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IFA 간증] 손에 손 잡고..

조회 수 886 추천 수 75 2012.09.05 21:34:06

매년 8월 말부터 9월초까지 베를린에서 열리는 IFA 국제 가전 전시회는 어김없이 올해도 찾아 왔고, 나는 법인장으로서 현장 지휘와 손님 응대 및 회의와 상담 진행 등 눈코 뜰새없는 나날을 보냈다.

9월 2일 주일, 여러가지 공식적인 행사 이외에 내게는 다른 한가지 할 일이 더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주일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나의 심정에, 회사의 크리스쳔 동료들이 함께 해 주었다. 전시장 인근의 베를린 제일교회에서 오후 2시에 시작하는 예배에 다른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참석할 수가 있었다.

기악팀과 성가대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대부분이 전공자들인지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화성의 공명이 참 좋았다. 이어서 찬양팀의 찬양 인도.. 찬양을 드리던 중, 옆에 있는 자매가 훌쩍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 눈물이 내게로 전이가 됨을 느꼈다. 아, 회개의 영이 살아 움직이는 듯.. 자매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눈물이 우리들의 딱딱하고 닫힌 마음들을 열어 주었다. 어느새 손을 높이 들어 찬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예배가 시작되고,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이어졌다. 찬양을 들으면서, 그 날 저녁에 내가 드릴 찬양에 또한 마음이 설레였다. 독일 손님들 앞에서 내가 부를 노래는 ‘Panis Angelicus’- 생명의 양식이다.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 분들처럼 잘 할 수 있을까? 마음에서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신영호 목사님의 설교 제목은 "물 위를 걷는 믿음"이었다. 마태복음 14장 후반에 나오는 이야기다. 풍랑 중에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이 무서워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 그 작은 믿음의 베드로를 손잡아 건져 주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는 예수님.. 한 폭의 그림같은 이 이야기를 목사님의 강해 설교를 따라 내 마음의 묵상도 움직여 간다.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는 파도(보이는 것)를 본 것이 아니라, 바람(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30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히11:1)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미 믿음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만을 보았으므로, 이는 작은 믿음이다. “믿음이 작은 자여”(31절)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으니 틀림없다.

그렇다면, 큰 믿음은 무엇일까? 이는 히브리서11장에 근거하여,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을 붙잡는 것이리라. 베드로의 눈 앞에는 바람이 있었고, 그 뒤에 예수님이 있었다. 그는 바람을 보느라고, 한 순간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예수님만큼 이 세상에서 ‘큰 것’이 있을까? 결국 내게 있어서도, 큰 믿음은 예수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예수만을 바라보고 그 분을 신뢰하며, 종국적으로는 '손 잡히는' 믿음으로 가는 것이다. 내가 손 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손 잡히는 것'이 내 믿음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렇다. 이것이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일치의 법칙'이었다. 주님과 함께 손에 손잡고,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내가 함께 가는 것이다. 풍랑이 일든지, 물 위를 걷든지,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주시면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이어 호텔에서 간단한 리허설을 하고자 했다. Caspar Frantz는 독일에서 꽤나 유명세를 타는 피아니스트다. 서로 인사를 하고 가져온 악보를 확인해 보니 원곡이 아닌 바리톤용이었다. 실무 소통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악보로 하려다가, 자칫 저음 처리가 어려워질 것 같아, 원곡을 빨리 수배해 달라고 실무진에게 요청했다. 그러는 동안, Caspar와 말을 트고 예술의 세계에 대한 그의 소견을 한창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내 입장을 솔직히 그에게 얘기해 주었다.

성가대에서 다년간 테너 파트를 했지만, 비전공자로서 무대에 서본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 "생명의 양식" 찬양을 좋아해서 우리말로는 흥얼거리면서 많이 불러 봤지만, 라틴어로는 사실 처음이라는 것.. 그것도 베를린 출발 1주일 전에 결정하여 딱 한 주 열심히 라틴어로 외우고 연습했다는 것.. 이러한 나에게 당신같은 거장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 그런 나에게 그는 오히려 걱정하지 말고, 평상시에 가졌던 이 노래에 대한 감정에 집중해서 불러 보라고 위로해 주었다.

이어 어렵사리 구한 원곡의 악보로 디너 시작 40분 전에야 실전 리허설 시작.. 이 디너는 내가 법인장으로서 매년 이맘 때 독일 손님들을 위해 주최하는 행사이다. 베를린 시내에 있는 어느 박물관 안에서 약 130명 정도의 손님들이 참석했다. 디너의 중간에 피아노의 반주를 따라 내가 즉석에서(?) 노래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그 외에도 각종 순서가 많다.

