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에서 들고 온 것

조회 수 230 추천 수 3 2014.09.17 22:38:54
지난 주에 휴양지로 유명한 멕시코 깡꾼에서 6박 7일을 지내다 왔습니다. 약 25 여년 만에 다시 찾은 그 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호텔과 그 호텔들이 밀집해 있는 호텔 존이라는 곳만 번드르하지 그 지역만 벗어나면 도시라는 곳도 그 수준이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오성급 호텔(자기들 말로는 별급을 넘어 다이아몬드 넷급)은 매년 오고 싶게 부와 안락함이 넘쳐나고, 맑고 따뜻하고 조용한 비취색 바다와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사장은 천국을 연상시키지만, 차를 빌려 타고시골로 들어가니 이건 거의 빈민굴 수준이더군요. 개들은 떼지어 돌아 다니고, 여기저기 쓰레기는 너절하고.

함께 간 친구는, 도대체 저런 곳에서 어떻게 저러고 살아?라며 혀를 차더니, 빨리 호텔로 돌아가자고 성화를 부리더군요. 즐기러 왔는데  기분이 우울해진다면서. 그런데 그 사람들의 표정이 특별히 우울해 보이지도 불행해 보이지도 않고 여느 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거예요.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은 나름 행복하고 즐겁게 아니면 적어도 무덤덤하게 살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 보니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실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와 섭리는 주어질 것이며, 그곳에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있어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기쁨 속에 살고 있을 것이란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내 친구가, 저런 곳에서 저러고 어떻게 살아 싶은 곳에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심란해지고 우울해 지는 그 곳에서—바꾸어 말하면, 내 친구는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 게 뻔한 비참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기쁨과 감사를 느끼며 살고 있을 거란 겁니다.

그렇다면,  내 친구로 대표되는 우리 더 가진 자들과 그들 중에, 누가 더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그들이 아닐까요? 아주 작은 것 또는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는 그들이 말입니다.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우리는 이제 어느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기쁨도 감사도 누리지 못하는 불구가 된 건 아닌가는 자각으로 제 마음 속은 착잡해지더군요. 나의 많음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한 게 아니라, 나를 그만큼 속박시키고 제한시키고 있음에 비로소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했는데,그래서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특정 조건과 상황에서만 그랬지 그것을 한 치라도 벗어나면 금방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랬구나,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내가 그러고 신앙생활을 해온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신앙이란 것이 어쩌면 피서지 신앙이었는지도요. 모든 안락함과 부유함과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근심 걱정에서 벗어난 여유로운 신앙. 그러다 날씨가 궂어지기라도 하면, 제때 음식이 나오지 않거나 기대한 맛이 아니거나,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금방 눈살 찌푸리고 불쾌해지고 마음이 미워지는 그런 얄팍한 신앙. . .마침 가져가 읽고 있던 책이 “Suburban Jesus” (전원도시용 예수)란 제목의 신앙서적인데, 우리의 안일하고 안락한 신앙태도를 지적하고 질타하는 대목을 읽으며, 그래, 맞아!라며 밑줄까지 그으면서도 나는 아니라 생각했던 그 다음날 그런 깨달음을 주시다니…!

배불리 먹을 양식도 머리 둘 곳도 없는예수님을 과연 나는 뒤따를까? 냉난방 시설 잘 된 교회당 안에서가 아니라 그 뜨거운 중동의 열기 속에서? 사도 바울처럼, 사십에 하나 모자란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 번씩이나 태장을 맞고, 숱한 각종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허다히 굶고 춥고 헐벗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다 살아나는 경험을 하고서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겠다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열심을 낼까? 아니면 그런 것은 특별히 불림받은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면서 여전히 난 아름다운 비치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신앙서적 읽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복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내 신앙을 이어갈 것인가?

나를 포함한 모두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그런 깨달음과 반성과 의문을 얻고 돌아온 휴가였습니다.

2014.09.17

사라의 웃음

2014.09.18 23:18:40
*.109.85.156

불신자일 때 가난한 자들 보면 돕고 싶었습니다. 교회 출석하며 그 맘은 더 진해져만 갔고요...요즘 곰곰 생각해 보면 선행과 구제에는 저의 넉넉함이 바탕이 되어야곘기에 하나님께 물질 달라고, 불쌍한 자들 돕고 싶다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나의 부요에 선행과 구제라는 이유로 하나님께 정당성을 내보인 아주 치사하고 교묘한 모습 아니였나 싶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참 자신이 아니일 때가 무척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좋아하는 참 괜찮은 자신이라고 믿고 싶을 뿐,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도 칭찬 그리고 탐욕도 챙기고 싶었던 것임을요.

김유상

2014.09.19 19:05:49
*.35.244.251

자매님, 잘 계시죠? 한때 제가 하나님께 통성기도장에서 그렇게 울부짖은 적 있습니다. 제게 넉넉히 주시면 하나님 나라 위해 잘 쓰겠으니까 풍족히 주십사고요. 그렇게 울부짖는 중에 문득 든 생각이, 예수님께선 한 번도 하나님께 그런 기도 드린 적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들자 너무 부끄러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 나왔지요.

잘 믿노라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욯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노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우리는 실상은 하나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오죽하면 예수께서, 날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53 영광의 고난 김유상 2015-03-06 422
152 하나님 일과 세상 일 [1] 김유상 2015-03-02 175
151 내 믿음의 척도 김유상 2015-03-02 192
150 우리가 사모할 것은 김유상 2015-02-26 99
149 돈벼락 김유상 2015-02-26 150
» 여름 휴가에서 들고 온 것 [2] 김유상 2014-09-17 230
147 유나의 거리 김유상 2014-08-22 355
146 눈에는 눈 이에는 이 [1] 김유상 2014-08-19 818
145 누구를 믿는가? [4] 김유상 2014-08-15 309
144 해변의 단상 file [2] 김유상 2013-05-29 352
143 기다림 file [6] 김유상 2013-05-29 388
142 Because I Say So 김유상 2013-05-15 329
141 소천 김유상 2013-05-08 561
140 미역국과 생일 선물 [2] 김유상 2013-05-07 308
139 축구 선수들의 요란한 기도 행위를 변호함 김유상 2013-05-02 385
138 사랑하니까 김유상 2013-04-30 271
137 기도 응답은커녕 예상치 않은 봉변을 당하는 이유 [1] 김유상 2013-04-23 437
136 Just Do It [1] 김유상 2013-04-17 336
135 생각들이 서로 다툰다 김유상 2013-04-16 280
134 살리에리의 고뇌 [2] 김유상 2013-04-16 580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