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성경에 많은 부분에서 그리하면 .. 내가 무엇을 하리라라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예로
- 예레미야 [Jeremiah] 7장 23절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 야고보서 [James]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잠언 [Proverbs] 3장 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욥기 [Job] 22장 21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설교 말씀 가운데에서도
"성도들이 순종하면 ... ",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 "복을 받으려면..." 라는 말씀들을 많이 듣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또는 말씀을 듣다 보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조건적인 하나님처럼 보여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조건적인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그리하면(If)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인가요?
[답변]
많은 성도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의문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눠 순차적으로 답변 드리는 것이 이해하시기 좋으실 듯 합니다. 가장 먼저 질문자께서 예로 든 성경 구절의 정확한 해석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쉽게 그런 의심을 가지게 되는 원인들을 살펴 보고 각각에 대한 바른 해결책을 제시하여 할 것입니다. 그 후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모습이 과연 조건부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올바른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각 성경 구절의 바른 해석
1.1. 렘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성경의 한 구절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성경 전체 대의에 따라 해석해야 하며 최소한 한 문단(paragraph) 안에서 어떤 뜻인지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앞 뒤 구절을 잘 살펴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한 문단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구태여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미리 문단의 구분을 다 해 놓았습니다. 조그마한 동그라미가 한 문단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어 한 동그라미에서 다음 동그라미 바로 전 구절까지가 한 문단이 됩니다.
본문은 21-26까지가 한 문단인데 이 문단의 대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인 제사를 꾸짖고 삶 전체에서 진정한 순종이 참 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23절은 22절,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할 때에 22, 23절을 말했는데도 너희들이 듣지 않았다고 지금 이전에 자신이 하셨던 말씀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출애굽할 때에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 하나님 백성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것이지 복만 받으려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미 경고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꾸짖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벌써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조건부로 어떤 행위를 해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형식적 제사를 드리는 까닭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면 드린 만큼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형식적 제사를 꾸짖었다는 뜻은 신자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탓한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당신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것을 못 참으시고 야단 친 것입니다.
1.2.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4장 1-10까지는 세상의 더러운 정욕을 버리고 청결한 겸손으로 주님 앞에 서라는 권면이며 10절은 9절까지 말씀하신 것의 결론 격입니다. 즉 “너희 중에 싸움(신자 중에 다툼)”(1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3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4절),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5절), “하나님께 순복 하고 마귀를 대적”(7절), 등의 구절의 의미를 생각할 때 특별히 신자가 두 마음을 품는 것에 관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주 앞에서 낮추라”는 말씀은 단순히 도덕적 겸손이나, 주님 앞에서 종교적 경배만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을 쫓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쓸려고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려는 뜻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참 겸손은 인간 관계에서의 온유한 태도나 도덕적인 선행으로만 판단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 더 이상 세상의 것들로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겸손입니다. 세상의 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다면 드러날 것은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당연히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결과가 따르게 됩니다.
1.3.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구절은 구체적인 설명이 별 달리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지도하실 리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일반적인 은총, 즉 때에 따라 곡식을 추수하도록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십니다. 신자의 농장에만 비가 오고 바로 곁에 있는 불신자의 과수원에는 비가 오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구체적으로 갈 길을 지도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자에게는 길을 지도하십니다. 여기서 지도는 단순히 안내자의 역할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앞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며 정한 목적지까지 데려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신자도 어떤 때는 의심과 불신앙에 넘어가 하나님을 범사에 완전히 인정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 때 하나님이 화가 나 신자를 지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끔 신자의 연단을 위해서 신자가 믿음이 약해질 때에 지도하지 않거나, 가만히 침묵하거나, 심지어 더 큰 환난을 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신자가 피할 길을 예비해 놓지 않고 또 합력해서 선이 되는 결과로 이끌지 않는 적은 없습니다.
