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묵상] 십자가의 4중 고통

조회 수 2330 추천 수 85 2012.03.28 14:45:30
2012/3/26 sunny lee (sonniglee@gmail.com)

샬롬~ 이선우 집사입니다.
어제 주일 저녁 늦게까지 몇몇 지인들과 함께 한 식당에서 작은 나눔을 가졌습니다. 그 감격이 오늘도 이어져, 이 나눔을 간단히 정리하여 여러 분들께도 전하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순절의 후반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고통은 무엇일까? 왜 내게 주어지는 것일까? 저는 개인적으로, 고통은 내가 반드시 거쳐야 할 인생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과 광야의 경험이 없이 어찌 인생을 논한단 말입니까? 고통은 피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과하고 감내하면서 그 고통을 통해 새롭게 변화하고 태어나야만 하는 일종의 쓰디쓴 '보약'인 셈입니다. 이는 마치 감기가 걸렸을 때, 내 몸이 이에 반응하여 감기 바이러스와 내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나는 고통을 견디고 이기는 과정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고통을 거쳐가는 그 순간 만큼은 너무나 괴롭고도 힘듭니다.ㅠ.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십자가는 제게도 너무나 특별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가치가 이곳에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당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이 내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 고통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할 때, 내게 십자가의 의미는 새롭게 다시금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2000여년 전의 그 십자가는 예수님만이 홀로 지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 나도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래 세 말씀이 이 놀라운 사실(Fact)을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갈2:20)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롬6:6)

만일 십자가가 예수님만의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그동안 뭔가 오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오늘날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의 십자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고통의 무게를 느껴 보셨는지요? 그 고통의 깊이를 가늠해 보셨는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고 체험하기에는, 이 십자가에는 4중 고통이 있었습니다. 수치의 십자가, 육체적 고통의 십자가, 단절의 십자가, 죄의 십자가가 그것입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동안 이를 차례대로 하나씩 나누고 싶습니다. (4부작입니다.^^)
**

1부: 수치의 십자가

먼저, 수치의 십자가입니다. 4중 고통 중에서 가장 첫번째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작은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은 어떤 면에서 본다면,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저같이 체면치례와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수치를 한꺼번에 다 받으셨습니다. 숨막히는 심문과 손가락질들, 노도와 같은 야유와 조롱들, 거칠고 잔인스런 모욕과 멸시들, 무자비한 침뱉음과 뺨맞음, 찢김의 채찍들과 피투성이 가시 면류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님이 당하신 것들입니다. 그 수치의 현장을 어찌 필설로 담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 마지막 당하신 것은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그야말로 저주와 수치의 상징물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신21:23, 갈3:13) 십자가가 수치스러운 이유는, 가장 극악한 범죄자만이 십자가형에 처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저주의 십자가에는 또 한가지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사람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문화를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십자가 형틀은 보기조차도 민망할 정도의 부끄러움이었을 테니까요.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이 이런 일을 하고" (요19:23-24)

위 말씀을 자세히 따져보면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골고다의 형장에 있었던 군병은 4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다른 두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전리품 삼아 나눠 가졌습니다. 그 시대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듯, 예수님의 옷은 모두 다섯 가지였습니다. 겉옷과 머리에 쓴 터반, 허리띠, 샌달(신발)과 속옷이었겠지요. 속옷을 제외한 네 개는 서로 나눠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속옷은 아래 위 한통으로 짜여진, 대제사장만이 입는, 탐날 정도로 귀하고 값비싼 옷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제비를 뽑았던 것입니다. 그럼 다른 옷은? 없었습니다. 그외에 예수님이 걸친 옷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었습니다.

내 모든 은밀한 것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드러날 때의 수치가 얼마나 참담하겠습니까? 나체의 예수님이시라니.... 충격적입니까?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구요? 왜 그 흔한 성화나 십자가 상에는 모두다 옷을 걸치고 계셨느냐구요? 설교 강단에서는 왜 이런 주제가 나오지 않느냐구요?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덕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민망함을 넘어선 참혹스러움 때문일 겁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부끄러움 때문일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차라리 숨기고 싶을 정도로, 진실을 외면할 정도로, 우리는 그만큼 체면과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상상하는 것 조차도 싫어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우리가 믿는 전부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자가의 진실이라면.. 그렇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면서까지, 만 천하 백주 대낮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 하셨을까?
좀 더 점잖게 십자가에 달리시면 안 되었을까?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만 했을까?

저는 이 당혹스런 질문에 일일히 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답은 이미 알려져 있지요..)
그럼에도 한 번 쯤은,
이 수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으로 내 눈물과 진심을 쏟아 부어야 할 것이 아닌지요.....


<당신은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

고통의 십자가,
절망의 십자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의 십자가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수치의 십자가였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께서
벌거벗겨진 채로,
백주 대낮에
부끄러운 부분까지도
만천하에 모두 보여지다니..
오, 주님!
당신은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

머리엔 가시 면류관
찢겨진 등판과 창자욱 옆구리
온 몸은 피투성이
고통의 일그러짐과
벌거벗음의 수치..
오, 주님!
당신은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

아, 십자가!
그것은 최고의 고통이었고,
최대의 절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수치였고,
최대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

오, 주님!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히12:3)

오,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이 지신 그것은
내 부끄러움이요,
내 수치였습니다.

오,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이 지신 그것은
수치와 고통으로 얼룩진
내 참담한 죄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가에 38년동안 하염없이 누워있던 병자처럼,
죄악의 현장에서 잡혀 주님 앞에 끌려온 간음한 여인처럼,
성전 구석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던 세리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드립니다.
주여, 나의 부끄러움을 받으소서.
주여, 나의 수치를 받으소서.
**


2012/3/28 sunny lee
2부: 육체적 고통의 십자가

십자가의 고통을 글로 표현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상 하노라면 산문이 아닌 시가 나오는 편입니다. 1부의 마지막에 올린 "당신은 어찌 그리 하셨습니까"도 2009년 11월에 쓴 제 졸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시인이 아님은 아시겠지요.^^ 특히 육체적 고통의 십자가는, 제 짧은 실력으로는 산문적 형식으로 표현할 길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2부 육체적 고통의 십자가는 두 편의 제 자작시와 한 편의 부록을 소개드림으로 가름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자작시 "나의 유월절 어린 양"은 2010년 1월 제자반 시절 QT 묵상의 일부로 씌여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7~30절을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해서 제가 본 것은,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애굽과 바로왕에게 내려지는 마지막 열번째 하나님의 재앙은 그 땅의 모든 장자와 첫태가 죽는 것이지요.

