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훈련된 저격수(sniper)였다.

조회 수 650 추천 수 11 2012.07.04 00:20:51
다윗은 훈련된 저격수(sniper)였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6:18-20)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저께 아침 체육관의 러닝머신에 달린 TV로 프렌치오픈 여자 테니스 결승전을 2세트 중반부터 보았다. 러시아 미녀 사라포바가 이태리의 신예 에라니를 2-0으로 가뿐하게 이기고 챔피언이 되었다. 사라포바는 세계 랭킹도 1위로 뛰었고, 무엇보다 커리어 그랜드슬램(메이저대회 넷 모두를 생애 중에 한 번씩 우승하는 것)도 이루었다. 몇 년 전의 어깨 수술로 선수생명이 끝날 줄 예상했음에도 값진 인간 승리를 일군 것이다.  

경기의 흐름은 일방적이었다. 단순히 경험이나 기술의 차이가 아니었다. 신장에서 9인치(약23센티)나 작은 에라니로선 양쪽 코너를 번갈아 찔러대는 사라포바의 빠른 스트로크를 받아 내기에 급급해 보였다. 누가 봐도 사라포바의 승리는 따 논 당상이었고 단지 시간문제였을 뿐이었다. 모든 면에서 열등한 에라니로선 테니스에선 일종의 트릭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Drop Shot으로 사라포바를 가끔 괴롭혔을 뿐이다.  

그런 일방적 경기를 보는 내내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도 그와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아예 상대도 안 된다. 도무지 격이 맞지 않은 싸움이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 승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것으로 이미 확정되어져 있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사탄은 매우 치사한 수법으로 신자를 괴롭힐 수 있을 뿐이다. 권투에 비유하면 케이오 펀치는 하나님이 때가 되면 날리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고 사탄은 그저 가벼운 잽을 톡톡 날릴 따름이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출15:3-5) 하나님은 애굽의 병거와 군대를 몽땅 수장(水葬)시키는 놀라운 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 소년 다윗에게도 너무나 큰 승리를 안겨주신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은 이 천지간에 단 하나도 없다. 잠시 귀찮고 혼란스럽게는 할 수 있어도 말이다. 문제는 실제로는 전혀 무력한 방해임에도 신자의 눈에는 항상 아주 크고 위중해 보인다는 것이다. 고센 땅을 떠난 이스라엘 앞에는 시퍼런 홍해 바다가, 뒤에는 세계 최강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다윗의 눈앞에도 이스라엘 군인 중에 어느 누구도 상대 못했던, 아니 그럴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만드는 거인이 버티고 있었다. 현실에선 누가 봐도 사탄이 이기는 게임으로 비춰진다. 오히려 신자의 패배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할 것 같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만히 묵상해보라. 홍해의 큰 물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기에 그 물을 물리치게 하시는 것은 그분에게 식은 죽 먹기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또 하나님은 칼과 창이 아닌 하나님만의 놀라운 방법으로 순식간에 대적을 물리쳐 주신다는 진리를 깨달으라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사탄이, 또는 현실의 고난이 너무나 미약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의지하겠는지 논리적으로 따져보라는 것이다. 또 잠간 기도만 하면 순식간에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게 되면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와 경배를 돌릴 수 있겠는가? 고난은 인내하기 힘들어야 하고 또 이겨내기에 버거울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고난 자체가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고난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부러 사탄에게 아주 어렵사리 이기는 모습을 신자에게 보여주어 감사와 경배를 더 크게 구걸하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또 너무나도(?) 전지전능하시다 보니 일상이 지루하고 따분해서 사탄을 실컷 갖고 놀다가 마지막 순간에 통쾌하게 이겨서 당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분도 아니다. 그 동안 신자야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지 아무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라포바 같은 프로 선수가 될수록 어려운 상대와 싸우길 원한다. 상대가 시시하면 아예 시합조차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상대와도 싸워 이기기 위해서, 최소한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시합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최고 난도의 훈련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훈련의 세기도 날마다 커지며 또 하루 이틀로 끝나지 않는다. 랭킹 1위가 되어도 현역에 있는 한 훈련을 쉬는 날이 절대 없다. 승리의 영광은 정말로 잠시며 나머지 시간은 오직 훈련뿐이다.

