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진정 생각하는 존재라면?

조회 수 687 추천 수 42 2010.02.21 22: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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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진정 생각하는 존재라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극대와 극소의 장벽

천체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찾기 위해 허블 전자망원경으로 쉬지 않고 샅샅이 우주를 관찰하고 있다. 수백만 광년이 떨어진 곳까지도 사진을 찍어서 그 생성 과정을 탐구하려 한다. 열을 감지하는 촬영기법이 발달되어서 사진에 나타나는 피사체의 색깔만으로도 과학적으로 다양한 분석이 가능해졌다. 또 동일한 대상을 계속 관찰함으로써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자료도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는 여전히 공간 차원에서 눈에 보이는 물체만 살펴본 것뿐이다. 비록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자료들이 축적되었겠지만, 빛의 속도로도 수백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온 빛을 받아서 사진을 찍은 것인데 그 수십 년의 자료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론적으로는 수백만 년 이전의 과거를 본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아예 쇠퇴하여 소멸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와 반대로 생명의 기원을 찾기 위해 미생물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전자현미경으로 탐구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제는 Nono 단위 즉, 10억분의 1까지 세분화해서 볼 정도가 되었다. 미생물의 아주 미세한 변화마저 놓치지 않으려고 Nano-second로 나눠서 관찰하며 자료를 수집한다. 그러나 나노초는 사실상 무시해도 될 만한 시간 간격이다. 이런 관찰 또한 여전히 공간 차원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대상으로 한 것이란 뜻이다.

이를테면 두 경우 다 아무리 최첨단 기기를 사용해도 과학이 다룰 수 있는 한계만 노정한 셈이다. 광대한 우주를 대상으로 그 기원을 찾으려니 수백만 광년의 갭(gap)정도는 무시할 수밖에 없다. 또 생명의 기원을 우연히 합성된 박테리아에서만 찾으려니까 나노-초(秒)까지 감안해야 했다. 그러나 양쪽 다 인간의 육안으로 도저히 관찰이 불가능한 영역을 전자 눈을 빌려서 더 멀리 또 더 적게 보려고 노력한 것뿐이다.

또 아무리 초정밀 전자 눈으로 공간의 물체를 살펴본다고 해도 그 기원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른 말로 어떤 최신예 우주선이나 망원경으로 극대(極大)의 세계를 탐색하든, 그 반대로 현미경으로 극소(極小)의 차원을 파고들어가든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는 것이다. 그저 보이는 것은 사진에 찍힌 물체뿐이다.

우주든, 생명이든 시공간이 공존하는 차원에 속해 있기에 공간만 봐선 그 기원을 절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전자 눈으로는 공간의 배후에 있는 시간까지는 결코 볼 수 없지 않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시간은 오직 이미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만 의미를 가진다. 말하자면 생명과 우주의 기원을 찾는데 시간의 의미를 역으로 추적하지 않고 단지 물체만 봐선 아무리 오래 동안 멀리 혹은 가깝게 관찰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과거로 추적하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어딘가? 바로 태초다. 반대로 미래로 추적하면 마지막 날이다. 꼭 종교적으로 따지지 않아도 태양이 영원토록 탈 수 있는 에너지를 갖지 않는 한 반드시 종말은 있게 마련이지 않겠는가? 그럼 시간을 추적하여 내릴 수 있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결론은 아무리 궁리해 봐도 두 가지뿐이다. 태초와 마지막 날에는 오직 물질만 있다는 것과 그 배후에 물질을 만드신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극대와 극소까지 찾아가도 물질만 발견한 자들은 전자의 결론밖에 내릴 것이 없다.  너무나 허무한 결론이다. 물질을 연구해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찾겠다고 무진장 애를 썼지만 여전히 물질만 남았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은 물질이 태초부터 선재했다고 믿었기에  물질 외에 다른 기원을 찾겠다고 덤빈 것부터 자가당착이었다.  

지금껏 아주 심오한 진술을 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다.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자동차를 온갖 방향에서 사진을 찍거나 이만 개도 넘는 부품을 나사하나까지 다 분해해 봐도 누가 거기에 자동차를 버려놓았는지, 말하자면 누가 그것을 설계 제작했는지는 절대 알 수 없다. 물질에 불과한 자동차가 스스로 주인이 누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대와 극소로 탐구해도 여전히 남는 것은 자동차와 그 잔해뿐인 물질이다.  

