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용서란 어떤 것인가?
[질문]
요즘 배우 송혜교씨가 출연한 영화 “오늘” 에 대해 생각하다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 영화는 용서란 무엇인가? 전적인 용서가 가능한가? 등 묵직한 담론을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해자로부터 사과 받지 않은 용서가 과연 진정한 용서인가?”란 질문이 대두됩니다. 저도 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 용서에서도 분명 먼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고 회개 할 때 구원 받을 수 있기에 사과가 있어야 진정한 용서가 되는 원리가 맞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죄인은 전혀 모르는데 피해자인 사람이 그 죄인을 용서했다고 용서가 된 것일까요?
[답변]
영화에서 묘사된 용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단 가해자 쪽에선 아무런 사과의 말이 없었는데도 피해자만 용서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 용서의 방안이 자기 혼자만의 심정적 용서인지, 직접 만나서 용서한다는 뜻을 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크게 상관없을 것입니다. 질문의 주제는 피해자만의 용서가 참 용서인지 묻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야말로 성경적인 용서입니다. 아니 그 전에 용서란 반드시 피해자가 하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보상하고 사죄한 것으로는 용서의 필요조건일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놓고 피해자의 처분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사죄를 넘치도록 해도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가 독단으로 했던, 심정적으로만 했던, 사죄 전에 먼저 했던, 어쨌든 진정으로 했다면 이미 용서는 용서인 것입니다. 용서는 전적으로 피해자가 해야 한다는 너무나 간단명료한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의 가장 기본
세상에서의 용서는 가해자가 반드시 자기가 끼친 모든 손해에 대해 피해자에게 보상을 한 후에 진정으로 반성하며 사죄하는 고백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물론 가해자 쪽의 형편이 어려워져 현실적 보상이 불가능한 경우는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해자의 반성 사죄가 정말로 진심인지 여부입니다. 또 그 진심을 피해자가 충분히 납득, 이해하여 받아들이면 용서가 성립됩니다.
우선 사죄가 진심이어야 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죄에도 이런 저런 모습으로 가식, 과장, 위선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현실적 위치와 신분과 관계 등을 감안하고 또 자기 이해타산을 따져서 일단 빌고 보자고 들 수 있습니다. 거기다 주위 사람들의 강요에 의한 사죄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역으로 따져 용서에서 쉽게 간과하는 측면이 있는데 피해자도 반드시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의 가장 핵심이자 기초되는 내용은 한마디로 앞으로 복수를 결코 하지 않겠다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간혹 여러 가지 정황과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용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가해자의 사죄에 일차 감정적 반응으로, 그 사죄가 진심인지 과장이었는지 불문하고, 용서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억울하고 괘씸해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용서하지만 나중에 다른 일로 혹은 이와 동일한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받은 만큼 되돌려 줄 테다”는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들면 아무리 첫 용서의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해도 참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죄할 때에 현실적, 정신적 손해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는 뜻도 피해자가 복수하고자 하는 시도를 막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수는 않겠지만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거나, 가해자를 내 사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것들도 역시 온전한 용서는 아닙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격언대로 용서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이전보다 더 좋아지던지 최소한 동일해져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게 되면 사죄나 용서 둘 다 순전히 현실적, 타산적 필요에 의해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척 시늉만 낸 것입니다. 부부가 속으로는 미워하고 각 방을 쓰면서도 자녀들 앞에서는 사이좋은 척 웃고 지내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용서의 진짜 본질
가해자가 손해를 배상하고, 피해자는 복수할 의도가 없다는 용서에서의 가장 기본적 요소를 곰곰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손해 배상은 용서 받아야만 할 사건을 실제로도 종결짓자는 의미를 지닙니다. 더 이상 그 사건을 문제 삼지 말아달라고 간구하는 셈입니다. 복수 하지 않겠다는 것도 이미 그 사건은 종결 났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새로운 혹은 이전과 같은 관계로 회복하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기본적으로 용서란 불미했던 사건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 사건을 청산하여 잊는 절차가 아니라 가해자인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건보다 사람 중심이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습니까?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건은 다 해결되었어도 여전히 그 사람이 미우면 용서 안 해주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말하자면 상할 대로 상해진 내 체면, 위신, 자존심은 억만금을 주어도 회복할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변상과 사죄를 충분히 받았기에 용서한다고 선포했어도, 물론 그 당시로선 상당한 진심이 포함된 용서였지만, 그 사건을 다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분통이 터지고 억울한 마음이 솟구칠 수도 있습니다.