이 사건의 핵심은 어린 양의 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린 양의 피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어린 양이 이스라엘 각 가정별로 한 마리씩 준비되어, 죽임 당하고 피를 흘려, 그 피는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집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양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은 닿지않는 불에 구워 먹었고, 뼈는 꺾어지지 말아야 했으며, 남은 것은 그 밤을 넘기기 전에 모두 불살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칼을 든 천사들은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을 죽음의 심판이 없이 넘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이요, 그 양은 유월절 어린 양인 것입니다. 아, 죽임 당하신 유월절 어린 양.. 그 어린 양의 입장에 서서, 그 고통이 어떠할지 묵상하면서 읽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나의 유월절 어린 양>

  오, 주님!

  당신은 어린 양처럼
  죄와 흠이 한점도 없으셨지만
  죄인의 괴수된 나를 대-신-하-여
  아, 십자가 형틀을 택하셨지요.

  당신은 목마르다 하시며
  우슬초 묶음에 매인 신 포도주,
  그 쓰*디*쓴 잔을
  아, 달가이 받으셨답니다.

  십자가의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진
  고귀한 당신의 피는
  마땅히 죽어질 나의 죄를 대-신-하-여
  아, 한 방울 아낌없이 쏟아 부어졌지요.

  당신의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은
  닿지않는 불에 구워지듯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레
  아, 타들어 갔답니다.

  그 고통 중에 당신은 당신의 뼈를
  일일히 헤아릴 수 있었지만,
  영원∞무궁한 당신의 말씀의 뼈는
  아, 어느 누구라도 꺾을 수 없었지요.

  그 밤을 넘기기 전에
  당신은 모든 일을 이루시고
  유월절 어린 양의 사역을
  아, 홀.로.이. 마치셨답니다.

  오, 주님!
  오, 주님!
  †십자가† 주님..
  아, 나의 유월절 어린 양..

두번째 시는 시편 22편에서 빌려온 것이지요. 시편 22편은 십자가를 향한 제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이 시편을 대했을 때, 두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첫째는, 예수님 오시기 1000 여년 전의 사람인 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 고난에 대한 사건을 이렇게도 잘 묘사할 수 있었을까? 둘째는, 읽으면 읽을 수록, 예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며 고통 당하시는 그 순간 순간의 과정을 그리듯이 어찌도 그리 섬세하고 정확하게 씌여질 수 있을까, 하는 경탄과 감격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도 그렇지만, 시편 22편은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 얼마나 크고 중한지를 내게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22편을 처음 대한 이래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시시때때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지었는지 모릅니다.

'어그러짐'이라는 시를 작성한 때는 2010년 7월 중순이었습니다. 그 당시 새벽기도 설교 말씀과 히브리서 QT 묵상 중에,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린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이 강하게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어서 제게 주어진 것은 시편 22편이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특히, 뼈에 대한 아래의 두 귀절이 제 가슴을 할퀴듯이 지나갔습니다.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14절)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17절)

이 말씀들이 내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기며, 어그러짐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그러짐은 무엇이고, 뼈의 어그러짐은 무엇일까?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는 경지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그러짐과 뼈의 어그러짐,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뼈들이 어그러짐에 대한 깨달음이 점진적으로 임했습니다. 시편22편의 말씀이 알알이 그대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6절)고 호소하신 예수님의 갈갈히 찢긴 마음이 제 심령에 동화가 되었습니다. 그 고통의 강도와 폭과 깊이에 파묻혀, 울고 또 울다 어느덧 메말라 쾡한 눈이 되었을 때에야, 마침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아래의 시입니다.

<어그러짐>

어그러짐은..

맞물려 있는 물체가 틀어져서 맞지않는 상태이다.
끊어지거나 비뚤어지거나 굽음으로 서로 어긋난 모양이다.
동질감에서 이물감으로 이행되는 불균형이다.
오그라짐과 늘어짐의 대립적 긴장이다.
짓눌림과 당겨짐의 상호 갈등이다.

뼈의 어그러짐은...

에임과 저림과 젖혀짐을 넘어선 틀어짐이다.
뼈마디와 관절의 위골이요 탈골이다.
큰 뼈가 먼저 어그러지고 작은 뼈가 그 뒤를 따른다.
오그라짐과 늘어짐, 짓눌림과 당겨짐으로 시작하여
굽혀짐과 끊어짐, 쥐어짬과 으깨임이 함께 온다.
극한 고통으로 인한 악물림의 사무침이다.

십자가 상에서 모든 뼈의 어그러짐은....

양팔이 늘어나고 어깨가 탈골됨으로 시작된다.
발목과 양 손목의 역삼각형 축을 견디지 못한 모든 뼈의 위골이다.
에베레스트의 무산소 등정에 이르는 숨참에 겨운 질식이다.
단 한 방울 물만을 갈구했던 음부 속 부자의 목탐이다.
피와 땀을 차마 분간할 수 없는 육신의 발작적 몸부림이다.
신경계의 모든 통각점이 일시에 열리는 하늘과 땅의 흐느낌이다.
생명의 진액이 서서히 타들어 가는 점진적 고갈이다.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이다.

