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15-17 선악과가 성경말씀인가요?

조회 수 572 추천 수 26 2011.01.01 02: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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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가 성경말씀인가요?


[질문]


선악과가 성경말씀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내가 분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분별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는데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답변]

선악과 사건은 실제로 있었다.


복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나누는 기준이 여럿인데 성경의 무오류성을 믿느냐 여부도 그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1-11장을 전자는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로 보는 반면에 후자는 설화, 전설, 혹은 가공의 이야기로만 간주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 중에서도 선악과 사건의 사실성을 가장 의심하고선 단지 영적인 의미만 취하려 듭니다.

물론 성경에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두고도 과학적, 사실적인 묘사가 부족한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가 갖는 한계성 때문에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일 뿐 없었던 일을 지어낸 것은 아닙니다.

비유컨대 금강산을 12,000 봉이라고 묘사했는데 정확히 세워봤더니 11,952 봉이라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금강산에 봉우리가 그렇게 많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듯이, 창세기 전반부의 창조와 타락 사건을 비롯해 창세기 11장까지 기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그 기록 전부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자적 표현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단지 과학논문 식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은 절대적으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혹시 그렇게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사실이라고 자신할 수 있느냐고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창조나 에덴동산의 현장에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또 문자는 훨씬 후대의 발명품이므로 아담과 이브라고 해서 자기들이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최초의 인간은 한 부부였으며, 그들이 살았던 특정장소인 에덴도 분명히 실재(實在)했으며, 선악과 사건 또한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거나, 성령으로 기록된 그분의 절대적 계시이므로 오류가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나눠서, 인간과 만물의 창조, 인간의 타락, 예수님의 구속, 마지막 날의 완성까지 넷입니다. 그중에 전반 둘의 핵심내용 전부가 창세기 1-3장에 나옵니다. 만약 아담의 선악과 범죄 사건이 실재하지 않았다면 성경 전체 내용이 곧바로 픽션(fiction)이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창조와 타락의 기사는 아주 짧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역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과정과 그 후에 전개되는 사태와 하나님께 벌을 받는 기록들이 너무나 정미합니다. 죄의 본질, 죄의 근원,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온 과정,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결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뜻, 특별히 죄인의 구원 계획 등에 관한 진리가 그 짧은 기록 안에 아주 심도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록들이 선악과를 실제로 따먹었다는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절대적 계시로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아담의 그 타락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구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림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7-19)

말하자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원죄는 성립되지 않으며, 또 예수님의 죄인을 대표한 대속의 죽음도 효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상태로 생명나무 실과마저 따먹으면 구원의 길이 없어지기에 하나님은 그 나무를 옮기고서 천사더러 화염검으로 지키게 했습니다. 대신에 “여자의 후손” 즉, 동정녀에서 나신 구세주 예수님이 사탄의 머리를 밟음으로써(창3:15) 구원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 하나님이며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의를 믿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면 당연히 선악과 사건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여야 합니다. 만약 예수를 부인하면 자연히 선악과도 부인되지만, 선악과 사건을 성경 기록된 내용을 넘어서버리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부인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전반부 기록이 언뜻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것처럼, 다른 말로 마치 심오한 영적 의미만 주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어떤 사상이나 교리를, 그것도 문학적 수사법을 동원해 진술(proclaim)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사건(event)을 묘사(describe)한 것은 분명한 사실(fact)임을 전제로 해석해야 합니다. 또 실제로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와 비교해 보면 기록된 그대로 분명한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만이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절대 주권자로서 세상만사를 통치하고 있음을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 잊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을 대신 다스릴 청지기 직분을 맡았기에 만물 중에 가장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맡기신 그 사명을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어 창조주와 온전한 관계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와 열매는 그분의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을 따먹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부인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그 마음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자발적, 의도적으로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이 땅의 주인이 되려는 엄청난 배역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악이 출발하고 세상은 죄로 오염된 것입니다. (선악과의 더 자세한 의미에 대해선 “성경의 맥을 잡자” 사이트의 #26-28 글을 참조하시기 바람)

해석과 적용

성경을 읽을 때에 주의해야 할 사항은 해석과 적용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해석은 않고 적용으로, 그것도 순전히 자의적(恣意的)으로, 바로 넘어갑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QT(경건의 시간)를 할 때에 가장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자신의 기대, 편견, 고집, 기분, 상황에 따라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어긋나는 “내가 복음”을 스스로 저작해냅니다.

성경은 과거에 기록된 것이기에 당시 상황, 저자의 의도, 앞뒤 문맥, 성경의 일관된 주제 등과 연결하여서 성경본문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추출해내어야만 합니다. 해석은  한마디로 본문 자체의 정확한 뜻을 찾는 일입니다. 반면에 적용은 본문에서 찾아낸 해석을 가지고 오늘날의 신자가 자신의 삶에 응용할 수 있는 내용으로 바꾸거나, 실제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영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해석은 "then and there"(그때 그곳에서의 이야기)를 찾는 일이라면 적용은 “now and here"(지금 여기서의 의미)로 바꾸는 작업입니다. 선악과 사건에서 해석은 인간의 첫째 조상은 하나님을 배역하여서 그분의 절대적 계명을 불순종하여서 실과를 분명히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후의 경과도 성경 기록 그대로입니다.

