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집에서도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

조회 수 582 추천 수 29 2009.11.11 22: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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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집에서도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


부모는 배달꾼에 불과하다.

불신자들은 인생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꼽는다.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 때문이다.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고 효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해 불신자에겐 생명을 창조해준 하나님과 다를 바 없다. 효도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할 바의 가장 첫째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부모는 생명을 전달해준 배달꾼에 불과하다. 부모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번식의 역할만 했다거나, 그분들의 은혜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부모가 귀할수록 더더욱 그분들은 심부름꾼이었다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또 심부름꾼에게 진정한 감사를 표해야 함도 너무나 지당하다.  

부모가 심부름꾼이었다는 뜻은 그분들도 단지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들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허무, 갈증, 슬픔, 고통들을 이미 똑 같은 방식과 크기로 체험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인생에서 스스로 소원하거나 계획한 일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은 아픔들을 다 겪었다. 사람들 사이에 상처 분노 미움 저주 갈등 등도 수도 없이 주고받았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형통을 누리기도 했지만 잠간뿐이다. 어떤 수단과 노력을 경주해도, 심지어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위치에 올랐거나 갖지 못한 것을 다 가졌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깊숙한 내면의 고픔과 주림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부모가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흔들림이 없고, 또 어떤 짓을 해도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었기에 인격적으로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커갈수록 그분들의 눈물이 보이고 한숨도 들린다. 내가 갖고 있는 고민과 갈등을 부모라고 다 해결해 주지 못함은 물론  때로는 그분들의 잘못과 허물마저 볼 수 있어서 실망되고 심지어 싫어지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 성인이 될 때까지 먹고 마시는 일 말고 정작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 준 일도 크게 없다. 어차피 내가 가야할 인생길을 내가 정했다. 결혼의 상대도 내가 골랐고 자식도 내가 낳았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겨야 함에는 변함이 없지만 차츰 나보다 훨씬 연약한 존재임을 절실히 깨달아 나이가 들수록 오로지 불쌍해질 뿐이다. 한 마디로 부모라고 인간에게 부여된 모든 제한에서 절대 예외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부모 또한 우리가 느끼는 것과 똑 같이 그들 부모에게서 느꼈을 것이다. 그 위의 부모도 또 그 위의 부모도 모두 동일하다. 아니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점차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로 비쳐져 가고 있다. 우리가 자식을 보살피기보다 자식이 우리를 걱정해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얼마 안가 우리의 자식 또한 그들의 자식에게서 동일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모든 지역의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문제는 항상 동일했다. 나아지거나 줄어든 것도 없다. 그래서 부모가, 또 부모의 부모들이 지금의 내가 내답게 되는 데에 육신적 배달군의 역할만 한 셈이다. 부모를 존경하기에 앞서 그 부모를 이 땅에 존재케 해준, 다른 말로 나에게 심부름꾼으로 보내어준 실질적인 주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이라는 선물의 배달꾼보다 생명의 창조자를 찾아서 왜 내게 생명을 주었는지, 어떻게 이 땅에 존재케 되었는지 이유라도 묻고 따져야 한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문제가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면 그 책임은 부모도 아니며, 나도 아니며, 내 후손도 아니다. 나아가 사회적 환경, 교육, 도덕, 훈련, 등등 외부적인 요인도 아니다. 바로 인간으로 존재케 되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짊어져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다.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그 존재케 된 근원과 맞닿는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그 근원에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인생의 문제를 창조와 진화에 연결해서 고려해 보지 않으면 아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진화로 인해선 인간에게 이런 문제들이 생길 이유는 전혀 없다. 물론 진화로 인간이 생겼고 또 인간끼리 생존경쟁을 하면서 살다보니 제반 문제가 생겼다고 쉽게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자도 동일한, 어쩌면 더 큰 문제를 갖고 있지 않는가?

또 그보다는 정말 진화가 맞고 창조주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겪는 문제를 구태여 인간이 심각하게 문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인생이란 물질로 왔다가 물질로 돌아가는 과정인데 그 와중에 어떤 일이 생겼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령 고통이나 슬픔이 자연발생적으로 어쩔 수 없이 생겼다 해도 그 때만 참고 넘기든지, 그대로 당하든지,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닌 채 물질로 인생을 마감할 것 아닌가 말이다.