그래서 십자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시22편)

어.그..러...짐....
오 주님.....
†십자가† 주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제 부족한 능력으로 어찌 십자가의 고통을 다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트루만 데이비스의 글 "현대의학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부록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의사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깊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과 그 과정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읽어 보지 못한 분들은 꼭 일독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샬롬~


(부록)

트루만 데이비스의 현대의학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1.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여기에는 예수님의 수난, 혹은 예수님의 고난의 육체적인 면에 대해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부터 재판, 채찍질, 고난의 행렬,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마지막 몇 시간까지의 예수님의 발자취를 뒤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
  제가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약 1년 전으로. 짐 비솝이 쓴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날]이란 책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글을 읽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지내온 모든 날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다소간 덤덤하게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성경에 그 비참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만,  점차 익숙해짐에 따라 그 사실에 대해 무디어져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제  자신이 내과 의사면서도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잘 몰랐습니다. 이 점에서 복음서 기자들도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십자가 형벌이나 채찍질이 그 당시에는 잘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술한다는 것을 불필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마가가 간략이 남겨놓은 다음과 같은 식의 글을 볼 수 있을 뿐 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15:15,25)
  과거에 예수님의 육체적 수난에 대해 연구한 많은 사람들, 특히 프랑스 외과의사로서 그 문제에 대해  철저히 역사적, 실험적으로 연구하고 광범위하게 글을 써온 피에르 바르베 박사에게 저는 힘입은 바가 큽니다.
  
▶ 십자가형의 관습  
  타락한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심적, 영적 고통의 깊이에 대해서는 제가 논의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몸이 그 고통의 시간 동안 도대체 무엇을 경험했는지, 곧 그분의 수난에 대해 생리적이고 해부학적인 면은 어느 정도 세부적으로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저는 먼저  십자가에 못 박는 관습 자체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외관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관습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페르시아인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이것을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장군들이 이집트와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의 고대 도시국가. 주전 146년 로마에 멸망됨)에 소개했습니다. 그 후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로부터 그 관례를 배우고 실행에 옮겨 그 기술과  능력을 고도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키케로, 타키투스와 같은 로마의 많은 저술가들이 그에 대해  평하고 있습니다. 십자가형의 몇몇 변화가 고대 문학에 묘사되어 있는데, 저는 이 글을 뒷받침 해줄 부분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십자가의 세로대 부분에는 꼭대기로부터 수직으로 60-90cm 밑에 가로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고전형의 십자가(후에 라틴 십자가라고 명명함)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형은 "타우 십자가"(영어의 T자 모양)였습니다. 이 십자가에서는 가로대가 십자가 꼭대기에 있는 새김문에 놓여 졌습니다. 고고학적 연구는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가 바로 그런 십자가형(T자형)이었음을 압도적으로 증거 합니다.
  직립한 세로대는 이미 형장에 박혀 있었고,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는 무게가 50KG이나 나가는 가로대를  지고 감옥에서 형 집행 장소까지 강제적으로 운반해야 했습니다. 아무런 역사적, 성경적 근거  없이 중세와 르네상스 화가들은 십자가 전체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그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상에 대해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남긴 많은 작품들은 손바닥에 못이 박힌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역사적 보고와 실험에 따른 연구는 못이 예수님의 손바닥에 박힌 것이 아니라 손목의 작은 뼈 사이에 박힌 것을 증명 합니다. 만일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면, 못은 사람의 몸무게를 지탱치 못하고 손가락 사이를 찢고 나갔을 것입니다. "내 손을 보아라"(요20:27)고 도마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혹 잘못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고대 해부학자 현대 해부학자 할 것 없이 항상 손목을 손의 한 부분의 취급해 왔습니다. 사형수의 죄목이 새겨진 작은 패는 보통 형장까지 가는 행렬 앞에 놓였고, 나중에 사형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그의 머리 위에 그 패를 함께 박았습니다. 십자가 꼭대기에 나무를 박고 그 위에 붙인 이 패는 어떻게 보면 라틴 십자가 모양을 띱니다.
  
▶ 갯세마네에서의 수난
  예수님의 육체적 수난은 갯세마네 동산에서 시작됩니다. 이 초반의 고통에서 특별히 생리학적으로 흥미 있는 점 하나만 논의하겠습니다. 바로 "피 같은 땀"에 대해서입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복음서 기자들 중에서 오직 의사인 누가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힘쓰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잘못된 전제 하에. 이 구절을 자기네들 구미에 맞게 해석하기 위하여 별별 시도를 다해 왔습니다. 우리는 의학서적을 참고해 봄으로써 상당한 수고를 덜 수 있습니다.매우 희귀하기는 해도 [헤마티드로시스](피 같은 땀)현상이 의학책들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극도의 감정적인 과로 상태에서는 작은 모세관이 땀샘에서 파괴될 수 있는데, 이 현상으로 말미암아 피와 땀이 섞이는 것입니다.
  
▶ 대제사장 앞에서의 수난
  이제 예수께서 배신당하고 붙들리신 현장으로 가도록 합시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제가 예수님의 수난 기사 모두를 다루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실망할지 모르나, 순수하게 수난의 육체적인 관점만을 논의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그렇게 했습니다.
  한밤중에 잡히신 후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와 대 제사장 가야바 앞으로 끌려갔는데, 바로 여기서  처음으로 외상을 입으셨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에 아무 대답 없이 잠잠히 있다는 이유로 사환 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리고나서 성전 경비대들이 그분을 끌고 가서 때리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보라고 하면서 조롱하고 비웃고 침 뱉고 얼굴을 때렸습니다.
  
▶ 빌라도 앞에서의 수난
  상하고 멍들고 탈수한데다가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지쳐 버린 예수님은 이른 아침 예루살렘을 지나,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이 있는 안토니아 요새의 관정으로 호송되었습니다. 물론 당신은 빌라도가 책임을 유대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에게로 전가하려 했음을 잘 알 것입니다. 예수님은 헤롯에게서는 육체적으로 아무데도 다치지 않고 빌라도에게 다시 돌려보내졌습니다. 빌라도는 군중의 외치는 소리에 응하여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선고를 내렸습니다.
  채찍에 맞는 것이 십자가형의 서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로마 저술가들은 그 둘을 연관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빌라도가 본래 예수에 대해 형벌로 채찍질만 명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하는 예수에 대해 가이사 편을 들지 않는다고  군중들이 힐책하자, 그때서야 십자가형을 선고했다는 것입니다.

