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1:1-4)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2021 신년주일 설교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학1:1-4)

 

학개서의 배경

 

암울했던 2020년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으나 터널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여태껏 살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앞으로도 상당기간 더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 혼돈의 와중에도 백신이 속속 개발 보급되고 있어서 언젠가는 언택트(un-tact) 사회가 종식되고 이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오기에 새로운 계획과 각오로 희망차게 새해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에게 네 번에 걸쳐 백성들로 성전재건을 독려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것은 코로나 재앙이 끝이 나서 정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자 바로 성전을 재건한 일은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교회로 다시 모여서 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새해 첫 주일 아침에 학개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서 그 때를 대비할 수 있는 지침을 얻고자 합니다.

 

그 첫째 계시가 바사의 다리오 왕 이년 즉, BC 520년 유월 초하루에 임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는 BC 586년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멸망당했으나 그 바벨론도 BC539년에 바사의 고레스에게 멸망당합니다. 고레스는 피정복민에게 유화정책을 시행했는데 BC 538년에 칙령을 내려 유다백성을 본토로 돌아가고 성전도 재건하도록 허락했습니다.(스1:1)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인솔 하에 일차 포로귀환이 이뤄졌는데 학개도 이때에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크게 회개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잘 지키지 않은데다 우상을 숭배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겠다고 단단히 결심했고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성전 건축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마리아의 총독들이 고레스 왕이 죽자 아닥사스다 왕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유다가 성전과 성읍을 중건하고 나면 반역할 것이라고 음해하여 공사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다 다리오 왕 2년인 유월일일에 학개가 여호와의 첫 계시를 백성들에게 선포했고 그 24일 후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성전재건공사를 재개했습니다.(학1:14,15)

 

그러자 다시 유브라데 강 서편의 총독들이 공사를 하지 못하도록 다리오 왕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스5:6-17) 그러나 다리오는 왕궁의 서고에서 포로귀환과 성전재건을 허락한 고레스 왕의 조서를 발견하고 경비까지 대주며 그 공사 재개를 다시 적극적으로 허락해주었습니다. 결국 고레스 사후 다리오까지 14년 간 성전은 공사가 중지된 채 방치되었던 것입니다. 학개의 메시지로 공사를 재개하고 4년 후 BC516년에 완공했는데(스6:15), 그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늙은 선지자의 마지막 봉사

 

우선 에스라서는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스5: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개의 첫째 메시지를 들은 백성들이 다리오의 정식허가를 받기 전인데도 공사를 재개했고 그럼에도 사마리아의 총독들은 그 공사를 훼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유다장로들을 돌보셨다고 해서 호위 천사를 보내준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그들로 훼방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한 것이고 또 그 전에 장로들의 굳건한 믿음과 뜨거운 열정이 겉으로 확연히 드러났기에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14년 전에는 왜 그렇게 과감하게 공사를 계속하지 못했는지 의아해집니다. 식민지에게 자치권을 주었던 고레스 왕이 죽어서 정치적 환경이 바뀐 탓도 있지만 유대인들의 믿음이 시들해진 것입니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는 한국 속담이 있습니다. 처음 귀환했을 때 모든 사정이 열악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했는데도 성전 재건에 열심을 내었으나 차츰 생활이 안정되자 게을러졌던 것입니다.

 

그들을 바르게 이끌어야 할 스룹바벨, 여호수아, 학개 같은 지도자들도 함께 손을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으로 나태해지자 하나님의 계시도 그 기간 동안 중단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사 년의 침묵을 깨고 이스라엘에게 던지신 첫마디(4절)가 이스라엘의 그 나태한 정신 상태를 야단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도 성전 재건을 시작하자고 외쳤는데(스5:1,2) 학개보다 두 달 후인 다리오왕 이년 8월이었습니다.(슥1:1) 그럼 학개의 첫 메시지만 듣고 공사를 재개했는데 장로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행동으로 옮기게 만들 만큼 강렬했다는 뜻입니다.

