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절망적인 순간에 응답하심이 전혀 없으실까요?
[질문]
기적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서 가족을 회복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도 가족이 죽습니다.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 믿고 지났습니다. 사고로 갑자기 아주 어린아이였던 가족이 죽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뜻이 있었을 거라 믿고 지났습니다. 매일 가족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지만 ... 벌어진 일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없던 건 아니지만 기도를 듣지 않으심이 아니라 믿고 지났습니다. 수 없이 많은 좌절과 절망을 응답되지 않는 기도 속에서 보면서도 뭔가 뜻이 있는 거라 생각하며 지나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모든 일을 보니. 기적이란 게 신자나 불신자나, 기도하는 사람이나 부적을 쓰는 사람이나 결국 확률의 문제일 뿐이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기초적 치료임에도 불구하고 치료비가 없어 의료시설에 도움을 받지 못한 가정에게 목사님은 "기도하세요."라고 했는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처구니없이 돈 500만원이 없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니 더욱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구약에 희년제도나 구제, 가난한 이웃이나 금융에 대한 말씀들이 완전하게 이뤄진다면 물론 이런 일은 없을 테니 인간의 문제지 하나님의 불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일어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부적 쓰고 굿하고 해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게 확률상의 기적이란 결론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런 결론과 상황에 도달하니 도대체 왜 기도해야하는지. 기도해 봐도 결국 확률이라면 무엇 때문에 절망적 상황에도 기도해야 하는지. 성경에서 일어난 기적들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도 성경 밖에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문제도 있지만. 오늘날에 기적을 말하는 유명 사이비 목사나 장로가 인기가 높고, 결국은 확률 상에 지나지 않아 질병과 가난과 고통에서 죽어 가는데.. 믿음 안에서 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살려달라는 게 야고보가 말한 육신의 소욕에 따른 기도라 응답하시지 않는 건 아닐 듯싶고, 의심하고 기도해서 그런 거라면 도대체 의심하지 않고 기도해서 다~ 응답받는 그런 사람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으니 역시 그런 말도 타당성은 없을 테고, 죄가 있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시며 시편과 같이 얼굴을 숨기셨다고 해도... 결국 모든 응답이 확률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전도서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시기와 운에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니 역시 무의미해 보입니다.
왜 신자는 기도가 결국 확률의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해야 하는 걸까요? 아무리 기도해도 역사에 뽕나무가 바다에 심겼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고, 절망적인 현실에 기대할게 없고 회의감만 들어 혼란스럽습니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서 하나님의 실존하심까지 의문을 가졌으나 논리적으로나 기록적으로나 기타 여러 가지로 창조주를 부정할 방법이 없는데 동시에 그 창조주께 왜 그런 절망적 상황에 결국 확률에 불과함에도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아주 힘든 일들을 많이 겪으신 것 같습니다.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동일한 의문을 갖고 있는데도 대놓고 묻지 못하는데 갈등하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진솔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로선 질문자님께서 겪으신 그 고통을 감히 짐작도 못할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고난 중에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덧나기만 하며 결국에는 큰 불행으로 끝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하며 의심을 넘어 불신까지 듭니다. 그 동안에 그렇게 열심히 믿었던 것이 다 허사처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럴수록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뿐입니다. 기도할 힘조차 없고 자꾸 눈물과 한숨과 불평만 절로 터져 나와도 그분 외에 달리 기댈 데라고는 없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붙들었는데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의 실망감은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욥처럼 그 고난의 원인이라도 또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라도 알았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니 갑갑하기만 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답변도 원론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내용에 흔쾌히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단지 냉정한 교리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음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통치하시는 원리와 또 그 원리와 기도의 상관관계에 대해 체계적인 정리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몇 가지 신앙적 원리를 먼저 설명 드린 후에 절망적 상황에서도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를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적을 비롯한 몇 가지 신앙적 원리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지는 천국에서의 영화스런 구원의 완성입니다. 바꿔 말해 구원 받은 신자라면 언제 천국을 가든 그 본인으로선 믿음의 상급은 완전하게 받은 것입니다. 물론 남아 있는 가족과 친지들로선 고인과의 더 이상 이 땅에서 교통을 못하는 육신적 이별이 정말 슬프고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고인은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막에서 주님과 얼굴로 맞대면 하여서 이 땅에선 불가능한 순전한 사랑의 교제를 그분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억울해 보이고 너무 일찍 데려간다 싶은 죽음도 하나님의 뜻에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사 57:1,2)
반면에 이 땅에서의 인생은 그 사람의 믿음과 기도와 상관없이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세계도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입니다.
나아가 세상 사람들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있고 신자도 그 본성이 살아 있기에 서로 시기 분쟁 분노 저주함으로써 온갖 모순과 불법과 죄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인간이 겪는 고난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이지 하나님이 일부러 괴롭히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신자의 믿음을 연단시키려 허락하는 고난도 아주 드뭅니다.
따라서 모든 질병들도 인간의 죄의 결과이거나 스스로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온전히 관리하지 못한 탓입니다. 유전적인 질병도 결국 선조인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비록 유전을 안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본인은 그 질병 때문이 아닌 다른 죄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질병도 인간이 책임지고 고쳐야 할 몫이지 하나님이 치유해주어야만 하는 일차적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계의 운행법칙을 당신께서 스스로 깨트리는 기적에 대한 관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인간 쪽에서 모든 수단이 고갈되어 도무지 손을 써볼 수 없는 상황에서 간절히 기도한다고 기적이 일어나는 법은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우선 참 신자라면 천국에 먼저 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불신자로써 모든 죄인이 가야할 길을 그도 가는 것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는 목적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오직 이것(기적)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기적적 은혜를 베풀어서 그분(하나님)을 믿게 만들어 구원을 얻게 하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이미 믿은 자들에게는 기적은 구태여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이후에는 기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여서 기독교를 속히 확립시켜야 할 필요가 있어서 성령이 특별하게 강력히 역사한 시기였습니다. 기적이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성경이 완비되고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성령이 역사하면 성경에 계시된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그런 기적 없이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 전혀 무지한 선교지에선 기적이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존재 자체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처한 여건과 환경을 풍요하고 안락하게 바꿔주는 것이 아닙니다. 정욕과 죄악으로 더렵혀진 한 죄인을 십자가 보혈로 깨끗케 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후에 성령의 인도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려고 세상에서 구별해 불러낸 것이 구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작 신자에게 갖는 관심은 오직 당신의 자녀답게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지, 아무 고난 없이 장수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입니다.