▶채찍질의 수난
  채찍질을 하기 위한 준비가  다되었습니다. "죄수"의 옷이 벗겨지고 두 손은 머리위에 있는 기둥에 묶여졌습니다. 여기서, 로마 군병들이 채찍질 하는 데 유대 법을 따르려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고대 유대법에 따르면 사십 번 이상 때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확실히 그 법을 준수토록 하기 위해 최고 서른 아홉번 만 때리도록 했습니다.
  로마 군병이 손에 채찍을 들고 한걸음 다가셨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가죽 끈으로 된 채찍으로, 그 끝에는 각각 두 개씩 둥그런 납덩이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무거운 채찍으로 예수님의 어깨, 등, 그리고 다리를 사정없이 거듭 내리쳤습니다. 처음에는 그 무거운 가죽 끈들이 피부만을 찢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내리침에 따라 그 가죽 채찍이 피하 조직을 찢고 파고들자 모세관과 혈관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나오고, 드디어 속 근육에 있는 혈관에서 피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조그만 납덩이들 때문에, 계속되는 채찍질 때문에 넓고 깊은 상처가 생겼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분의 등살가죽이 마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등 전체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고 피로 범벅된 살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죄수"가 거의 죽게 되었다고 담당 백부장이 추측하자, 드디어 채찍을 그쳤습니다. 실신상태의 예수님은 포박에서 풀리자, 자신의 피로 물들어진 돌바닥 위로 푹 쓰러졌습니다.
  
▶ 가시면류관의 수난
  로마 군병들은 왕이라고 자칭하는 이 시골뜨기 유대인을 보며 희롱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어깨 위로 자색 옷을 던지고 그 손에 왕이 쥐는 홀 대신 갈대를 쥐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그들의 익살스런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조롱의 면류관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긴 가시들로 덮인 유연성 있는 가시더미가 면류관 모양으로 만들어져 예수님의 머리위에 씌워졌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다량의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머리카락이 있는 곳은 신체 중  많은 혈관이 있는 곳 중 하나입니다). 비웃고 얼굴을 때리고 난 후 그 군병들은 그 가시 면류관을 머리 깊숙이 씌우기 위해 예수님의 손에서 갈대를 취해 머리를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잔인한 장난에 싫증이 나자  그들은 예수님 위에 덮여 있던 자색 옷을 잡아챘습니다. 그 자색 옷은 이미 예수님이 흘린 피와 상처에 있는 혈청에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옷을 잡아채는 것은  마치 상처를 감싼 외과용 붕대를 마구 떼어내는  것과 같아서 그분을 몹시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마치 또다시  채찍에 맞는 것같이 피가 그 상처 난 곳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수난의 발걸음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돌려주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의 가로대가 예수님의 어깨를 가로질러 묶여졌습니다. 그리고나자 사형 선고를 받은 예수님의 행렬이 두 강도와 로마 군병들과 함께 천천히 "비아 돌로로사"(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신 길)를 따라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똑바로 서서 걸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피를 흘린 충격에다가 그 무거운 가로대 무게를 감당한다는 것이 그분에게는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비틀거리고 쓰러졌습니다. 그 거친 나무 기둥은 그분 어깨의 찢어진 피부와 근육 속을 도려내듯이 비벼댔습니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인간 근육의 힘이 견뎌낼 수 있는 한도를 이미 넘어선 후였습니다. 백부장은 빨리 십자가형을 집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건장한 북아프리카 구경꾼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피와 끈적끈적한 땀을 흘리며 행렬을 따라갔습니다. 안토니아 요새로부터 골고다까지의 600여 미터의 행렬이 끝나자, 유대인에게는 허락된 속옷만을 남긴 채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다시 벗겼습니다.
  
▶ 못 박히는 수난
  그런 다음 곧 십가가 형이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군병이 독하지 않은 진통제와 몰약을 혼합한 포도주를 예수께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시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십자가 가로대를 땅에 내려 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수님의 두 어깨가 가로대 위에 뉘어졌습니다.
  로마 군병은 예수님의 손목 앞에 약간 오목한 곳을 더듬었습니다. 그는 곧 무겁고 네모진 단철 못을 예수님의 손목을 뚫고 나무에  박았습니다. 재빨리 그는 다른 쪽으로 가서 팔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도록 조심면서, 그분의 팔을 세게 잡아당기지 않고 못을 박았습니다. 군병은 십자가의 가로대를 세워  올리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죄 표를 그 위에 박았습니다.
  그리고  왼쪽 발을 오른쪽 발에 포개어 발가락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무릎이 적당히 움직일 수 있게 발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졌습니다. 점차 몸이 쳐져 손목에 박혀있는 못이 몸무게를 지탱하자 무서운  아픔이 예수님의 손가락과 팔을 따라 뇌로 전해졌습니다. 손목에 박혀 있는  못들은 중추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몸을 위로 밀어 올리자 몸무게 전체가 다리에 박힌 못에 지워졌습니다. 바로 이때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팔들이 피로해지자 경련이 그 근육 전체로 급속하게 퍼졌는데, 그것은 깊고 사정없이 쑤시는 아픔이었습니다. 이 경련 때문에 그분은 몸을 위로 밀어 올리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팔에 몸무게가 실리게 되자 가슴 근육이 마비되고 늑간근육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공기를 폐안으로 흡입할 수는 있지만 내쉴 수는 없었습니다. 짧은 호흡이라도 얻기 위해 예수님은 몸을 위로 밀어 올리고자 안간힘을 쓰셨습니다. 도리어 이산화탄소가 허파와 혈류에 채워지자 근육의 경련이 부분적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발작적으로 그분은 숨을 내쉬기 위해 몸을 위로 밀어올리고 산소를 들이마셨습니다.

2. 가상칠언(架上七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예수께서는 일곱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자신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지는 로마 군병들을 내려다보며 하신 말씀입니다.
  둘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셋째, "보라!  네  어머니이시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두려워 떨며 슬픔에 찬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하신 말씀입니다.

  넷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이 말씀은 시편 22편 서두에 기록된 말씀의 인용입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 관절 마디를 부수는 듯한 경련, 때때로 일어나는 부분적 질식, 그리고 그 거친 나무 기둥에 대고 위 아래로 몸을 밀어올리고 내릴 때마다 찢기어진 등허리를 또 찢기는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며, 또 하나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심장이 압박되기 시작되자, 심하게 으깨는 듯한 고통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이것은 시편 22편 14절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나이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세포 조직 분비액의 유출은 위기 상태에 이르고, 압축된 심장은 무겁고, 그나마 남은 피를 세포 조직으로 보내기 위해 애쓰고 시달림 받는 폐는 약간의 공기라도 흡입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습니다. 탈수가 많이 된 세포 조직은 다량의 자극을 뇌에 전달했습니다.