대신에 현실적인 힘만 키워 제 멋대로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호의호식하는 것 이상 인생에서 멋지고 보람찬 일은 없다. 심지어 쾌락의 극치를 추구하다 양껏 타락해도 괜찮다. 단순히 사후 심판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최소한 서로 지켜야 할 것 지키자는 공중도덕으로 따질 문제도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진화하고 있는 존재이기에 비유컨대 지금은 똥개의 수준이고 앞으로 훨씬 더 고급하고 의로운 존재로 바뀔 텐데 구태여 똥개 수준에서 죄책감과 수치를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 아니 설령 그래봐야 어차피 썩어 없어질 인생인데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원리가 부정적인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하고 의로운 일에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돕거나, 아니 가장 기본적 가치로 여기는 부모효도와 자식양육에도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부모나 아이도 어차피 물질로 돌아가고 말 것 아닌가? 단순히 살아 있는 동안에 잠시 기쁨을 느끼는 것뿐이다. 만약 진화되어가는 과정 중에라도 잠시 의로운 기쁨을 누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면, 그 반대로 쾌락이나 스릴을, 심지어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 같은 자신만의 기쁨을 최대한 추구한들 누구도 잘못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 아닌가?

아무 의미 없는 진화론    
              
다윈, 러셀, 도킨스, 불가지론의 삼대 거두들이 자신의 사상 체계를 세우는 데는 이유 없는 고통이 하나의 중요 이유가 되었다. 그들도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겪는 동일한 문제를 절감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친구, 친척, 형제, 부모는 물론 자신도 해결할 수 없으며 인간 외부에 있는 여러 조건 탓도 아니라고 시인한 셈이다.

그러나 그 이유 없는 고통이 바로 절대자를 부인하는 이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인정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더 정당한 태도가 아닐까? 이유 없는 고통을 신이 주었다는 뜻이 아니다. 괜히 자기 기분에 따라 독단적으로 고통을 주었다가 이유 없이 형통도 주는 신경질적인 하나님이라면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경배할 가치는 전혀 없다.