결국 하나님이 신자에게 고난을 쉴 새 없이, 그것도 자꾸 더 큰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최고의 신자로 만드시려는 뜻이다. 그것들을 두려워하고 피하면 결코 일등 신자가 될 수 없다. 또 하나님 마음에 가장 합당한 신자가 되려면 승리의 영광은 잠시뿐, 나머지 모든 시간은 인내와 경건을 통해 그분의 성품에 참예하는 훈련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신자가 되기 원하면 어떤 고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리 많아도 주저앉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더 힘이 솟아나야 한다. 스스로 그럴 수 없더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럴 수 있다. 고난이 겹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대한 소망과 기대는 그보다 더 몇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승리는 오직 시간문제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용감무쌍한 믿음(?)의 소년 다윗

마침 어제 인터넷 신문에서 흥미로운 신간서평을 읽었다. 사이먼 몬티피오리가 저작한 “예루살렘 전기”(시공사 발간)라는 책이다. 기사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다윗은 단순히 용감한 소년이 아니라 고대의 '스나이퍼'(sniper)였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벽화를 통해 확인된 바, 고대제국 군대에서 돌팔매 부대는 궁수들 옆에 편제된 특수저격부대였다는 것이다.” 저의 졸저(拙著)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진짜 이유”와 기본적인 해석이 같아 눈길이 확 끌렸던 것이다.  

저는 다윗은 골리앗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자신만의 실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말했다. 돌팔매질에선 사라포바처럼 이스라엘의 최고 고수였다는 뜻이다. 그가 하나님의 구원은 칼과 창 즉, 인간이 만든 무기에 있지 않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 돌팔매라는 인간이 만든 무기로 스스로 승리를 쟁취했었다. 그렇다고 그 승리가 하나님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오직 다윗의 자력만으로 이뤄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예의 책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 왕이 미리 훈련시킨 정예 저격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같은 맥락이긴 해도 훨씬 다르게 말하고 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17:36) 사울이 다윗을 정식 군인으로 뽑아서 훈련시킨 것이 아니라, 그가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기술이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쉴 새 없이 늑대는 물론 사자와 곰 같은 맹수가 나타나게 만들어 훈련시켰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말씀도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다”(38절)고 증언한다. 처음부터 맹수들을 출몰시켜서 곧 바로 돌팔매의 맹수로 만들어주었다는 뜻은 아니다. 처음에는 여우 같이 작은 동물, 그리고는 들개와 늑대를 거쳐서 마지막에는 곰과 사자도 나타나게 만든 것이다. 돌팔매 훈련의 강도를 서서히 높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다윗이 나면서부터 백발백중 명사수였던 것도 아니다. 그의 돌팔매질은 수도 없이 과녁을 빗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동물은 돌만 던져도 도망간다. 그러다 다시 또 떼를 지어 나타나 주위를 빙빙 돌며 괴롭힌다. 반드시 한두 마리를 정확히 맞추어 죽여야 완전히 도망간다. 다윗은 명중보다 오발(誤發)한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았을 것이다. 또 그러는 사이에 달리다 넘어지기도 하면서 많이 다쳤을 것이다. 때로는 맹수에게 물리기도 했겠지만 지팡이로 겨우 물리쳤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훈련 과정을 허락하셨고, 또 함께 하셨고, 나중에 사자와 곰에게 비록 물리긴 했어도 죽지 않도록 온전하게 지켜 주셨다. 그런 오랜 인고의 세월 끝에 최고의 스나이퍼가 된 것이다. 단순히 믿음이 유별나게 견고한 용감무쌍한 소년이 무모하게(?) 골리앗에게 도전했고, 그 용기가 가상해서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던 것이 아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할 때는 이미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스나이퍼가 되어 있었다. 충분히 골리앗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차있었다. 나아가 그 인고의 과정을 직접 이끈 하나님이 자기를 결코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승리도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가 이스라엘 군사와 사울 왕에 던진 출사표(出師表)를 보라.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삼상17:38a)

기도원 영성인가? 현실 영성인가?

신자가 평생토록 행해야만 할 씨름은 분명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엡6:11,12)이다. 그래서 진리, 의, 평안의 복음, 믿음은 물론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 안에서 깨어서 무시(無時)로 기도해야만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이길 수 있다.

