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묵상:고후12장] 약함의 정체성

조회 수 1181 추천 수 78 2011.08.03 21:45:50

본문: 고후12:1~10

붙잡은 말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9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


본문의 주제는 약함이다. 약함은 불편함이자 나를 얽어매는 걸림돌이다. 약함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육체적 약함이든, 인격적 심성적 결함이든, 나아가 영적 연약함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내가 확실하게 벗을 길은 없어 보인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약함은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약함이 죄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약하기 때문에 나는 죄에 대해 훨씬 더 노출되어 있다. 즉, 나의 약함으로 인하여 죄를 지을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약함이 거센 외부의 환경을 만나면 죄에의 유혹은 그만큼 커지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약함은 위험해 보인다. 그래서, 내 성정은 약함을 싫어하였고 어떡하든 약함을 극복하여 더 강해지고자 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것이 내 속에 내재된 본능이다. 좀더 강해지고자 파워 내지는 능력을 추구하는 것이 또한 나의 잠재적 목표가 되었다.

나와 비슷한 속성의 인물을 성경 속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 사울이 처음부터 강함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외모는 준수했고 키가 컸다. 그럼에도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한마디 명령을 따라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방방곡곡을 헤메였던 집안의 효자였다. 선지자 사무엘이 왕으로 지명했을 때, 그는 어쩔줄 몰라 행구에 숨었었고, 자신을 이스라엘의 보잘것 없는 자로 여겼다. 그러나 왕이 된 이후, 그는 권력과 강함의 맛을 알았고 이에 편승하여 자신의 약함을 과감히 버렸다.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삼상14:52) 아, 강함을 추구했던 사울.. 사울의 실패가 나의 실패였다.

그런데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의 일반적 상황 논리에서 비추어 볼 때에, 본문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도무지 상식적인 선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뭘 어쩌자는 말인가? 약함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씀이 아닌가? 무(無)개선- 내 약함을 개선시키지 말라? 무(無)성장- 내 약함에 관해서는 성장의 비젼이 없다? 무위도식하라는 얘기인가? 본문에 의하면 바로 그렇다.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응답을 내 식으로 써 본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약함의 정체성’이 아닐까?

선우야,
네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네 약함을 강함으로 고치거나 바꾸려 하지 말아라.
약함을 약함의 상태로 내버려 두거라.
약함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거라.
왜냐하면 네 약함을 내가 그대로 용납했기 때문이란다.
그래, 그 약함 속에 내가 있으니까.
네게 주어진 그 약함이 바로 내 은혜인거야.
언제나처럼 내 은혜가 네게 족하지 않느냐?
약함 자체가 능력은 아니지만,
그 약함 속에는 내 능력이 깃들어 있어.
네가 약함을 버리는 순간 내 능력은 사라져 버리지.
네가 약함의 자리에 머무르는 한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있어.
내 능력은 네가 약한 데서 그렇게 완성되어 간단다.

그러므로, 약함은 나 자신의 얼굴이다. 약함은 인식을 통해 약함으로 인정된다. 약함을 속속들이, 뼈저리게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약함의 정체성이다. 예수라는 거울을 통해, 몰랐던 나 자신의 약함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다. 암 걸린 사람 중에는 그 암세포와 투병하지 않고 친구 삼아 오래도록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듯이 약함을 평생의 친구로 알아, 약함과 마음 터 놓고 기쁨으로 사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약함의 정체성에는 비굴함이나 조급함이 없다. 그 반대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만이 아닐까? 교만은 약함의 정체성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진심으로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것, 잘난 것, 강한 것만 보고 좋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만적 행위의 결과는 무엇일까? 추락이다. 떨어짐이다. 사단의 추락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14:12, 15) 에베소 교회에 경고하신 말씀 중에도 ‘떨어짐’이 보인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 그 분과의 첫사랑은 나의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느새 교만이 들어왔다. 약함은 강함으로 변질되고자 했고, 약함을 부정한 결과는 떨어짐으로 나타났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내가 약함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높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약함의 정체성이 겸손은 아니다. 겸손은 자신의 현 위치에서 그 높이를 낮추는 것이지만, 약함의 정체성은 나를 낮추지 않는다. 그냥 나 자신의 현 위치를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왜? 실제로 나는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다.

약함의 정체성은 그 의미 자체가 파라독스다. 이 난해한 말씀을 음미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구절이 있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8-30) 감옥에 갇혔던 세례요한에게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대답했던 말이다. 주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말씀.. 나는 약함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야 하겠고, 그로 인해 약한 내 안에 계신 주님은 점점 더 강성해져야 한다는 뜻이지 않을까? 이것이 약함의 비밀이 아닐까?