용서를 몇 번이나 해주어야 하는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베드로로선 세상 사람들은 세 번까지 용서해주는 것도 대단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선 그 곱절에다 하나 많으면서 완전수인 7번까지 용서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겠는가 여겼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70의 7곱 배인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까? 일곱 “번이라도”라고 했으므로 실은 그럴 정도로 아무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했으므로 동일한 잘못을 70번 반복하고, 또 그렇게 7곱 종류의 죄를 범해도 용서해주라는 뜻입니다. 숫자로만 따져도 현실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불가능한 용서 같습니다. 한마디로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용서하려면 잘못된 사건들은 전혀 문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 사람을 다시 진정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큰 잘못이 있어도, 또 아무리 많이 자주 범했어도, 나에게 너무나 큰 손해와 상처가 남아 있더라도,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용서는 손해 배상이나 사죄를 안 받아도 이뤄져야 하며, 아니 사실은 그것과 무관하게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종들과 회개하는 임금의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면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초점은 “중심으로 그 형제를” 용서하는 데 있습니다. 사건의 종류, 피해의 정도, 보상의 크기, 사죄하는 태도 등에 따라 용서를 차별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형제,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을 거푸 범한 잘못을 용서하기란 절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용서하기 이전에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지부터 진짜로 심각하게 따져 봐야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에 여러 구체적 뜻이 있겠지만 일단은 이혼까지 갈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 타협 용서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끝까지 용서하는 근본 이유도 무엇입니까? 오로지 자식이니까, 그 관계는 죽을 때까지 소멸될 수 없으니까, 때로는 자식이 원수보다 더 미울 때도 있지만 결국은 용서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주로 부모 쪽에서 먼저 일방적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성경은 신자에게 예수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용서를 베풀었습니까? 당신께 죄인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온 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피해자이고 죄에 빠진 인간이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가해자가 예수님께 회개하며 먼저 용서를 빌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먼저 일방적으로 용서를 베풀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용서를 본받아야할 가장 핵심적 부분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8,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용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가해자의 회개하는 진심이 가감 없이 전해진다면 또 모든 배상이 완료되었다면 어지간히 완악한 자가 아니고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야할 일이 있다는 자체로 이미 평소에 가까운 사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아예 먼 사이거나 모르는 자라면 용서라는 개념 자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가해자 쪽의 보상과 사과가 충분이 이뤄져서 용서했다면 엄밀히 따져서 피해자 쪽에서 사랑으로 행한 측면은 거의 없습니다. 더 큰 용서는 가해자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신자를 두고 가르치신 그대로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3-48)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지금껏 유대 율법사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도덕적 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할만한 자, 문안할만한 자만 그렇게 하는 것은 이방인에게도 예사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과 문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을 위해 먼저 일방적으로 사랑하셨듯이 신자라면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질문자께서 하나님께 먼저 회개해야 구원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회개 자체가 인간의 공로가 됩니다. 구원에서 예수님의 공로 외에 인간의 자격, 조건, 공적, 의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믿음만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영이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날 때에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 회개로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의 중생의 씻음이 선행되었기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예수 믿고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주셨던 것입니다.
용서로 천국을 실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예수님이 신자가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먼저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회개와 마찬가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전제조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워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도성 니느웨가 진노의 심판 대신에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을 요나는 끝내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요나를 이렇게 견책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0,11)
한 마디로 정죄와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분께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심판할 자를 심판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결코 미워하지 말고 오직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도 하지만 모두가 죄 아래 있는 연약하고 어리석고 흠결 많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나한테 진정으로 용서를 빌고 있지 않는 바로 그 모습으로 내가 다른 이에게 대할 가능성은 상존(常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용서를 몇 번이나 해야 하는지 물은 것은 용서의 방법과 태도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숫자로 물었으니까 일단은 숫자로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490번의 숫자에는 숫자적 의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구체적으로 70번 동일한 잘못 X 7의 다른 종류의 잘못은, 아니 7번의 동일한 잘못 X 70 개의 다른 종류의 잘못이라 쳐도, 어지간히 믿음이 좋아도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베드로가 7이라는 완전 숫자로 물었으니까, 예수님은 더 나아가 꽉 찬 숫자 10을 곱한 위에 다시 완전 수자 7을 보탰습니다. 한 마디로 숫자에 관계없이 천 번이든 만 번이든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관해서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평생에 짓는 죄가 어디 만 번뿐이겠습니까?
주님은 용서의 방법이 아닌 용서의 본질에 관해 가르친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사건 대신에 사람을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선 눈을 감으시고, 실은 십자가 보혈의 의로 덧입혀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보시지만, 죄인인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았기에 어떤 잘못이 있어도 끝까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그 용서의 개념을 최후의 심판에까지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라고 하신 후에 심판하는 왕과 종의 비유를 들었습니다.(마18:23-35) 이 또한 용서하지 않으면 구원 대신에 심판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 각각 중심으로 너희 형제를 용서하라”(33,35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하면 이 땅에서부터 성도들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이 더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도 예수님이 원수된 우리를 사랑해주셨기에 바로 그런 사랑을 우리도 우리 원수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부부 사이에 상대의 허물과 결점을 먼저 일방적으로 품어주고 사랑하면 그 가정은 천국으로 화할 것 아닙니까?
