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이 된 교회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은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3-6)
최근의 기독교는 개인의 심리 치료에 많이 경도(傾倒)되고 심지어 그것이 복음사역을 대체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나 실제 삶이 경건하게 변화되지 않거나 혹은 복음을 전해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이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이런저런 상처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예컨대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든지, 근친 간에 성적 희롱을 당했다든지 한 것이 영혼 속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어 믿음 생활에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심령에 맺혀 있는 비정상적으로 과도한 열등감, 상처, 죄책감, 분노 등이 본인도 의식 못하는 사이에 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사사건건 주관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적 기법을 동원해 내적치유부터 시킨 후에 복음을 전하거나 성화를 훈련시키려 합니다.
심지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결국은 복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를 아주 쉽게 들 수 있습니다.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본인은 잘못한 것 하나 없는 피해자란 뜻입니다. 자신만의 가치관과 윤리 의식이 미처 형성되지 못한 어린 시절에 학대나 성폭행을 당한 것은 전적으로 가해자의 잘못입니다. 본인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거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가해자이고 하나님은 일방적 피해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그 죄 값을 다 갚게 한 후에 죄인은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져 낫게 해주었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어느 한 구석에도 없습니다. 심리적 상처가 죄와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동일한 개념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반드시 죄에서 그것도 하나님을 배반한 죄에서 구원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 향락과 죄악에 빠졌던 지난 인생이 너무나 헛된 것임을 깨달아 뼈를 깎는 회개와 완전한 자기 깨어짐이 없는 어떤 방도도 인간에겐 절대로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하여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심리적 상처는 복음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생이 어렸을 때에 한두 번 상처받고 치울 만큼 절대 단순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상처란 일생을 통해 반복해서 받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 받은 상처를 치유 받았다고 해서 심리적으로 완벽하게 안정되지 않으며 삶이 제대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치유가 복음 사역을 대체하려면 매번 상처 받을 때마다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심리 안정만 얻으려는 정신치료소로 둔갑합니다. 실제로 동일한 교인들을 대상으로 내적 치유 사역을 정기적으로 반복하고 있으며 교인들도 매번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고 실토하지 않습니까? 복음은 골고다 십자가의 영단번의 죽으심에 힘입어 신자의 일생에 그 전과 후과 완전히 달라지는 단 한 번의 일대 전환점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인이 된 후에는 상처를 나름대로 소화해낼 수 있을 만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었기에 매번 치유가 필요치 않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심령 또한 스스로 통제 가능할 만큼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선 이전에 자신을 노예로 부려 먹던 악의 잔재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훼방 또한 만만치 않으며, 나아가 사단은 쉴 새 없이 신자를 넘어뜨리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영혼은 만물 가운데 심히 부패해 럭비공처럼 언제 어디로 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신자라고 크게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부터 “견고한 진”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생각과 이론”으로 또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모든 생각”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을 알아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신자에게는 견고한 진의 의미는 당연히 다른 것이어야, 아니 사실은 없어야 논리적으로 합당합니다. 또 심령 속 깊은 상처가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에 장애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이거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생각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견고한 진의 구체적인 성경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육체대로 행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사람으로 육체대로 행하게 만드는 모든 생각과 이론이 견고한 진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범하거나 현실적 탐욕을 추구하면 육체대로 행한 것입니까? 그 또한 결코 아닙니다. 앞뒤 문맥상 성경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고 비난한 거짓 교사들을 육체대로 행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음해하는 대신 자신들이 반사적으로 교인들의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이제 육체적으로 행하는 것 즉 견고한 진의 의미가 명확해졌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인간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거짓 교사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런 뜻이 더 확실해집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7절), 또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12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을 자기 사고의 중심에 두지 않으려는 모든 생각과 이론, 즉 인본주의적 사고와 철학과 그에서 파생하는 모든 심리적 경향이 바로 견고한 진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심령 속에 견고한 진을 지니고 육체대로 행하는 자에 대해서 이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17,18절) 세상에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려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삶을 주관해 나가는 가치관이 바로 견고한 진입니다.
그럼 신자에게 견고한 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없어야 함이 맞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수시로 발동합니다. 도저히 자신이 제대로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세상의 갈채가 한 없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것이 한 없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신자라는 호칭조차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인본주의적 사고가 그야말로 너무나 “견고한 진”이 되어 우리 심령 속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 견고한 진을 어떻게 파해야 합니까? 그 일이 현재 많은 교회들이 아주 중점적으로 사역하고 있는 심리적 치유로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병기인 강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강력이라고 했으니 외적 은사로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 힘을 말합니까? 물론 성령의 간섭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꼭 기적 같은 역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강력은 훨씬 더 근본적인 내용을 함의(含意)합니다.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않은 바울의 사역을 육체대로 행하는 자와 비교해 보면 어떻게 달랐습니까?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기를 원하기에 사람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강력은 진리를 선포할 때는 담대히 하되 사람은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모든 생각을 파해 그리스도에 온전히 복종하게 될 때까지 고난은 자신이 감당하며 끝까지 용서와 사랑으로 복음만 담대히 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가 한 죄인을 거듭나게 만드는 성령의 경이로운 역사가 바로 강력입니다.
바꿔 말해 십자가 복음 안에선 인간의 모든 심리적 상처도 치유될 뿐 아니라 또 그렇게 치유되어야만 올바른 치유가 된다는 뜻입니다. 심리적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복음이 전해지거나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죄에 대한 철저한 저주와 죄인에 대한 무한한 긍휼이 배제되어선 어떤 치유도 참 된 치유가 아닌 것입니다. 항상 복음이 먼저이며 치유는 나중입니다.
신자에 따라 그리스도에게 이미 복종했지만 때때로 심리적 상처가 그분께 “완전하게 복종”하는 데는 장애가 될 수 있으므로 제거해야할 현실적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 감정적 응급조치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상처는 계속 생기기 마련이라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즉 속에서 끝없이 샘솟는 인간적 갈채를 바라는 욕구를 죽여 나가는 길 말고는 완전한 심리적 치유는 없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력에 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은 비우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면서 말입니다. 요컨대 신자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일이 잠시라도 멈추면 심리적 상처의 골은 깊어지며 삶의 방향마저도 죄와 사단 쪽으로 급격히 선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