그러다보니 많은 신자들이 영적전투를 자꾸만 초자연적이고도 신령한 차원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성령의 가시적 외형적 은사(charisma)를 가진 자들이 뜨겁게 기도하면 하늘의 높은 곳에서 하나님이 신자 대신에 사탄과 싸워서 승리를 안겨준다고 믿는다. 또 그래서 울부짖으며 기도만 열심히 하면 사탄은 열 길로 물러가고 세상과 사람들은 가만 두어도 죄악을 씻고 거룩해지리라 기대한다. 신자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고난도 기도하고 말씀 보고, 특별히  큰 고난은 힘에 넘치도록 열심히 교회봉사하면 하나님이 다 물리쳐 준다고 여긴다.  

지금 에베소서가 영적전투에 대해 말하는 핵심은 “싸움의 대상이 사탄”이기에 그에 맞설 “신자의 자세”에 관한 것이다. 영전전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할지 그 과정과 결과에  관한 것은 이차적이다.

바꿔 말해 그 전투를 치르는 장소는 여전히 신자가 매일 먹고 마시고 일하는 이 땅이라는 뜻이다. 신자의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신비하고도 놀라운 능력으로 악의 세력들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전투의 직접 당사자도 하나님과 사탄이 아니다. 신자가 이 땅의 여러 모순, 죄악, 고난 등과 직접 마주치고 싸워야만 한다.

출애굽시의 홍해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일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다. 또 이백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단번에 구원했던 일이다. 쉽게 말해 아주 비상한 방법을 동원했어야만 하는 예외적인 경우였다는 뜻이다. 신자 개인이 본받을 영적전투의 모델로 삼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좌우로 갈라선 높은 바닷물 사이로 담대하게 걸어 들어갔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도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우고 나아간 것이다. 하나님이 그 대신 싸워준 것이 아니다. 물매 돌 다섯을 들고 자기 목숨을 걸고 전투한 자는 다윗이며 그 장소도 가나안 들판이었다. 골리앗이라는 무시무시한 대적이 산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다윗이 싸우기 전과 도중에 분명 기도를 했겠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실력으로 싸웠던 것이다.  

오스왈도 챔버스는 “당신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다면 당신의 믿음은 현실 속에서 반드시 역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현실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며, 심지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도 맺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기도와 말씀에만 전무하면서 아무리 고고하고 경건하게 살아도 하나님은 그런 자를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꼭 그렇게 하겠다면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그 성과를 후대인에게 전해주기라도 해야 한다. 몸이 아파 몸져 누워있지 않는한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영적전투에서 가장 크게 승리한 자를 들라면 사도 바울임을 부인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가 기도와 말씀에 무시로 전무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자신이 기록한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행했음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그가 신비하고 초자연적 모습으로 하늘에서 전투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 영혼이 삼층천까지 올라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받기는 했어도 그 자체가 영적전투는 아니다.

그는 세 차례 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회도 곳곳에 세웠다. 무엇보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저작했다. 그 바쁜 선교와 사역 일정 중에서, 심지어 남들은 도무지 겪지 못한 극심한 고난과 핍박을 그렇게 많이 받으면서도 말이다. 장막 만드는 일로 돈을 벌어가면서 영적전투를 행했다는 사실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그의 영적전투는 성령의 인도를 받되 이 땅의 일상사에서 행해졌다. 나날이 어려움과 핍박은 더해지고 강해지는 가운데 이뤄졌다. 고난이 닥칠수록 그의 믿음은 더 정금같이 단련되어졌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마귀가 직접 나서도 전혀 훼방 못할 정도로 깊어졌으며, 자연히 그를 만나는 모든 이가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맡을 수 있었다.