  다섯째, "내가 목마르다'(요19:28)
  이 말씀은 예언시 시편 22편에 있는 또 다른 구절을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내 힘이 말라 질그릇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15절)
로마 군병들이 자기들이 주로 마시는 값싸고 신 포도주를 스폰지(해융)에 적셔 그분의 입술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그분은 어떠한 음료도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이제 극도의 고통과 탈진 상태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냉기가 자신의  피부 속으로 스며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섯째, "다 이루었다"(요19:30)
  죽음의 기운을 실감하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아마도 고뇌에 차 속삭이는 소리보다는 좀 더 크게). 속죄의 임무가 완성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마감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일곱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찢기어진 발로 못을 딛고, 다시 한 번 몸을 밀어 올리며 다리를 뻗어 깊은 숨을 들이쉬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후의 내용은 당신도  잘 아는 바입니다.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그 희생자들을 빨리 처치하여 십자가에서 옮겨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십자가형을 끝내는 평범한 방법은 다리를 꺽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희생자가 몸을 위로 밀어 올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가슴 근육이 긴장을 풀지 못하여 재빨리 질식해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두 강도의 다리를 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 왔을 때는 그것이 불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한 군병이 창으로 다섯째  갈비뼈 사이를 뚫고 심낭과 심장을 찔렀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19장 34절에 "그 중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고 적고 있습니다.
  심장을 둘러싸며 고였던 액체와 심장에 있던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질식으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심낭에 있는 액체에 의한 심장의 충격과 압축 때문에 심장 쇠약으로 돌아가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해 인간들이 드러내 놓은 악의 모습을 대강 훑어보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라 우리를 낙심케 하고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편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의 모습이…. 속죄의 기적과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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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31 sunny lee
3부: 단절의 십자가

1부와 2부에서 나눈 수치와 육체적 고통 이외에 십자가의 예수님께 더한 고통이 있었을까? 저는 당연히 더 있다고 느꼈습니다. 3부는 그 중, 단절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단절의 고통이 도대체 얼마나 컸길래 육체적 고통보다 더하단 말인가? 이 의문을 마음에 담고 저를 따라가 보시지요.

단절의 십자가는 달리 말해, 절망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관계가 와해된 것입니다. 아무 희망도, 소망도 없는 상태, 절망의 캄캄 절벽에서 홀로이 지신 십자가가 단절의 십자가입니다.

왜 단절일까? 이 의미를 이해하려면, 단절의 반대 개념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즉, 단절의 이전 상태는 무엇일까? 단절이 관계의 깨짐이요 파괴라면, 그 반대는 화합이요 연합일 것입니다. 이러한 화합과 연합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찌 생각하셨고, 어찌 행동하셨을까?

먼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유명한 초청의 말씀에서 주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이같이 예수님의 초청은 주님과 함께 더불어 화합하고 연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3년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은 이를 위해 제자들을 모으고 주위 사람들에게 친히 모본을 보이시며 하나하나 가르치셨지요. 이들을 예수님이 진심으로, 끝까지 사랑하셨음이 곳곳의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여지없이 깨진 것이지요. 그 전 날까지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 그들이 모두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배반의 칼날을 들이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하기에 바빴습니다. 한 청년은 잡히지 않으려고 맨 몸에 걸쳤던 홑이불조차 버리고 발가벗은 채 도망쳤지요. 베드로는 저주까지 일삼으며 스승을 세 번씩 부인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호했던 그 군중들이 등을 돌려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쳐 댑니다. 그렇습니다. 단절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받고 배반당한 절망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일까?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단절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이 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단절의 고통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예수님의 평상시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컸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10: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10:30)

이 두 말씀을 잘 연결해 보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완전한 화합이자 연합이지요. 그 원류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선하심과 인자하심, 빛과 사랑,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아들은 그 원류이신 아버지와의 연합된 관계 속에서 아버지의 선하심을 물려 받습니다. 컴퓨터 파일에서 원본을 카피한 복사본이 100% 일치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도 아버지와 똑같이 선하십니다. 그러나, 아들은 당신의 선하심을 조금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선하심은 전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연합의 관계를 아들되신 예수님은 오늘날의 나하고도 그대로 맺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성령)에게서 나오는 모든 선한 것들을 내가 그대로 물려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이지요.

그 평상시의 관계(아들과 아버지의 연합)가 십자가에서는 여지없이 깨어짐을 봅니다.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상칠언의 순서를 따라가면 이것이 보입니다. 가상칠언의 내용과 순서를, 편의상 2부에서 소개한 트루만 데이비스를 따라 아래와 같이 정리합니다. 이 중 1), 3), 4), 7)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요.

(십자가에 달린 시간- 오전 9시)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3) "보라 네 어머니이시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19:26,27)
(이후 3시간 경과 후 12시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3시까지 이어짐)
(이후 또 3시간 경과 후 오후 3시 가까이 됨)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5) "내가 목마르다” (요19:28)
6) "다 이루었다" (요19:30)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오후 3시 경에 운명하심)

먼저 쉬운 것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총 6시간 동안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시간 개념으로, 오전 9시에 시작하여 오후 3시에 끝납니다. 이를 전반기 3시간과 후반기 3시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분기점은 12시에 온 땅을 덮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둠은 무엇일까? 왜 후반기 3시간에는 온 땅에 어둠이 몰려 왔을까?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단절의 십자가라는 눈으로 볼 때에, 어둠이라는 구분자는 두가지 다른 관계를 분리시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반기는 사람과의 관계요, 후반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즉, 전반기는 사람들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그리고 후반기는 더 나아가, 사람들과의 관계 단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1부 수치의 십자가는 사람에게 비추어진 전반기 3시간까지일 것입니다.

