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원 후에 바로 휴거되지 않나요?

조회 수 965 추천 수 15 2014.06.20 00:42:21
왜 구원 후에 바로 휴거되지 않나요?

[질문]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원죄와 자범죄까지 다 받았는데 그럼 죄가 없으니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하는데 왜 우리들은 죽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영생을 약속하신 것은 그럼 그건 거짓말이 되는 것일까요? "

일단 육체가 영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불가능한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2-1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15:54)  

창세기 말씀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는 사망이 명하여졌고, 로마서 말씀대로 그 사망이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 고린도전서 말씀대로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사람은 재림하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주님을 만나 영원히 살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불완전하고 썩을 수밖에 없는 육체대신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살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쉽게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다시 조금 더 생각해보니 추가적인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면(엡2:14~18) 왜 거듭난 사람들은 바로 휴거되지 않고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고난과 슬픔 속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점이었습니다.

거듭나자마자 바로 휴거가 되거나 십자가의 강도와는 다르게 불의의 사고를 통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 땅에 살아가면서 성화의 과정 속에서 신앙적으로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 육신의 고난으로 인하여 낙망과 좌절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 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 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해 왔으나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어서 막연하게 몇 가지로 해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고 은혜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살아간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바울 사도는 달려갈 길과 사명이 있노라 말했고, 말씀에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고전1:21) 하셔서 전도의 사명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전도는 내가 말을 전할 뿐이지 능력은 주께서 주시며,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도 주께서 해 주시는 것으로 단순히 저는 말을 전하는 입술이 되어 평안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꼭 많은 성도들이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엘리야 시대가 신앙적으로 암흑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능력 있던 엘리야 대신 아직은 부족하게 보였던 엘리사가 있기 때문에 엘리야를 살아서 불병거를 태워 승천하게 하신 기록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동시에 사역을 했다면 더 큰 사역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게 주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충분한 역사를 보여주셨다는 점에서 꼭 믿는 자 모두가 살아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수고해야하기 때문에 거듭난 성도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단순히 전도를 위해서 이 땅에서 살게 하셨을까 싶었습니다.

둘. 불순종으로 잃어지고 방황했던 성도에게 훈련과 은혜의 연단이 필요해서 세상에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13:17)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는데, 그들이 광야 길을 지나지 않고 더 쉽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들을 가까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음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악함을 알고 계셨고, 순종과 예배에 대하여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과 동일하게 신자에게 이 땅에서 고난 속에서 순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해서 허락하신 고난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본다고 해도 실상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서 제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잃어지는 것이나 상실되는 것도 아니고, 또 순종의 시간이 테스트가 되어 제 믿음이 부족하면 구원을 잃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도리어 주님께서 저를 이끌어 주시고 풍성한 은혜로 함께 해 주시는 과정 속에서 기쁨을 느끼며 영광을 돌리는 삶이 신앙생활이라는 점에서 광야 40년과는 다르다고 생각되어 이것도 역시 부족한 이유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셋.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연단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라가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에 대하여 더욱 알아가는 과정으로서 이 땅에 삶이 필요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변]

구원 받은 신자를 왜 바로 휴거시키지 않고 현실에서 이런 저런 고난과 실패를 겪게 하는지 많은 성도들이 궁금해 합니다. 형제님이 묵상하여 추정한 세 가지 견해는 그 질문에 대한 아주 훌륭한 성경적 답변입니다. 그 셋만 온전히 이해하고 신앙생활에 제대로 반영해도 신앙은 크게 성숙될 것입니다. 이왕에 질문을 주셨기에 몇 가지 사항을 보완해보겠습니다.