그에게 중첩된 고난들은 하나님의 자상하고도 완벽한 훈련 과정이었다. 또 그와 동시에 다윗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그 모든 위험에서 그를 건져주셨다. 바울 자신도 작은 고난에서 시작해 큰 고난을 이겨나갈수록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너무나 확고하게 깨달았기에, 이전보다 더 심한 고난들이 자꾸 닥쳐도 그분과의 관계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아름답고 풍성해졌다. 자신의 영성을 깊고 넓게 함에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영적 전투의 본질

우리가 행할 영적전투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윗처럼 너무나 볼품없는 양치기 일을 매일 하더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훼방꾼이 나타나도 싸워 이기는 것이다. 처음에는 여우가, 차츰 들개와 늑대와 곰이, 마지막에는 맹수의 왕 사자가 나타나도 그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넘어지고 다치고 물려도 끝까지 그 전투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당연히 기도와 말씀으로 십자가 복음을 무장한 채로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다가 결국에는 이스라엘 최고의 스나이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명예와 권력을 높이는 목적으로 실력을 쌓거나, 최고가 된 후에 그런 용도로   그 실력을 행사한다면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영적전투를 한 것이 아니다. 최고의 스나이퍼는 실력이 최고라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반드시 하나님이 마련 해놓은 꼭 필요한 전투에 꼭 필요한 용사로 쓰임 받아야 한다. 자기가 아니면 아무도 감당 못할 하나님이 자기에만 맡기는 일이 반드시 있다. 또 그 일을 날마다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올바른 영적 전투를 하기에 반드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한마디로 현실의 일상에서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훈련 받는 것이 영적 전투의 시작이자 본질이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통해 날마다 자신의 믿음이 더 세어지는 것이다. 또 그 훈련은 스스로 책임지고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에 의해 훈련 받았다면 날이 갈수록 그 영성은 순수하고 깊어질 것이며 또 어떤 전투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훈련시켰다면 그 실력도 그분이 가장 잘 아시기에 그에 맞추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에 내보내시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보장해 놓았지 않는가? 사탄의 훼방은 단지 가벼운 잽이지 않는가?

그럼 신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끝까지 그 훈련을 참아내고 언제든 하나님이 명하시면 그분의 전투에 출천하기 위해서 기쁨과 설렘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또 어떤 전투가 눈앞에 닥쳐도 이미 최고의 스나이퍼가 되어있거나, 그런 과정에 있고 또  하나님 그분이 동행해주시기에 과감하고도 담대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다. 아무리 갈수록 더 힘들고 엄청난 위험이 닥쳐도 실제로는 단지 잽에 불과하다고 확신하며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잽이란 그 충격은 가볍지만 쉴 새 없이 내뻗는 것이다. 그런 잽도 계속해서 맞다 보면 나중에는 케이오 된다. 사단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사단이 쉬는 일은 없다. 그의 식욕에 포만감이라고는 절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이 아무리 강해보여도 사실은 트릭일 뿐이다. 근신하고 깨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단지 그 쉴  새 없이 날라 오는 잽을 귀찮게만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에 우리를 괴롭게하려는 뜻은 절대로 없다. 우리를 최고의 신자로 만들어주시려는 그분만의 은혜요, 사랑이다. 주님이 이미 정해 놓은 승리의 시간을 잠잠히 기다리면서 담담하게 맞서면 된다. 실제로 꼭 내가 해야 할 바를 열심히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지루하게 여기지 않고 충성하기만 하면 어느 샌가 모르게 자기는 하나님의 저격수로 자라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 그분의 큰일의 현장에 큰 일군, 정확하게는 가장 적합한 일군으로 초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이 무시로 기도하고 말씀에 깊이 천착(穿鑿)해 놓고도 성도들과 복음의 교제가 없었다면 그의 생애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또 세상 사람들 앞에 영광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의 보람도 없었고, 아니 존재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이 땅에서 자기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 것이며 또 그것이 바로 그의 영적전투였던 것이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은 영적전투를 아직은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그 자체가 영적전투가 아니라 영적전투를 잘하기 위한 사전 준비운동이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 모여 교회 행사에 열심인 것이 신자의 임무가 아니라, 주일 하루만 예배드려도 나머지 6일 동안 세상에 나가 복음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 실제 소명이라는 것이다.

이 순서를 거꾸로 하고 있다면 아무리 영적으로 경건하고 심오해져도 본인의 종교적 의를 하나님 앞에 자랑하는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는 그 사는 방식부터 온전히 달라야 한다. 우리 몸을 일상의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서부터 거룩한 산제사로 그분께 드려야 한다.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 벗어나거나 등한시 하는 영적전투는 종교적 사치요 허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6/1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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