사일 따름입니다.
5/2/2012
아무래도 함께 보는 것이 이해에 편할 것 같아서
다시 하나로 묶어 본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