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조회 수 244 추천 수 4 2013.04.16 19: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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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태복음 강해(16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5-20)


돼지가 손발 씻고 밥을 먹는다면?

만약에 돼지가 밥을 먹기 전에 네 발을 깨끗이 씻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미 그 자체로 돼지는 돼지의 위치를 뛰어 넘는다. 함부로 돼지라고 부를 수도 없다. 손을 씻고 밥을 먹는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단히 고급하며 신령하기까지 한 행위다.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지울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인간은 그 정도 수준으로 만족해선 결코 안 되는 존재인데도 불행하게도 인간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는 인간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수용되는 윤리적 종교적 인식을 뒤엎거나 초월하는 파격적인 사상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신구약성경 66권이 완비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오늘 날의 신자에게도 아주 어렵게 다가온다. 기독교 밖의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거나 제대로 알아보려 노력도 하지 않고 아예 틀렸다고 반박만 한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인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다. 앞으로 오는 세대들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생각해낼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말할 수 있는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죄의 본질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지 않거나 멀리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마음에 심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그래서 당신께서 심지 않은 자들은 마지막 날에 뽑힐 것이라고 한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천 년 전이나, 21세기 현대인들 모두에게 아주 어렵게만 여겨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해 당신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심어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진리임을 증명한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 뽑힐 대상이 바로 당시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로 일반인들의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 눈이 먼 소경이라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고 한다. 그 현장에 있던 제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니 성질 급한 베드로가 다시 보충 설명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15절), 예수님은 아주 초보적인 차원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춰준 것이다.    

내 육신만 통제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뒤로 버려질 뿐이라고 한다. 음식은 소화 흡수된 후에 찌꺼기는 대소변으로 배출된다. 설령 손을 안 씻고 밥을 먹느라 먼지나 병균이 함께 묻히어 입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하나님이 만드신 육체가 걸려낸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럼으로써 병이 들었다 해도 인간의 가치는 전혀 떨어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증 암에 걸렸다고 그가 열등한 인간인 것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하물며 손을 안 씻고 밥을 먹는 것은 말해 무어하랴?

그 대신에 인간을 더럽고 추하게 만드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대표적으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증거, 훼방 등을 열거했다. 이 또한 비유다. 비유를 설명하면서 또 다른 비유를 동원한 것이다. 입에서 실제로 나오는 것은 거짓 증거뿐이고 살인이나 간음이 입에서 나올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음란한 욕설이나 음담패설을 하거나, “I hate you. I will kill you" 식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입”은 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와 외부세계를 대조 구별 짖는 경계선의 의미를 가진다. 쉽게 말해 인간의 참 됨됨이를 따질 때에 외부로 표출되는 행동과 말보다 내면에 담긴 진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이차대전 때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억울하게 죽은 비극(Holocaust)을 기억할 것이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비참한 환경에 갇혀 노동으로 혹사당하다 병약해지면 가스실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전쟁 말기에는 소요되는 가스나 기름이 아까워 산 채로 매장당하기도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지옥 같은 환난과 핍박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치 제국이 자신들 몸은 지배했을지라도 그 정신은 전혀 지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노동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유대인이라는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기계에 불과한 육신의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 즉,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자기 존재의 내면에 있는데 총과 칼로도 없애기는커녕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특이한 존재 - 인간

인간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다. 수술로 팔다리 내장 등을 거의 다 들어내어도 여전히 인간이다. 몸통과 머리만 남아있다시피 한 닉부이지치는 분명 인간일 뿐 아니라 더 비범하고 의롭고 신실한 주의 종이지 않는가?  

반대로 사지가 온전하며 육신이 아주 건강해도 정신이 완전히 수준미달인 경우도 있다. 멀쩡한 어른이 애기 같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예사로 한다. 동물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 어른이 된 사자가 계속 엄마 사자가 먹이 갖다 주길 기다리는 법은 절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로 변하는 것은, 특별히 치매가 걸리는 경우는 모르긴 해도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치매가 있고 없고가 하나님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여 창조한 좋은 예다. 인간은 머리를 써는 것이 인생의 주가 된다는 것이다. 동물의 존재 목적은 생존과 종족 유지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으로 충분하다. 돼지가 손발을 씻지 않고 밥을 먹어도 돼지로서의 존재 목적에 하등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는 결코 충족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먹고 마실 것이 풍요롭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워도 참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예수님이 손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따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야단친 이유는 그들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종교적 탐욕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만든 기계적 형식적 절차, 관습, 의식 안에 제한시키고 심지어 하나님 그분과도 대체시킨 때문이었다.

