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교훈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요?
[질문]
구약에 나오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신약을 읽다보면 구약의 중요성을 놓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잠언을 보면서 교훈들이 나오면 현재의 나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인가요? 신약 시대에 오면서 이 교훈들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요?
[답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예수님은 구약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러 오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당신의 초림으로 일차 달성했고 또 장차 재림으로 완성시킬 것입니다. 구약에 계시된 인간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영원한 뜻과 목적은 단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연히 신약 신자들도 하나님의 그 거룩한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계시하신 당신의 뜻을 원칙적으로는 일점일획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불합리하고 애매한 규정들이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약성경 내에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설명과 힌트들이 나와 있습니다. 또 신자들의 영원하신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 율법에서 무엇이 폐지되었는가?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준행하여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할 율법을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훈이 모세오경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도 그곳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자님이 지적하신 잠언에는 직접적으로, 또 여타 구약에도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윤리적 종교적 계명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모든 계명들의 내용은 크게 보아 도덕법, 사회법(혹은 재판법), 제사법, 정결례, 음식법 등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도덕법은 개인이 반드시 따라야 할 하나님의 의의 기준입니다. 사회법은 공동체를 거룩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정입니다. 제사법은 하나님께 속죄, 서원, 경배, 화목 등의 목적으로 드려지는 희생제사에 관한 규정입니다. 정결례는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사람, 물건을 깨끗케 하거나 질병을 처리하는 규정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눠 식용 가능여부를 밝힌 규정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예물과 제사가 죄 씻음을 온전히 이룰 수 없기에 개혁할 때까지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실현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맡겨졌다고 합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구약시대는 제사만 잘 드리면 구원 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자체가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사법은 완전한 희생제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러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로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인류 구속이 완성됨으로써 예표로서의 제사법의 용도는 종료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구약 율법 중에서 제사법은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도 맡겨두었다고 합니다. 신약 시대 이후로 음식법과 정결례도 같이 폐지된 것입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14:20)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고전10:25,26)
단순히 무슨 음식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어도 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만물이 정하고,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신약 시대 이후는 세부적 절차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께 진심을 바치느냐가 먼저지 정결례를 준행 여부는 그 다음입니다. 실제로 비록 장로의 유전이긴 해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한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도덕법과 사회법에 대해선 임시로 맡겨 두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신약 이후로도 폐지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도덕법이 지속적으로 적용되어야 함은 마땅하나 사회법은 여전히 그 해석과 적용이 애매합니다. 노예제도, 계대결혼 같이 시대착오적인 율법들이 많이 있으니 혼란스럽습니다.
모든 율법의 두 강령
이 문제를 판단하기 위해선 반드시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도덕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십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피조물 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인 윤리입니다.
나아가 모든 다른 부수적 윤리를 제정, 점검,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이기도 합니다. 어떤 종교적 윤리적 교훈이라도 반드시 십계명에서 파생 발전된 것이어야만 하고, 만약 이 근본 윤리와 상충되면 잘못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십계명은 어떤 내용입니까? 첫째는 경배할 대상이 오직 하나님임을, 둘째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셋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누구인지, 넷째는 언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하는지를 밝힌 것입니다.
다섯째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지만 넓게는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자에게 순종하라는 뜻이며, 여섯째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아껴야 하고, 일곱째는 성과 결혼의 순결을 보호하고, 여덟째는 타인의 재산을 인정하고, 아홉째는 다른 이의 인격을 존중하며, 열째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추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여타 계명은 하나님께서 그에 적합하게 확장시킨 것이기에 상기의 근본 의미에 따라 해석 운영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특별히 사회법은 타인의 생명, 성적순결, 재산, 인격과 영혼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에 의거해 각 세대와 사회의 여건과 문화에 맞추어 합리적으로 적용하면 됩니다.
간단한 예로 간음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계명은 도덕법과 사회법이 다 적용됩니다. 간음하면 하나님의 의를 위반한 것이니 해선 안 된다는 것은 도덕법입니다. 또 간음한 당사자를 그냥 두면 공동체가 더럽혀지므로 반드시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규정은 사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간음에 대해 벌은 주되 죽일 수는 없고 다른 방식의 형벌을 부과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의 # 253 "성경 해석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하는가?"의 글도 참조 바랍니다.)
도덕과 종교에 관한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신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올바르게 세우고, 오직 그분만 사랑하며, 자신 속에 남아 있는 탐심부터 제거하고,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며, 이웃의 인격과 영혼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아끼고 존중해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에 의거해서 해석 운용 적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 중에 어느 것이 큰지 묻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경령이니라."(마21:37-40)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십계명의 첫 네 계명 하나님 사랑과, 뒤 여섯 계명 이웃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또 그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즉,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축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둘은 영원토록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적 도덕법입니다. 신자 개인과 공동체가 따라야 할 어떤 규정도 이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십계명은 또 첫 넷은 하나님과 신자 개인의 수직적 관계를, 나머지 여섯은 인간끼리 맺는 수평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이런 구조는 십자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모든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해석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구약계명에 대해 새롭고도 완전한 온전한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다시 간음을 예로 들어 살펴봅시다.