혹시 신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지도는 전과 다름 없이 항상 동일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가 그것을 제대로 못 알아 차리고 그 지도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4.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가 대부분의 신자에게는 해석하기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욥기만은 반드시 내용의 흐름을 알고 보셔야 합니다. 욥기는 원인 모를 고통에 관한 주제에 관해 욥과 그 세 친구 발닷, 엘리바스, 소발 간에 논쟁을 벌린 것이 주 내용입니다.
세 친구의 주장은 하나님이 죄 없는 자에게 고통을 줄 리가 없으니 욥더러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빌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기에 따라 하나님은 축복과 징계를 비례해서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자기가 겪는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님을 믿지만 그 원인을 몰라 괴로워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엘리후가 등장하여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그 분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만이 인간의 도리라고 설파하자 욥 또한 이를 수긍하고 다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가장 먼저 누가 한 말인가, 그가 갖는 사상이 무엇인가, 욥이 한 말이라면 엘리후 출현 전에 한 말인가 후에 한 말인가 등을 잘 구분해서 볼 줄 아셔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볼 때는 그 말씀이 합당하고 은혜가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누가 한 말인가를 먼저 구별하지 않고 보면 신학적으로 잘못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제일 대표적인 말씀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입니다. 이 말은 욥의 친구 발닷이 한 말로 그는 조건부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바로 앞의 6절(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 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과 연결 해 보면 이 말의 의미는 착하게 살고 열심히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선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죄 지으면 벌 받고, 착하게 살면 상 받는다는 사상에 의거해서 한 말입니다. 성경 전체적으로나 욥기의 사상으로 보아도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믿음이 좋으면 결과적으로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은혜(현실적인 것보다 영적인 축복의 모습이 대부분이지만)가 넘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신자가 그 상태에 이를 것을 소원하고 또 남도 그렇게 되길 축복해준다는 의미로 따로 떼어서 이해한다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쓰여진 원래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잘 믿으면 하나님이 나중에 현실의 커다란 축복을 주시는 것으로, 특히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이 적게 시작해도 나중에는 크게 번창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보장하는 말씀처럼 인용되어지고 있으니 큰 일입니다. 신실한 신자의 기업도 얼마든지 부도 날 수 있습니다.
지금 예로 든 욥 22:21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한 말입니다. 이 또한 권선징악적인 조건부 하나님을 믿는 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별로 하자가 없는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 한다고 현실적으로 꼭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욥기 전체 주제는 오히려 조건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예로 든 네 가지의 해석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습니다만 각각 그 의미가 다른 것을 확인했습니다. 문법적으로 같은 표현이라도 전체 줄거리와 앞뒤 문맥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일반 평신도들이 오해하기 좋게 “그리하면 … 하리라”고 표현했는가 그 이유는 아래 몇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2.1. 한글의 모호성
한글은 문법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헬라어, 나아가 영어 같은 셈족 계통의 언어에 비해 정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 원어의 뜻이 제대로 전달 되지 못하고 애매하게 표현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의 렘 7:23만 보아도 원어적으로는 “Obey my voice, and I will be your God”으로 명령과 결과(Do…, and…)를 나타내는 뜻이지 조건과 상벌(If ….then…)의 의미가 아닙니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야유회를 가는 데 “내일 어느 공원에 몇 시까지 집합하시오. 그러면 갈비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것이요”라고 하면 그 구조는 명령과 결과입니다. 그러나 야유회와 상관 없이 “내일 공원에 몇 시 까지 나오는 자에게는 갈비를 줄 것이요”라고 하면 조건과 상벌입니다.
전자는 회사 직원이 100명이면 미리 100명 분의 갈비를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공원에 지정된 시간에 갔기 때문에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회사 직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누구나 갈비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공원에 몇 명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갈비를 미리 준비 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공원에 정시에 도착한 것을 확인 한 후에야 도착한 사람 수만큼 갈비를 준비하거나 나중에 집으로 보내 주는 경우입니다.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공원에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행위의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대조해서 설명을 듣고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말 표현 법은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모든 표현이 “그리하면… 하리라”로 밖에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 성경 전체 사상과 앞 뒤 문맥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2..2 하나님과 아버지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되 인간의 눈 높이에 맞추어 쓰여졌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정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법과 문법과 형식이 동원된 것입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경우를 들자면 아버지가 어린 자식과 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대해 먼 장래의 계획을 갖고 자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모든 지식 경험을 갖고 자식에게 가장 유익한 길을 추구하고 있지만 미리 그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수준에 낮추어 말합니다.