어느 막말인 “니 꼬라지를 알라”에서와 같이, 나는 내 약함의 꼬라지를 발견한다. 바울의 경우도, 그 꼬라지를 인식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세 차례씩이나 기도했고, 그 응답은 아마도 더디게 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시련과 고통과 연단과 인내의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약함의 정체성을 깨닫는 데는 ‘경험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론이나 상상 속에서는 약함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육과 혼과 영의 혼연일체, 즉 ‘온 몸’으로의 경험이자 체득을 통해서다. 그 경험치의 심도와 정도는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한가지만은 틀림없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기대는, 약함을 극복하고 이를 이기기 보다는, 도리어 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더욱 경험하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모세도 약함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젊었을 때의 모세는 강한 자존심의 표상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그 강함으로 이집트 군인을 살해했고 동족의 지도자로 나서고자 했으나,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고 애굽을 떠나 피신을 해야했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약함의 정체성을 발견하는데 40년의 기나긴 세월을 필요로 했다.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의 삶을 살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인지를 체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 그의 넋두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출3:11) 이어 그는 자신의 약함을 고했다. “말주변도 없고, 가진 것도 재주도 없고, 나이도 많고, 잘못된 실패도 있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독촉에도 그는 약함의 자리에서 한 발자욱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진노하실 때까지.. 오리발도 마지막 끝까지 내밀어야 효력이 있다.(^^) 나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내 약함의 자리를 끝까지 고수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하셨을까? 아, 그러고 보니 그 분은 약함의 전형이셨다. 예수님의 외형은 어떠셨을까? 흔한 성화 속에 나오듯이, 키크고 멋진 서구형 미남 얼굴이 진짜 예수님의 모습이었을까? 누가 보기에도 흠모할 아름다운 모습이셨을까? 이사야는 이를 정면으로 부인한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사53:2-3, 새번역) 이 얼마나 충격적인 묘사인가? 아,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던 훌륭한 의사요 치료자이시지만, 정작 당신 스스로는 병을 앓고 계신 예수님.. ㅠ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을까? 주님은 진정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볼품 없고 못 생기고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그 분은 그렇게 이 세상을 사셨다. 그러기에, 내 약함도 너무나 잘 아시지 않을까?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13:4) 놀라운 말씀이다. 분명 주님은 약하셨다.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예수님이 친히 약함 가운데 거하시는 비결을 나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었고, 이 약함이 부활하심을 이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능력자이셨을까? 논리적인 내 머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수님이 능력자가 아니라면 어찌 병을 고치셨고, 기적을 행하셨고, 부활하셨겠어? 당연히 능력자이시지.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 아주 잘 들어맞는 일반 상식이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아니 단언컨대, 예수님은 능력자가 아니셨다. 적어도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예수님은 나와 똑같이 약하디 약한 인간으로, 그야말로 당신 스스로 약자임을 철저히 고수하셨다. 위 성경 구절의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두 번이나 이 말씀이 반복되었다.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다. ‘우리(바울 일행)’의 능력도 아니다. 스스로 능력 발휘를 한 것이 아니다. 제 3자의 능력, 즉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시 말하자면, 능력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제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은 능력을 발휘하셨으되,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닌 아버지의 것을 ‘빌려서’ 쓰셨다. 즉, 예수님은 약함으로 일관하셨지만, 그 약함의 정체성 속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께 임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경험하신 약함의 정체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영원한 모본이신 예수님을 닮아가자. 능력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자. 약함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자.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체휼은 경험치이다. 실제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는 체휼이라는 말을 쓰기 어렵다. 예수님은 나와 똑같이 약함을 경험하고 체휼하셨다. 뒤에 있는 말씀이 더 놀랍다. 죄는 없으시니라.. ‘약함은 죄의 유혹과 시험에 노출되기 쉽다’는 내 일반론을 뒤집어 버린다. 약함과 약함의 인식은 분명히 다르다. 약함은 강함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 힘의 차이다. 그러나 약함의 인식, 즉 약함의 정체성은 강함을 포용할 수 있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물을 쪼갤 수는 없지 않은가?

너무 큰 논리적 비약일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은 어떨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약함은 그 자체로 약하나, 약함의 정체성은 강하다. 약함의 정체성 안에는 다른 분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약함의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약함은 내가 쇠함이요, 그 분이 흥함이다.(요3:30) 즉, 나의 약함 속에는 나의 죽음이 있고, 주님의 사심이 있다. 이것을 그대로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 약함의 정체성이다. 아쉽게도, 그 분은 내가 약함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고는 내 안에서 조금도 움직이시지 않는다. 반면에, 내가 약함의 정체성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주님은 약한 나의 안에서 마음놓고 능력을 발휘하실 것이다.