바꿔 말해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의 문제가 똑 같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 반드시 그 문제를 영원에 연결해서 생각하든지, 아니면 인간은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그치는 물질이기에 전혀 문제 삼지 말아야 하든지 둘 중 하나만이 해결책이라는 뜻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주창하고 보니까 이유 없는 고통은 진화 과정상의 무의미한 산물이 되었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원인을 알아볼 필요 없이 그냥 넘어가버리면 되듯이 말이다. (다윈주의는 무신론뿐 아니라 현대를 주도하는 실존주의철학과 유물사관의 출발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재가 절대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선재한 물질 내지 생명의 씨가 어떤 절대적 존재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저절로 이 자리에까지 이르렀는가? 둘 중 하나가 확실히 되어야만 이유 없는 고통의 의미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자신을 물질로 보느냐, 절대자에 의해 가치 있게 창조된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집 앞에 놓인 고급차 주인을 알아볼 생각도 않고 그냥 몰고 다니는 몰염치를 자행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을 찾아 그 주인 뜻대로 차를 몰 것인가의 차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거의 모든 인간이 어차피 고급차가 이미 공짜로 생겼다고 치부하고 그저 즐기면서 몰고 다닌다. 사실은 도적질 해놓고 주인이 안 보이니 없다든지(무신론), 누구 것인지 모르겠다거나 알아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불가지론)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대신에 인간을 창조하여 주관하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이유 없는 고통을 비롯해 인간의 모든 문제는 당연히 그분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의미와 해결책도 그 관계의 연장선상에서만 파악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유 없는 고통을 그분이 주신 것이 아니다. 우선 그분과의 관계가 없거나, 아예 인간이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인식도 못하는 사람으로선 그 배경을 모르니까 이유 없는 고통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그런 고통마저 바로 잡아줄 능력은 오직 그분만 갖고 있음을 안다. 인간이 완전한 무신론자가 아니라면 완전한 유신론자일 수밖에 없다고 이미 말했다. 그럼 이유 없는 고통 때문에 그분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더 진지하고도 세밀하게 찾아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물질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오묘하지 않는가? 도무지 우리의 지혜로는 그 비밀을 캘 수가 없지 않는가? 앞으로도 그 비밀을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지 않는가? 물질로 와서 물질로 끝난다는 것은 그랜드케년의 바위나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방울에나 해당되는 말이다. 인간은 그것을 보는 순간 최소한 조물주는 있다고 느끼는 존재다. 한마디로 인간은 결코 물질이, 정확하게는 물질로 끝날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물질이 아니라면 자연을 보고서 조물주만 인정해선 안 된다. 조물주란 창조 때는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물질이라고 자인하는 것이다. 그럼 물질이 아닌데도 끝까지 물질로 살겠다고 우기는 꼴밖에 안 된다. 또 물질에게 조물주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어떻게 들겠는가? 자연을 보면서 그런 심각한 생각을 하리라고는 스스로도 작정, 기대, 추측, 예상, 아니 꿈도 꾸지 않았지 않는가? 조물주라는 개념이 절로 떠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창조한 절대자가 지금도 살아서 자기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관하고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물질에 생명이 들어 있는 것만도 신기한데 그 안에 감성, 지성, 의지까지 함께 작동한다는 것은 더더욱 오묘하지 않는가? 어떻게 저녁놀을 보며 아름다운 시가 나오며, 광활한 밤하늘을 보며 절대자에 대한 경외감이 생기며, 인간과 인간끼리 먹고 마시고 번식하는 일 말고도 서로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끼리 자신을 희생하고 진정으로 섬기며 사랑할 때에 가장 큰 기쁨이 생길 수 있는가? 반면에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안락해도 참 사랑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며 방황하게 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왜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측면은 물질로서 절대 충족되지 않는가? 그럼 인간은 절대 물질로 시작해 물질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아가 왜 인간은 진화나 창조냐 따지고 있는가? 아니 따질 수 있는가? 자기가 왜 이 땅에 와서 왜 살아야 하며 왜 죽는지 그렇게도 궁금해지는가? 아니 인간이 출생과 죽음마저 즉, 자기 인생의 가장 큰일인 시작과 끝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인간이 알고 통제할 수 있는 일보다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은가? 이런 무지와 무능은 자연히 불충만(갈증)과 불만족(허무)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의롭고 신령한 사람이라도 자기 존재에 대한 고독감과 내면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자는 없다. 아니 그런 자일수록 더 그렇다. 인류의 지성적 사고의 출발은 그리스 철학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 못한다. 현대 철학이 그로부터 나아진 것도 별반 없다. 그런데 바로 그 그리스에 만신전(萬神殿)이 있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었다. 이전에는 최고 지성인들조차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창조주 내지 신들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논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이런 모든 질문들에 대해 진화는 전혀 답을 줄 수 없다. 아니 그런 질문들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답한다. 엄연히 누구나 교육과 환경에 상관없이 느끼는 질문이고 유사 이래로 모든 인간이, 아니 철학적이고 지성적이고 종교적인 인간일수록 더 심각하게 던져온 질문인데도 진화는 처음부터 무슨 쓸데없는 질문을 하느냐고 강제로 입을 봉해버린다. 그냥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답 하나만 준다.

물론 그 이유도 하나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며 그 후손으로 언젠가는 인간이 아닌 제 삼의 고급한 존재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은 제 삼의 존재로 가야하는 중간 과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어차피 인간은 물질로 썩어질 존재라고 전제해놓고는 또 더 고급한 존재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이론적인 모순을 떠나 고급한 존재로 바뀌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그 때도 썩어 없어질 물질인 것은 여전한데 말이다.

인간의 문제가 동일한 이유

성경이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한 번 귀담아 들어 보자. 지구라는 사과 상자를 흔들어 보았더니 아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고 흔들어볼 생각도 없다는 자, 자기에겐 내면의 허무와 갈증은 전혀 생기지 않고 오직 현실의 형통만 있으면 인생이 풍부하고 가치 있다고 믿는 자,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들이 인간 존재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각 자의 잘못에 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간주하는 자, 그래서 누가 뭐래도 인간은 그저 물질에서 시작해서 물질로 그칠 뿐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들어볼 필요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에 대한 모든 편견과 선입관을 일단 버리고 정말 냉정하게 그 의미를 따져보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자연이라는 사과 상자를 흔들면 아무리 밀봉되어서 그 속을 볼 수는 없지만 뭔가는 분명히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그저 장구한 세월 동안에 자연적 선택을 통하여 지금처럼 되었을 리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0)고 한다.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믿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창세 때부터의 인간의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실제 주인으로 그분께 생명을 받고, 그분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며, 그분이 생명을 앗아간다는 너무나 간단한 사실조차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인생살이에서 겪는 제반 문제들이 자기 부모와 그 선조들이, 또 자기 자식과 그 후손 모두도 똑 같이 겪는 문제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자기 능력과 책임 하에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내 인생이 나의 것이지 어느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지어주신 창조주를 완전히 배제하고 제 멋대로 인생을 살겠다고 덤비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모든 세대 인간들이 항상 동일한 문제를 겪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 결과 해결책도 인간 존재의 근원에 연결해서 풀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을 두고도 아무런 평강과 자유를 체험도 못하면서 끝까지 자기 기분대로만 행하겠다는 완악한 교만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2:13) 성경은 그래서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어떤 수단을 다 써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치 못한다고 선언한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내면의 근원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갖춘 것들에 묶여 고난만 더 늘어난다. 사람들이 웅덩이를 파는 이유는 분명 갈증을 느꼈기 때문이지만 터져 있어서 절대 물이 고이지 않는다. 일시적 심리적 해결책만 알고 동원할 뿐이다.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 스스로 자랑하지만 막상 자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기”(롬1:22,23) 때문이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을 두고 다른 곳에 간 것이다.

