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적인 사랑으로 결혼해도 되는지요?
[질문]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장로인 아버지로 부터 상처를 많이 받아 유독 외로움을 타는 자매를 만났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하면서 우는 자매의 모습을 보고 종교 때문에 심한 핍박을 받은 저희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자매가 예쁘게 생기진 않았고 자존감도 없습니다. 처음엔 별로 관심이 없다가 어머니 생각에 동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 자매에게 고백도 해봤습니다만 마음이 약한 자매는 저를 별로 안 좋아 하더군요. 아무래도 강하고 당당하고 재미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학창시절을 가정사에 대해 고민하며 애써 외면하며 인내하며 지냈습니다. 이제 와서 저와 비슷한 자매를 보고 예전의 저와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서 너무 힘듭니다. 도와주세요.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요? 이 자매를 달라고 기도해야할까요? 저는 뜨거운 마음은 있지만 이 자매는 절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지켜볼 뿐입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성격의 저보다 더 당당하고 재미있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기도 해봤지만 도무지 되질 않습니다. 이 자매를 만난 자체가 하나님께 원망이 들만큼 저의 아픈 부분입니다. 이 자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할까요?
[답변]
동정에서 발전되었더라도 사랑하는 자매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풋풋해서 보기에 좋고 부럽습니다. 그런데 일단 사랑이라는 열병을 앓고 있는 자에겐 어떤 권면과 충고도 사실은 백약이 무효입니다. 나아가 성경적인 정답도 없습니다. 오직 형제님의 판단과 선택과 실행에 달린 문제입니다. 제가 드리는 답변이 혹시라도 원하는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적 정답은 창세기 2장에 나와 있지만 인간이 죄로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나는 후대의 인간 중에는 그렇게 연애하여서 결혼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아니 엄격히 말해 본성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정답은 정답이되 이상적인 답일 뿐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르침은 분명 정답이지만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아직 죄의 본성이 살아있기에 그대로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자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아담 이후의 모든 결혼은 죄인끼리의 결혼입니다. 신자는 그 점을 잘 분별하여 반드시 서로 불쌍히 여기고 상대의 나와 다른 점들과 단점들을 용납하고 인내와 관용으로 끝까지 주님을 대하듯 사랑하고 섬기는 연애와 결혼을 해야 합니다. (현재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는 창세기강해의 #18-20의 글도 참조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니라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2-25)
상기 구절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 결혼의 이상적 모습을 간단히 축약해서 형제님의 경우에 적용해봅시다. 가장 먼저 하나님이 붙여준 결혼이어야 합니다. 이 자매가 하나님이 붙여주었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일부러 고난에 빠트려서 힘들고 괴롭게 만들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자의 유익과 성장을 위한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으며 또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의 인도가 따릅니다.
물론 현재 형제님이 겪고 있는 상황과 느끼는 감정 자체는 분명 괴롭고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여준 상대라면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확신과 평강이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감사가 나옵니다. 그 자매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생깁니다. 나아가 그런 결단과 헌신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차후의 여건과 상황의 전개 또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릅니다.
우선 이런 면에서 형제님의 생각과 상황을 엄밀히 재점검해보십시오. 질문을 문자적으로만 판단해보면 현재 하나님께 원망이 들고 본인이 힘들기만 하고 확신과 평강은 없으며 상황의 전개도 완전히 부정적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붙여준 상대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둘째, 반드시 서로 간에 이성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사랑으로는 연애와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본인이 원하여 선택했다면 짝사랑을, 그것도 평생을 두고 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정답이 없고 형제님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단 아무 진척이 없어도, 상대가 끝까지 외면해도, 가끔 상담하고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아니 그 자매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사랑이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이미 괴롭고 원망이 생기고 곤혹스럽다면 순전한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럽지 않은 사랑, 연애, 결혼이 아닌 것입니다. 순전하지 않다면 불순물이 개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매로 인해 이익을 보겠다든지, 내 욕심만 앞세우는 이기심이 작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님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 입었다든지, 내가 이렇게까지 진정으로 도와주겠다는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데 못 알아주는 것에 대한 섭섭함과 미움 등이 사랑보다 더 크게 작용했다는 뜻입니다.