디너가 시작되고 내가 노래할 순서가 점점 더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차분해짐을 느꼈다. 물위를 걸으라!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방법은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걷는 것이다. 즉, ‘내가’ 걷는 것이다. 반면에 두번째는,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주시고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즉, ‘주님이’ 나 대신 걸어주시는 것이다. 아, 새로운 믿음의 패러다임.. 그렇다. 손에 손 잡고..

드디어 무대에 섰다. 막상 무대에 딱 서니 너무나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
Dat panis coelicus figuris terminum
O res mirabilis, manducat dominum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자에게 내리어 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님께 구하는 심정으로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드렸다. 전반부에서는 주님을 향한 나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고, 후반부에서는 전반부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그 주님을 찬양으로 올려드리는 마음으로 노래했다. 물 위를 걷는 심정으로.. 손에 손 잡고.. 나의 손을 굳게 잡은 주님과 함께.. 찬양을 드리면서 나도 모르는 생명력의 약동이 솟구침을 느낀다.

내 찬양이 끝나고 Caspar의 마지막 후주 동안, 나는 기도의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이어 터져나오는 박수와 환호.. 내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손님들의 화답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기립하여 박수하는 그들에게 몇차례 인사를 드리고 고맙다는 인사말을 드림으로 내 노래를 마쳤다.
박수는 내가 받았지만, 나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음을 믿는다. 특별히 그 곳에 같이 했던 한국 사람들(주재원, 본사 임원들)의 감동이 컸던 것 같았다. 이 일을 통해 자연스레 전도를 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우리 주님께 찬양과 영광 돌린다. 할렐루야....



(후기)
유튜브에 관련 동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함께 한 이승주 형제님이 즉석에서 찍은 것입니다.
곡의 후반부로부터 시작해서 이후 손님들의 반응과 제 인사말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haj1B7MQ1CU



(부록)
물 위를 걸으라!
(베드로가 인생의 말년에 영적 아들 마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아들 마가야, 지난 번 들려준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이번엔 예수님과 물 위를 걸었던 신기한 경험을 얘기해 줄 차례구나. 내 일생에서 어쩌면 제일 신났던 경험일거야.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거든. 내 친구들도 다들 나를 부러워 했었지. 조금 싱겁게 끝나기는 했지만..

그 날 말이야. 내 동생 안드레, 야고보 형제, 빌립, 도마 등 우리 제자들은 빈들에서 게네사렛을 향해 배를 띄웠지.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 갑자기 기도하러 혼자 근처 산속에 남아 계시겠다는 거야. 그러시면서 우리 보고는 먼저 배를 타고 벳세다로 건너가 있으라는 거지. 예수님이 걱정은 되었지만, 늘 그러시는 분이니까 어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저녁 느즈막해졌을 때에야 배를 띄웠어. 배가 출발하기 무섭게 갈릴리 바다에는 풍랑이 세차게 불어왔어. 맞바람이 치면서 배는 잘 가질 못하고 있었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자정이 훨씬 넘었을 때였을거야. 다들 노를 잡고 힘겹게 파도와 싸움을 하고 있던 중, "유령이다"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 거야. 친구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보니, 웬 시커먼 물체가 바다 위에 떠 있었지 않겠느냐. 이게 꿈인가 하여 두 눈을 부비고 다시봐도 뭔가 시커먼 것이 그대로 있는 거야. 아니, 그것은 우리 쪽으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어. 배 안에서는 난리가 났지. "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여기저기 구원을 향한 기도소리도 들렸어. 다들 이제는 유령에게 잡혀 죽게 생겼구나, 라고 생각했지. 왜, 하필 이런 때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을까? 한순간의 의문이 내 머리 속을 스쳐갔어. 주님이 계셨으면 저런 유령 따위는 걱정도 없었을텐데. 그런데 그 주님이 안 계시니..

어느새 그 유령은 배와 지척 간으로 다가왔어. 비바람이 매섭게 치는 가운데 보이는 것은 희미하지만 사람의 형태였어. 다들 생각했지, 그래 어차피 유령도 사람의 형태로 되어 있거든. 그런데 그 유령 쪽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온 거야. 나는 그때 뒷쪽에 남아 있어서 잘 들리지가 않았어. 앞쪽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어. 뭐라고 그러는 거야? 빌립이 앞쪽에다 소리쳤어. 예수님이래! 앞쪽의 누군가가 답해 주었어. 아, 유령처럼 서 있는 앞의 시커먼 물체가 주님이시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는 동안 나도 앞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제는 서 있는 그 사람의 윤곽이 잡히더군. 빗줄기와 풍랑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여자가 아닌 남자의 모습이었지.