죄가 없어진(?) 구원  

“예수님의 피로 원죄와 자범죄까지 구원을 다 받았는데 그럼 죄가 없으니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 받았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에 지었던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죄의 상관관계를 좀 더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이해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죄를 인간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벗어나 행한 모든 잘못이라고만 이해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 포함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의 범위를 예쁜 여인을 보며 생각으로 간음하고 말로 형제를 바보라 욕하여 살인하는 것까지 확장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각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자기 의지로 고의로 행한 행위입니다. 생각으로 짓는 죄도 행동의 죄입니다. 주님이 그런 죄들만 사하려고 오신 것이 아님은 질문자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죄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반대편으로 향하게 만드는 성향, 경향, 습성, 파워 등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길 싫어하고 스스로 낙원의 주인이 되려 함으로써 죄가 모든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의 발단이자,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을 지고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인간을, 그것도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태생적 성향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 성향으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판단이 파생되고 그분의 의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십계명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계명을 앞에 두고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 계명을 뒤에 두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서있지 않으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물론 타인의 생명, 재산, 육체, 인격에 손상을 주며 마지막으로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마음으로 시기하고 탐하는 죄까지 범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히지 밖에서 인간에게 들어가는 것이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마15:19,20) 바울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8:7)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바로 서려면 그 태생적 죄인의 상태에서 그분이 용납할 수 있는 의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행동(다시 강조하지만 생각의 죄까지 포함)으로 죄를 지어 죄인이 된 것이 옳다면 각각의 잘못된 모든 행위들을 회개하고 고치면 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의 행위구원관입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보편적 체험과도 상충됩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식으로 조변석개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도 자신을 통제는 물론 잘 모르는 판에 어떻게 온전한 회개가 가능하겠습니까? 자력구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태생적 죄인이자, 그 영혼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인지라 하나님이 그 영혼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제2의 창조를 일으켜서 거듭나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새 생명의 선물을 베푸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칭의의 의미

하나님이 십자가 주님의 의로 덧입혀서 구원해준다는 의미도 한 사람의 인격체 전부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통회자백하며 오직 주님의 대속 은혜만을 소원하는 자는 현재 어떤 상태에 있던지, 흉악한 살인범이든 더러운 창기이든 간에 있는 모습 그대로 용서해주십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구원으로 예정하신 자를 때가 되어 성령의 간섭으로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품으로 당신께서 옮겨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한 잃어버린 죄인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신 것이 바로 구원의 첫 단계인 칭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회적, 과거적, 일방적, 취소불능의 구원입니다. 그 신분이 흑암과 사탄과 사망의 나라 소속에서 빛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 소속으로 영원히 바뀐 것입니다.  

죄와 연관해서 말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죄의 삯인 사망의 벌을 받아야만 하지만 주님의 대속 은혜로 그 죄의 형벌이 면제된 것입니다. 죄의 본질 즉, 자기중심의 성향인 육신의 생각은 구원 받은 성도라도 그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이란 인간 쪽에서 보면 인간중심 성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지 처절히 깨닫고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바꾸겠다고 결단 한 것입니다. 인생관과 가치관의 방향만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유턴한 것입니다.

따라서 칭의는 “죄의 형벌”만 면제된 것이지(free from the penalty of the sin)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대신 해결한 것은 모든 인간이 반드시 져야할 “죄 값”입니다. 단순히 “인간을 위한” 희생적 선행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주님께 전가되었고 주님은 죽음으로 죄의 형벌을 그분이 대신 다 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죄 값은 다 치러졌기에 주님의 그 의를 죄인에게 덧입혀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포해 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죄인의 입장에선 십자가에 죽을 자기를 주님이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전의 자기는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체험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그 영혼이 완전히 연합해야 합니다. 주님이 단순히 우리 죄를 용서해주러 오셨다기보다는 한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과 그 죄인의 전부를 맞바꾸신 것입니다.  

질문자께서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도덕적 종교적 회개나, 교리를 이성적으로 수긍하여 의지적으로 믿기로 결단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자신이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개인적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쪽의 의지로 지난 잘못, 심지어 하나님을 몰랐던 죄도 포함하여 회개(悔改)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나님 반대쪽에 있던 죄인의 마음을 하나님 쪽으로 바꾸어주는 회심(回心)입니다.

한 죄인의 영혼에 역사하는 이런 성령의 간섭, 그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바랄 뿐이라는 고백을 하게까지의 구체적 과정은 신자 자신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점만 압니다. 자기중심에 있던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모셨기에 그분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자발적 헌신과 결단도 따릅니다.  

