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9-34 & 2:1-11 가나 혼인잔치에 관한 의문 둘

조회 수 966 추천 수 8 2012.09.14 20: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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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혼인잔치에 관한 의문 둘


[질문]


1. 요한복음을 읽다보면 1장 29절로 34절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증거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35절로 51절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 2장 1절로는 '그 후 사흘 되던 날'에 하며 가나 혼인 잔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상으로 본다면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40일 광야 시험의 기간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1장 29절 이후의 사건은 이미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 40일 시험을 통과하시고 다시 세례요한에게 왔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명확한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싶어 질문을 보냅니다.

2.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에는 많은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숫자들에 영적 의미을 부여하여 반드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예를 들어 가나혼인 잔치의 항아리 수가 6인 것은 완전하지 못함을 뜻하며 구약을 대표한다)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아니면 어떤 것은 알레고리적으로 어떤 것은 해석 없이 숫자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나요?

[답변]

흔히 간과하기 쉬운 문제에 대해 예리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질문자님께선 이미 상당한 성경지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인 것 같아도 의심나는 부분을 지나치지 않고 탐구하시다 보면 성경을 깊이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답을 추구해가는 과정 중에 단지 해답만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관된 주제들도 함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1. 광야 시험과 제자 선택

1.1. 요한의 저작 의도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이라고 합니다. 이 세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적 연대 순서에 맞추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주님의 일대기인 셈입니다. 그래서 저자들의 저작 관점이 같다는 의미로 공관복음이라고 명합니다.  저자마다 그 강조하는 부분은 각기 다르지만 그 내용과 순서가 거의 같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질문하신 가나혼인잔치나, 니고데모와 대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사건, 마지막 성령에 관한 강화 부분(14-17장) 등이 그러합니다. 또 다른 복음서에 볼 수 없는 안드레, 빌립, 도마 같은 개인에 대한 정보도 나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과 구분하여 제사(第四)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 잘 아시는 대로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일곱 표적을 나름의 의도를 갖고 배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를 스스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예수님이 행한 표적이 상당히 많았지만 일곱 표적만 따로 골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선한 이유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중에서 특별히 주님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자료들 외에는 과감히 생략했다는 뜻입니다. 더 쉽게 말해 공관복음에 이미 기록된 것은 구태여 중복해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AD 50-70년 저작)보다 한 세대 정도 늦게(AD 80-90년)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AD30-33) 때와 비교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돌아가신 직후에는 복음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허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에 함께 생활한 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복음의 역할과 권능을 행사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도 여러 기적의 현장에서 실제 체험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그분의 메시아 됨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차츰 사도들과 동시대의 생생한 증인(eye witness)들의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기억이 더 이상 희미해지기 전에 예수님의 일대기를 정확한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가 생겼습니다. 공관복음이 저작된 이유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더 흘러 사도들과 증인들마저 죽고 사라졌습니다. 이미 복음은 옛날이야기처럼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근 두 세대, 즉 손자뻘의 사람들에게는 현대인들이 그러하듯이 할아버지 담배 피던 시절의 동화나 전설로 비춰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초대교회 내에 이단사상이 서서히 침투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에 대해 확실하게 변론해 놓을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순교 당했지만 오직 요한만 하나님이 근 백세까지 살게 해주신 이유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초기 이단들은 물론 당시 주님 되심에 확신이 없는 신자들과 후대의 성경독자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체계적으로 논증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서두(1:1-14)부터 그 점을 명확하게 전제한 후에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주님이 대답하는 논쟁(debate) 형식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주님께서 당신의 메시아 됨을 직접 증거한 내용들입니다.

요컨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일대기가 아닌,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는 논문 내지 보고서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공관복음에서 다룬 내용들은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빼고는 다른 기적들은 생략하고 대신에 가난 혼인잔치나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덧붙인 이유입니다. 말하자면 질문하신 연대순서 같은 문제는 구태여 공관복음과 연결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면 자칫 혼란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1.2. 공생애 첫 주간

문제는 질문하신 대로 1:29이 “이튿날”, 1:35는 “또 이튿날”, 1:43도 “이튿날”, 2;1도 “사흘 되던 날”이라고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연일(連日) 이어지는 사건이라는 뜻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실제로 그런 순서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저자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저작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첫 주간(1:19-2:11)의 사역을 밝히려는 뜻입니다. 마지막 한 주간(고난주간)의 기록(12:1-21:25)과 비교해 보면 그의 의도가 쉽게 확인됩니다. 간단히 대비해 보겠습니다.  