서너 살 짜리 아이에게 아빠 구두 닦으면 백원 주겠다고 합니다. 아빠로선 구두를 닦고자 하는 목적도 아니요, 아이에게 백원씩 모으게 해서 돈 벌게 해주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직 대가 없는 돈은 없으며, 열심히 일한 다음에는 보상이 돌아 오며, 또 적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대학 들어가면 차 사 줄게 하면 차 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대학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대학 떨어졌더라도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면 떨어져도 차를 사 줄 수 있고, 반면에 맨 날 놀다가 막판에 보다 못한 아버지가 족집게 고액 과외를 부쳐 어떻게 삼류대학 최고 낮은 과를 들어갔다면 안 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선 두 경우 다 “그리하면 …하리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서너 살 아이에게 돈을 벌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하면 아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고 3아이에게 떨어져도 최선을 다하면 차 사 줄 수 있다라고 하면 겉으로 최선을 다하는 시늉만 낼 수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 아무리 표현법이 정확한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도 하나님으로선 일부러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절대 표현법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나태함과 가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2.3. 구원(칭의)과 성화
성경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보도록 의도된 책입니다. 어거스틴의 말 대로 알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 깨달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간섭하여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 말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이 이미 신자가 된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구원의 첫 단계 거듭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은 신약성경은 로마서 1-11장을 대표로 들 수 있고, 구약은 이사야서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원에 관한 설명은 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님 쪽에서 능동적으로 주신 선물이자 인간쪽에선 수동적으로 받은 은혜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3:2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롬8:28),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43:2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성경 전체로 보면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 외는 대개가 구원 받은 백성,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 하여금 거룩과 의와 빛의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말씀이 주를 이룹니다. 성화는 성도가 의지적 결단과 훈련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성도가 책임지고 피 흘리기 까지 싸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신자의 헌신을 요구하는 명령형의 표현이 많고 또 그런 성화를 이뤄 나갈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자연적인 결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2.4. 행위와 신분
성화를 이루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자 책임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독교의 성화는 다른 종교의 도덕적 훈련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모든 종교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에 의롭거나 죄악 된 행위 하나하나와 그 신의 상벌 즉 구원과 심판이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기독교 식의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든 신앙 활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행위를 바로 잡는 데만 초점이 모아지고 또 죽은 후라야 그 결산이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다릅니다.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이 그렇게 해선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자 아무도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죄악 된 행동을 했기에 죄인이 되었다고 보므로 그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 구원이라면,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악 된 행위를 한다고 믿으므로 그 인간 자체를 먼저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중생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일단계이자 근거입니다. 중생이 없으면 인간 스스로의 도덕 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신자가 성화를 이뤄나가는 모습도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거듭난 새 생명은 이제 하나님 안에 신분, 소속, 위치가 바뀐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보혈로 영혼이 먼저 깨끗하게 되는 것으로 성화를 이뤄나갑니다. 인간 혼자의 의지적 노력과 훈련만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혼자서 죄를 씻거나 이겨낼 수 없으니 성령님께서 거룩한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고 죄를 이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싸워 나가야 합니다. 얼마나 내 의지로 나쁜 짓을 참아 내느냐가 아니라 매일 십자가로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그리하면 ….되리라”는 표현도 자꾸 행위적 관점에서만 해석해선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은혜로 의로워질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하려는 열심과 소원과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 쪽에서 그런 행동에 관한 명령을 하시는 이유도 네가 분명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면 당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품 안에 있는 신자에게 악한 세력이 접근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축복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지 그 행위를 심사해서 따로 상벌을 준비 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원리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복 있는 자가 율법을 지킨 대가로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자체를 즐거워 한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시냇가로 일부러 옮겨 오거나, 나무가 자꾸 더 크게 더 많이 열매 맺자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져 있기에 열매가 많이 맺힌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신분과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명령도 그 바뀐 신분과 위치라면 당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2.5. 율법을 주신 목적
신자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조건부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신약에선 별 문제가 없는데 구약에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까닭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음을 알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갈3:24) 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의 상황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시켜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었고 홍해를 건넘으로 물 세례를 거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구약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것은 그 후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해 주고 복을 주는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6:1, 3)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스스로 밝힌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건져낸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킬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노예의 땅에서 건져 내시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여 보내셨습니다.
