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에 관한 아홉 번째 질문

조회 수 807 추천 수 25 2012.06.06 19:42:50
예수는 없다에 관한 아홉 번째 질문


[질문 1]


1.사전적의 의미는 우리가 어떤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하는데 기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의(definition)가 다르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1-2.그래서 저는 믿음, 완전함, 온전함, 가치관, 모든, 양심 등의 정확한 의미를(definition) 먼저 공유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1-3. 특히 단편적인 차원에서의 약간의 차이는 더 높은 차원에서는 너무나 다른 결과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편적인 차원에서 정확한 일치함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답변 1]

이제는 님께서 주시는 질문이나 주장에서 애매모호한 표현들이 많이 없어지고 그 의미하는 바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어서 좋습니다. 거기다 그동안 돌고 돌아서 제가 맨 먼저 전제한 것처럼 토론할 때에 사전에 어떤 개념에 대해 상호 합의해야 한다는 간단한 원리를 인정하는 데까지는 도달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님과 저는 여전히 서로 다른 곳에서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단어, 개념 등의 정의에 대해 사전적 의미로 먼저 합의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 토론이나 학술 논문에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기독교나 성경을 두고 논의할 때는 그 원론적인 면에서는 같으나 사정을 조금 달리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토론에서 드러났듯이 "믿음, 완전함, 온전함, 가치관, 모든, 양심" 등의 용어들에  대한 “정의 자체”가 신앙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에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믿음, 가치관, 양심 등이 더 그러합니다. 그 기본 정의가 전혀 다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전적 의미의 정의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논의할 때에 적합하지 않다는, 정확히 말해 많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르거나 충분하지 않기에 온전한 이해도 되지 않으며 논리적인 토의가 진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표적 단어인 '믿음'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믿음’을 자꾸만 한 번 온전히 믿은 후에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분명히 사전적, 그것도 근본적 정의로는 옳습니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관계나 어떤 물리적 사안에서조차 실제로 그런 완전한 믿음을 가진 경우는 아주 드물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사전적 정의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는 한 죄인이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항복하는 믿음은 물론, 또 그 후에 신자가 매일 자기를 부인하며 평생을 두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는 부침이 심한 영적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논의의 대상 자체가 그런 사전적 정의의 한계로 묶어놓을 차원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정의는 “예수를 온전히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또 간단히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 믿음”과 “구원 후에 성화를 이뤄나갈 때 동원되는 믿음”으로 대별됩니다. 벌써 믿음의 구체적인 정의 자체가 내용이 다른 둘로 나뉘며, 그 각각의 내용도 깊고도 다양합니다.

비유컨대 믿음이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ABC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정의만으로 기독교의 이 두 개의 믿음을 제대로 설명해낼 재간은 없습니다. 마치 3차 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너무나 당연히 99단을 모르면 안 되지만, 삼차방정식 자체를 구구단만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논의가 처음 시잘 될 때의 핵심질문은 “예수를 자신의 사상과 철학으로 자신만의 예수 상을 그려야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혹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면서 어떤 토론이든 반드시 논의의 범주를 정해야 하는데 이미 그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제 답변을 온전히 이해 못하실 것이라고 전제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그 ‘질문’ 자체만으로 충분히 판단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상을 자기가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 상과 다를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는 믿음의 의미와  자기가 그린 예수를 믿는 믿음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의 정의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사안을 두고 토의할 때는 그 논의의 준거나 범위가 상호 명확히 일치해야 합니다. Apple사 직원이 ‘내부에서 본 회사의 경영성과와 향후전망’에 관한 토의를 한다면 Google의 직원은 설령 하버드 대학 경영학박사 출신이라도 아예 참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라고 전제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의 예수를 믿는 믿음과 자기가 만들어내는 예수를 믿는 믿음은 그 의미가 다르기에 서로 논의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호 토론과 이해는 당연히 힘들뿐 아니라 지금까지처럼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마저 서로 뜻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하나만의 사전적 정의는 님이 말한 것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 믿음”과 “구원 후의 신앙생활을 할 때의 믿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믿음”이 아니라, “예수 믿는 믿음의 대상과 내용”에 관해 정의(definition)를 내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이라는 단어 하나의, 그것도 사전적 정의만 가지고 논의를 이끌려들면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지금처럼 같은 질문과 답변을 아홉 번째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에 관한 어떤 주제이든 기독교 밖에 있는 자가 그 안에 있는 자와 논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범(凡)기독교인이라 해도 구원의 의미, 과정, 결과 등에 관해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끼리는 토론은 할 수 있어도 서로 합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논의의 준거(準據, standard)나 범위(範圍, category)가 상호 명확히 일치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단어나 자구 하나하나의 정의에 합의하자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넓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또 다시 ‘준거’나 ‘범위’의 사전적 정의를 내리자고는 하지 마십시오.) ‘범위’는 믿는 자라야 이해되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내용을 말하며, ‘준거’는 성경이 말하는 바에 기준해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각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당연히 고려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핵심적 교리를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고서 그에 바탕을 둔 설명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의 알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질문하신 주제에 비추어 누차 강조했습니다. 성경적인 예수 상을 먼저 믿어야만 성경이 말하는 예수 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만은 먼저 온전한 성경적 믿음을 가져야만 나머지 믿음의 세부적인 사항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님의 “단편적인 차원에서 정확한 일치함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래야만 더 높은 차원의 일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 토론에만 해당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높은 차원에서 일치를 본 후라야 단편적인 차원 또한 정확하게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전적 정의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려 접근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먼저 갖고서 사전적 정의는 당연히 기본 울타리로 두르되 성경이 말하는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을 알아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처음 질문하실 때의 핵심 주제에 대한 논의는 이제 다 사라지고 지금은 단어의 정의만 논하고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님은 믿음이라는 용어의 정의에 상호 합의가 안 되니까 제가 드린 설명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정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예 처음부터 그럴 것을 예측하고 전체 그림이 확실히 그려지면 나머지 세부사항도 그려질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질문 2 & 3]

