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렸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조회 수 732 추천 수 60 2009.09.22 00:42:56
잊어버렸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


어리석은 인간

원죄 이후의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고 죄된 본성에 붙들려 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항상 죄를 짓고 거룩과는 거리가 멀다. 단 한 사람도 완전하지 못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불일치에 따른 긴장이 발생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툼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자연적인 결과로 상호간에 갈등과 상처와 분노가 찌끼처럼 남고 심하면 원수로까지 발전한다.

요컨대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선 쌍방이 불완전한 죄인으로 공동 책임이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했거나 억울하게 당하는 적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은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상대 눈의 티끌은 너무나 정확하게 잘 집어내기 때문에 항상 자기는 의롭고 상대가 잘못했다고 고집한다. 기껏 양심적이라 해봐야 자기는 잘못한 것이 아니라 실수했다고 인정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처를 받아 힘들어지는 것이 대체로 자주 만나는 가까운 사람 사이에  일어난다는 데 있다. 가깝기 때문에 그 상처는 크고 깊어 이겨내기가 더 힘들다. 또 안 만나려야 안 만날 수 없으니 상처를 안은 채 자꾸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상처가 덧난다. 그래서 원수는 항상 가까운데 있게 마련이고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사이에도 얼마든지 더 그럴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별로 가깝지 않아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상처가 생길 이유가 없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설령 힘든 일이 생겨도 상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그 부담이 적게 느껴지고 또 자주 만나지 않으니까 자연히 쉽게 잊어버리거나 치유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가까운 사람의 경우는 항상 서로가 서로에게 거는 기대와 소망이 크다. 내가 상대를 생각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그렇게 대접해 주기를 바라지만 무의식적이든, 실수든, 고의든 그 기대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바로 큰 상처로 변하게 된다. 가깝게 지내려면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수고와 책임을 서로 간에 져야만 하는데도 그런 준비와 각오가 없다. 사이가 가까우니까 서로 받으려만 드니 쉽게 상처 받고 또 작은 상처라도 힘들게 마련이다.

상처를 치유하는 법

미국 적십자사를 설립한 클라라 버튼 여사에게 한 친구가 수년 전에 버튼이 상처 받아 힘들었던 어떤 일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다. 친구는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큰일을 잊을 수 있는가 의아해하며 구체적으로 사건의 시종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건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건을 잊어버렸다는 사실만은 기억난다고 대답했다.

상대에 대한 기대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런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당연히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상대가 내 기대치에 맞추어 변화되어 주든지 아니면 내 기대치를 바꾸거나 낮추는 길 뿐이다. 그런데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는가? 상대도 주관과 고집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잘못을 인정시키는 것만도 아주 힘들다. 설령 상대가 솔직히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 쳐도 상대로선 상처 받은 쪽에서 느끼는 것만큼 절실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고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그렇다면 결국 내 기대치를 변경하거나 낮추는 것이 훨씬 손쉽다.

만약에 정작 상대가 분명히 잘못했고 내가 갖고 있는 기대치가 100% 옳고 정당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때도 내 기대치를 낮추어 억지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면 상대의 완전한 잘못마저 묵인하거나 심지어 조장하게 된다. 그 때는 제 삼의 방법 밖에 없다. 버튼 여사처럼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잊어버리는 방법이다. 이미 온갖 쓰라린 흠집은 다 생겼는데 어떻게 쉽게 잊어지겠는가? 일부러 잊으려고 애를 쓸수록 오히려 더 가슴을 찌른다. 차라리 기억을 상실시키는 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다. 단순하게 내가 잊어야지, 참아야지, 없었던 일로 해버려야지 다짐해도 생각만큼 잘 안 된다. 상대가 분명히 잘못했는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데 싶은 마음은 절대로 그리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좋은 일은 쉽게 잊어도 상처 받은 일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어쩌면 버튼 여사가 사실은 비정상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 해결의 키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가 잘못했다는 기분이 남아 있어서는 절대 잊어버릴 수 없다면 용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대가 잘못했다는 그 마음을 없애는 것이지 않겠는가? 물론 잘못의 주체는 분명 상대방이고 또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그 엄연한 사실 자체를 바꾸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 것이 그 사람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사정은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단순히 상대가 고의로 아니면 실수로 한 잘못인가를 따지라는 것이 아니다. 그도 불완전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인정하라는 것이다. 아담의 원죄로 인한 죄의 본성 혹은  사단의 조종과 시험이 그 잘못의 원인인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상대도 어쩔 수 없이 연약하고 항상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제한된 존재이며 나아가  내 쪽에서 어떤 잘못된 행동, 말, 심지어 표정이 그 죄의 본성에 불을 붙였을지 모른다는 것까지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심장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5-17)