첫 주간의 첫날은 침례 요한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1:19-28), 둘째 날은 침례 요한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렸으며(1:29-34), 셋째 날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을 소개하고(1:35-42), 넷째 날은 나다니엘이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했으며(1:43-51), 다섯째 날은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즉, 침묵의 시기이며, 여섯 째 날은 “사흘 되던 날”에 가나 혼인 잔치를(2:1-11)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간의 첫날(토요일)은 베다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고(12:1-11), 둘째 날(일요일)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으며(12:12-50), 세 번째 기록인 목요일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이며(13-17장), 넷째 금요일은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과 함께 달리셨고(18:1-19:37), 다섯째 금요일 이후는 장사지내 사흘 간 무덤에 침묵으로 머물었으며(19:38-42), 여섯째 마지막 일요일에는(20장) 즉 “사흘 되던 날” 부활하신 것입니다. 첫 주간과 마지막 주간의 기록이 날짜별로 그 의미가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본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공사역을 시작한 첫째와 둘째 날의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침례 요한이 예수님께 침례 주신 사건과 연결되긴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공관복음처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시제가  과거로 표현되어 있어서 저자 요한은 물론 침례 요한이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사건을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 구분이 더 확실해집니다. (참고로 성경의 의문사항이 있을 때에는 헬라 원어까지 연구할 필요 없이 영어성경만 잘 살펴보아도 쉽게 구분이 됩니다.)

대신에 1:15-34는 침례 요한이 간증한 내용을 저자 요한이 인용한 것입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15절)로 시작하여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34절)고 마칩니다. 중간에도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32절)라고 표현함으로써 계속해서 침례 요한의 증거를 저자가 인용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영어에는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을 인용할 때에는 그 말한 부분은 “ ”로 구분하여 현재형으로 표현하지만 실제 시제는 과거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런 구분을 하지 않았기에 현재형과 과거형의 시제가 섞여 있거나 주로 과거로만 표현하기에 언제 일어난 일인지 구분하기가 힘듭니다. 어쨌든 첫째 날과 둘째 날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 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1:28) 먼저 “이 일”이라는 표현은 이미 있었던 일임을 뜻합니다. “베다니에서 된”이라고 시제도 분명 과거(were done)입니다. 저자 요한이 사건을 직접 겪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요한이  ... 허락하니라...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3-17)고 표현되어 현장성이 생생한 마태의 진술과는 명확히 다릅니다.

참고할 것은 이 일이 복수(these things)입니다. 그 뜻은 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침례 요한에게 여러 번 찾아 와서 동일한 질문들을 했다는 것과, 또 한 번에 그 여러 가지 질문들을 했다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어느 쪽인지 성경기록으로는 분별이 쉽지 않지만, 어쨌든 다음 구절인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1:29)에서 “이튿날”을 해석하는 중요한 키가 됩니다.

만약 바리새인과 침례 요한의 만남이 여러 번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공사역 이틀째를 뜻합니다. 여러 번 있었던 일 중에서 어느 날의 다음 날인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 만남이 한 번만 있었다면 그 사건의 다음 날 즉, 바리새인들과 만난  그 다음 날에 예수님께 침례를 주었다는 뜻이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1:15-34까지 전부가 침례 요한이 간증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거기다 이 문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열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34절입니다. 영어로 봅시다. And I have seen and testified that this is the "Son of God." 현재완료형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that 이하 종속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현재형 시제 is로 표현한 것은 영원한 진리임을 뜻합니다.) 그럼 바리새인과 침례 요한이 만난 그 이튿날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침례를 줄 때에 하늘에서 나는 그런 음성을 들었는데 지금까지 그 일을 쭉 증거해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한 첫 주의 첫째와 둘째 날에는 침례 요한이 대중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분명하게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첫날은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확고하게, 또 둘째 날은 침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정확하게 밝힌 것입니다. 요한의 기록대로 따르면 예수님의 공사역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예수님이 공중 앞에 그와 함께 나섰는지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침례 요한의 그런 간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셋째 날(1:35-42)은 실제로 그 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저자 요한이 날짜 별로 일어난 사건을 좀 더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혀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가 연로했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2. 가나 혼인잔치의 여섯 항아리.

성경에 나타난 일부 숫자는 분명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모든 숫자에 무조건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곤란합니다. 이방의 왕들이 교만하게 이스라엘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대적하는 말과 행동, 또는 영적으로 부패하여 교만해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과 행동을 기록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단순 사실로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하는 경구로 삼을 수는 있지만, 세부적 표현에 일일이 풍유적(諷諭的, allegorical)해석을 부여하면 안 되듯이 말입니다.    

