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불 못 지옥이 정당한가요?

조회 수 503 추천 수 0 2015.02.05 00:27:33
영원한 불 못 지옥이 정당한가요?


[질문]


저는 안식교나 생애의 빛, 여호와의 증인 같은 집단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옥이 거슬리고 부당하게 생각되어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새롭게 하나님 말씀을 멋대로 해석하여 끼워 맞춰 만든 다른 자신들의 신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지옥에서 영혼 소멸이나 지옥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들은 원어로 주장하는 부분들도 있으나 실제 원어까지 살펴보아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보고 확실하게 지옥은 영원한 형벌과 심판의 장소임을 확인하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런 영원한 지옥의 형벌과 심판이라는 부분에 있어 "그런 영원한 형벌이 정당하냐?"를 물을 때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하여 확실한 변증을 하지 못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로마서 말씀처럼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토기장이가 토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듯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선택과 형벌에 있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은 믿고 있습니다.

또한 지옥이 단순히 행위에 따른 형벌이라는 인간 세상의 법적 심판이 아니라 마음에 죄를 기뻐하고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반항과 거부감의 결과가 마음과 행동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며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도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도 없는 죄는 물론이며 이런 죄를 지은 사람도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럼 소멸하게 하거나 처음부터 죄를 짓지 못하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주장할 때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서 공의가 없는 사랑은 공의가 아니라는 점으로 설명을 해 보려 하지만 역시 영원한 심판에 대하여 충분한 변증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가 변증을 해야만 공의와 사랑이 인정되시는 분도 아니고, 이런 변증 자체가 아무 쓸모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무의미한 인간의 논쟁과 노력임에 틀림없지만 불신자들의 마음은 물론이며, 신자 중에서도 연약한 신자에게 어떻게 이것을 충분하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의 핵심을 간단히 다시 정리해 말씀드리면 "지옥의 영원한 형벌의 정당성을 묻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라고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답변]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반발


“영원한 불 못의 지옥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도무지 맞지 않기에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발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을 지닙니다. 사랑의 하나님만 볼 것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도 감안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불의한 면이 전혀 없으니 영원한 불 못 지옥에 대해서도 어떤 의심과 반발 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영원한 불 못의 지옥”이라는 서술은 지옥의 상태를 설명한 것입니다. 지금 논의하는 주제는 지옥이 실재(實在)하는지 그 정당성 여부입니다. 영원한 불 못이 옳은지 그른지 지옥의 상태에 관해선 그 실재를 인정한 자들만 논의할 자격이 있습니다. 영원한 불 못이라는 상황 때문에 그 실재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반발입니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에게 화상통화가 가능한 스마트 폰은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로선 아무리 먼 곳의 사람이라도 화면을 통해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합니다. 말하자면 화상통화부터 도무지 이해가 안 되니까 스마트폰도 아예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합니다.

이처럼 스마트폰의 실체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화상통화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필요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이 실재해야만 할 당위성은 제쳐둔 채,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으니 지옥의 실재성도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는 사실상 토의를 할 필요와 이유가 없습니다.

더 정확한 비유를 들자면 아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심하게 때리는 아버지가 있다고 칩시다. 아버지라면 사랑으로 자식을 감싸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아들을 그렇게 학대하다니 그는 절대로 아버지가 아니라고 반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그가 친아버지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한 후에, 진짜 아버지라면 이렇게 저렇게 자식을 대해야 한다고 서로 권면 논의하는 것이 순서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지옥이 있어야 할 당위성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옥이 꼭 있어야 할 당위성

무엇보다 지옥의 심판이 없으면 천국의 구원도 없습니다. (지금 그 둘의 실재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당위성에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이는 너무나 간단한 이치입니다. 지옥의 심판이 없으면 아무리 천국의 구원이 있다 해도 모든 인간에게 사실상 이 땅의 삶만이 전부가 됩니다. 당장 저부터도 솔직히 예수를 믿지 않고 제 멋대로 살다가 죽겠습니다. 구태여 시간을 쪼개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대신에 신나게 이리저리 놀러 다니겠습니다.