기도에 대한 관점을 바꿔라.
이런 맥락에서 기도에 대한 관점도 달라져야 합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주지 않습니다. 그럼 신자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신자의 종입니다. 반드시 당신의 뜻에 맞는 기도라야 응답해줍니다. 기도를 하면서 오히려 그분의 뜻에 자신의 뜻을 바꿔서 맞춰나가야 합니다. 올바른 기도란 그래서 자신의 성품을 그리스도와 닮게 가꾸고 그분이 주신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인간적 수단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에 기적을 바라며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기도해야만 합니다. 또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 일이나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미리 알 수 없기에 더더욱 그분의 선하신 인도를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께 자신의 소망과 계획을 마치 아버지와 대화하듯이 진솔하게 꾸밈없이 아뢰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계획과 소망을 더 거룩하고 완전하고 아름답게 바꿔주실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인정해야 합니다. 그분이 내 뜻과 계획을 수정 포기 시킬 수 있음을 언제 어떤 일에서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 뜻에 맞춰나가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그랬지 않습니까?
기도는 절대로 확률의 게임이 아닙니다. 질문 가운데 무당이 굿을 하거나 부적을 써서 다니는 경우도 병이 낫는다고 했는데 그것도 사실입니다. 또 그래서 확률의 문제로까지 여긴 점도 이해는 됩니다. 사탄도 큰 능력이 있습니다. 욥기에서 보듯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권세는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궁극적 통치 아래 있지 절대로 확률이, 다른 말로 행운이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나아가 사탄은 세상 권세를 잡은 거짓과 탐욕의 아비로서 병을 낫게 해주고는 돈을 요구합니다. 조금 있다 병을 더 도지게 해서 더 큰 굿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성령이 내주하는 참 신자에겐 절대 그런 농간을 부릴 수 없습니다. 불신자의 경우는 하나님이 사탄의 미혹 아래에 두도록 허락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거룩한 통치는 오직 당신의 자녀에게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순전한 신자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아무 차질 없이 완벽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기도란 단순히 위급한 상황을 기적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는 기도는 다시 강조하지만 그분을 종으로 부려먹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기도의 근본적 의미가 “나는 못하니 하나님이 대신 해주세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심지어 사탄의 훼방까지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당신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쉬지 말고, 즉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맹장염은 오늘날에는 중병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간단한 수술로 가볍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수술만 하면 나으니까 기적적 간섭을 요구하는 뜻이 아닙니다. 친절하고 솜씨 좋은 의사와 간호사들을 만나고, 실수나 부작용 없는 수술을 하고, 회복도 빨리 잘 되고, 이후에 더 강건해지고, 이 일을 통해 건강을 잘 챙기는 계기가 되고, 매일 운동하려는 결심을 지키고, 나아가 하나님이 간단한 맹장염을 통해 건강에 대한 적신호를 울려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분께 더욱 순종 헌신하겠다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어떻게 확률의 게임입니까? 맹장염이 수술로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은 99.9%입니다. 대신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0.01%의 부작용을 막아달라는 기도만 한다면 확률의 게임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외에 이 일을 통해 자신을 바꾸며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가려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종교인들이나 불신자가 전혀 하지 못하는, 아니 알지도 못하는 기도입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절망적 상황에도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질문자님의 생각대로 하나님만이 소망으로 바꿔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기적을 소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확률로 따지면 기적은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희소합니다. 따라서 그런 절망적 상황에도 반드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나아가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아 극렬한 풀무불로 던져질 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이 생각을 바꾸라는 다그침에 그들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그들이 기적을 바라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풀무 불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풀무 불은 물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분이 전능하다고 해서 다 기도에 응답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분의 뜻은 자기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설령 하나님이 건져주지 않더라도 자기들은 하나님께 불만을 갖기는커녕 당신의 뜻에 전혀 의심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의 뜻은 자기들을 풀무 불에서 기적적으로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것임을 알고 그대로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기적적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 불에 타죽게 된다면 자기들이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담력과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장렬하게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고 우상에 절하지 않는 우리 믿음이 이 이방의 왕과 불신자들 앞에서 증명되고 여호와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절망적 상황에도 반드시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그 드러난 능력으로만 신들의 우열을 가리는 사고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머리털 하나 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심으로써 당신의 당신 되심을 스스로 증명했던 것입니다.
현대는 과학과 의술이 첨단으로 발전되었고, 이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인 이성을 사용한 업적으로 그분의 은혜임, 무엇보다 성경에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명료히 계시되었기에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기도처럼 우리 또한 기적을 가장 먼저 소원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 믿음이 더 견고해지고 주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당신께서 반드시 드러내길 소원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떤 절망적 상황에도 관련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임하실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와 사랑이 반드시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염려하신 그대로 확률의 게임, 아니 불신자들 관념대로 운에 따라 좌우되는 인생으로 그칩니다. 그리고 위급한 일에만 기도하면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먹는 참람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해달라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범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통치해달라고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완전히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12/9/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