 

학개는 또 백성들에게 성전의 이전의 영광을 상기해보라고 강조했는데(학2:4) 그도 느부갓네살에게 파괴되기 전의 성전을 보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럼 지금 그의 나이가 최하 70세는 되었습니다. 그가 활동한 기간도 이년 남짓으로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결국 학개는 인생 말년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서 주님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불꽃은 마지막 사그라질 때가 가장 밝게 빛난다고 합니다. 학개로선 그 나이에 남의 눈치를 보거나 외부의 핍박이 두려울 리 없으므로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격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지난 14년간 외부 압력에 굴복했지만 그 기간 내내 하나님께 이 문제를 두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쉬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때가 되었다고 보고 이 늙은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격려하는 동시에 도전하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이 그의 말에 청종했고(1:12) 또 여호와가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매 하나님의 전의 역사를 시작했다라고(1:14)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개의 메시지는 아주 직설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간결한 질문이나 관용구를 반복한 것이 특징입니다. 백성들로 성전재건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생각을 집중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 외부여건에 핑계대지 않고 진심으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 것입니다.

 

코로나로 모든 이들이 흑암에 눌려 있는 지금 세대에 이런 선지자적인 소명에 자기 전부를 걸 수 있는 목회자가 절실합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신실한 종들이 그분께 받은 진리의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 상황은 어떻게 되든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뜻만이 실현되기를 소원하는 순전한 믿음의 목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럼 성령의 역사도 강력히 임하고 그 메시지를 듣는 성도들도 학개 때처럼 감동받아 주님의 일에 기꺼이 동참할 것입니다.

 

학개서의 하나의 주제

 

학개의 그 강력했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바로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4절)입니다. 학개서 전체의 주제이자 결론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청중에게 진지한 회개와 엄숙한 결단을 요구하는 강력한 도전입니다. 질문만 던졌지 답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듣기 원하시는 답은 너무나 명백해서 누구나 알 수 있으며 다른 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답은 “그럴 수 없다(No)”는 것입니다.

 

너희들만 그럴싸한 집에서 안락하게 지내지 말라고 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 하여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며 다스릴 처소는 짓다말고 버려져있지 않느냐? 너희가 성전에 모여 제사도 기도도 드리지 않으면서 감히 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판벽한 집이라고 해서 화려한 집이 아니라 원어로는 단순히 지붕을 이었고 벽을 판자로 가렸다는 뜻입니다. 성전이 파괴되어 지붕과 벽도 없는 비참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 말씀에 빗대어서 교회 건물을 신축 내지 증축하면서 무리해서라도 헌금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문자적으로 확대해석해서 판벽한 집에 거하면 안 되니까 집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아서라도 건축헌금을 바치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가르침이며 죄송하지만 성경을 전혀 해석할 줄 모르는 무식한 소치입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과 오늘날의 교회건물은 여러 차원에서 판이하게 다르므로 일대일로 그것도 문자적으로 비교 적용해선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각 지역에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성경으로 따지면 회당에 해당되기에 이스라엘 전국에 하나뿐인 성전과 견줄 수 없습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기독교 전체를 통 털어 서울에 교회가 하나뿐이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부터 힘에 부치도록 헌금하겠습니다.

 

구약시대에 한곳에 모여 예배드리도록 하신 여호와의 뜻은 여럿입니다. 우선 매일 아침저녁으로 또 수시로 동물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율법의 엄격한 절차에 따라서 제사장들이 집전해야하므로 각 지역에서 임의로 행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성전에만 안치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중보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는 대제사장도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에 하나가 되어서 당신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주변 이방 족속들의 온갖 죄악과 우상숭배의 악습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두 지파가 시기 분쟁 분열 없이 온전한 제사장 나라를 당신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기업으로 주셨던 그 땅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의 제사장 제도는 오늘날로 치면 행정 사법 입법 모든 권세를 행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는 체계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이고 성전은 대통령 궁인 셈입니다. 그럼 성전이 완성되어야만 나라가 온전히 서고 백성들의 삶도 율법에 따라 공평하게 관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 구약 율법은 십자가 복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10) 성전이 맡았던 고유의 역할은 끝이 났습니다. 본문 말씀을 핑계로 교회 건축에 최우선적으로 매달리라고 강요하거나 심지어 하나님 뜻이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것은 성경을 나아가 십자가 복음을 대놓고 거역하는 처사입니다.

