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하나님과 결혼 관계(?)
[이의]
성경적 주제에 대해 사전적 정의만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적 정의의 기초가 없으면 정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으며, 접근한다 해도 다른 사람과 올바르게 소통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혼자만의 만족으로 그칠 수밖에 혹은 잘못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저는 하나님과 저와의 신분관계가 결혼관계로 비유되는 것을 못마땅했습니다. 이혼이 50%가 넘는다는 상황에서는 그것은 절적한 비유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하나님 안에서의 신자의 신분 변화를 결혼에 비유했을 때 그것의 의미는 머리가 파 뿌리 되도록 변치 않음을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였지만, 작금의 결혼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싫으면 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특질을 우리는 확실히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해명]
비유의 사전적 정의
먼저 문학적 수사법의 하나인 ‘비유’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질문자께서 어떤 용어라도 사전적 정의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부합하는 일입니다. 국어사전은 비유를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표현함, 또는 그 표현방법”이라고 정의합니다.(동아새국어사전 1990년 판)
또 비유법을 구체적으로 세분하면 직유, 은유, 풍유, 제유, 환유 등이 있습니다.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는 것은 은유(隱喩, metaphor)에 해당됩니다. 예의 사전은 은유를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 관념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질을 묘사하는 표현 방법, ‘내 마음은 호수’ 따위”라고 정의합니다.
은유에서 초점은 원관념은 숨겼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관념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려주기 싫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까다롭고 또 그래 봐야 듣는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래서 설명과 이해가 쉬운 보조관념으로 원관념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만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사전에서 예를 든 “내 마음은 호수”라는 비유를 살펴봅시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인간의 마음 상태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기 참 힘듭니다. 조변석개하는 것이 그 마음이며, 성경은 심지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이라고 말합니다.
호수에도 여러 특성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넓다, 잔잔하다, 깨끗하다, 아름답다 등의 이미지를 쉽게 연상합니다. 호수의 여러 특성 중에 어느 것이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지는 그 표현이 사용된 전후 문맥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로 비유의 목적은 특정 정황에서 한두 가지 특징만 강조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마음이 잔잔했다는 것이 화자(話者)의 문맥상의 의도였다 해도 그 마음에 평강만 있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어떤 순간에 평강을 유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뿐이며 또 그렇게 강조한다고 해서 아무도 잘못 비유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유교에선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가르칩니다. 수사법상 임금, 스승, 부모는 동일하다는 직유법이 사용된 것입니다. 화자의 의도가 그들 셋의 모든 특성이 같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어느 누구도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이라면 그 세 분을 동일한 존경심과 열성으로 섬기라는 차원만 강조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선 그 한 가지 사항만 이해 적용하면 되지, 임금과 스승과 부모가 어떻게 똑 같느냐(一體)고 따져선 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거듭난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했을 때는 결혼의 몇 가지 특성을 강조하면서 그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즉, 부부가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평생 동안 서로 변치 않고 사랑하고 또 자녀를 낳아 훌륭한 사람으로 양육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이런 결혼의 몇몇 특성에 비견한 것입니다.
군사부일체를 다시 예로 들면 "광해군 연산군 같은 임금을 스승이나 부모처럼 공경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니 비유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결혼에 나쁜 점도 많고 이혼도 많이 한다고 해서 결혼의 비유가 그것을 대변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그렇게 해석하는 자도 없습니다.
또 이혼을 전제로 해서 결혼하는 법도 없기에 현실에서 이혼이 많다고 해서 결혼으로 비유 대상을 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싫으면 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줄 수도 있다”는 식으로 결혼 비유를 해석해버리면 비유법에 대한 원리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그런 의미를, 아니 그런 힌트조차 내비친 적이 없습니다.
저로서도 질문자께서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한 것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라고 이해합니다. 그보다는 질문자 자신의 그분과의 영적 관계가 아름다운 결혼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약 질문자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 즉,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이미 그러지 않은 이상은 그분과의 관계가 약간 소원해진 것은 아주 정상적인 결혼관계에 속한 것입니다.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도 평생 동안 처음 결혼했을 때의 그 열정과 사랑의 감정을 항상 동일하게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살다보면 수시로 싸우고 며칠 씩 말도 하지 않고 지내고 심지어 잠시 별거했다가 다시 합하지 않습니까?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도 그와 동일하다는 측면에선 오히려 결혼의 비유는 아주 적절합니다.
'야다'의 결혼 관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호4:6)
호세아 선지자는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도해야 할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위해서 악행을 일삼는 것을 한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제사장직을 더 이상 수행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할 백성들조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지므로 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히브리어 ‘다아트’(dah-ath)의 어근은 동사 ‘야다’(yaw-dah)에서 온 것입니다. 또 ‘야다’는 상호 관계를 통해 직접 보고 겪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야다는 바로 아담과 이브의 결혼을 설명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4:1) 여기서 동침한다는 단어가 바로 서로를 체험을 통해 안다는 뜻인 ‘야다’입니다.
만에 하나 주님과 신자의 관계를 어떤 이단종파처럼 성적관계를 맺는데 비유한 것으로 오해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이미 설명 드린 대로 화자가 전하고자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에 비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신자의 사이도 부부가 성관계를 통해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서로 깊이 알고 있는 사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면 그 때부터 항상 같이 살면서 모든 일을 의논해가면서 힘을 합쳐 아름다운 가정이 되도록 꾸려 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그분의 왕국을 자신의 삶과 인생에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모든 일을 그분과 상의 결정 수행하면서 말입니다. 또 신자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영적 간음에 해당되기에 결혼이라는 은유가 아주 적절한 것입니다.
계시록에선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주님의 신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19:7-9)
성경에는 결혼 외에도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 대한 비유가 다양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 스승과 제자, 형제 관계, 친구 사이, 왕과 백성 등등입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의 여러 다양한 측면들을 하나의 비유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각각의 비유는 누구나 그 비유를 통해 가장 쉽게 연상할 수 있는 특성만 강조한 것이지, 그 관계에서 파생되는 부정적 측면까지 포함해서 전부를 다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 종, 제자, 동생, 친구, 백성의 위치에 있는 신자가 그분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자의 잘못이자 책임입니다. 또 실제로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신자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여러 약점과 허물을 노정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비유들의 적실성은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군사부일체라는 비유를 통한 가르침 자체는 아무 하자가 없지만, 충성과 공경과 효성이 모자라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것은 그 당자의 책임이듯이 말입니다.
6/29/2012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간 저와 님 사이에 막혔던 소통의 벽을
아주 조금이나마 허물어보려는
제 나름의 진심과 노력이라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