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옴] 믿음의 힘으로 지옥을 이겼다

조회 수 1609 추천 수 153 2005.07.17 15: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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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49, 전 요덕수용소 출신-북한 민주화 운동본부 공동대표)


내가 태어난 곳은 중국 길림성 용정시 삼합이라는 곳이다. 삼합은 북한 함북 회령, 무산, 온성 등에서 탈북하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주용 경로이기도 하다.

중국 국적의 동포였던 아버지와 북한 국적의 어머니는 6ㆍ25전쟁 때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중국생활을 청산하고 부모님을 따라 6살 때 함북 청진으로 이사를 했다. 강원도 원산과 평남 평성에서 인민학교(지금 소학교)와 고등중학교(지금 중학교)를 졸업했고, 72년에 인민군 자동차양성소와 원산 원동기공장에서 근무했다.

북한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중국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지긋지긋한 통제와 억압은 숨이 막힐 정도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체제에 대해 염증은 더해만 갔다. 어린 시절을 보낸 중국에서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북한사회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판단이 굳어져 갔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87년 3월 함북 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중국은 등소평의 개혁ㆍ개방으로 나라 전체가「천지개벽」을 시작하던 때였다.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유로웠고, 인민들은 활기차 보였다. 나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나는 우연히 교회에 나가게 됐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신앙생활은 나에게 또다른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으며, 온갖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중국에서 16개월 동안 탄광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정착할 때쯤인 어느 날 중국 공안(경찰)에 체포돼 함북 회령을 통해 북송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보위부는 나를 거의 간첩취급을 했다.

게다가 공안이 나의 숙소를 급습할 때 발견한 성경책이 크게 문제가 됐다. 북한에서는 간첩죄 못지 않게 엄중하게 다루는 것이 바로 기독교에 오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첫날부터 뭇매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 성경책은 함께 살던 사람의 것이었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성경책이 나의 것이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나는 끝장나기 때문이었다.

보위부의 조사는 8개월간 계속됐다. 북한감옥을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당하는 고문이 있다. 잠 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 정좌한 채 같은 자세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구둣발과 몽둥이가 날아왔다. 차라리 구타를 당하는게 낫지 이것은 숫제 고문보다는 훨씬 가혹한 벌이었다. 조금 지나면 온몸이 쑤시고 다리가 저려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바로 철창에 수갑을 채우고 매단 뒤 권총으로 뼈 부위만을 골라서 때렸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발가벗긴 채 잠을 재우지 않고 감방 안에 앉아 있게 했다. 겨울에는 용변을 볼 때 방안의 온도가 너무 차서 변기통 주변이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변기통 위에서 일을 본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다. 위생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앉아 있으면 얼굴로 이가 기어 다니고, 감방에서 나갈 때까지 8개월 동안 세수조차 한 번도 할 수 없었다. 수감자들끼리 말을 하다 걸리면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 때리기를 시키는 비인간적 처벌도 가해졌다.

한번은 조사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쇠못을 집어 삼킨 적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수술받는 것이 조사받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배를 째기도 전에 못이 변으로 나와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마음 속으로는 늘 하나님께 기도했다. 『너무나 견디기 힘들고 차라리 죽는게 편할 것 같습니다. 저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나의 신념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기도는 감방 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8개월의 조사과정을 마치고 나자 함남 요덕에 위치한 「15호 관리소」(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강제 수감되었다. 재판이 있을 리 없다. 한 번 들어가면 평생 살아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에 들어가지 않은 것 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보위부 조사 과정에서 나는 심한 영양실조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런데도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매일 12시간의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수감자들은 산에서 부식토(거름)를 지게에 져 나르는 작업을 했다. 나는 힘이 없어 다른 사람들보다 부식토를 적게 담았던 적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보위원이 나를 발로 차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지고 나서도 그를 욕하였다고 하여 분주소(보위원 사무실)에 붙들려가 내부지도원에게 참나무 장작으로 심하게 맞아 실신하였다. 깨어보니 방이었다. 수감자들이 나를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한번은 지게에 무거운 것을 지고 머리를 숙이고 가다가 경비병이 지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경비병은 내가 인사를 안 했다고 저녁에 불러내어 자기 동료 7~8명과 함께 다시 뭇매를 가했다. 그렇게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그들은 나를 벌거벗기고 마당 한가운데 수갑을 채워 세워놓았다. 수갑을 채울 때도 발로 세게 밟아 수갑을 사정없이 조여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손이 금방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