우상을 숭배했다고 깎아 만든 것에 절하거나 다른 종교를 믿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인간의 참 만족, 행복, 안전, 지혜, 능력 등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데도 다른 것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인생을 풍성하고 행복하게 하려고 돈, 권력, 명예 등에만 의존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심지어 탐심(貪心)도 우상숭배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 현실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외에 과도하게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그 여유분으로 인해 자신의 행복이 보장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여전히 참 행복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 절대 달성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따르거나 믿지 않거나 심지어 찾지도 않는 것은 그분에 의해 생명이 부여된 존재로선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시쳇말로 자기 분수도 모르고 까부는 너무나 건방진 짓이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행위다. 또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나겠다는 것은 사실상 탐심이며 모든 다른 우상숭배가 바로 이 근본적 탐심에서 파생될 뿐이다.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바로 그 근본적인 탐심이다. 형상에 절하지도 않고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아도 그렇다. 단순히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도킨스, 러셀, 다윈 모두가 인생에 이유 없는 고통을 주는 하나님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명시적으로는 아니지만 은연중에, 이유로 그분과 등을 지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기 때문이다.

이유 없는 고통이란 실제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 인간이 몰라도 실제 원인은 있다는 것이다. 또 만약 이유를 모두 알 수 있다면 당장은 아니라도 다음번에 비슷한 종류의 고통에 대해 대책을 충분히 세울 수 있다. 최소한 고통이 덜 고통스럽게 여겨지거나 억울하지는 않다.

나아가 원인을 알아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거나, 거꾸로 결과에서 원인을 찾아내든 이미 모든 고통은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다. 이유 없는 고통이 전혀 없다면 만사를 인간이 주관하며 세상은 완전히 인간의 것이 된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오직 완전한 무신론만이 정당한 진리가 된다. 불가지론조차 들어설 여지와 의미가 없어진다.

거기다 물질에서 물질로 끝나는 진화론의 관점에선 이유 없는 고통이란 말 자체부터 아무 의미가 없다. 고통도 물질의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생겼을 뿐이다. 인간이 실제로 고통을 느끼든 말든 아무 이유 없는 고통인지라, 모든 기쁨도 이유 없는 기쁨이긴 마찬가지임, 사실상 고통스럽다고 따질 이유도 가치도 없다.  

실제로도 모든 인생이 평생을 두고 저축치 못할 웅덩이를 파고 있으니까 의미 있는 결실이 생길 리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 최고의 재물, 권력, 명예, 지성, 심지어 도덕과 종교까지 갖추었어도 다른 사람들도 똑 같이 물질로 끝날 처지이니까 아무리 해도 그 웅덩이에 물이 고이지 않는다. 모두가 그저 흘러왔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이 행성에 사는 인생의 양면성

반면에 이유 없는 고통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느니라.”(전3:10,11)

기독교 저술가 필립 얀시는 전도서의 이 구절을 이렇게 주해했다. “이 고상한 구절은 인간의 많은 경험 속에서 적용됩니다. 물론 그것은 종교적인 본능을 암시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종교가 아닌 면에서도 영원을 인식합니다.”(오늘의 양식, 벧엘출판사 2009/7/21자)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인간에게는 종교적 본능이 있기 마련이지만 종교가 없어도 자연을, 특별히 이유 없는 고통을 보면 오히려 영원을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영원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서만 안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영원한 문제는 영원한 근원이 아니고는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얀시의 이어지는 말을 보라. “전도서는 이 행성 위에 삶에 대한 양면성을 제시합니다.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우리의 삶을 그것들을 쫓는 것에 몰두하게 만들 수 있는 쾌락의 약속과 이러한 쾌락은 우리를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무서운 현실인식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우리의 욕심으로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규칙에 순종하지 않으며, 우리가 모든 좋은 선물들을 주신 그분을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에서 이유 없는 고통이 없어진다고 절대로 선하고 공평하고 자애로운 신이 크고도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실상은 그 반대다. 신 자체가 아예 없어진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무조건 자기를 경배하라고 겁주기 위해서 고통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유 없는 고통이 있기에 겸손해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기에 이유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배경에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 절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 인정하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바로 그 이유다. 나아가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문제의 해결책도, 일부러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아님, 오직 그분에게서 구하라는 것이다.  