성화와 영화  

재차 강조하지만 구원 받았다고 해서 인간 중심의 성향, 죄의 본성까지 깨끗해진 것은 아닙니다. 성도 안에 평생토록 끈질기게 남아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얼마나 줄이느냐가 관건입니다. 신자는 그 죄의 본성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를 두고 성화라고 합니다.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싸움, 혹은 죄로 인해 오염된 상태를 씻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free from the power of the sin)

칭의와 성화는 서로 시간적으로 구별되는 다른 단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순간 이미 성화도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그분의 자녀로 완전히 들어와 있습니다. 그 보증으로 성령이 성도 안에 임재하여 영원토록 내주합니다. 그 정도와 속도에서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신자는 이전과 다른 인생을 살기로 결단 헌신 실천해야 합니다.    

성화에서 가장 먼저 싸워야 할 대상은 자꾸만 자기중심으로 흐르려는 마음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저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며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확고히 세워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범하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그 인도에 따르고 그 능력에 의존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것부터 자기를 죽이며 선한 행실을 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은 신자의 주도와 책임 하에 있습니다. 이는 신자가 평생 동안 이뤄나가야 할(빌2:12) 진행형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성도가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 주님과 얼굴을 맞대면 하게 되며 천국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것으로 영화라고 합니다. 죄와 연관하면 더 이상 죄의 본성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회복되어서 성령 안에서의 영원한 경배와 찬양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어떤 것과도 공존할 수 없기에 죄의 성향은 물론 그로 인한 결과인 악한 행위는 아예 존재조차하지 않는 곳이 천국입니다. 죄가 없어지는 것이 영화입니다.(free from the presence of the sin)  

죄와 연결해서 구원을 다시 간단히 정의하면 처음 예수 믿을 때는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죄의 형벌”(미래에 지을 죄에 대해서도)만 없애줍니다. 구원 후 이 땅에서 살 동안에는 신자는 자기 책임 하에 “죄의 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다 천국에 가면 “죄 자체”와 아예 무관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 후에 바로 휴거시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쉽게 도출됩니다. 바로 죄의 본성과 싸워 이기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부터 그런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천국에 입성할 하나님의 사람답게 바뀌어야 합니다. 죄의 본성이 인간의 자기중심성향이기에 그것에서 최대한 자유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럼 그 성향의 외적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죄도 줄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창조 당시로의 회복    

그런데 구원이 한 죄인을 죄에서 깨끗케 해주시는 것은 분명히 옳습니다만 그것만 강조 내지 집중하면 자칫 편향되고 부족한 구원관으로 흐르게 됩니다. 예컨대 질문하신 대로 어떤 이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면 죄가 들끓는 이 땅에서 계속 살게 할 것이 아니라 곧바로 천국으로 데려 가야하지 않느냐는 의아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 본질이 개인의 영혼구원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그보다 훨씬 더 광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소망은 죄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의 상태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실현되지 못했던 창조 시에 모든 인간에게 부여했던 소명을 이젠 신자를 통해 구현하려는 것입니다. 이 땅 전체를 회복하여서 우주적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그 출발은 당연히 개인 구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2-23)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4, 28-29)

쉽게 말해 신자더러 이 땅에 교회를 세우라고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조직체인 지역교회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소망과 한 믿음을 가진 자들끼리 사랑으로 섬기는 연합체를 뜻합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온전하고도 거룩한 통치를 받는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 비밀의 경륜을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공적 조직체가 지역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역사를 거룩하게 다스리는 당신의 동역자로 신자를 부른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소명은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창1:28)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거부하면서부터 인간의 영혼은 타락했고 이 땅도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농간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인간끼리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뜻이었으며 현실적으로만 따지면 인간 서로에게는 득이 되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탐스럽고 먹음직한 과일을 나눠먹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결과는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죄책감뿐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헐뜯는 꼴만, 그것도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순전한 사랑을 나눴던 부부사이에서마저, 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길 싫어하자 불순종하려는 방향으로 마음의 흐름이 바뀌고 실제로 선악과를 따먹은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후 이 땅은 죄가 들끓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닌 채 영생하게 할 수 없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고 낙원에서 쫓아냈습니다. 원시복음을 선포한(창3:15) 후에 짐승을 잡아 직접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써(창3:21) 예수님 십자가 구원으로 가는 길은 열어놓고서 말입니다.