반면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다. 자동차를 길에 버린 주인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렇게 정교한 기계가 어떤 고급한 지능을 가진 설계 제작자가 없이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허블망원경이 있고 초정밀 전자현미경이 있으니 영원토록 자동차 설계 제작자가 안 나타나도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고 고집하는 꼴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뜻도 아니다. 아주 작은 나사 하나가 발전 변모하여 그 자동차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 최초의 구절은 바로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한 마디로 진술한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최첨단장비를 가지고 극대와 극소를 탐구해도 반드시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양쪽에 다 가로 막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극대로 가서 우주의 기원을 찾든, 극소로 가서 생명의 기원을 찾든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 하나님이 통제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태양이 불붙기 시작할 때에 지구도 시작되었고 그 에너지가 소진되면 당연히 지구의 종말도 온다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나사가 스스로 자동차로 변모하지 않았듯이 태양과 지구 또한 스스로 시작과 종말을 계획, 제작, 준행하지 않았다는 너무나 간단명료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극대와 극소의 만남은 없다.

그럼에도 과학을 맹신하는, 더 정확히 말해 물질을 신으로 숭배하는 물질적 인간들은 여전히 물질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극대와 극소의 세계는 공통점을 갖고 서로 만남으로써 그 배후에 있는 장벽이 무너질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그 핑계는 간단히 말해 미생물 안에 우주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우주는 영겁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작은 물질들이 모여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극소와 극대의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다른 말로 우주든 생명이든 인간이 생각하기에 따라 그 기원과 정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우주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고 결론지어버린다. 허블망원경이나 초정밀전자현미경도 찾지 못하는 배후는 없을 뿐 아니라, 구태여 찾을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진리는 우리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초월(超越)의 차원을 단순히 자기 생각 안에 가둠으로써 그 초월을 뛰어넘어 보려는 헛된 시도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도 통제 못하는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도무지 실측(實測)이 불가능한 극대와 극소마저 감히 넘어서려 한다.

초월은 어디까지나 초월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기껏 2미터도 안 되는 체격에, 백년도 안 되는 수명을 가진 그래서 시공간 안에 너무나 협소하게 제한된 존재가 인간이지 않는가? 광대한 우주와 그것이 생성된 장구한 세월을, 창조과학자의 수천 년 주장이든 진화론자의 수십억 년 주장이든 한 개인이 뛰어넘지 못할 세월임은 분명하므로, 인간이 어찌 초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마음을 먹는다는 것조차 사실은 너무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짓이지 않는가? 사람의 머릿속에 우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헛된 망상만 어지럽게 오갈 뿐이다.  

구태여 그들의 생각을 탓할 이유는 없다. 대신에 스스로 지성적이라 자부하면서도 도리어 과학적 합리성에 반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싶다. 최신 전자기기로도 극대와 극소의 한계에 부딪혔기에 그것이 전부라고 한정지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전자기기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지 극대나 극소의 한계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는 자신들의 믿음의 한계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지진계가 아무리 정밀해도 아직은 쥐나 개가 땅의 진동을 감지하는 수준까지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쥐가 미세한 지진이라도 미리 감지해서 도망을 가는데도 지진계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만약 현재보다 더 고차원적인 망원경과 현미경을 발전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제의 한계는 무너지고 계속 극대를 넘어선 새로운 극대, 극소 안의 새로운 극소를 더 멀리 더 깊이 추적해 들어갈 수 있을 것 아닌가?  

따라서 현재로선 인간의 과학이 발견한 수준은 이것뿐이라고 해야 이성적으로 정당한 결론이다. 극대 극소까지 가봤지만 하나님은 도저히 발견할 수 없고 여전히 물질뿐이더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섣부르고도 비이성적인 결론이지 않는가 말이다. 정말로 이성적인 과학자라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인간이 감히 넘지 못할 어떤 장벽에 맞닥뜨렸다고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니 그 이후를 부인하려고만 한다. 이전에 지구는 평평하다고 했다든지, 지중해를 넘어서는 세계는 없다고 부인했듯이 말이다. 당시로선 그 주장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진실은 지중해를 넘어선 광대하고도 둥근 지구가 있었지 않는가?