율법은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지킬 규칙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로 살 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려는 사랑과 축복의 약속이 율법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체육관에 들어와 운동하려면 면 티셔츠와 짧은 반 바지를 입고 두꺼운 양말에 운동화를 신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운동하기 편하지 신사복에 넥타이 매고 구두 신고 하면 운동은커녕 자칫 다칩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그 지킨 행위를 심사해서 비례해서 복을 준다고 믿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가 그런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율법 다운 율법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기독교가 오히려 율법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 자체가 복이자, 지키면 복은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구원에서 뿐 아니라 성화의 단계에서도 하나님은 전혀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조건부 하나님은 찾아 볼 수 없는데 율법이라는 용어와 ‘그리하면 …하리라’는 표현이 성경에 너무 많다 보니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3. 성경 속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되 특별히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은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하는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설명해 놓은 책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의미와 결과를 적어 놓은 책입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전제, 방법을 설명해 놓은 매뉴얼이 아닙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그 말은 성경의 전체 주제가 예수님이요 그 해석의 기준과 힌트 또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풀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잘 아시는 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롬5:8)하신 것입니다. 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요일4:10)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 인간을 대할 때에 자격과 조건을 절대 따지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견줄만한 출애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7,13)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음을 당해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불쌍하게 종살이 했다고 살려 주었고 바로와 애굽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악하게 굴었기에 죽인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는데 한 일이라고는 어린 양을 자기 식구 숫자(모든 자가 다 죽어 마땅하다는 뜻)에 맞추어 잡고, 피를 문에 가로 세로로 칠하고(십자가를 상징), 집 안에 모여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은 것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도 윤리적, 종교적으로 의인과 죄인의 구별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그들 전부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고 십자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여호와 성부 하나님이시든, 나사렛 예수 성자 하나님이시든,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하나님이시든 동일하신 분입니다. 처음이자 끝까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에 구약에 조건부 하나님이었다 신약에 와서 무조건 적인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아가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 지 인간에 불과한 우리로선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변한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며 하나님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4. 신자의 성경 말씀을 대하는 태도
대략적으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오해하게 되는 이유들을 알아 봤습니다. 그럼 이제 성도가 말씀을 읽을 때에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점은 이미 언급된 가운데 다 나왔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반드시 성경 전체의 주제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해석하되,
-각 성경 권별로 각기 다른 중심 사상과 배경이 있으니 그것을 아셔야 하고 (예의 욥기 같은 경우 해석의 오류를 막을 수 있음),
-앞 뒤 문맥 최소한 한 문단 안에서의 뜻을 살펴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 눈 높이에 맞추어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신자가 되기 전 칭의와 중생에 관한 말씀인지 아니면 신자가 된 후 성화와 훈련에 관한 말씀인지 구분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하는 말씀인지 불신자에 관한 말씀인지도 분별하셔야 하며,
-하나님은 신자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주 안에서 바꾸고 항상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도덕적 명령과 요구도 그 준행 여부와 상벌이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사는 선한 삶 자체가 축복이요 권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모호한 표현이 있거나 의심이 들면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진리에 나타난 사랑과 대비해 조금이라도 모순되는 생각, 이해, 해석이 나오면 일단 그것은 잘못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의심을 하고 자꾸 따지는 것은 오히려 좋습니다. 대신에 그 때마다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에게 말씀해 주시고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읽으시면 성령의 조명으로 살아 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