순전한 사랑은 아무 결실 보상 없어도 오직 상대에게 베푸는 것이어야 합니다. 과연 진정한 사랑으로 자매를 대하고 있는지 다시 엄밀하게 점검해 보십시오. 오직 상대가 원하는 대로,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형제님과는 행복한 결합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런 뜻으로 이미 통보했는데도 형제님 혼자 고집하는 것은 자매님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또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합니다. 남편이 그 가정에서 하나님 앞에 대표자로, 또 가족을 이끌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애와 결혼에서 이성간의 뜨거운 감정이 따르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남편과 가장으로써 아내와 가족 구성원 전부가 존경할 수 있는 인격과 지혜와 영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신자와만 결혼하라는 것도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삶의 목적 방식 방향이 같아야지 존경과 사랑은 물론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매님이 형제님처럼 연약한 상대가 아니라 좀 더 당당하고 재미있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뜻을 존경해주어야 합니다. 첨언하자면 자매들은 강한 아버지에게 상처 받았으면서도 대체로 아버지와 같은 유형의 사람을 원하거나 결혼하게 됩니다. 지금 당당하고 강한 남자를 원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동정이 바탕이 된 연애와 결혼은 나중에 후회할 확률이 높습니다. 인격과 가치관에서 서로 존경할 상대가 되어야 합니다. 순전한 사랑이긴 하고 둘 다 연약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크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두 당사자의 자발적이고 기꺼운 합의와 헌신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자매님 말대로 비슷하게 연약한 상대끼리 결혼은 서로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매님들이 형제님들보다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더 현명한 것 같습니다.
현재로선 형제님은 성경적인 정답과는 거리가 너무 먼 상황입니다. 문제는 그 자매님의 선택과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고 어리석고 연약하기에 형제님의 선택과 판단도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이 어떤 길을 택해도 형제님의 자유와 책임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틀린 답 혹은 올바른 해결책이란 없습니다. 신자의 자유의지에 맡겨진 문제로 그 결과를 자신이 책임지면 됩니다.
신자들이 이런 주제에서 크게 오해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상적 자매를 곧바로 만나게 해주고 또 아주 쉽게 결혼시켜 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형제님의 경우에도 기도만 하면 그 자매님의 생각을 하나님이 바꿔주고 상황이 호전되어서 둘 사이에 아주 큰 진전이 있고 형제님이 바라는 대로 결말지어질 것이라는 기대하는데 오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백마 탄 왕자나 신데렐라는 동화일 뿐입니다.
현실은 수고와 고난이 불변의 상수로 존재하며 믿음은 그런 것들과의 끝없는 싸움입니다. 신자는 상황과 사람과 하나님과 머리 싸매고 씨름하면서 모든 현실적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야만 합니다. 믿음은 소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뜻은 포기하면서 주님께 순종할 힘을 얻는데 동원되는 것입니다. 매직 쇼를 일으키는 능력이 믿음이 아닙니다. 신자는 가만히 앉아있고 하나님이 나서서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해결해주는 법은 평생에 한두 번 아주 특별한 경우, 그것도 하나님이 당신의 큰일을 맡길 당신의 택한 종에게 말고는 없습니다.
이 문제도 지금부터 형제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어쨌든 지금 이상적 긍정적 상황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형제님이 끝까지 자매님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단 자매님의 생각과 상황이 바뀌도록 기도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형제님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자매님이 바라는 대로 당당하고 남자답고 강하며 재미있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다 형제님이 그렇게 변해 가는데도 자매님이 끝까지(평생을 두고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과연 그 자매를 순전히 사랑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지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결정과 헌신이 순전하다면 아무 결실은커녕 진전이 없어도 감사와 기쁨이 따라 나와야 합니다. 최소한도 확신과 평강은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자신에 대한 곤혹, 고달픔, 자매에 대한 쓰라림, 안쓰러움, 동정, 하나님에 대한 의심 원망 불신이 앞서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무 결실 없는데도 도와주는 것만으로, 아니 평생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다면 어떤 유익도 없이 헛된 일인데 과연 그런 것이 해결책이 될지 의심스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는 과정 중에 감사와 기쁨이 넘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형제님께 큰 자람이 있습니다. 참 사랑이 무엇인지와 순전한 인간관계는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에 관한 지혜도 생기고,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장점이 자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도 깊어집니다. 그분과의 관계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진정하고도 신실하게끔 성숙됩니다. 나중에는 그 자매와 연애나 결혼을 전혀 하지 못해도, 아니 못함으로 인해서 더 큰 유익과 성숙이 있어서 더 큰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형제님 하고 싶은 대로 선택 결단 실행하십시오. 누차 강조하지만 감사와 기쁨과 확신과 평강이 없으면 차라리 당장 포기하십시오. 순전한 사랑으로 행한 일이라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반드시 형제님의 자람이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현실적으로도 사실은 가장 빠른 길입니다. 형제님 앞에 놓인 선택은 둘 뿐입니다. 계속 관계를 지속하여 결혼까지 이를 것인지 당장 지금 포기할 것인지 둘 말입니다. 후자를 선택했다면 아무 미련 없이 잊으면 됩니다. 만약 전자를 선택한다면 형제님부터 바뀌는 것이 자매님의 마음을 여는 최선의 길이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아무 결실이 없다면 없는 대로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9/24/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