십계명의 제 칠은 "간음하지 말지니라."입니다. 이는 영원토록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도덕법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관련법의 절대적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공동체에 이를 적용할 사회법(재판법)으로는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레20:10)고 사형을 그 형벌로 정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27-32)
먼저 간음의 범위를 아주 넓혔습니다. 실제로 혼외정사를 가지는 것뿐 아니라 마음에 특정 여인을 두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뿐 아니라 말이나 생각으로도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제칠 계명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시켰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도덕법은 결코 변개 가감 취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혼 가능한 케이스를 예시하면서 간음죄를 더욱 엄하게 규탄했습니다. 먼저 간음은 이혼의 취소여건이 됩니다. 비록 예수님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19:6)고 했지만 간음만은 예외가 될 만큼 하나님이 철두철미 저주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간음 외의 이유로 아내를 버려도 여전히 하나님이 짝지어준 상태는 해소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법으로는 전남편의 아내인) 그 여자에게 장가들게 되면 똑 같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성적으로 철저히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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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간음한 자의 오른 눈을 빼어 내버리라고 해서 그 형벌까지 동일하게 더 엄격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간음죄를 미워한다는 비유입니다. 장차 천국에 입성할 당신의 자녀답게 신자는 정말로 온전히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또 잘못한 자는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며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전에 돌로 쳐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명함으로써 행동보다 마음의 죄도 동일하게 중(重)함을 예리하게 다시 지적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간음죄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고쳐야 하지만 죄인은 불쌍히 여겨주라는 것입니다. 도덕법은 전혀 변함없고 재판법만 바뀐 셈입니다. 공의는 살리되 사랑을 베푸는 십자가 진리가 율법의 적용에도 실현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구약시대의 호세아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심지어 음란한 여인 고멜이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았음에도 용서해주고 데리고 와서 같이 살라고 이미 명했습니다.
돌비 대신에 심비에 심겨진 계명
살펴본 대로 신약시대에는 간음하지 말라는 절대적 계명은 아무 변함없고 오히려 그 뜻이 더 확장 강화되었습니다. 반면에 그 도덕법을 적용하는 사회법은 사형제도 대신에 철저한 회개와 재범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용서해주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작금 불신 세상에선 아무리 간음이 죄가 아니고 그 형벌제도마저 없어졌지만 신자라면 반드시 그 계명을 예수님이 해석하신 더 깊은 의미까지 지켜야만 합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해도 된다는 것은 여성의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않은 당시의 사회상에 맞춘 재판법일 뿐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영적 진리와 그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는 도덕법이 확장 적용된 것입니다. 그 자체가 절대적 도덕법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여성의 권리가 보장된 상황에선 전혀 무용한 계명입니다. 또 말씀드린 대로 여성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해주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선적인 도덕법입니다. 계대결혼이나, 노예제도 등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십계명과 연관해 이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일조에 관한 가르침에서도 이런 진리와 그 적용에 관해 정확히 배울 수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십일조의 정신을 살려 이웃을 구제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문자적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다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념까지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는 없고 인간 장로들이 덧붙인 추가규정일 뿐입니다. 반면에 자기 것을 나눠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어떤 세대에도 절대 유효하며, 십의 일조만이 아니라 십의 8,9조까지도 이웃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3,34)
예수님 오신 신약시대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명은 돌 비석에 새겨지는 대신에 신자의 심령에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대로 지키되 그러지 못할 때마다 담대하게 주님의 보좌 앞에 입술로 통회 자백 회개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구약시대의 도덕법과 그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절대적입니다. 그 뜻을 훼손치 않는 한 그 법을 시대상황에 맞추어 적용하는 것은 신자의 자유와 책임으로 맡겨져 있습니다. 단 예수님의 복음과 그 가르침의 원리 맞추어서 말입니다.
잠언에도 복음은 있다.
질문자께서 특별히 잠언의 계명에 혼돈이 온 까닭은 틀림없이 재물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구절, 혹은 그와 유사하게 현실에서의 성공을 장려하는 듯한 구절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 봐도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10:15)같은 구절은 기독교 교리와 상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원리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웃의 생명, 재물, 성적 순결, 인격과 영혼을 철저히 보호해주라는 것입니다. 또 그 전에 자신의 더러운 죄와 탐욕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
재물이나 현실의 형통에 관해서도 이 뜻을 그대로 적용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영달과 형통이 아님,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으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또 그 목적대로 돈을 소비하면 됩니다. 돈을 벌고 쓰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에 겸손하게 맡겨야 함도 물론입니다.
결과적으로 신자가 부자가 되고 그 재물이 자신을 안락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자 은혜인 것입니다. 심지어 재물 얻을 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신8:18) 그래서 그 부를 자신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일에 나눠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 잠언은 부모의 훈계 같은 인간적 지혜나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는 것을 상당히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사고와 잠언 기자의 지혜에 대한 인식은 전혀 다릅니다. 모든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기에 인간의 지혜는 무용하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철에만 의지하는 것이 오히려 참 지혜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잠언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세히 앞뒤 문맥을 잘 살피면 구태여 예를 들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스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주제로 본격적인 서술을 시작하고(1;7)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잠언에도 곳곳에 십자가 복음이 보석 같이 숨겨져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나 윤리 종교적 계명이 결코 아닙니다. 예컨대 1:20-33에서 ‘지혜’ 대신에 ‘십자가 복음’이나 '예수님'을 대체해서 묵상해 보십시오. 특별히 20-22절은 마태복음 11:15-19절과 대비해서 읽어 보십시오. 실제로 예수님이 당신을 ‘지혜’라고 묘사하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의 책 중에 복음이 숨겨지지 않은 책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참고로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구약의 기독론-헹스텐베르그 저작” 같은 책도 있습니다.)
요컨대 십계명과 십자가 복음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성경의 교훈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이나 신약이나 신자를 향한 그 어떤 계명도 그에 맞추어 해석하면 예수님이 가르치고 손수 본을 보인 것처럼 신약시대 이후로도 더더욱 성실하게 준행해야 하며 얼마든지 각 시대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7/4/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