지금도 과학자들은 자신의 체험, 실험, 자료, 지식이 다루지 못하는 장벽은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든다. 그렇다면 사실상 인간이 뽐내는 과학적 지성이 그 장벽들을 만들어 낸 꼴이다. 또 인간이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가로막아서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인간은 끝까지 전지전능한(?) 존재로 남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 초월자가 되려는 과대망상이다. 출생과 죽음도 스스로 통제 못하는 인간이 우주의 극대와 생명의 극소를, 아니 그 기원을 스스로 만들어보겠다고 나선 셈이다. 요컨대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물질이 선악을 만들었다.

정작 문제는 극대와 극소는 서로 통한다는 이 주장이 물리적 차원에만 머물면 다행이려만 영적 차원까지 다루려 한다는 것이다. 극대와 극소의 만난처럼 선과 악도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긍정적 현상(+)의 무한대와 부정적 현상(-)의 무한대는 결국 그 무한대라는 영역 안에서 원을 그리며 서로 만난다는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 안에 절대적 선이나 절대적 악도 없다는 것이다. 광대한 우주 공간에는 영겁의 세월 동안에 다만 물질만 있었다는 것이다. 물질에게서 선과 악이 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인간이 선과 악을 따져봐야, 극대와 극소를 넘어서는 영역을 찾으려 해봐야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인간끼리 서로 다퉈봐야 죽으면 끝이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초월적 장벽을 발견한 자의 태도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알려고 해도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했지 않는가? 그럼 그 장벽을 있는 그대로 겸허히 인정하면 그만이지 장벽이 있으니까 그 앞에서 주저앉으려 들면 너무나 비겁한 짓이지 않는가? 또 아무리 부인한다고 해서 분명히 있는 장벽이 없어질 리도 만무하지 않는가?  

인류의 최근 역사에서 대표적인 두 사건을 한번 생각해보라. 히틀러 나치 제국의 유대인 학살과 일본 군국주의가 생체 실험한 일을 말이다. 과연 그것이 절대적 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안에 선이 조금이라도 개입, 조화, 상생할 수가 있는가? 세상사람 다 모아놓아도, 지성 문화 관습 제도 종교를 불문하고, 단연코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 아닌가?

지금 두 사건의 윤리적 판단을 내려 보라는 뜻이 아니다. 우주는 물질이 전부이기에 우주에 선과 악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홀로코스트나 생체실험은 절대적 악이라고 시인했다. 그럼 물질이 선과 악을 만들어 내었다고 주장하는 꼴이 된다.

물론 물질은 당연히 가치중립적이다. 아니 가치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런데 그 물질이 선과 악이라는 가치도 창출했다면 이보다 더 심한 억지는 없다. 물질이 생명체를 만들어 냈다는 주장은 순진할 정도다. 마치 바위가 윤리교과서를 저술했다는 말과 유사하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교과서를 저술하는 것은 선과 악을 외부에서 관찰만 해도 가능하지만 선과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은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홀로코스터를 단순히 히틀러라는 한 광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 휘하에 수많은 부하들이 그 범죄에 아무 거리낌 없이, 심지어 즐기면서 동참했다. 모두가 집단적 광기에 휘말린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 모두가 외부에 있는 악한 기운에 넘어갔다는 뜻이다.

이처럼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이 일맥상통하는 면은 전혀 없다. 또 절대적 선과 악이 인간 외부에 존재한다. 여기서 절대적이란 의미는 선과 악의 크기나 정도를 말하기 보다는 단순히 분명한 실체라는 의미다. 그것도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인간이 선을 따르면 선행이, 악을 따르면 범죄가 생성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선과 악의 실체가 인간 밖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세상은 절대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인간은 분명 물질로 생성된 육체가 있다. 성경의 표현대로 흙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물질에 탄생하여 성장하고 쇠퇴하다가 죽는 생명이 있다. 거기다 스스로의 지정의로 생각하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결정하여 시행할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고민할 수 있다. 누구나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절대적 신의 존재에 대해 숙고한다. 극대와 극소의 세계를 탐구하려 한다. 인간이 이런 고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만든 힘이 인간 외부에 별도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창조가 기독교적 억지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우선 인간은 다른 물체나 동식물과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생각이 없으면 인간이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기원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또 아무래도 답이 없으니 단지 생각하는 존재로만 머물겠다는 뜻도 된다.