천국의 영광에 대해 성경이 아무리 설명해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열심히 해결하며 살아가야 할 과제들과는 무관한 먼 장래의 일뿐입니다. “이미 죽은 후에 그렇게 성스러운 곳에서 찬양만 하며 지낼 필요가 있을까? 한 번뿐인 이 짧은 부평초 같은 인생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다 해보고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누구나 쉽게 말할 것입니다.

비록 의인이 가는 천국이 있다 해도 악인에 대한 사후 심판 없이 죽음으로 그 인생이 완전히 소멸된다면 천국 가는 의인보다 이 땅에서 끝나는 악인이 훨씬 더 매력적일 것입니다.  형무소만 가지 않는 범위에서 온갖 쾌락을 즐기며 안락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 인생을 최고로 잘 사는 길이 됩니다. 이는 어느 누구도 반발할 수 없는 논리, 아니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3-19) 인생이 이생으로만 끝나면 가난과 소외와 핍박 가운데도 천국의 소망을 키우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신자들만 헛고생하는 것이라고 바울도 분명히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자의 삶에서 지옥을 변증하라.

그렇다고 천국과 지옥이 실재할 당위성의 근거가 영원한 심판이 있으니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든지, 반대로 영원한 구원이 있으니 더욱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이 마치 부모의 체벌이 두려워 나쁜 짓하지 않거나, 상을 받는 재미로 공부 열심히 하는 정도의 수준 밖에 안 됩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죄를 지으면 저절로 수치심과 공포심에 휩싸이게 됩니다. 또 그 억눌림과 괴로움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스스로 해결하려 시도해봤지만 오히려 더 큰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집니다. 나아가 세상에서의 풍요와 쾌락은 아무리 추구해도 도리어 갈급함과 허망함만 늘어난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심지어 어려운 이웃을 섬기고 소속 단체나 사회에 봉사도 많이 해봤지만 자신을 높이 세우려는 자랑과 교만 때문에 항상 뒤끝이 개운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너무 착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의인이라고 칭찬해도 내 스스로 나를 돌아볼 때에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존재임을 자신만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엄밀하고도 세밀히 살피면 너무 싫어서 나라는 존재 전체를 깡그리 부인하고 싶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들 앞에서는 더 의롭고 겸손한 양 재물과 명예와 권력 등으로 치장합니다. 살아갈수록 기쁨과 보람과 의미가 늘어나야 함에도 반대로 슬픔과 허망과 무의미함만 늘어나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삶의 진정한 의미는커녕 목적도 없고 심지어 방향도 잡지 못합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시는 은혜를 입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지난 모든 갈증과 자괴감이 나를 창조하시고 공평과 정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멀리한 까닭임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는 절대 해결하지 못했던 죄로 인한 수치심과 공포심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다 감당해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어리석고 추하며 죄에 빠진 나를 그 모습 그대로 사랑으로 품어주셨음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여 언제 어디서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일대일 인격적 대면의 체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를 안 믿어 그 반대편 심판으로 떨어졌다면 정말로 큰일이었겠다고 절감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구원 체험에 비추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경의 진술이 절대적 진리이자 그분이 하나님임을 확신합니다. 마땅히 그분이 말하는 지옥 심판도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요컨대 지옥이 있어야 할 당위성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십자가 구원을 체험한 자에게는 전혀 의심이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거듭남의 은혜를 입어 예수를 따르면 구원과 심판의 당위성도 자연히 알게 된다는 말은, 지옥이 있어야 할 당위성은 신자가 자신의 삶을 통해 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처럼 부활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소지하여 어떤 죄악, 흑암, 사망의 세력과도 생명을 걸고서라도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야 합니다. 신자의 빛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천국의 구원을 확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와 반대편에서 죄악, 흑암, 사망에 붙잡혀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그들 스스로도 깨닫게, 최소한 눈치는 채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옥에 관한 가르침