그 다음에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독자가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여러 가닥으로, 그럼에도 성경의 일관된 진리의 범위를 절대로 벗어나선 안 됨, 나눠질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도 선악과 본문에 대한 적용으로 제한시켜야지 그 해석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본문 해석이라고 간주하면 자유주의자처럼 성경의 무오류성을 부인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의 해석과 적용에서 신자가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실제 사건은 사실 자체가 갖는 객관성과 합리성 때문에 반드시 한정되고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란 어느 누가 해석해도 봉우리가 아주 많으며 겹겹이 쌓여서 절경을 이룬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봉우리가 몇 안 되고 별로 경치도 안 좋다는 해석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실제 있는 사건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선악과 사건은 실제 있었던 일이기에 앞뒤 문맥과 성경의 일관된 주제와 일치하는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며, 또 역으로 그래서 객관적 개연성이 보장되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러하기에 그런 기록이 내포하는 아주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의미는 어떤 신학자라도 동일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은 명료하고 확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도 절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복음주의자와 각자의 상대적 해석에 맡겨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로 나눠집니다.)  

반면에 실제 사건이 아니라면 자연히 각자가 나름대로 영적 의미만 추출하면 됩니다. 선악과 기록은 죄의 근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성경이 설명하고자하는 바인데도 그것과 전혀 연관 없는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비기독교적이고 단순히 수신제가의 내용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선악과가 보암직했다고 해서 색깔과 무늬가 화려할수록 독버섯인 것처럼 보기 좋은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고만 이해하고 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이 바른 해석인지, 나아가 그 적용이 제대로 되었는지 어떻게 점검할 수 있습니까? 해석 내지 적용한 결과를 본문에 다시 대입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선 아담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선악과가 성경말씀이기에 오늘날의 신자도 따먹어봐야 한다는 해석을 본문에 다시 대입하면 말씀을 읽고도 일부러 어겨봐야 한다는 엉뚱한 결론에 이릅니다. 그럼 불순종의 결과를 실제 체험해보고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만약 그분의 의미가 이것이 아니라면 김유상님이 댓글로 답변드린 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선악과가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계명이란 점에선 후일의 성경말씀, 특히 율법서와 동일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말씀을 먹듯 선악과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즉, 선악과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라는 뜻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면, 문제 삼을 것이 못 될 것 같습니다.” 또 그 댓글대로 성경은 선악과보다 후시대에 생겼으므로 이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런 뜻의 적용이라면 잘못된 점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선악과가 실제 사건이 아니라면 당장 3장 이하의 기록과, 길게는 신약 전체와, 무엇보다 예수님과 연결될 고리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오늘날 신자도 선악과는 물론 예수님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선악과 범죄가 후대 인간의 원죄하의 탄생의 이유 즉, 죄의 실제적 근원이 아니라면 십자가 구원도 전혀 필요 없지 않습니까?
  
또 그러면 칸트가 주장하는 식의 도덕적 종교만 남게 됩니다. 그는 “인간은 이 시간 내에서 선하게 창조된 적도 없고, 이 시간 내에서 타락한 적도 없으며, 이 시간 내에서 구속되지도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대신에 도덕적으로 백지 상태로 출생한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선과 악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의 기원이 각 개인입니다. 악에서의 구원도 당연히 각 개인의 행위로만 즉, 완전하게 도덕적이 될 때에 가능케 됩니다. 결국 도덕적인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가 없으면 인류 타락에 대한 기원은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악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칸트의 주장이 온전히 힘을 얻게 됩니다. 그가 현대의 기독교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또 성경을 단지 영적으로만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큰 폐단을 낳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기독교 신앙은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이자 청지기 직분을 맡은 인간 사이에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맨 처음 계명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 즉, 당신을 경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일치합니다. 앞에서 선악과 사건이 없으면 그 뒤의 모든 성경 기록이 실효(失效) 한다고 말한 또 다른 까닭입니다.  

선악과가 성경말씀이기에 오늘날의 신자도 먹어봐야 한다는 주장이 신자더러 성경 읽기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의미로만 그치면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아닌 적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을 읽어서 그대로 다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면 지옥을 간다든지, 또는 말씀을 자유의지를 사용해 순종할 것과 불순종할 것을 골라야 한다는 식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내포된다면 문제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거나, 스스로의 도덕적 실행으로 천국 가려는 것은 아주 잘못된 발상입니다. 그야말로 아담의 선악과 범죄로 인한 원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성경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자는 한 명도 없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하지 않습니까?

성경의 창조, 선악과, 타락 기사는 인간이 현재 처한 영적 실상(spiritual reality)과 모든 현상들을 올바르게 설명해주는 세상에서 유일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담긴 책입니다. 다른 어떤 사상, 철학, 도덕, 종교도 불완전한 설명일 뿐 아니라 인류에게 어떤 궁극적 해결책도 마련해 주지 못합니다.  죄에 찌들어 어리석은 인간의 지성으로 고안해낸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그 초점이 모아지는 신구약 성경만이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모순, 왜곡, 재앙, 죄악, 고통, 죽음 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경은 반드시 온전한 해석을 먼저 한 후 영적 적용을 해야 합니다. 또 영적 적용도 그 해석된 진리 자체가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절대적 범주를 넘어서선 결코 안 됩니다.

12/3/2010

(*) 코넬리우스 반틸, "개혁신앙과 현대사상", 이승구 옮김(서울 SFC: 2009),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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