3)번의 말씀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마지막 남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당신 스스로 끊는 장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은 이 시점에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철두철미 끊어진 고립무원의 상태였습니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제자들과 친인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단절된 상황에서 예수님은 전반기 3시간을 홀로이, 고통스럽게 보내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사람들과의 단절은 하나님과의 단절에 비해 훨씬 가볍고 쉬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연합적 관계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지속될 가장 아름다운 관계이고,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닮아야 할 롤모델이겠지요. 그런데 이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가상칠언 중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시는 장면이 셋입니다. 1)번과 7)번은 아버지이지만, 4)번은 하나님임을 주목해 주십시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으로 부르신 것은 이 4)번이 유일하다고 하지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22:1을 그대로 인용한 이 절규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못했을까? 또한 왜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고 울부짖으셨을까? 신자라 불리우는 우리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정확한 이유를 4부(죄의 십자가)에서 상세히 설명해야 하겠지만, Fact(사실)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십자가 상의 예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 단절의 고통이여...

아버지와의 끊기지 않는 화합과 연합,
그리고 이를 통한 친밀한 사랑의 교류와 교제하심이
그 순간만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리라.
아니, 그 순간만큼은 서로 ‘원수’가 되어있는 상태였지 않은가?

영적 연결의 끈이 끊어진 그 시점에서,
영혼 깊숙히 느껴지는 아버지의 버림과 배신,
저주와 심판의 칼날이여...
아, 살을 도려내는 것이 이렇게 아플까?

땀방울이 핏방울 되어 떨어지기까지
그렇게도 피하고자 기도하셨던 그 잔...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권리조차 빼앗긴
그 잔혹한 진노의 잔이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 단절의 고통이여...

그 끝없는 나락의 깊이는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신 그 사랑,
또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
바로 지고한 그 사랑의 깊이와 동일하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니 그 피눈물의 토함이 어찌 절로 나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그 한스러운 절규가 어찌 공중에 사무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수치의 십자가, 육체적 고통의 십자가가
어찌 단절의 십자가에 비교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단절의 끝은 무엇일까? 절망의 막다름에는 무엇이 있을까? 제게는 이것이 ‘한(恨)’이라는 단어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인에게만 있는 감정의 최극단, 그 끝자락에 가야지만 만날 수 있는 말이 한이지요. 절망의 최저점에서 오는 고뇌의 극한.. 그 한에 이르는 과정을 저는 ‘사무침’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제게 있어, 단절의 십자가는 심리적, 심령적 고통의 사무침이요, 그 최종 종착역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절규를 토해내신 ‘예수님의 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무침이 승화된 모습을 이미 보고 있지요. 이를 나름으로 묘사한 ‘사무침’이라는 제 자작시로 단절의 십자가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샬롬~

<사무침>

사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의 가슴 속에 맺히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으로 맺히는가.
흔적..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맺힘.
바로 사무침이다.
-안도현의 ‘봄날, 그리운 첫사랑’에서-

사무침은 어느 한 곳에 깊이 스며 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는 것이다.
어떤 일이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극한점이다.
그 막다름에 이르러 넘쳐 흐르고 끓어 오르다 못한 절절함이다.

사무침은 알알이 맺힌 내 가슴앓이를 비통스레 토해내는 아쟁산조이다.
내 가슴에서 그 분에게로 전이가 가능한 소통 수단이다.
죄인된 내가 거룩한 그 분을 만나뵐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기쁨이 넘치면 흥이 되고,
흥이 사무치면 춤추는 막가파가 된다.
하나님의 궤 앞에서 신명나게 춤추었던 다윗처럼.

슬픔이 거세지면 눈물이 흐르고,
눈물이 사무치면 절규의 기도가 된다.
성전에서 술 취하듯 읊조렸던 한나처럼.

바람이 커지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사무치면 절대적 갈망이 온다.
모년에 아기 예수를 해후했던 시므온과 안나처럼.

병이 길면 고통이 잦아오고,
고통이 사무치면 무대뽀 짝사랑이 된다.
그 분의 옷자락을 겁도 없이 만진 혈루증 여인처럼.

들음이 많아지면 마음 속 새김이 되어가고,
새김이 사무치면 믿음의 아버지가 된다.
모리야 산에서 아들을 바쳤던 아브라함처럼.

사무침은 내 쪽에서 할 일을 다했다는 마침표이다.
아니, 사무침은 새로운 반전으로의 연결점이자 도약점이다.
그러기에 사무침의 끝자락에는 그 분의 옷자락이 놓여있다.

이 땅에 오셨던 그 분은 내 사무침의 영원한 모델이다.
그 분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진실하심과 선하심의 사무침이다.
십자가는 그 분이 이루신 사무침의 극치이다.

그 사무침의 눈물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사로를 향하여
아, 못난 나를 향하여..

그 사무침의 기도가,
올리브를 압착해 기름 짜듯 핏방울로
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사무침의 수치가,
침뱉음과 뺨맞음, 조롱과 굴욕
아, 발가 벗겨짐..

그 사무침의 고통이,
물같이 쏟아짐과 어그러짐
아, 녹슨 세개의 못으로..

그 사무침의 단절이,
친인들과 제자들로부터
아, 아버지로부터..

끝내 그 사무침의 절규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러나 이제 나는 알았다.
그 분의 그 사무침이
영광의 사무침으로 이미 승화되었음을.

그러함으로
그 분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속속들이 사무쳤음을.

그러하기에
그 분의 그 사무침이
내 가슴에 거룩한 생채기 되어 맺혀 있음을.

그 분이 새겨주신 이 사무침의 흔적들을
나는 더 알아가고 싶다.
나는 더 간직하고 싶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시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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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4/4 sunny lee
4부: 죄의 십자가

4부 죄의 십자가는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왜 죄의 십자가일까? 죄의 최종적 결과는 멸망과 죽음의 심판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의 죄를 아들에게 전가시킨 것이지요. 십자가에서... 그래서 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아래의 두 말씀을 보면, 왜 예수님이 죄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해 집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6:2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고후5:21)

3부에서 따온 질문을 다시 해 봅니다. 예수님은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시지 못했을까? 또한 왜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고 울부짖으셨을까? 예수님은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내가 거기에 함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내가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데, 어찌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어디 아버지와의 관계 단절 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십자가의 예수님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서, 서로 간에 원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죄의 십자가에서 재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었지요. 어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얼굴을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대신 지신 나의 죄에서 얼굴을 돌리신 것입니다. 천하의 죄인인 나를 준엄한 심판대에서 심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해서 지셨던 나의 죄를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심판의 고통이란, 우리의 일상적 언어로서는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는 내밀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나를 영벌에 처할 무시무시한 진노와 정죄의 저주가 그 고통의 십자가에 한꺼번에 퍼부어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그 심판의 칼날이 어찌나 잔혹스럽고 처절했던지, 태양도 빛을 잃고 어둠이 온 땅을 덮었을 것입니다.