성령의 거듭남으로 구원을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타락의 순서를 역으로 진행하여 인간이 반드시 서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한 죄인을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게 해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원래의 소명대로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회복시키도록 만드십니다. 신자는 가정에서부터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기 전의 모습으로 바꿔야 합니다. 자기가 속한 어떤 공동체에서라도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소금과 빛의 역할을 온전히 행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고 신자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마5:16) 불신자들더러 신자가 믿는 하나님, 보배로 소지한 예수, 항상 의지하는 성령을 부러워하게, 최소한 궁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초대해야 합니다. 모든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케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는데 힘을 합해야 합니다.  

비록 낙원이 천국으로 옮겨졌지만....

문제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모습으로의 완전한 낙원 건설은 지상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죄의 형벌만 면제해주고 그 생각의 방향만 하나님 쪽으로 바꿔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사탄의 거짓 된 실체만 사람들로 깨닫게 해주었지 사탄을 완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인간의 내부에는 죄의 본성이 살아 있고, 외부에도 다른 인간의 죄악과 사탄의 흉계는 번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완전한 낙원으로의 회복은 예수님 재림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 때까지 신자로 이 땅에 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완전한 낙원과 최대한 가까운 모습으로 주님의 공동체를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순전한 연합체 교회는 다가올 완전한 낙원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성전제도는 복음 구원의 표상이었습니다. 죄를 용서 받아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길 수 있는 길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 계시는 주님의 십자가에 명백히 밝혀졌고 온전한 구원이 실현되었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를 죄가 여전한 이 땅에 남겨두는 이유는 신약시대의 땅은 장차 예수님에 의해 이 땅에 완성될 천국의 표상일 뿐 아니라, 신자더러 세상 앞에 그 표상을 미흡하더라도 가시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구원 후에 천국으로 바로 데려가면 어떤 결과가 됩니까? 그 사람은 이 땅에서 한 번도 천국의 표상을 실현하지도 맛보지도 못한 상태로 죽게 됩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죄와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실제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하고 죄가 전혀 없는 곳으로 옮겨집니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회심하자 그날로 낙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서 한 번도 죄에 대한 승리는커녕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는 기쁨과 평강과 자유를 누려본 적도 없습니다. 처형 직전에 그 영혼이라도 구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그로선 너무나 가난하고 어쩌면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 후 바로 휴거가 된다고 가정해봅시다. 예수 믿은 자들이 하나둘씩 이 땅에서 소문 없이 사라집니다. 요즘 같이 SNS가 발달한 상황에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이유마저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럼 너도 나도 진정한 회심 없이 예수 믿겠다고 온 세상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알곡과 쭉정이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뜩이나 영적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눈이 멀어서 십자가 구원의 진리와 은혜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럼 또 이 땅을 구태여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 땅에선 죄에 찌들어 살다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용서해주고 곧바로 천국으로 이끌면 이 땅에서 그 동안 존재해왔던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구원의 일차적 대상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입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 천국 영광은 완전히 보장됩니다. 천국은 이미 시작된 구원의 완성일 뿐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천국 안에 들어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신자더러 그 완성을 소망하면서 자신을 거룩하게 가꾸고 주위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을 스스로 실현하고 맛본 만큼만 천국에서 주님과의 교제가 가능합니다. 자주 비유하지만 디즈니랜든 입장권을 사서 입장만 한 상태에서 천국가면 이 땅에서 재미있었던 일을 주님과 나눌 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롤러코스터를, 그것도 가장 스릴 넘치는 것을 타 본 자라야 천국에서 나눌 내용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질문자께서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한두 명의 선지자만으로도 복음전파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못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럼 다른 모든 성도는  영혼구원의 일꾼이 되는 감격과 하나님 나라 건축의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합니다. 인간으로 최고 행복은 사도들이 그랬듯이 한 죄인이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고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이 아름답게 변하도록 곁에서 도와주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더러 구원 이후 이 땅에 남아 그 최고의 기쁨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至福) 여덟 개를 가르쳤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해져 천국을 차지한 후에 누릴 복들이었습니다. 바울도 최고 극심한 고통을 겪었어도(고후11:23-27), 자기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연약한 성도와 교회라고(28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고난 가운데도 자기를 본 받으라고, 실제로 아그립바 왕더러 쇠사슬에 묶인 것만 빼고 자기처럼 되라고 담대하게 진심으로 권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직접 보이신 예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 목적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인간이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사는 삶의 모습을 당신께서 직접 살아 보여주었습니다. 또 당신께서 걸어가신 좁고 머리 둘 곳도 없어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 길로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구원 후 휴거가 바로 있다면 구태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었습니다. 구원으로 택한 자를 죽은 후에 그냥 구원해주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이 땅에 실현되어지는 모습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이브를 붙여준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래야 합니다. 순수하게 사랑하기에 서로 감출 것 없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 땅에서 소외되고 비천한 사람들과 교제했습니다. 세속 사회가 인정하는 권력, 재물, 명예, 지성, 문벌, 미모 등으로 인간의 가치가 평가되는 체계를 부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망하는 바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당신의 자녀로서 외적 조건이 어떠하든 인간 그 자체로서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인정하고 대우해주는 사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구원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죄의 성향이 여전히 있어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않습니까?  