 

장소보다 내용이 중요한 예배

 

하나님의 이 도전을 오늘날 코로나 사태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꾸중이 이렇게 들리지 않습니까? “집에서 편안하게 온라인으로 예배를 보는데 익숙해져 교회로 모일 필요가 없다고 점차 게을러지지 않느냐?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계속 그렇게 예배를 보고 싶지? 아무 때나 접속해서 설교만 들으면 되니 시간도 절약되고 설교 잘하는 목사님들 골라서 들을 수 있으니 더 은혜롭게 여겨지느냐? 꼴 보기 싫은 성도들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고 주중에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그 시간에 다른 취미활동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처럼 여겨지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섬기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경건하게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만 받아 들여선 크게 부족합니다. 그것은 신자라면 당연히 항상 지켜야 할 계명이므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할지 질문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1-23)

 

우선 예배는 어디서 드려야하는지 그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아는 것을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배자가 예배하는 의미와 목적과 은혜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주님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합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차별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유다지파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날 것이며 그가 십자가 대속죽음으로 이루신 구원을 알아야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교회로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장소보다 그 내용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선포되고 불신 세상에까지 번져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과 권능만이 순전하게 선포되고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여 사탄에게 미혹된 죄인의 영혼들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이 사역에 헌신하고 있으면 신자들로 코로나 사태도 넉넉히 이기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코로나가 이번 한 번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앞으로도 비슷한 재앙이 계속 일어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가 완전히 멈추고 인간의 거주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나라끼리 탐욕스런 경쟁이 멈추지 않는 한 새롭고 더 강력한 바이러스는 계속 생길 것입니다. 지금 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야 할지 모르고 그럼 교회 건물로 모이는 것이 근본적으로 차단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대비까지 하라고 이번에 온라인 예배 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학개의 꾸중을 통해 성전을 재건시켰어도 이스라엘이 처음 율법을 수여하신 뜻대로 준행하지 않으면 바벨론 포로 때처럼 다시 그들을 외면할 것입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절대로 두지 않고 오직 그분의 계명대로 거룩하게 살아야만 하나님이 들어와도 나가도 즉,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이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실패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성전은 이전의 모습을 회복했으나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얼마 안 가서 이방족속의 우상을 숭배하던 이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한탄하셨지 않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 하나님의 계시가 학개 때의 십사 년의 삼십 배나 되는 사백년간 침묵했고 성전문은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닫혔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게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으나 예배의 내용은 여전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예배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아는 대로 삶에 실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크고 화려한 교회는 문을 닫으라.

 