영화 “Passion of Christ”의 장면에는, 사탄이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주위에서 맴돌며 온갖 조롱과 저주를 퍼부어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이 장면이 비사실적인 부분으로 생각하여 반감이 생겼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생각해 보니, 이것만큼 성경적인 것도 없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원흉이 바로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했고, 가인으로 하여금 돌을 들어 아벨을 쳐죽이게 하였으며, 목욕하는 밧세바를 다윗이 간통하게 만들었고, 가룟 유다로 하여금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먹게 한 그 진정한 배후자.. 옛뱀이요 참소자라 일컫는 사탄이 십자가 주위에 없었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결과를 압니다. 예수 십자가로 인해, 사탄은 패퇴해 머리를 상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눈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죄를 짖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3:8)

아브라함이 모리야 산에서 아들 이삭을 향해 칼을 높이 들었듯이,
하나님은 아들을 향해 심판의 칼을 높이 드셨습니다.
이삭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았지만,
예수님은 준엄한 심판의 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죄의 십자가를 지고
모든 고통과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내 죄로 인해 예수님께 수치가 찾아왔고,
내 죄로 인해 예수님께 육체의 고통이 닥쳤으며,
내 죄로 인해 예수님께 단절의 고통이 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십자가는 수치의 십자가,
육체적 고통의 십자가,
단절의 십자가의 총합입니다.

나의 죄에 대하여
나는 파산자요, 무능력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홀로이,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나 대신
죄의 십자가를 직면하신 것입니다.

그 어마어마한 무게를..
십자가의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느껴 봅니다.


<십자가의 무게>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무게는 얼마일까?
예수님이 지셨다던 가로목 십자가의 무게는 50Kg 정도란다.
세로목 십자가는 골고다 형장에 원래부터 세워져 놓았다는구나.
그러니까 십자가의 무게는 합쳐서 120Kg이 된다는 거야.

그것이 십자가의 무게 전부일까?
아니야, 십자가에는 수치의 무게가 더해져 있어.
그래서 더 무거웠던 거야.
침뱉음과 모욕과 조롱 당한 수치의 무게,
온 몸의 발가벗겨짐 당한 굴욕과 수치의 무게,
ㅠ., 당신의 피조물 앞에서..

그것이 십자가의 무게 전부일까?
아니야, 십자가에는 고통의 무게가 얹혀져 있어.
그래서 더욱 더 무거웠던 거야.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무자비한 채찍의 무게,
온 신경 통점의 중심축이 되어버린 괴악스런 대못 세 개의 무게,
피의 물처럼 쏟아짐과 모든 뼈의 어그러짐의 무게,
ㅠ.ㅠ., 너와 나를 대신하여 이 엄청난 고통을..

이것이 십자가의 무게 전부일까?
아니야, 십자가에는 단절의 무게가 억눌려져 있어.
그래서 훠~얼씬 더 무거웠던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한 단절의 무게,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심령적으로 끊어진 단절의 무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ㅠ.ㅠ.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시다니..

이것이 십자가의 무게 전부일까?
아니야, 십자가에는 죄의 무게가 짓눌려져 있어.
그래서 아예 표현 못할 정도로 무거웠던 거야.
수치와 고통과 단절의 무게는 죄의 무게 중 일부일 뿐이야.
하늘과 땅을 다 합쳐도 죄의 무게를 견줄 수 없어.
십자가 상의 그 절규가 들리지 않니?
죄라고는 일점도 없는 그분의 피 토함이 보이지 않니?
너와 나의 죄 무게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울부짖었쟎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ㅠ.ㅠ.ㅠ.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는 얼마일까?
그 수치의 무게를 재어 보았니?
그 고통의 무게를 겪어 보았니?
그 단절의 무게를 접해 보았니?
그 죄의 무게를 느껴 보았니?
무한대라는 네 머릿속 숫자 가지고도 부족할 거야.
십자가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워 측량할 수가 없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지는 십자가의 무게는 얼마일까?
그래, 주님이 지신 십자가 만큼 네 것도 원래 무거웠어.
네 수치의 무게,
네 고통의 무게,
네 단절의 무게,
네 죄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니?
그런데 주님께서 네 무게를 대신 지셨쟎니?
그래서 네 멍애는 이제 그만큼 가벼워 졌단다.
네가 거뜬히 스스로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네게 주신 은혜의 무게는 얼마일까?
‘한량없는 은혜’란 말로 그 은혜의 무게가 표현될까?
아니야, 그 정도론 부족해.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가 네 은혜의 무게인 거야.
아니, 은혜의 무게는 십자가의 무게를 통해 알아지는 거야.
아니, 은혜의 무게는 십자가의 무게가 중심점이지.
그 주님을 깨닫는 만큼 네 은혜의 무게는 무거워 질거야.

주님의 영광의 무게는 얼마일까?
주님의 영광의 무게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 무비한단다.
무한대라는 네 머릿속 숫자 가지고 그 무게가 표현될까?
아니야, 그 정도론 턱도 없이 부족해.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가 또한 주님의 영광의 무게로 연결되기 때문이야.
주님의 십자가야말로 이 땅에서 잃었던 주님의 영광의 완전한 회복인 거지.
그래서, 영광의 무게도 십자가의 무게를 통해 알아지는 거야.
그래서, 영광의 무게도 십자가의 무게가 중심점이지.
그래서, 우리가 들어갈 영광의 문도 주님 십자가를 통한 문이야.
그렇지만, 주님의 영광의 무게는 십자가의 무게를 초월한다고 생각해.
그러기에, 주님의 영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쟎니?
그 주님을 깨닫는 만큼 네가 체험할 영광의 무게도 늘어날 거야.