얀시의 말대로 하자면 창조하신 하나님을 두고 우리 것도 아닌 세상을 단지 우리 욕심으로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탐심의 근본이며,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만든 과일 하나 따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분을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 죄의 기원이라는 뜻이다. 분명히 인생의 여러 문제를, 특별히 이유 없는 고통을 겪으면 오히려 영원을 사모하게 되어야 함에도 고의로 당장 눈앞의 일시적 사안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는 것이 죄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두 종류로 나뉠 수밖에 없다. 영원을 사모하는 심정이 자기도 모르게 분명 생기는데도 고의로 무시하고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자와, 그 심정을 더더욱 파고들어 영원의 주인인 하나님을 찾게 되는 자다. 쉽게 말해 이유 없는 고통이 있기에 하나님은 불공평하다고 치부해버리는 자와 오히려 배후의 엄위한 절대자 앞에 더욱 겸손해지는 자다.

물질로만 형체를 이룬 인간 안에 생명이 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 또한 죽을 때까지 작동한다. 그 지정의로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과 미술과 문학 등을 창작해 낸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심정에 감동을 주고 때로는 그 인생을 변화시키기도 하는데 그런 작품들은 영원한 고전(古典)으로 살아남는다. 일시적으로 썩어 없어질 물질에서, 또 앞으로 계속 더 고차원적으로 발전할 물질로부터 발생할 사안이 결코 아니다. 이런 예술 활동, 아니 인간의 사고와 말과 활동 전부에 영원을 사모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질로 썩어 없어질 인간이 왜 죽음을 생각하는가? 어떻게 해서 창조와 진화를 논의하게 되는가? 그리고 솔직히 따져 보면 이유 없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 자체도 영원을 사모하는 것 아닌가? 나아가 온갖 깎아 만든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나, 심지어 작금의 일시적 흥미 쾌락 위주의 모든 세속 문화도 사실상 영원을 사모하는 심정이 그런 방식으로 발전된 것, 시쳇말로 온전한 만족을 찾기 위한 발악이 아니겠는가? 체스터톤이라는 신학자가 “인생은 기생집에 가도 하나님을 찾는 법이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단지 이유 없는 고통이 있다는 이유로 자연이라는 상자를 흔들어서 뭔가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은 우주에 내팽겨진 물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분명 귀머거리가 아닌 데도 귀머거리인양 행세하는 것이다. 아니 자연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내 인생이 이런 것은 아닌데, 최소한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날 수는 없는데”라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도 끝까지 못 들은 척하는 자다. 남은 몰라도 자기만은 결코 속일 수 없음에도 스스로를 속이려드는, 사실은 속은 양 위장을 하는 비겁하고 소심하고 게으른 자다.  

지구라는 행성에 살게 된 인생에는 분명 양면성이 있다. 물질과 정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땅과 하늘, 순간과 영원, 진화와 창조, 무신론과 유신론,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로 너무나 확실하게 나눠진다. 이 둘은 서로 융화될 성질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그 중간 지대는 절대 실재(實在)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무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 둘을 함께 맛보고 겪어야 할 운명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물질에서 최고 단계로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은 영적 존재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은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은 그 영원의 주인을 찾아가는 인간 고유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이다. 만약 그 본능을 죽을 때까지 무시하면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의 어떤 문제도 영원과 연결시킬 수, 쉽게 말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결코 없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3:12-15)

인간만이 땅에서 물질적 삶을 살되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이중적 존재다. 왜 모든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가? 최소한 그런 점을 의식은 하고 사는가? 그런데 말이다. 진화, 무신론, 불가지론을 주장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이중적인 태도가 아닌가? 오히려 인간 자체가 이중적 존재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다운 태도가 아닌가?  

7/26/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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