스스로 자기부터 용서하라.
아이러니하게도 용서받지 못한 자보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자가 더 괴롭습니다. 현실에선 가해자들에게 사죄할 마음이 거의 없는 까닭은 자기 잘못을 쉽게 깨닫고 용서를 빌 자 같으면 처음부터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순전히 자기 책임이 아니고 쌍방의 과실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용서를 빌긴 빌어야겠는데 보상할 여유가 없다든지 체면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속으로 회개하고 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가해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는 채, 어쩌면 굉장히 회개하고 있는데도, 단지 사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계속 용서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갈수록 상대가 더 괘씸해서 분노만 늘어납니다. 거꾸로 자신의 심령이 용서를 못하는 자신에게 묶이는 것입니다.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사단에게 빌미를 줄 뿐 아니라 상대를 저주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복수할 마음이 스며듭니다. 말하자면 가해자나 피해자 중에 누가 더 의로운지 분간이 안 갈 단계가 됩니다. 예수님은 심중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나 마찬가지라고 했지 않습니까?
진정한 용서란 궁극적으로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미워하고 있는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꺼내놓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가해자의 사죄가 없어도, 혹은 여전히 원수 상태인 그를 비로소 사랑하고 또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용서는 현실적 보상은 물론 진정한 사죄의 고백 없이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심중에서만 용서해도 용서인 것입니다. 아니 심중에서 먼저 진정한 용서가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부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용서하고 그런 바탕에서 자기와 상대를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똑 같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확실히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죄를 보지 않고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용서란 이전과 동일한 혹은 더 좋은 관계로의 회복을 최종 목표로 합니다. 단순히 인간 사회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서로 세워주고 체면치레 하는 정도라면 용서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용서는 이해 타산적 요식 행위에 불과합니다. 법정에 가서 서로 얼굴 붉히고 시간적 재정적 손해 보는 일만 막자고 타협한 것입니다.
또 가해자가 모든 손해를 충분히 보상하고 진정으로 사죄하여 용서를 받았다 칩시다. 가해자도 죄 많은 인간인지라 돌아서서 지나고 나면 다른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용사 받는 태도에서 괘씸하거나 섭섭한 점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렇게까지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도 됐는데 싶어서 괜히 손해 본 기분마저 들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해자가 보상과 사죄도 하기 전에 피해자가 무조건적으로 진정으로 가해자를 용서했다고 칩시다. 어떤 불순한 동기나 앙금이 내포되지 않는 가해자의 진정한 회개를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진짜로 예수님처럼 용서한다면 누가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가해자의 참 회개가 선행되면 바람직하고 피해자의 용서도 잇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자 쪽에서 먼저 일방적으로 베푸는 용서는 더더욱 가해자의 참 회개를 부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해자가 계속 잘못을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거나, 그 반대로 혼자서만 이미 반성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피해자는 진정한 용서가 심중에 이뤄졌다면 가해자를 먼저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 정황과 그 예상되는 반응까지 심사숙고해야 하겠지만 피해자가 용서하겠다고 하는데 완강하게 반대할(?) 가해자는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전혀 사죄할 생각이 없고 자기가 오히려 잘했다고 우긴다면 신자로선 하나님과 자신 앞에 자기가 할 바는 다한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방문한 자의 집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지만 받을 태세가 안 되어 있다면 그 복은 빈 자에게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무조건 신자더러 일방적으로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강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솔직히 너무나 벅차고 감당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기 위해 날마다 피 흘리기까지 노력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또 우리 모두가 능히 그러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더더욱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십자가 긍휼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나부터 용서해 주시고 또 나에게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과 힘을 부어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용서의 순서와 방법과 태도가 문제가 되기 시작하면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참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에서 요체는 사건보다 사람을 용서하되, 이전보다 더 좋거나 같은 관계로 이어져야 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원수 같은 존재였다가 무조건 용서 받았기에 우리도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으며,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계명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천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그래야 하며, 무엇보다 자신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참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용서의 이런 본질을 제대로 알고 진심으로 그대로 시행하겠다면, 가해자의 사죄나 피해자의 용서에서 그 순서와 방법과 태도를 하등 문제 삼을 것 없지 않겠습니까?
11/3/2011
손양원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매일 묵상하고 있는 구절들 중 요나4장11절이 있는데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