코로나 이후에 교회가 당면할 첫째 과제로 예배당으로 대면예배로 모이는 것이 전부이자 본질인지 심각하게 재고해봐야 할 것입니다. 대형교회를 탓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커지는 데는 땀과 눈물의 헌신이 있었고 설교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많은 자원과 인원으로 다방면의 사역을 효율적으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화려한 교회건물이 이런 시대 상황에 꼭 필요한지 다시 점검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의 중심이 예배일 때는 신자들을 다 수용해야 하므로 큰 건물이 필요합니다. 예배가 교회 사역에서 가장 먼저이고 중요한 것은 틀림없으나 엄밀히 말해서 주일 하루는 나머지 주 6일의 삶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예배로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재확인하고 가슴에 채워서 세상에 나가서 그것을 나눠주고 알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의 존재와 삶 자체가 산제사가 되어야 하고 그 생활 현장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자더러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는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선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기독교가 그 짧은 기간에 불같이 번져나간 이유는 하나님 쪽에선 성령의 강력한 역사였지만 신자 쪽에선 당시의 음란한 세태와 정반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겼고 그 사랑이 주변으로 누룩처럼 번져 나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학개서의 주제인 본문 4절의 말씀을 거꾸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코로나 사태를 겪고도 판벽 한 예배당에만 거주하는 것이 가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신자끼리 예배만 드리려면 온라인 예배라도 충분합니다. 일 년 가량 온라인 예배만 드리는 와중에도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신자는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더욱 집중했기에 대면 예배 이상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학개 당시에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지 않고 타 인종과 결혼해 남은 자들도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자 창조주 여호와께 예배는 계속 드려야 했기에 서서히 회당 예배가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외부적인 제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소그룹 예배가 형성된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모든 사회 활동이 비대면 체제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훨씬 이전 온라인이 활성화되면서 무점포 비즈니스 추세로 들어섰습니다. 이번에 재택근무마저 본격화되었고 교회도 그 흐름을 끝까지 비껴나갈 수 없습니다. 이번에 온라인 예배가 편해진 사람들은 코로나가 끝나도 꼭 교회로 모일 필요가 없다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초점을 개인적인 각성과 성화에만 두는 미숙한 교인이긴 하지만 그들을 교회 밖에 버려둘 수는 없으니 당분간 오프라인 온라인 예배가 병행해야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이가 가장 아쉬워한 것은 사람들과의 진정어린 따뜻한 교제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한 미국 TV 뉴스에서 백신을 맞으려고 기다리는 한 아주머니가 어서 빨리 정상으로 돌아가 자식들을 만나고 싶다고 울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장소와 형식에 관계없이 정말로 진실하게 교제할 수 있는 소규모 모임이 절실해졌고 또 활성화되고 있기에 이 사태가 끝나면 지금 같은 규모의 교회건물의 필요성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모임을 통해서 초대교회 때처럼 실제로 예수님의 사랑이 성도 간에 나눠지고 그로 인해 새 생명으로 함께 승리하는 역사를 체험케 해주지 못하면 앞으로 존속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지금껏 예배로 모이는 가장 큰 목적이 솔직히 무엇이었습니까? 설교를 통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조금 더 착하게 살아야지 결심하는 정도입니다. 그보다 새벽마다 뜨겁게 기도하여서 자기 고난과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합니다. 코로나 사태도 어서 빨리 끝내달라거나 그로 인한 불안감 당혹감을 없애려고만 기도합니다.

 

예수를 믿어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더 이상 십자가 복음에 내포된 더 깊은 은혜와 권능을 배우고 실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을 성부 하나님께 바칠 테니 당신의 큰 권능으로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 최소한 나쁜 일은 생기지 말게 해달라는 것이 신앙 목표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참 제자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같은 모습으로는 교회가 아니라 종교단체일 뿐입니다.

 

예배당 밖에 있는 예수님

 

예수님은 오늘날의 교회들이 하고 있는 행태를 보인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강도의 굴혈로 변했다고 야단치면서 제물 장사치와 환전상을 쫓아내었습니다. 나중에는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참히 파괴될 것이라고 눈물 흘리며 예언했습니다. 로마의 디도 장군에게 AD 70년에 그대로 된 이후로 이천 년이 지나도 버려져 있다 못해 이슬람의 성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예배로 모이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었고 이스라엘이 아는 것을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본체이신 당신께서 오셔서 하늘의 거룩하고 신령을 빛을 비추었으나 당신의 백성들이 어둠이 더 좋아 그 빛을 싫어하며 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거리나 가정집에서, 때로 거처도 정하지 않고 유대 온 땅을 다니면서 일상시민을 만나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질병을 고치며 상담해주었습니다. 그것도 율법, 정확히 말해선 인간장로들이 만든 유전에 따라 정죄 받아서 성전에 출입할 수 없는 자들을 주로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하늘의 새 생명으로 살려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으로 치면 목사인데도 예배당 밖에서 거지, 창녀, 귀신들린 자, 불구자, 불치병자, 고아, 과부, 세리, 외국인 나그네, 우상숭배 자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그런 주님이 오늘날 화려한 예배당 안에 정장을 빼입은 사람끼리 모여서 거룩한 얼굴로 경건하게 찬양하고 기도하는 곳에 과연 함께해 주실까요?