성경의 숫자에 관해선 하나님과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종이 직접 정하거나 거론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에 대한 영적 의미도 따져봐야 합니다. 대표적 예로 예수님이나 모세가 40일 금식한 것은 그분들이 그렇게 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는 먹을 것을 가졌는지 찾아보니 그것 밖에 없었더라는 뜻으로 그냥 그렇게 일어난 사실입니다. 이런 차이는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지파가 열둘이며, 신약의 예수님 제자도 열두 명이었습니다. 12는 3X4=12의 뜻입니다. 3은 길이, 넓이, 높이 즉 삼차원의 공간을 말합니다. 또 4는 동서남북의 네 방향입니다. 동서남북의 네 공간 안에 다 채울 수 있는 숫자입니다. 일 년은 사계절이 석 달씩 있어서 열두 달이 되는데, 시간적으로 반복되는 주기인 일 년을 다 채운다는 의미와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뭇별처럼 번성케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모습이 구약의 열두지파이며, 그와 연결하여 십자가 복음 또한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의 모든 족속에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 열두 제자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4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 144,000명이라는 것은 구약 12 지파 X 신약 12 제자 X 1,000(아주 많음을 대변) 명을 뜻합니다. 신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 무수히 구원 받는다는 뜻이지 그 숫자에 한정되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계시록에서 사탄에게 이마에 받은 표인 666은(계13:18) 여러 묵시적 의미를 가지며 시대마다 해석을 달리했습니다. 헬라어 알파벳에 수치를 대입하면 네로 황제가 나오지만, 실은 네로가 크리스천을 종교적 이유로 핍박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적 광기로 대화재의 희생양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박해받기는 그 후 디모티안 황제 때부터입니다. 나아가 666을 알파벳에 대입하면 산술방식에 따라 아무에게나 해당될 수 있으며 그 예로 히틀러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약 예언들이 주님이 직접 오시어 사역을 완료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듯이, 이 또한 마지막 때에 대환난을 거치고난 후에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논란되고 있는 베리칩도 666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마18:22) 것도 완전 숫자(7)에 꽉 찬 숫자(10)를 곱해 어떤 경우라도 모든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수자로만 따지면 490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491번째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다 같은 일에 70번까지, 또 그러기를 서로 다른 일곱 케이스에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의인이라도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용서했듯이 상대가 행한 결과는 절대 보지 말고 그 상대만 끝까지 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단순히 사실관계만 나타내는 숫자의 예를 봅시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물고기 다섯이나 떡 두 개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당시 한 사람이 먹을 도시락의 양이었을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밤새 허탕 친 베드로더러 그물을 던지게 하자 무려 153마리나 잡게 된(요21:11) 경우도 단지 실제 사실이었다는 뜻입니다. 38 년 된 행려병자, 12 년 된 혈루병 여인도 단순히 그만큼 병이 깊었다는 것이며, 열 명의 문둥이를 낫게 했지만 한 명만 돌아왔다는 것도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돌리는 자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가나 혼인잔치의 여섯 항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미리부터 여섯 항아리를 지정해서  물을 채우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잔치 집에 있던 항아리가 여섯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6은 사탄의 숫자인데다, 여섯 항아리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으니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했다고 하면 조금 무리한 해석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먼저 기존의 여섯 항아리에다 새 항아리 하나를 더 갖고 오라고 명한 후에 일곱 항아리에서 이적을 일으켜야 합니다. 요컨대 6이라는 수자로 해석의 기준을 삼았으면, 바뀐 이후의 상황도 당연히 숫자로만 상징화 되어야 합니다. 해석의 준거를 동일한 사안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삼아선 이미 그 자체로 논리적 타당성이 감퇴 내지 실종됩니다.    

여기선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 이적의 초점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이 땅의 현실적 삶의 즐거움에도 함께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를 벌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신자의 일상적 삶의 세세한 부분에도 관심을 갖고 아름답게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 항아리는 원래 집에 오는 손님들의 손발을 씻는 용도였습니다. 율법의 결례를 순종하는 의미입니다.(요2:6). 비록 여섯 개 있었지만 율법을 따르는 것인데 어찌 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탄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은혜로 바꾸시는 예수님을 상징할 뿐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리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앞뒤 문맥을 잘 살피면 의도적으로 미리 정한 숫자로 분명 상징성이 있는 것인지, 단순히 사실만 나타내는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이미 조금 무리하거나 어색하게 여겨지는 해석이라면 그 자체로 성령의 경고성 깨우침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해석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진리에 연관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믿음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나름대로의 의미도 분명 있을 것이므로 크게 문제 삼지 말고 혼자서만 참조하시면 됩니다.

9/5/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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