그런데 손을 씻고 밥 먹어야 한다는 유대 관습을 인간의 존재론적 견지에서 따지면 사실은 먹고 마시는 것을 조금 고급화 시킨 수준 밖에 안 된다. 시골에서 농부가 벼를 심다가 진흙이 묻은 손으로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과, 정장을 차려 입고 호텔에서 코스 만찬을 먹는 그런 차이 말이다.

인간 내면이 밖으로 표출 되는 것보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해서 인간이 정신과 육체 둘로 나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육신은 추하고 정신은 고상하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에 없다. 죽으면 육신은 땅에 남아 썩고 영혼은 천국을 간다는 영혼불멸설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도 아니다.

그런 정도는 불신자들도 잘 알고 다른 종교에서도 가르친다. 세상 사람들도 자아를 발견하여 충족시키려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정신세계를 고급한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독서하고 묵상한다. 인생의 지혜와 의미와 가치와 진리를 찾으려고 탐구한다. 정신을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시하는 까닭이다.

기독교는 다르다.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육신이 신령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을 소망한다. 그것만 아니라 이 땅의 물질계와 현실 세계도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로 감사히 여긴다. 그 모든 것을 인간이 아름답게 가꿀 책임이 있고 또 기쁨으로 즐기며 누릴 수 있는 축복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정신만 고상하다고 강조하면서 무소유가 옳다거나, 세속에서 도피 내지 격리하라는 것은 절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생각과 마음의 차이

지금 예수님이 육신과 내면을 비교하며 가르친 내용 중에서 세 가지 강조점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이라고 했다. 생각과 마음을 의도적으로 구분했다. 인간의 내면이 그 둘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악한 생각이 먼저 나오고 그 뒤를 악한 행동들이 따르고 있다. 행동은 생각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악한 행동 중에 거짓 증거도 포함시켰다. 단순히 말만 해도 악한 행동의 죄라는 것이다.

창세기 8:21을 다시 인용해보자.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고 하나님은 선언했다. 마음으로 계획하는 바가 바로 생각이다. 그 마음이 어떻다고 했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한다. 모든 인간에 악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악한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고, 또 그 악한 생각에서 악한 말과 행동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착한 행동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행동을 주관하는 마음이 악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하겠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노아 때부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15:13절 방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심지 않는 것은 마지막 날에 뽑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보충하기 위해 답변했지만 사실은 구약의 창조주 하나님이 선포한 구원의 진리를 다시 부연 설명한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약의 하나님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의 경륜을 밝힌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생각과 마음으로 구분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인간에게 삼분법(三分法)을 적용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인간이 영(spirit), 혼(soul), 육(body)이라는 객관적 실체로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 생각과 마음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우선 생각은 인간의 지정의로 인식하고 판단하여 결단한 후에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사고 활동이다. 동물에게도 기본적 지정의는 있다. 그런데 동물과 인간의 지정의의 차이가 아이큐 한 자리, 잘해야 두 자리로 저급하고, 세 자리로 고급하다는 점이 아니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인간이 그 앞에서 아무리 얼쩡거려도 사자를 공격할 기미만 드러내지 않으면 그냥 가만 두고 잠만 잔다. 사자의 지정의는 자기 배만 부르면 만족하는 수준이다. 사자가 다른 동물의 어려움을 보고 돕는 것은 생각, 아니 상상(?)도 못한다. 오직 먹고 마시는 것으로 충족하게끔 창조주 하나님이 사전에 프로그램 해놓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각이 어떤 특정하고도 통일성을 지닌 한 가지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마음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가인은 시기심만으로 친동생 아벨을 죽였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자기 기분에 차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수백만을 죽였다. 미국 911 테러리스트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위한다는 구실로 애꿎은 사람을 죽인다. 최근 미국의 무차별 총격처럼 단지 심심하다는 핑계로 눈도 깜박 하지 않고, 그것도 동족인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다. 인간만이 동물과 달리 자기 생각의 방향을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의 실상(實狀)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경우,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자주 실토하듯이 그 실상은 마음이 생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 자주 경험하는 대로 입에서 뱉어져 나간 말은 도무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다. 부부 싸움하거나 회사에서 회식하며 술을 먹고 난 다음에 너무나 후회되는 짓거리를 자행해서 스스로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가 생각해도 나라는 존재가 싫고 때로는 밉기까지 하다.