당시 나는 경비병들의 훈련용 방탄벽 공사에 동원되었는데 공사장의 생석회 위에 나를 앉혀 놓았다. 그때 마침 비가 내렸는데 생석회가 빗물과 반응하여 끓어오르면서 살이 익는데도 한참을 그대로 앉혀 놓았다. 그때 엉덩이에 화상을 입어 1달 정도 바로 눕지도 못하고, 변을 볼 때도 살이 당겨 너무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바지를 못 입었다. 상처에서 진물이 나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90년 가을로 기억된다. 옥수수 밭 경비를 서다가 불을 피우고 옥수수를 구워 먹다 보위원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양수철이라는 보위원이었는데 그는 불붙는 장작으로 내 다리를 마구 때리고 지졌다. 그때의 화상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수용소에서 보낸 나날은 지금까지도 나를 공포에 떨게 하는 악몽이기도 하다. 그때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이 지옥을 견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수용소에서는 자신이 인간임을 잊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개 먹이를 훔쳐 먹으려고 개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영양을 보충할 수만 있다면 뱀과 개구리, 쥐와 같은 것도 가리지 않고 먹어야 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였다. 수용소에서는 일이 너무 고되어 자신의 손가락을 스스로 자른 사람부터 미친 척하며 정신이상자를 자처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님을 믿었다고 삽날에 맞아 파상풍으로 골수가 썩어 팔을 자른 사람, 말도 안 되는 할아버지의 과오로 영문도 모른 채 20-30년씩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수용소 안에 존재하는 특별감방에도 갔던 적이 있었다. 68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신화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박승진
씨도 이 감방에서 바퀴벌레를 먹고 살아나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내가 특별감방에 수감된 사연도 비정하기 짝이 없다. 나는 수용소에서 우연히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됐고 결국 그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됐다. 보위부는 그 여성을 체포해서 애는 강제로 유산시켰다.

그리고 나는 수용소 안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정도로 악명이 높은 특별감방에서 한 달 동안 수감됐다. 그곳에서는 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감방 안이 너무 추워 다리를 세워 가슴에 안고 앉아 있다가 간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간수가 나를 불러내 옷을 벗기고 구두발로 마구 차서 얼굴과 코가 피범벅이 되었다. 그렇게 무참히 맞은 후 다른 방에 나를 집어 넣었는데 그 방엔 벼룩이 득실거렸다. 그것도 형벌의 하나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제발 벼룩이 없는 방으로 옮겨 달라고 애원했더니 오히려 물통에 물을 담아 와서 나에게 끼얹었다. 온몸이 얼어드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지금도 찬바람이 불면 나도 모르게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나오곤 한다.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내 몸이 추위에 저절로 반응하는 모양이다. 이 일로 나의 수용소 생활이 1년 연장되기도 하였다.

5년 동안의 수감 생활을 끝마치고 나는 인간 생지옥 수용소에서 살아나왔다. 기적같은 일이었다. 수용소에서 나오자 나는 다시 그곳으로 끌려갈 위험이 있는 탈북을 시도했다. 나의 운명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97년 양강도 혜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고 다시 교회를 찾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처음으로 기도다운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2001년 6월 몽골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지금은 총신대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 지금은 탈북자들의 인권단체인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해체되고 북한땅에 종교의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날까지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나의 소중한 경험이 남쪽 사람들에게 전해져 북한인민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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