"아니야, 예수님을 가장한 유령일거야. 예수님이 이렇게 빨리 오실 수 있겠어? 그리고 생각해봐, 사람이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겠느냐구? 아이고,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도마가 그렇게 얘기하자 배 안은 금방 슬픔의 도가니로 바뀌어 버렸어. 그렇지만 시커먼 물체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어. 아마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앴어. 그렇게 혼돈의 순간이 있은 후에야, 평상시 눈썰미 좋은 야고보 동생 요한이 외쳤지. "예수님이다, 예수님 맞아. 저기봐, 얼굴의 구렛나루도 보이잖아. 분명, 주님이셔." 저쪽에서 요한의 외침에 대답하는 소리가 이제는 희미하게 들려왔어. "그래, 나다. 두려워말아라."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분명 예수님의 목소리였지. 와, 살았다! 여기저기 감격과 환호성의 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생각했지. 그래 맞아,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서 우리한테 오신거야. 잠깐이지만 우리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능력을 잊고 있었던 거야.

나는 신이 나서 외쳐댔어. "주님, 주님이시라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해 주십시요." 분명 주님이시라면,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해 주실거야, 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어. 저쪽에 계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 "그래, 이리로 오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배 밖 파도위로 첫 발을 디뎠어.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었느냐구? 아무 다른 생각은 없었어. 앞에 서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았지. 주님이 거기 계시니까. 그 주님만 바라보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계속해서 조금씩 걸어간 거야. 파도가 넘실대는 그 물 위를 말이야! 사실 내 발 밑이 물이라는 생각도 그 순간엔 잊어버리고 있었어. 오직 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웃음짖는 주님의 얼굴만 바라보며 한발 한발 나아간거야. 그래, 그거야. 바라봄의 법칙!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불가능이 없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는 거야. 주님만 바라보라!

그런데, 그게 있지. 주님만 바라보고 계속 간다는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 한순간 성난 파도가 일자 나는 정신이 번쩍 났어. 아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야. 물위를 걷고 있잖아. 우선은 우쭐한 생각이 들었어. 친구들 중에 내가 최고라는 빵빵한 기분, 그거 알지? 아차 하는 순간에 교만이라는 놈에게 내 몸을 맡긴거야. 그러고나서, 현실을 확인한 나는 내 발 밑의 파도를 보기 시작했어. 내가 갈리리 바다 한 복판 깊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 발은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지 뭐야. 어, 하는 사이 어느새 내 몸은 허리까지 빠져 들어갔어. 순간적으로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어. 앞에 계신 주님께 죽어라고 소리쳤지. "주님, 살려 주세요!" 공포와 절망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 단지 주님께 살려달라고 전심을 다해 소리지는 것 밖에는.. 내가 평상시에 물 속에서 얼마나 자맥질을 잘 하는 지는 마가 네가 알거야.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물 위를 걸었다는 자만심 속에서 물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갈 때는 오직 캄캄한 죽음의 절벽 밖에는 보이지 않더군.

예수님이 어느새 다가와 허우적거리는 내 손을 잡아 주셨어.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손을 잡았는지도 몰라. 어떻게 예수님이 빠져가는 내 몸을 끌어올렸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안나.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몸이 이미 물 밖에 있었고 나는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물위에 떠 있었어. 배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박수와 환호성이 들려왔지. 정신이 없어 예수님께 감사의 말씀도 올려 드리지 못했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의 책망어린 말씀만이 내 귀를 맴돌았을 뿐이야. 믿음이 적은 자여! 그래, 나는 아직도 멀었어. 주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한갖 세상의 파도 앞에서 의심만하고.. 쳇, 이게 무슨 꼴인가? 친구들 앞에서 개망신만 당했잖아. 몇 발자욱 물위를 걸었던 그 기적은 어느새 뒷전에 두고 나는 곧 부끄러움에 젖어 버렸어.

어느덧 예수님과 함께 나는 배 위로 올라와 쑥스럽지만 친구들의 박수와 함께 축하를 받았지. 모두들 예수님께 경배의 절을 드렸어. 동생 안드레가 옆에서 자꾸 물 위를 걸었던 기분이 어떠냐고 채근했지만, 그냥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내 생각은 계속 딴 곳으로 향했어. 왜 내가 실패했을까? 어떻게 했으면 그 때 계속 물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자문해도 그 당시에는 뾰족한 해답을 발견할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다시 이 문제를 주님께 여쭤 보기에는 좀 그랬고.. 그러다 훗날, 성령님이 내게 임하시고 깨달아지는 부분이 있었단다. 그것은 뭐랄까? 글로바 형제가 엠마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처음엔 알지 못하고 있었다가 나중에서야 눈이 밝아져 주님인 줄 깨달은 것과 같은 이치였지. 그것은 내가 또다시 물위를 걸었던 두번째 기적의 사건을 간과했다는 거야.