그 반대로 아주 선한 의도와 계획을 갖고 실천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내가 이렇게 뻔뻔하고 치사한 사람이었던지 스스로 의아할 때도 많다. 나아가 자기 속에 이런 엄청난 악마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생각과 마음 사이에 불균형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그 안에 하나님이라는 거룩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지워버렸다. 그러니 그 생각은 오직 하나님과 반대 쪽에 서서 그분을 거역하고 그분이 싫어하는 쪽으로만 향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 최고라는 바탕(마음)에서 자기중심적 방향으로만 생각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하라”(마6:33)고 하셨다. 신자라면 윤리적으로 고상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일을 당연히 먼저 행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뜻은 너희 마음에 하나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모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너희 마음에 가득 채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해 그 마음이 지배 받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즉 신자의 마음에 그분을 먼저 모시면 나머지 모든 일을 그분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말씀도 잘 믿으면 복 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말과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또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행복과 기쁨이, 최대한 양보해서 평강이 절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바로 그것이 이방인들의 영원한 실상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자기 주변의 환경과 여건이 풍족해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리라 믿는다. 먹고 마실 것이 풍족해지는 것만  자기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자 이유로 사는 사자와 같은 꼴이다.

인간은 사자와는 반대여야 한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거룩하고 의로워져야 생각도 올바르게 되고 당연히 의롭고 선한 말과 행동이 따른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부터 인간은 그러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영이 먼저 작동하고 그 후에 혼과 육이 순서대로 따르게 된다고 해서 인간만이 영적존재인 것이다. 바꿔 말해 이 순서를 거꾸로 하면 절대로 만족이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그대로 인간은 자기 심령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평강이 없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이 인간 실존의 근원이다. 그분이 인간으로 존재케 했기에 오직 그분 안에서만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 불신자들은 그와 반대로 끝까지 하나님을 제외하고 자기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찾으려 하니 평생을 두고 무슨 짓을 해도 갈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인간의 내면이 외면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무소유의 가치를 높이 산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여전히 외면을 더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소유와 물질 때문에 자꾸 자기 생각이 추하고 악해진다고 여긴다. 물질의 많고 적음을 서로 비교하다가 시기와 질투가 생기고 결국 미움과 다툼까지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원인이 되는 물질을 아예 없애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진짜로 힘이 센 쪽이 어디인가? 물질인가 정신인가? 물질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 외부의 것으로 인해 내면이 좌우된다는 원리에서 한 걸음도 나아간 것이 없다. 아무리 정신 수양을 강조해도 여전히 인간이 소유한 물질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불신자와 신자의 생각의 방향이 정반대이며 그 이면에도 정반대인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이런 차이를 이해하겠는가?    

예수님 꾸중의 진의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너희도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느냐고 질책했다.(16절) 하나님이 심지 않으면 뽑힌다고 하면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소망을 심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엄격히 말해 하나님이 심지 않는 마음의 경우 그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는가? 또 당시 교리 공부도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의 그 깊은 뜻을 당연히 깨달을 수 없었을 텐데도 질책한다면 조금 심한 것 아닌가?

먼저 “너희도”라고 말한 단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님과 계속 함께 기거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배웠으며 기적에 동참하고 때로는 기적을 직접 일으키기도 한 입장에서 따져보라는 것이다. 또 “아직까지”라고 강조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 동안 당신의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 당신께서 포커스를 어디에 두었는지, 강조하려는 주제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자의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뜻은 너희를 내가 선택하여 제자로 삼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후에 지금껏 어떤 인간도 가르치지 않았고, 아니 인간이 생각해 낼 수도 없는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냐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도 유대인인지라 조상대대로 내려온 관습과 선한 제도를 쉽게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유대교에서 손을 씻고 밥을 먹어야 한다는 규정은 선한 가르침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주님의 뜻은 그런 유전들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인간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맥락에 근거할 뿐이라는 것이다. 죄로 찌든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그 불균형적인 생각의 틀 안에 제한시키고 묶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창조했으며, 그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구약성경 그중에서도 모세오경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음에도 사실은 창세기의 의미마저 제대로 알지 못한  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치고 또 베푼 기적들은 결코 인간 선각자로서 행한 것이 아니었다. 영원자, 절대자, 구원자,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고 다스리는지를 제자들더러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이 정말로 어떤 분인지 당신의 몸으로 사역으로 직접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유대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인간의 형통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만 받으려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손 씻고 밥을 먹어야만 구원을, 다른 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중심에 하나님을 먼저 모시라고 했다. 그러면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당신의 마음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는 무엇에든지 거룩하고 의롭고 경건해지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승리하고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기껏 밥 먹을 때 손 씻는 것으로 인간다워졌다고 좋아하는 정도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릴 자로 인간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신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랄 수 있고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보다 사람들로 수백 수천 배 더 거룩하고 의로워지며 또 너무나 아름답고도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서 당신과 교통할 수 있게 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후에 심히 기뻐하셨다. 그분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을 당신의 대리인으로 삼는 것이었지 않는가? 또 그렇게 되도록 완벽하게 창조한 후에 너무나 기뻐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에겐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그분의 그 크신 영광 가운데 인간이 속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감히 감당할 수조차 없는 영광이지 않는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자는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는 결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저절로 거룩해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당신의 자녀와 백성으로 삼아주셨기에 그에 걸맞게 살려고 밥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다.
          