아, 그 십자가의 무게..
아, 그 은혜의 무게..
아, 그 영광의 무게..
우리 그 무게를 갈구하자.
우리 그 무게를 잊지말자.

오, 주님!
†십자가† 주님..
영광, 영-광-, 영--광-- 받으소서...
**


이제 위의 4부를 끝으로, 마지막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초두에 이야기한 ‘나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4중 고통은 주님의 고통이자 또한 나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나도 그 십자가에 참여한 것이지요. 그 십자가에 못 박힌 ‘나’는 곧 나의 자아요, 나의 육신(영의 반대 개념인 육)이요, 옛사람인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에스더4:16). 이것이 믿음의 끝일까? 저는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출발점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넘어 실제로 죽음의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말 그대로,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4중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강에 내 몸이 완전히 푹 잠겨서, 내 자아(옛사람)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참세례(침례)가 아닐까요? 그래야, 내 안에 계신 예수의 영이 비로소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차원에서, 저는 ‘내려놓음’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그리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용규 선교사의 이야기를 깎아 내린다거나, 그 표현의 선한 뜻을 곡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내려놓으면 마치 모든 것이 다 되는 양하는 ‘나의 태도’가 밉상스럽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음의 대상은 무엇일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제나, 그 문제의 본질인 죄일 것입니다. 일례로 내게 큰 욕심이 있어, 이를 내려놓았다 칩시다. 그러면 다 되는 것일까? 아니지요. 실제의 근원적 문제는, 내 안에서 욕심을 일으키게 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해결하려고 한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습니다. 욕심을 야기한 내 안의 그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려놓아서는 절대 문제 해결이 되지 않음을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유컨대, 이는 마치 죄와 죄인의 차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죄가 심판 받을까, 죄인이 심판 받을까? 죄가 죽는 것일까, 죄인이 죽는 것일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죄의 대표는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나의 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 즉 정욕과 탐심은 스스로 그 자체로 그냥 죽거나 도말되지 않습니다. 오직 내 육체 안에서 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에서와 같이 “육체와 함께..”입니다. 즉, 실제 못 박혀야 할 것은 나의 육체인 것입니다. 나의 육체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을 때, 내 안의 정욕과 탐심도 같이 못 박히는 것이요, 내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나의 정욕과 탐심도 같이 죽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내려놓음’은 근원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내려놓을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야기한 ‘나(자아)’ 또는 ‘옛사람’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옛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이미 나와 있지요..

그렇습니다. 해결책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내려놓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나의 자아가 죽는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즉, 십자가의 프로세스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오묘합니다. 이 과정을 올려놓음, 못박음, 피흘림, 죽음, 장사함의 5대 프로세스로 저는 정의했습니다. 이것을 노래한 것이 아래의 시입니다.

<십자가의 5대 프로세스>

주님은 십자가에 올려져서, 못 박히고, 피를 흘려,
죽음에 이르러 이후 장사를 치룬 바 되셨다.

주님은 나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셨다.
내 십자가를 짐도 나의 의지요, 주님을 따름도 나의 의지이다.
나아가, 내 의지는 십자가를 향한 순종의 믿음으로 승화한다.

주체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의 십자가가 수동적 십자가라면
나의 십자가는 능동적 십자가여야 한다.

그러기에 내 십자가의 능동적 프로세스는
올려놓고, 못박고, 피흘리고, 죽고, 장사하는 것이다.
*

올려놓음은 내려놓음의 반대이다.
십자가에는 내려놓아 숨길 자리가 한 틈도 없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나를 어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나도 십자가에 높이 달려야 한다.
내 모든 부끄러움을 올려놓아 빛 가운데 드러내는 벌거벗음이다.
그래서 올려놓음은 내 십자가의 첫번째 프로세스이다.

못박음은 화합의 반대이다.
그 세 개의 대못을 내 양팔과 발목에 박아야 한단 말인가?
나를 거세게 정죄하는 율법에 대하여 나를 못박고,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죄에 대하여 나를 못박으며,
내 안에 도사린 정욕과 탐심에 대하여 나를 못박는다.
그래서 못박음은 내 십자가의 두번째 프로세스이다.

피흘림은 불순종의 반대이다.
일말의 저항감이라도 있다면 피흘림의 순종이 없다.
피는 생명이요, 피흘림은 내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과정이지 않은가?
이는 필연적 죽음을 향하여 치달리는 인내의 몸부림이요,
새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의 대장정이다.
그래서 피흘림은 내 십자가의 세번째 프로세스이다.

죽음은 두려움의 반대이다.
이 끈질긴 생명력을 어찌 죽음의 막다름에 맡긴단 말인가?
그러므로 죽음은 위대한 용기요, 영혼을 위한 육신의 과감한 포기이다.
미지의 어둠으로 가득한 블랙홀의 심연으로 뛰어듬같이,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육체적 인과와의 별리 선언이다.
그래서 죽음은 내 십자가의 네번째 프로세스이다.

장사함은 탄생의 반대이자, 탄생의 직전 과정이다.
희디 흰 세마포로 감싸안긴 나의 주검이
때를 기다리는 침묵의 바다에 고요히 누워있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에서 내 생명이 다했음을 확증해 주는 표징이 아닌가?
장사함이 없으면 이후 새 생명의 탄생도 없다.
그래서 장사함은 내 십자가의 마지막 프로세스이다.
*

‘나’는 마음이자 옛사람의 대표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요, 교만과 정욕이요, 자아로 뭉친 죄 덩어리들이다.
그것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5대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죽음으로 버려진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내 모질디 모진 옛사람을
올려놓고, 못박고, 피흘리고, 죽고, 장사하는 시은소이다.
주님이 옆에서 도우시지만, 이 프로세스는 내가 주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요,
내가 이 땅에서 이룰 아름다운 소명이다.
옛사람의 죽음 이후에는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그 분이 나를 향해 해맑은 손짓을 주신다.
다시 태어난 자여, 어서 오라!
그렇게 함박웃음으로 한껏 팔을 벌리신다.

그러면, 이제 세상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십자가의 도를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예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박히고, 세상은 나에 대하여 또한 못 박히게 되는 것이지요. 아래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4중고통”- 그 기나긴 장정(?)을 마치고자 합니다.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샬롬~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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