그러면, 약함의 정체성은 어떻게 생길까? 본문에 해답이 있다. 나의 약함에 대해 고민하고 몸부림치고 기도드린 결과이다. 내게 주어진 약함이 은혜이고 약함의 정체성 안에 주님의 능력이 임하신다는 성찰은 어느 한순간 즉석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약함을 경험하고 체득한 사람은 안다. 이것은 고통과 인내의 프로쎄스인 것이다. 여린 살을 지닌 조개가 굵고 억센 모래 알갱이들을 감싸안고 장구한 인고의 세월을 거쳐 빛나는 진주를 빚어내어 가는 과정과도 같다. 그 약함이 진정한 ‘내 것’이 되었을 때 약함의 정체성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아니, 약함은 그 시점부터 비로소 주님의 손에 얹어져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약함의 정체성, 그 최종 단계는 바울과 같이 나의 약함을 자랑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내 안에 아름다운 진주가 있는데, 어찌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39:4)

주님이 가르치신 팔복은 약한 자를 위한 노래이다.
약함의 정체성과 노하우가 가득 담긴 오라토리오다.
철두철미 약함의 자리에 머무르는 이들이 목청껏 부르는 18번이다.
나도 그냥 이들을 따라 약한 자의 노래를 오늘도 흥얼거리고 싶다.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배부름이 있을 것이다.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들이여,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후기)
약함은 약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함은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것을 오래전에 머리로 알았음에도 최근에야 심령적으로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강함을 내려놓은 모든 약한 자들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특별히, 약함의 오리발을 내밀되 목숨 걸고 끝까지 내밀 수 있는 분들에게, 그리고..
진주 모래를 가득 안고 오늘도 아파하는 분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연단과 깨달음의 시간은 더디고 길겠지만 종내는 우리의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순태

2011.08.06 01:55:57
*.216.63.160

많이 공감합니다!

제가 목사 직분자들에게 흔쾌히 동조하지 않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바로 “약함” 신학 때문이었습니다. 만나본(또는 들어본) 주변의 목사들은 결코 ‘약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능력들을 보유한 강한 자 중의 가장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성경과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이 사실을 깨우친 후부터 기독교계에 편만해 있는 ‘목사존경’ 사상의 허구를 알게 되었습니다. 존경심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던 것이지요...(목회자들이 약함 신학을 제대로 알 때, 평신도들의 목사존경은 새롭게 회복될 것입니다.)

형제님의 묵상에 대해 정말 많이 공감합니다. 최근 어떤 책에서 발견한 사도 바울의 약함 신학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 초기부터 자신의 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님께서 본문 삼으신 구절의 마지막 말이 바로 이를 증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더욱 발전합니다.

고전15:9절에서 “사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때가 AD55년경으로서 회심한지 18년 정도 지난 후였다고 합니다. 13명 중에서 가장 작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엡3:8절에서는 “모든 성도 중 가장 작은 자”라고 폭을 더 넓혔습니다. 이때는 61-64년경으로서 회심 후 24년이었다 합니다. 당시 성도 숫자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충 수 만명이라하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작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딤전1:15절에서는 “죄인 중의 괴수”라 했습니다. 63-65년경으로서 회심 후 29년 이후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 인구가 5억이었다면 5억 중에서 가장 작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약해지기만 할 뿐인 바울.......우리가 닮아야 할 표상일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전번에 소개드린, 마르바 던의 ‘약할 때 기뻐하라’를 읽어보는 것도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약함 신학에 대해 다시 생각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선우

2011.08.07 20:59:22
*.222.242.101

정순태 형제님, 귀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약함 신학'이라는 거창한 말을 제 글에 견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냥 약함에 대해 조금 고민하고 묵상하면서 제 자신에게 던지는 QT글을 써 본 것입니다.
쓰다보니 '정체성' 쪽으로 글이 몰아 가더라구요.
그래서 의도한 바는 아니나 제목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쓰는 과정에서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약함에 대해서는 이곳 홈피 식구들 몇몇 분들도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만,
종국적으로는 제 내면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저야말로 '약자의 괴수'이니까요.^^
신학적으로 제대로 들어맞는지도 의문입니다.
암튼 감사드리고, '약할 때 기뻐하라' - 언젠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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