좋은 믿음이란?

인간 행동을 근거로 판단하면 역사상 이 지구상에 구원 받을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긍휼한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또 그 후에 그분의 사랑어린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기다리는 것은 처참한 실패와 영원한 사망뿐이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애끓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런 인간의 상태를 보시고 계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또 당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시는지, 얼마나 큰 자비와 권능으로 다스리고 계시는지를 모든 사람이 보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 자체를 주려고 오신 것이다. 요컨대 당신의 전부를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함께 기거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 그들조차도 아직까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이 구원을 은혜로 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지금 보충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베드로마저 당신을 세 번 부인하는데 어찌 당신께서 직접 당신의 마음을 그들에게 심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쓰러져서 추하고 더러워져도 하나님은 그 모두를 품어 안고 용서하시며 끝까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종교적 계명을 어겼다는 단순한 이유로 심판을 하는 분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추하고 더럽지 않게 하는 길이다. 참 인간답게 충만한 삶을 살게 만드는 능력이다. 정말로 주님의 그 넓은 사랑의 품 안에서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정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 마음을 예수님의 보혈로 씻는 모습이어야 한다.

믿음이 좋다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기도 뜨겁게 하고 성경 말씀을 많이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그래서 심히 기뻐하셨던 바로 그 상태로 완전히 혹은 가장 가까이 돌아가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그분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하나님이 정말로 신자를 향해 가장 기뻐하는 마음이 무엇이겠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심어 기뻐했다. 타락하기 전의 에덴동산에 있을 때의 아담의 상태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바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마음에 비추어 생각하여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예수 전의 그것과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오직 예수 중심으로 바뀌어 모든 생각이 그 통일된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신이 육체보다, 인간의 내면세계가 외부의 물질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도 그러하지만 특별히 인간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경외하며 살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추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나치 제국이 그랬지 않는가? 그들의 목표도 선했다. 인간끼리 서로 협력하여 복을 누리는 이상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제했기에 그 결과는 또 다른 바벨탑만 쌓게 되었고 불신자들도 인정하는 대로 사탄이 주인인 지옥 같은 제국만 만들었다. 그 후의 공산주의도 그렇고, 지금 북한도 그러하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미국과 서구와 한국 같은 선진국들의 현재 추세도 그렇다. 하나님 그분을 거역한 채로 오직 인간의 소견에 좋은 대로만 행하고 있다.

지금 불신자들을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실존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한다. 그들 마음에 하나님은 없고 알지 못하기에 그분께 기도도 전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를 야단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문제는 교회와 신자들이다. 이천 년 전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도덕과 종교를 하나님과 예수님보다 앞세우고 있다. 불신자들이 자기들 사상과 철학을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떻게 창조되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대해 모른다. 잘 모르니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심어주어 당신의 마음이 자기 마음에 충만해져 있는 신자는 정말로 참 인간답게 풍성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 무엇에나 경건하고 의로워질 수 있다. 교회는 신자로 그렇게 변화시키고 그런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한다. 말하자면 신자가 범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권능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손을 안 씻고 밥을 먹어도, 심지어 교회 안팎에서 세속적이고 경망하다고 오해하는 행동을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선 전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적 생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소통하지 않고, 범사를 대하면 아무리 손을 씻고 밥을 먹어도 더럽고 추해질 뿐이다.  

3/3/2013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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