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평생 동안 해야 할 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2)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단순히 윤리적인 내용이 아니라 천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고 있는 신자가 현재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 규범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삶과 인생의 평범한 교훈 같지만 그 내용은 아주 심오합니다. 또 예수님 특유의 비유가 뜻하는 바는 아주 예리합니다.
흔히들 이 말씀을 내 들보가 남의 티끌보다 크다는 이유 때문에 남보다 네 허물이 더 많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남의 허물에 대해선 관대하고 자신의 허물은 엄격하게 대해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세속의 현자들도 많이 다뤄왔기에 누구나 잘 알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과제를 다룬 것밖에 안됩니다.
들보와 티는 비유이긴 하지만 그 크기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허물과 죄는 도토리 키 재기일 따름입니다. 특별이 아주 악독하거나 아주 선량한 구분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남의 죄가 내 죄보다 큰 것이 아니듯이 내 죄 또한 남보다 커지 않습니다. 내 죄가 들보이고 남의 죄는 티가 아니라 어느 누구의 죄나 다 들보처럼 큽니다.
그보다는 들보와 티가 각기 사람의 눈에 들어가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 있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 흔히 연애할 때에 눈에 꽁 깍지가 씌웠다고 하듯이 이미 눈 속에 박힌 물질대로만 보게 됩니다. 쉽게 말해 푸른 색 안경을 끼면 세상이 다 푸르게, 붉은 색 안경은 다 붉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일단 남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태도와 습관을 나무란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니 남의 허물은 그 들보라는 필터 때문에 다 들보처럼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그것을 두고 외식(外飾)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외식의 원어상의 의미는 연극배우가 여러 가지 역할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진짜 정체성과 달리 남들 앞에 다르게 보이려 애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남들 앞에 자기를 잘 보이려면 자기를 과대 포장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명품으로 휘감는다든지, 교양이 있는 척 한다든지, 속마음과는 달리 포용력이 있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의 허물을 먼저 보는 것 즉 남을 깎아 내려서 자기가 올라가는 것도 동일한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이 남들에게 자기의 실제 가치보다 더 높게 보이게끔 하는 것인데 상대가 낮아지면 자기는 반사적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을 노린 것입니다. 쉬운 예로 “저 사람은 집사인데도 새벽기도에 너무 자주 빠져”라고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같은 집사로서 새벽기도에 빠지는 법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상대는 엉터리 외식적인 신자가 되고 자기는 아주 고상하고 경건한 신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바로 네가 외식적인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런 자를 두고 음흉하고 치사하다고 절대 매도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자기에게는 관대한 법입니다. 대신에 남이 조금이라도 잘못할 양이면 당장에 난리를 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대놓고 남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고 성격이 급해서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높이려들지만 남을 깎아내리느냐 자기를 올리느냐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한 마디로 인간은 모두가 들보를 끼고 남을 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꼬투리를 잡기 좋아하는 존재가 인간이란 뜻입니다. 반면에 과대 포장을 하든 관대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는 속내를 감추고 아무 포장을 안 하는 포장을 하던 그저 남들 앞에 예쁘고 거룩하게 보이려 듭니다.
흔히들 같은 불륜을 두고 남이 하면 간음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고 합니다. 밥 스미스 목사가 남이 고집이 세면 편견 자기는 신념, 남이 자기를 내세우면 교만 자기는 자존심, 남이 몸치장에 시간을 보내면 허식 자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남이 적은 일에 예민하면 성격이 과민하고 자기는 감수성이 풍부하며, 남이 어떤 일에 참견하면 쓸 데 없는 간섭이지만 자신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신의 허물에는 엄격해야 하고 남의 잘못에는 관대해져야 한다는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되돌아 온 것이 됩니까? 물론 결과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그 원인과 처방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이 외식하는 존재라고 지적했습니다. 단순히 인격적으로 수양이 잘 된 사람은 남을 잘 헐뜯지 않고 자신을 관리하는 데 엄격하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포장한다는 것은 자신의 진짜 실체를 감추고 싶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벌거벗겨서 남들 앞에 보여주기 싫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아직도 살아서 시퍼렇게 꿈틀거리는 죄의 본성이 있고 또 그런 사실을 자신이 잘 알고 있거나 그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에는 차이, 그것도 아주 미세하게나마 있을 수 있지만 신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이브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서로 감출 것이 없었습니다. 구태여 자기를 더 과대포장하거나 상대를 깎아 내릴 필요도 그럴 마음도 아예 없었습니다. 오직 두 사람만 있고 다른 경쟁 상대가 없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이라 그랬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여전히 두 사람 뿐인데도 아담이 당장에 이브를 깎아 내렸지 않습니까?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이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3) 물론 하나님이 뱀을 상대할 필요조차 없었지만 이때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한 뱀이 차라리 더 나아보일 정도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아담이나 이브나 눈에 들보가 끼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계명에 “외식하는 자여”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 예수님의 뜻은 남을 관대히 대하고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라는 도덕적 계명을 넘어서는 차원이 되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죽을 때까지 눈에 들보를 끼고 사는 외식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서 심히 좋아하셨는데 자꾸 감추려고만 드는 그래서 하나님이 심히 싫어하는 존재로 바뀐 것입니다.
불신자는 단순히 자기 눈의 들보 크기만 줄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는 그 정도로 그쳐선 안 됩니다. 가장 먼저 왜 자기 눈에 들보가 끼였는지부터, 그래서 눈에 들보가 끼여 있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부패되어 있는지부터 처절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신자가 평생을 두고 할 일은 원죄로 남아 있는 더러운 본성을 죽여 나가는 것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그 죄의 힘과 싸워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남의 죄와 허물이 자꾸 커 보이면 또 자기의 것들은 자꾸 작아 보이면 일단은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이 바른 길에 서 있지 못하고 또 다시 죄의 본성에 지고 있다고 판단해 합니다.
남이 저지른 명백한 죄와 허물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판단까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죄와 허물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왜 나쁜지 명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와 허물로 인해 그 상대가 싫어지고 미워지기 시작하면 무조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자기를 볼 때도 똑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 자꾸 관대해져 제대로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에 항상 가난한 마음으로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성령의 깨우침을 기다려야 합니다. 특별히 뭔가 영적으로 눌리고 답답할 때에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성령을 내주케 한 이유가 바로 구원받은 자 또한 근본적으로 외식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치사하고 비겁하고 음흉하고 간사한 자만 외식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본질상 그렇습니다. 단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불신자이고 그 사실을 처절하게 자각했기 때문에 더욱 겸비해질 수밖에 없는 자가 신자일 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외식에서 헤매며 괴로워하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애통하는 심정으로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7/5/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