첫번째 기적은, 내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 나아가면서 물위를 걸었던 거야. 명백하지? 나와 친구들 모두 그 첫번째 기적에만 집착해서 두번째 기적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 그게 뭘까? 그래,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다시 내가 물위를 걸었었다는 사실이야! 주님의 손을 잡고 배로 돌아오기까지 물위를 걸었던 그 순간의 기적 말이야. 왜 이것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았을까? 그건 말이야. 우선은 그 기적의 주체가 내가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 사실 그 때는 내가 한 일이 별로 없었거든. 나는 단지 주님의 손만 잡고 있었던 거야. 주님이 걸으시는 대로 내 발걸음도 물위를 걸어 나도 모르는 사이 배 위로 올라오게 된 거지. 그런데 그 거리는 내가 애쓰고 노력했던 첫번째 기적을 행한 그 거리와 똑같앴어.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는 주님과 함께 훨씬 더 긴 거리를 아무 장애도 없이 분명 더 걸을 수가 있었어.

마가야, 이제 이 두가지 기적의 근원적인 차이를 어느정도 깨달을 수 있겠니? 첫번째 기적 때는 내 의지로, 내가 주체가 되어, 주님을 내 기적의 도구로 사용한 거야. 바라봄의 법칙은 정말 좋은 것이지. 하지만,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될 때 바라봄으로만은 한계가 있어. 결국 나는 내 자유의지로 이것도 택할 수 있고 저것도 택할 수 있지. 내 주위의 환경,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굳건한 것처럼 보였던 나의 믿음은 교만과 의심이라는 장애 앞에 언젠가는 쓰러지게 된단다. 이미 내가 첫번째 기적에서 체험했던 것과 같아. 어쩌면 이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인지도 몰라. 내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유혹자가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한 말이야.

그러면 두번째 기적은 어떨까? 먼저 두번째 기적은 무엇으로 시작이 되었을까? 그것은 전적인 내 의지의 포기로 시작이 되었어. 내 노력과 스스로의 행위를 완전히 멈추고 주님께 항복하여 두 손을 벌릴 때였어. 다급한 내 외침(주님, 살려주세요) 속에는 처음에 내걸었던 어떤 형태의 가정법(주님이시라면..)도 없었단다. 물위를 걸어보겠다는 애초의 욕심 따위도 아예 없었지. 그냥 아무런 욕구와 조건이 없이 주님께 나를 던져버린 거야. 내 지정의(知情意)의 전체를 주님께 맡겼다고나 할까?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일으키셨을 때, '나'는 사라지고 주님만이 홀로 행동의 주체가 되신 거야. 나는 주님의 손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가지일 뿐이었어. 주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기억나지? 바로 그거야. 그때서야 나는 포도나무이신 주님께만 온전히 붙어있는 가지가 된거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바라봄의 법칙인지도 몰라. 아니, 바라봄의 법칙을 넘어선 일치의 법칙이라고 하면 어떨까? 내 모든 것을 주님과 일치시키는 거야. 주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잖니? 일치의 법칙이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된 것처럼 나를 주님과 하나로 일치시키는 거야. 내 손이 주님의 손을 잡음으로, 또한 주님의 손이 내 손을 잡아 주심으로, 나는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가 되는 거야. 두번째 기적으로 돌아가 볼까? 내가 주님의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물위를 걸을 수 있었겠지. 주님은 언제나 내 손을 붙잡고 계시거든. 나를 사랑하시고 목숨까지 주신 그 분이 어떤 순간에라도 내 손을 뿌리칠 리가 만무하지 않느냐? 정말 내 쪽만 문제 없다면 말이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말이야.

오늘도 얘기가 길어졌지? 이제 정리를 해보자꾸나. 첫번째 물위를 걷는 기적은 내 욕심과 조건으로부터의 출발이었어.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세상의 파고는 내 바라봄보다 더 높아서 나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어. 두번째 물위를 걷는 기적의 출발은 나를 포기함으로 비롯되었지. 주님의 손을 잡기위해,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주시기 위해, 나는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야 했어. 그것이 욕심이든 교만이든 명예이든 상관이 없는거야. 주님과의 일치를 위해서는 먼저 나를 철저히 비워야 해. 왜냐하면 내가 먼저 비워진 연후에야 주님이 채우실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곤 내 손을 주님께 벌려야겠지. 우리 주님은 비워지고 겸비한 나를 향해 늘 손을 내밀고 계신단다. 주님의 손과 내 손이 만나 서로 잡고 있을 때, 신비적 일치의 기적이 시작되는 거야. 바꾸어 말하면, '내'가 비워진 그곳에 '주님'으로 채워지는 거야. 바로 주님과 나의 하나됨, 일치의 법칙이야.

아들아!
너는 바라봄의 법칙을 넘어
일치의 법칙으로 나아가야 하느니라.
그러나 네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단다.
주님께서 네 안에서
일치의 법칙을 운행하시도록
주님께 네 모든 것을 맡기려므나.
아들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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