어떻게 해석해도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이긴 해도 궁극적 해답은 얻지 못했고 그저 그냥 실존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뜻에 그친다. 말하자면 통칭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마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아무리 숙고해도 답을 못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그 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또는 기원의 정답이 되겠는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이 또한 그리 심각한 진술이 아니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물질이 선과 악을 만들지 않았고 인간도 그러지 않았다면 제 삼의 존재에게서만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일 뿐이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그 말은 “인간은 자신의 기원에 대해 생각한다. 고로 인간의 기원은 인간 밖에 있다.”라고 고쳐져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은 금세기 최대의 과학적 발견이라고 일컬어진다. 인간의 유전자의 구조를 완전히 밝혀낸 것이다. 그 프로젝트를 담당한 책임자 프란시스 콜린스 박사는 독실한 신자였다. 회심을 경험하고 목사가 되려고도 생각했지만 자기에게 목회적 은사가 없음을 깨닫고 자신 있게 잘할 수 있는 분야인 과학자가 되었다.  

그가 신자임을 아는 한 기자가 “당신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당신의 과학적인 성과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기자로선 과학과 신앙은 각기 별개의 영역을 취급하거나 서로 상충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물질을 다루는 과학에서 큰 업적을 이룬다는 것은 영혼을 다루는 신앙과는 조화될 수 없는 일이 아닌가라는 뜻이었다.

콜린스 박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셨지만 인간이 몰랐던 것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매번 새로운 사실을 실험을 통해 알아나갈 때마다 그 순간이 내게는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새롭게 발견하기에 그분을 향한 진정한 경배의 순간이 된다.”  

게놈 프로젝트야말로 전자 현미경으로 생명의 신비를 나노 단위까지 추적하는 대표적 작업이다.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극소까지 즉, 더 이상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볼 수 없는  한계까지 도달한 것이다. 거기서 콜린스 박사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극소 단위에마저도 너무나 놀랍고도 신비한 질서와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너무나 활기찬 생명력이 인간의 신체를 조화롭게 작동시킴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발견한 것들은 물질은 절대 우연히 생성해낼 수 없는 질서와 아름다움과 활력이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그 극소의 단위 안에도 세계의 모든 과학자들이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설계해도 도무지 그렇게 만들 수 없는 최상의 완벽함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뛰어넘을 수 없는 진정한 초월을 발견한 것이다. 아마 콜린스 박사가 역으로 허블망원경으로 우주의 극대 단위를 추적해도 마찬가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반면에 극대 극소의 장벽을 만나면 주저앉아버리는 과학자들은 도무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 사실은 하나님을 부인부터 하고 과학을 시작했기에 그분을 발견할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아무리 초월자의 냄새가 솔솔 나도 이미 비염에 걸린 코 때문에 감지하지 못한다. 자기 코에 문제가 있다고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기자처럼 과학과 신앙은 전혀 별개의 영역이라는 아주 합리적인(?) 핑계만 댄다. 과학이 다루는 물질적 세계만이 실체이고 신앙은 단지 인간이 임의로 사고하는 차원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뉠 수밖에 없다. 인간 능력으로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장벽과 맞부딪혔으므로 초월적 영역은 아예 없다고 부인해버리는 자와, 그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자다. 전자는 보이는 물체만을 공간 차원에서만 분석하는 태도다. 후자는 공간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특별히 시간 차원까지 감안하는 자다. 과연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가?

요컨대 창세기 1:1은 비과학적인 추측 내지 억지를 믿으라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강요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이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진실로 합리적인 진술이다. 누구라도 진정으로 생각하는 인간다운 존재라면 이 말씀 앞에 취할 태도란 겸손히 엎드리는 것 말고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2/11/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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