성경이 절대적 진리이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과는 논쟁은커녕 변증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교파에선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정확히 말하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자기들이 미리 정해놓은 이단적 교리에 끼워 맞추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한 예만 들어서, 질문자께선 이미 그런 점까지 다 파악하시고 계시지만, 설명해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이 말씀에서 “지옥 불”로 번역된 원어가 신학적 용어인 지옥이 아니라 유대에 있던 특정 장소였기에 주님은 지옥 심판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고 반발합니다. “지옥 불”의 문자적 의미는 “불이 붙는 게헨나”인데, 게헨나는 예수님 당시 쓰레기를 버리던 예루살렘 남쪽의 골짜기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실제로 쓰레기를 태우느라 항상 불이 붙어 연기가 자욱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타락한 유대인들이 이방신 몰록의 제사를 지냈는데 사람을 번제물로 불로 태웠기에 예레미야는 “살륙의 골짜기”(렘 7:31)라고 저주했습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 왕이 몰록의 제사를 금지시키고(왕하23:10)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용도로 바꿨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따라 유대교는 최후의 심판이 이 골짜기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 속에서 행해질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중간기 이후의 문서에는 ‘게헨나’가 지리적 장소라기보다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지옥을 뚜렷이 상징하는 용도로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에게도 최후심판의 장소 내지 그 심판을 상징하는 의미로 게헨나가 사용되고 있음을 같은 유대인인 주님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맥락에서 형제를 말로 살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격한 최후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청중들도 실제로 그 골짜기에 쓰레기나 시체로 버려진다기보다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다들 이해했을 것입니다.

원어의 문자주의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선 마땅히 원문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뜻만 무조건 절대적으로 강조하면 “원문의 문자주의”라는 또 다른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만약에 게헨나가 최후 심판이나 지옥을 상징하지 않고 특정장소일 뿐이라고 해석 고집하려면 형제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면 하나님으로부터 정말로 난지도 같은 쓰레기 처리장에 버려지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원어이든 번역어이든)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에 한정지어야 합니다. “만일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5:29) 이 말씀에서 후반 부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는 절대적 진리에 해당됩니다. 세상에서 어떤 현실적 손해를 입더라도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전반부 “만일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어디까지나 상징적 비유를 사용한 부연설명입니다. 이마저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서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을 때마다 눈을 빼버리면 저를 필두로 이 세상 남자는 모두 봉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원어를 살필 때는 당시에 그 원어가 가졌을 상징적 의미도 함께 따져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게헨나를 힌놈의 골짜기라는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당시 통용되던 지옥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말씀하셨기에 “지옥 불”은 가장 합당하고 정확한 번역입니다.    

형제에게 말로 상처 주면 모두 지옥 불 심판을 받는다고 주님의 말씀을 단순히 해석하면 이 또한 문자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련한 놈은 단순히 어리석다, 바보 같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머리가 텅 비어있다(empty head), 그래서 살아있어도 사실은 생명이 없다(lifeless)는 것이며, 결국 말로 다른 이를 살인하는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죄의 범위를 행동으로 짓는 죄에서, 말로 짓는 죄는 물론 예쁜 여자를 보고 음육을 품는 생각으로 짓는 죄(마5:27,28)에까지 확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죄가 집요하고도 가공할 능력으로 인간을 넘어뜨릴 수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앞뒤 문맥(context)을 감안해 해석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를 믿은 신자,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본 자들이 지켜야 할 도덕규범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도 깊은 차원에서 거룩해지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행동의 죄는 물론 말과 생각으로 짓는 죄도 지옥 불에 던져질 만큼 큰 죄이므로 절대 죄를 경시하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인간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함을 주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손과 눈을 잘라가며 죄를 안 지으려면 아무도 살아남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자는 아무도 없으며 심지어 율법도 완전히 지킬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내내 주님이 유대 장로들의 유전과 대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는 패턴으로 계속 됩니다. 형식적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교의 종식을 고하고 복음에 의한 은혜의 구원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산상수훈 전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구원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길임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됩니다. 십자가 복음의 참된 의미대로 모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창조한 귀한 존재로 본다면 말로 상처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십자가 복음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기에 주님은 “불 붙는 게한나”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살필 문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신자를 불 못에 영원토록 빠트리는 잔혹한 하나님일 수 없다고 반발합니다. 즉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억만 년을 그런 극심한 고통에 빠트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永遠-eternity)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억만년이라는 시간은 물질계의 시공간 안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만 적용됩니다. 죽어서 영의 세계로 들어가면 더 이상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현재의 세계입니다. 그곳에서도 그곳 나름의 시공간이, 인간이 인지하고 있는 시공간 개념과 다르기에 차원 범주 영역 등으로 명명하는 것이 옳을 것임,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인간이 피부로 느끼는 그런 장구한 세월과는 다릅니다.  

