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일기-민11장] 만나 vs. 메추라기

조회 수 1520 추천 수 78 2012.02.19 21:06:10

본문: 민수기 11장 1~35절
붙잡은 단어: 이슬과 만나 (9절), 탐욕의 무덤과 메추라기 (34절)


2월 19일 주일의 늦은 오후, 나는 집 근처의 산책 코스로 산보를 나섰다. 오버루어젤의 벌판길은 사색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속보 중에 집중하는 QT의 사색은 내게 말씀의 새로움을 공급한다. 집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겠지만, 나 홀로의 산보길은 묵상의 기쁨이 있어 나름의 위로가 된다. 출발 전 오늘 예배시의 설교 말씀과 병행구들을 미리 머리에 넣어 놓았다. 담임 목사님의 설교 말씀 주제는 민수기 11장을 배경으로 한 이슬과 만나였다.

이제 출발.. 몸은 걷고, 머리와 가슴은 묵상이다. 만나는 광야 생활 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생명의 양식이었다. 만나는 매일 공급된다. 만나는 왜 주어진 것일까? 신명기에 해답이 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8:3) 즉,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살아있는 만나’라고 선포하셨다.(요6:48-51) “이(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그렇다. 나의 만나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시요, 또한 예수님 당신이시다. 내게 있어 매일의 영적 양식은 살아계신 만나이신 예수님이시다.

비가 내린 후의 햇살 가득한 들판길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2월 하순 영상 5도의 바람에는 상큼함이 느껴진다. 개나리 비슷한 나뭇가지에 새 순의 움틈이 간간히 보인다. 이미 봄은 동장군을 밀어내고 한 발짝 성큼 다가온 것일까? 이곳 들판의 대부분은 밀밭이다. 밀은 보리와 같이 늦가을에 파종하여 새순이 자라난 상태에서 혹독한 겨울을 난다. 얼음 밭길에 삐죽이 솟아 보이는 밀의 가녀린 싹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죽으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이 밭의 밀들을 실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예수님이 특별히 밀이라는 곡식을 택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이제사 이해가 된다. 파종 후 죽음의 과정을 거쳐 싹이 난 다음에도, 밀은 겨울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광야와 같은 삶이다. 영하의 칼바람과 얼음 밭 속에서 밀은 싹을 피운 채 석 달의 고난을 겪어야 한다. 기나긴 겨울을 건강하게 잘 보내야, 이후 봄이 오면 힘차게 자라고 초여름에 많은 열매를 맺어 수확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밀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씨앗은 죽고 새로이 거듭난 생명이다. 이 생명으로 광야를 살아갈 수 있다.

생명만이 생명을 낳는다. 어머니가 새 생명을 자궁에 잉태한 후 겪는 10개월의 시간도 희생과 수고이다. 특히, 마지막의 산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과정이다. 영적 탄생도 비슷한 것 같다. 아니, 나의 거듭남은 이보다 더 엄청난 과정을 거쳤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우문이 아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3:4)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거듭나 본 사람만이 무슨 뜻인지 안다. 물은 물 세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물 세례, 곧 침례는 죽음의 과정이다. 멸망의 대홍수 시에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요(벧전3:20-21),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이다(롬6:1-11). 그래서 예수님도 밀의 비유를 거론하신 직후,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5)고 말씀하셨다. 즉, 내가 죽은 이후에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거듭남의 과정이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에 내가 첫번째 붙잡은 단어는 이슬과 만나였다.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민11:9) 목사님은 이슬이 우리의 생명과도 같다고 했다. 그 말씀을 생각하며 밀밭을 지나던 중 번뜩 생각이 스쳐간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슬과 만나는 동시적으로 함께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슬이 먼저고, 만나가 나중이다. 같은 기사를 담은 출애굽기에서는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출16:13-14)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슬이 진 중에 먼저 내리고, 그 이슬이 말라야 만나가 생기는 것이다. 이슬이 중요한 이유는 이슬이 먼저 생겨야 만나가 이어 만들어지기 때문이리라. 광야의 메마른 환경을 생각하면 이슬이 금방 마를 것임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이슬은 생명과도 같이 존귀한 것이다. 그러니까 민수기 기사도 이슬과 만나가 ‘함께’ 내려지는 것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왜 이슬이 있고 만나가 생겨나는 것일까? 목사님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내 심금을 흔들었다. 내 마음에 언뜻 이슬은 만나의 ‘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귀하디 귀한 이슬이 마르고 스러져야 ‘더 좋고 귀한’ 만나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의 탄생 과정을 닮았다. 이슬이 희생되고 ‘죽어야’ 만나가 생긴다. 어찌보면, 이슬은 내가 가진 값지고 귀한 것이다. 주님과 십자가 복음 이외에 내가 지향하는 가치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이슬 대신 만나를 주기 원하신다. 이슬은 내 생명도 포함한다. 이슬과 만나를 동시에 얻을 수는 없다. 이슬을 희생해야 만나가 온다. 이슬은 스러 없어지고 말라붙어야 하는 것이다.