신자들이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할 때 근본적으로 실수하는 것은 이  계명을 도덕적 종교적으로만 해석한다. 이제 신자가 되었고 또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반드시 상대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원수까지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하여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잘못이다. 아직 자기가 신자가 된 뜻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인간의 전적으로 타락한 본성과 그에 대비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철저히 이해하지 않고는 이 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율법이 신령한 줄은 안다고 했다. 잘못을 저지른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신령한 율법을 통해 알고 있고 또 그럴 용의도 충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모두 죄 아래 팔려 있기 때문에 쉽게 용서 못한다는 것이다. 상대가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나 우리가 용서 못하는 것 둘 다 죄의 힘에 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적 윤리로는 어느 한 쪽이 잘못했지만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는 모두가 똑 같이 죄 아래 팔린 죄인이기에 누구 잘못이 더 큰가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신자는 남의 잘못으로 내가 상처 받고 괴로워 할 근본적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상대의 잘못이 아니라 상대 속에 있는 죄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남의 잘못을 잊어버려선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바라 볼 때의 그 심정으로 남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신자가 범하는 또 다른 결정적인 실수는 주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사랑을 극대치로 베풀었다고 생각해 우리도 자꾸 남을 향한 사랑에 불순물을 제거하고 그 파워를 극대치로 올리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신자를 바라본 심정은 끝없는 긍휼과 자비로 무조건 용서해준 마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죄와 죄인을 분리해서 보았다. 잘못한 죄는 결코 잊지 않으셨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 그 죄의 대가를 완벽하게 치루셨다. 이만큼 죄에 대한 형벌을 가장 과중하게 매긴 적은 역사상 어느 성자나 재판관에게도 없었다. 죄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벌주었다. 대신에 죄인은 따로 떼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신자가 원수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대하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이 십자가 안에만 있다. 상대가 나에게 잘못한 죄는 잊을 수 없다. 그것을 구태여 잊으려드니까 자꾸 힘든 것이다. 죄는 어쩔 수 없이 기억에 남아 있게 마련이다.  불완전하고 연약한 죄인을 먼저 용서해야 한다. 십자가 복음 안으로 나에게 저지른 죄가 아니라 나와 똑 같이 연약하고 불쌍한 죄인을 안고 들어가야 한다. 죄인이 용서되면 그 죄도 함께 용서되는 것이지 죄를 용서한 후에 죄인을 용서하려 해선 안 된다. 죄란 죄 값을 치르지 않고는 용서도 망각도 안 되기 때문이다.

불신자의 경우는 이런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도덕을 포기하여 죄를 무시하든지, 같이 죄를 지어 공범이 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원수는 끝까지 원수로 남는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죄와 죄인을 같이 취급하지 따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무율법주의 혹은 율법우선주의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신령한 신자라도 원수를 극한치의 사랑으로 무조건 용서해줄 수 있는 자는 아주 드물다. 오직 복음 안에서만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해 줄 수 있다. 단순히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와 그 잘못을 무조건 잊거나 억지로 용서하려 하지 말라. 대신에 죄인을 그 죄에서 따로 떼어 내어 내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 안에서 그 죄인만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라.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신자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을 제대로 알고 그 안에 있다면 신자만이 그 상처를 가장 큰 용서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도 상대가 변하기 훨씬 전에 말이다. 그래서 돌을 연못에 던져 넣으면 그곳에서부터 파도가 동심원(同心圓)이 되어 번져 나가듯이 신자로부터 용서와 사랑의 복음이  가까운 사람 또 그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든지 널리 번져 나가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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