 

하나님은 4절의 이 짧은 메시지 안에 당신의 분노를 최대한 절제하고 있습니다. 성전공사를 14년 간 중지했어도 징벌을 내리지 않고 긍휼을 베풀다가 때가 차매 성령으로 간섭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 쪼개는 권능을 역사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죽음을 앞둔 늙은 선지자의 끈질기고도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당연히 예배당에 모여서 한 목소리로 찬양 하고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큰 건물도 필요하고 다양한 사역을 효율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이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일로 함께 계실지 하나만은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사실은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판벽 한 교회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를 믿는다는 영적인 우월감에 취해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더 솔직히 말해 이웃과 이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천국 가고 이 땅에서 형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 아닙니까?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천 년 전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코로나로 모든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따져보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직접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 동안 교회가 맡은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철저히 회개하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코로나가 끝나 다시 교회로 모이면 처음 얼마간 회개하다가 금방 게을러지지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설교로 부흥한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함께 하지 않으면 교회만 부흥한 것이지 하나님이 부흥한 것은 아닙니다. 사회에서 멸시 소외 받거나 사탄에게 미혹된 자들만 찾아가시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함께 가지 않으면 주님은 계속해서 교회 밖에만 머물 것입니다.

 

“이때에 판벽 한 집과 예배당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학개의 외침이야말로 신자가 새해 첫날 아침에, 아니 천국 가는 그날까지 매일 아침마다 들어야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바꿔 말해 교회와 신자가 올해의 목표를 거창하게 잡을 필요 없이 행하는 모든 일에 진짜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도록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비추어 주님의 심정을 잠시만 헤아려도 주님이 진짜로 동행해주고 계시는지 아닌지 여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올해 매일 아침 이 음성을 듣고 그대로 실현하는 신자는 주님이 코로나에서도 지켜주시고 반드시 넘치는 은혜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1/3/2021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9 목사의 이중직(二重職)에 대한 성경적 입장은? master 2024-08-29 10
128 여자의 해산이 구원을 얻는다? master 2024-07-19  
127 현대 교회의 방언이 성경적으로 참된 방언인가요? master 2024-07-19  
126 성경(교회)은 정치적 우파를 지지하는가? master 2024-03-04 11
125 성전 건축이 백성을 착취한 것이 아닌지요? master 2023-11-28 10
124 집 근처 교회에 다녀야 할 성경적 근거가 궁금합니다. master 2022-12-22 18
123 신자가 장례를 화장으로 치러도 되는가? master 2022-11-07 27
122 신자가 할로윈파티를 개최해도 되는가? master 2022-10-03 20
121 (눅17:1,2) 지옥에 떨어질 사람의 조건은? master 2021-06-28 19
120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비유에서 나무가 교회를 뜻하는지요? master 2021-04-05 26
119 여성의 목사 안수에 대한 보충 master 2021-02-02 22
118 여성의 목사 안수는 성경적인가? master 2021-02-02 94
» (학1:1-4)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master 2021-01-11 21
116 (행15:22-35) 교회가 제정할 유일한 규례 master 2020-11-25 27
115 (행15:12-21) 복음 외에 신자에게 필수적인 규례 master 2020-11-20 9
114 (행1:8) 땅끝은 과연 어디인가? master 2020-10-28 47
113 (행14:1-18) 구원 받을 믿음을 볼 수 있는가? master 2020-10-28 17
112 창28:17-22) 십일조 드리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 master 2020-07-25 45
111 가나안 성도인데 어떻게 믿어야 하나요? master 2020-07-25 45
110 개신교는 왜 사도전승교회를 인정하지 않는가요? master 2020-05-27 50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