산보길의 중간에 엄청난 바람을 만났다. 변덕스런 독일 날씨에 더하여 바람길로 유명한 벌판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외투에 달린 벙거지 모자를 푹 쓰고 단추를 여미고 다시 걷는다. 이제 두번째 붙잡은 단어로 묵상이 이어진다. 메추라기는 무엇일까? 축복되고 좋은 것일까? 메추라기는 분명 만나와 함께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메추라기를 먹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그러니, 메추라기는 결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이 죽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아닌, ‘욕심을 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 지명의 이름도 ‘탐욕의 무덤’이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고기를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들은 두가지 거짓말을 했음을 본다. 첫번째는, 그들이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와 그 외 부산물들을 ‘값없이’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공짜가 아니었다. 고기를 먹는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가차없이 착취당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그들의 기력이 다했다는 것이다.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받아 누린 그들이 어찌 기력이 쇠퇴할 수 있었겠는가? 왜 이런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그들은 고기를 요구했을까? 4절에 해답이 나온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탐욕은 엄청난 전염성이 있다. 다른 인종들로 인해 시작된 탐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붙은 것이다.

결국 죽음에 이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끝까지 부린 사람들이었으리라. 그 중간에 나오는 기사가 흥미롭다. 하나님은 모세와 백성들 사이에 70인의 장로들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시어 예언을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다.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멧시지인 것이다. 아, 그럼에도 ‘탐욕의 무덤’은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기에, 생명의 말씀은 돌판에 새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판에 새겨야 할 것이다.(고후3:3) 은혜의 시대를 사는 나에게 메추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만나는 희생과 죽음으로 오지만, 메추라기는 탐욕으로 생긴다.
만나는 하나님으로터 온 것이요, 메추라기는 ‘나’로부터 온 것이다.
만나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만, 메추라기는 ‘나’를 왕으로 모시기 때문이다.

만나는 환경을 지배하지만, 메추라기는 환경에 지배받는다.
만나는 매일 새롭지만, 메추라기는 썩고 오염되어 있다.
만나는 하루치이지만, 메추라기는 한달치나 되기 때문이다.

만나는 ‘내어주심’이지만, 메추라기는 ‘버려두심’이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만나이지, 메추라기가 아니다.

아침의 이슬처럼 스러지는 내 세상적 가치를 주님께 모두 드리자.
매일 아침에 내 자아의 죽음을 체험하고, 주님의 만나를 먹자.
나의 메추라기들을 모두 버리고, 매일의 만나만을 향유하자.

어느덧, 내 산보길은 여러 가르텐(주말농장)들을 거쳐 아담하고 고즈넉한 호수로 접어 들었다. 집사람이 좋아하는 곳이라 어느새 내 발길이 이곳으로 인도했다. 지금은 얼음으로 둘러쌓인 이 호수가 곧 녹아서 생명의 약동을 할 때가 오기를 상상한다. 이 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교회의 정집사님이셨다. 집사람과 평상시 가까운 친인들 중의 한 분, 전기가 통했나?^^ 며칠 전 꿈 속에 집사람과 내가 선명하게 보여서,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전화하셨단다. 매일 새벽 무릎으로 시작하시는 집사님이신지라, 감사한 마음으로 근황을 보고드렸다. 기도 부탁도 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움은, 메추라기들을 정리하고, 참 만나를 향하는 내 마음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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