2. 회심이 모든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라면 “순간적, 일시적, 때때로”착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계속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때 모든 가치관이 아니라 핵심 혹은 중요 가치관이 확 바뀌었다든지 하는 표현을 쓴다면 “순간적, 일시적, 때때로”의 착각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2-1.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 철학을 모두 버렸는데 자기 생각 철학이 다시 살아나 순간적 일시적 때때로 착각을 하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 철학을 다 버렸다는 표현은 오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3. “회심이란 바로 모든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며, 성화는 그 바뀐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서 저의 생각은  회심이란 중요 혹은 핵심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며, 성화는 모든 가치관이 다 바뀌어 가는 것이다. 라고 목사님과 다른 점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답변 2 & 3]

상기 1과 같은 맥락의 질문이기에 또 다시 같은 맥락에서 답변드립니다. 회심, 가치관, 모든, 믿음 등의 사전적 정의로는 님이 말하는 바가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의하고 있는 것은 각각의 단어의 정의가 아닙니다. 믿기 전의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의 허망하고 혼란스런 영적 실태와, 믿은 후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성이 살아서 영적으로도 변화무쌍한 신자의 믿음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사전적 정의로 고착된 믿음의 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인간의 영혼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심할 때에 “모든 가치관”이 바뀐다고 ‘모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만은 제 불찰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자화상에 관한 첫 답변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댓글과 답글의 토론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것인데다, 또 그 과정 중에서도 핵심주제와 직접 연관된 설명이 아니었기에 조금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틀린 설명만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믿기 전에 세상과 자신을 가장 중하게 여겼던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제는 그 주의로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게 됩니다. 인본주의적 가치관은 여러 하부 가치관을 망라하는 큰 틀입니다. 어떤 사안을 두고  비교, 분석, 판단, 결단함에 자신의 사고가 지속적으로 한 쪽으로만 흘러가는 기본 방향입니다. 당연히 그 큰 틀 안에 신관, 세계관, 인간관, 역사관, 종말관, 종교관, 도덕관, 사회관, 문화관 등등의 세부적 가치관들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완전히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회심할 때에 모든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고의 흐름의 큰 틀을 신본주의적인 그것으로 전환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본주의적인 세부 가치관들도 모두 버리긴 했어도 아직은 신본주의적 세부 가치관들을 세우기 전입니다. 따라서 구원 후에 가치관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여러 세부 가치관들을 신본주의에 맞추어 수정해 나가는 작업을 평생토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 핵심적 사고의 흐름마저도 “순간적, 일시적, 때때로” 이전의 인본주의로 돌아갈 수는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또 다시 사전적 정의를 적용해서 그렇다면 회심은 불완전한 것이며, 가치관도 바뀌지 않은 것 아니냐고 따지면 정말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지금까지 논의한 핵심은 예수를 믿은 후에 첫 사랑의 감격을 잊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저는 “온전한 회심”(지겨울 정도로 설명하지만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칭의의 믿음은 온전함)을 한 후에도 신자라는 이미 바뀐 신분과 특권을 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후에는 ‘회심’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세상 쪽으로 흐른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고치려고 즉, 다시 그 방향을 하나님 쪽으로 돌리려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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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님들께서 봐도 9차례나 걸쳐서 지루한(?) 논의를 이어가는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 가장 중요하게는 본 홈페이지 사역을 하는 이유가 바로 “불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고 회의가 많은 지성적 교인을 온전한 믿음 위에 세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개인적 의견을 게시한 것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으로 올라오는 글에는 특별히 이단적 사상을 가지고 홈피를 훼방할 목적이 아닌 이상 운영자로선 마땅히 답변을 드려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 질문자님에 대한 직접적 답변도 되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가 갖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해야“(벧전3:15)할 것입니다.  

- 거기다 이런 논의를 이어가는 중에 제 설명이 일부 세밀하지 못했던 것 같아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단어 하나하나 선택에도 아주 신중을 기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하게 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질문자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그럼에도 그 간의 논의에서 본질적인 주제는 사라지고 대신에 단어의 정의에 비추어 세부적인 표현을 가지고 계속 동일한 논의를 했어야 했다는 점에선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 님께서 아직도 제게 물을 것이 많다고 하셨는데 아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왕이면 성경이나 예수님이나 기독교 신앙에 관한 새로운 주제에 대한 질문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6/5/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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