요컨대 지옥을 어떤 특정 공간에서 무한대의 시간 동안 무한대의 고통을 겪는다는 의미로만 제한해서 해석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찬양한다는 것이 억만년 동안 찬양만 부르는 것이라면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천국과 지옥을 지구의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바꿔 말해 끝없이 넘치는 축복과 끝없이 넘치는 고통으로만 대비해선 편협하고 잔인한 하나님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과 천국을 지구적 개념으로 제한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을 인간의 제한적 사고의 틀 안에 가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구체적인 상황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분만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직접 가서 하나님과 맞대면 해야만 이해가 되는 곳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해 범위 안에 드는 그림 언어로 그것도 천국에 대해서만 조금 길게 설명해 놓았을 뿐입니다. 인간이 함부로 무지하고 교만하게 영원토록 불 못에 가두는 포악한 하나님이라고 비평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그런 하나님일 리가 없으니 지옥이 없다고 주장해선 더더욱 안 됩니다.

천국은 죄와는 전혀 무관한 곳으로 오직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그분을 세세토록 찬양 경배할 만큼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지옥은 그 반대로 오직 죄와 더러움으로만 가득 차있고 사랑이라곤 티클 만큼도 없이 슬픔만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과는 완전히 단절되어서 두 번 다시 구원의 찬스가 영영히 없는 곳입니다. 이를 갈며 후회한들 이미 늦은 곳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 천국의 맛을 이 땅에서도 일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면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는 하나님을 거역 대적함으로써 지옥의 맛을 이 땅에서부터 일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죄 중에 빠져서 자기만 높이고 치장하려 들다 이웃과 분쟁하여 원수 되면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모든 이가 서로 자기만 높이려 드니까 다툼은 필연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며, 탈레반의 911테러입니다. 아유슈비츠 가스실과 단숨에 주저앉은 뉴욕 쌍둥이 빌딩에서 모든 이들은 지옥을 보았다고 한 목소리로 증언합니다. 이것 이상 지옥에 대한 확실한 변증도 없지 않습니까?

성경이 선언하는 것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인간의 얄팍한 지식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춰서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십니다. 완벽하십니다. 한 치의 오류나 부족이 없습니다. 지옥은 성경의 진술대로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가 끝없이 늘어선 슬럿머신에 돈 독이 오른 사람들이 잠 한숨 못 자고 충혈된 눈으로 도박만 하는 곳일지 모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땅에서 돈을 주인으로 삼고 돈의 노예가 되었던 그 상태로 죽은 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상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것은 성경(하나님)이 인간 이해 수준에 맞추어 지옥을 영원한 불 못이라고 설명한 문자적 의미 그대로 실제로 그렇다 해도 완전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런 지옥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승리, 구원의 완성이 이미 보장되어 있기에 그것만으로 평생 감사해도 모자랍니다.(계5장) 또 그래서 더더욱 지옥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전해야 할 것입니다.

1/29/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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