질문자께서 드신 세 가지 이유는 이 질문에 대한 아주 훌륭한 답변이긴 합니다만. 엄격히 말해 개인 구원, 그것도 영혼 구원에만 치중한 해명입니다. 이웃과 함께 하는 구원, 공동체로의 구원, 이 땅에서 천국의 실현, 개인구원을 통한 우주적 구원으로 확장 등에 대한 변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주 쉽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먼저 믿은 남편 혹은 아내가 휴거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혼이 종식되면서 그 동안 부부로 산 의미 자체가 없어집니다. 그럼 애초에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부는 원래 남이라 쳐도 자식은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먼저 휴거되면 자식도 휴거를 바라고 예수 믿으니 좋은 일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아닙니다. 옛 자아에 대한 철두철미한 회개와 함께 자발적이며 진정한 회심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단지 두려워서 믿는 것은 참 믿음도 참 구원도 아닙니다.

만약 아직도 젖을 빠는 어린 자식만 남는다면 누가 양육합니까? 믿는 사람끼리 결혼하여 낳은 아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다 그 아이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르는 판에 어찌 믿는 부모만 그냥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조금 더 연장해 살피면 아예 결혼할 필요가 없으며, 나아가 인간이 이 땅에 살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구태여 이 땅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구원의 진리를 더 깊이 알고자 해서 곧바로 휴거가 안 되는 이유를 따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곧바로 혹은 조속한 휴거를 소망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 이기주의가 내포된 변형된 종말주의입니다. 혼자만 죄가 많은,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이 많은 이 땅을 빨리 도피하고 싶다는 비겁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 주변의 죄 많은 이 땅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죄의 본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구원 후 이 땅에 남아 있는 동안 천국에 합당한 자로 바뀌는 것은 신자의 기본적 필요조건입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성도끼리 연합하여 이 땅을 거룩하게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더 큰 소망이자 천국 자녀가 되는 충분조건입니다.

6/19/2014

김상욱

2014.06.20 09:10:55
*.25.6.192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원죄와 자범죄까지 다 받았는데 그럼 죄가 없으니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하는데 왜 우리들은 죽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영생을 약속하신 것은 그럼 그건 거짓말이 되는 것일까요? ]



이 부분은 질문 드릴 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다른 분이 제게 질문을 주셨는데 제가 정확한 답변을 할 자신이 없어 질문드렸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죄는 법적 개념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롭다함의 칭의일 뿐 죄가 물질적으로 소멸된 것이 아니므로 " 죄가 없어졌다 " 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쉽게 해결 되는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명쾌하게 답변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정확하게 정리 해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 인적 이기주의가 내포된 변형된 종말주의입니다. 혼자만 죄가 많은,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이 많은 이 땅을 빨리 도피하고 싶다는 비겁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나 제 가슴 깊은 곳에 남습니다. 솔직하게 비겁한 신앙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디엘 무디 선생님의 승리하는 삶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도 죄에 대하여 도무지 극복되지 못하고 좌절하는 자신을 보면서 때로는 비겁하게 빨리 휴거되기를 소망하며 저 하나를 위해 비겁하게 도피를 목적으로 간구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제가 너무 편협하게 바라보았던 것들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보다 넓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 대하여도 조금 더 깊이있는 생각과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참으로 성경을 배우면 배울수록 제가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하고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보고 고민하고 공부해야 할지 항상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모루두개

2024.04.26 19:08:55
*.230.44.2

참으로 감사한 질문과 답변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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