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하고 있는가?

조회 수 568 추천 수 27 2009.11.12 01:33:11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하고 있는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에게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4-17)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여야 하고 또 세상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승리와 향기를 신자들이 흔히 이해하고 있는 것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승리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받고 나아가 자신의 소망을 믿음의 기도로 크게 이뤄내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믿음이 성숙한 신자라도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항상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영적으로 평강과 위로를 얻는 것만이 승리입니다. 말하자면 신자 자신이 영육 간에 강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 앞에 고결한 인격을 드러내고 불쌍한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말하자면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 같이 되는 것입니다. 또 믿는 사람의 표시를 내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신자의 집에 가면 성구 액자가 곳곳에 걸려 있고 찬송가 테이프는 은은하게 울리며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든 모습들이 신앙생활에서 신자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들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분명히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요 그분의 향기를 드러내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승리와 향기는 우리와 차원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 안에 생명과 사망의 두 냄새가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축복과 환난을 번갈아 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생명과 사망의 냄새 둘 다 피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신자에게는 잘 대우했고 불신자는 배척했다는 뜻도 당연히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오직 십자가로만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기 삶과 인생의 전부를 오직 복음 전하는 데에만 걸었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복음을 전하되 거기에 어떤 다른 내용을 첨부하여서 혼잡하게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믿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을 당한다는 그 한 주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의 승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떤 형태라도 자신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죄와 사단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바로 그 승리뿐이었습니다. 복음 안에 들어온 자가 참 생명을 얻음으로써 죽음을 이겨내는 승리입니다. 그 승리가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뿐 아니라 바울 자신과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항상”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복음을 전하는 자마다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우선 쉬운 예로 아그립바 왕은 반쯤 마음을 열었다가 복음을 외면해버렸을 뿐 아니라(행26:28), 본문에서도 사망의 냄새도 피웠다고 했으므로 전도에 실패한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한다고 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되 확실하게 승리하는 모습으로 전했다는 뜻입니다. 전도하는 태도나 언변이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이 한 인간이 영원히 살고 죽는 진짜 심각하고도 긴급한 문제라는 것을 상대가 확실히 알도록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들은 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단순히 사상, 도덕, 철학,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걸려있는 인생에서 가장 크고도 중요한 결정을 가름하는 분기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라고 말 했습니다. 아무도 그 두 반응이 아닌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이미 사단에게 완전히 승리한 복음만 전하므로 하나님과 사단의 자녀가 확연하게 다르게 반응하여 딱 두 부류로 나뉘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복음 안에 들어와 있든지 그 밖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사망과 생명 외에 다른 제 삼의 대안은 없으며 그 경계선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영육간에 어느 쪽이든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했는데도 상대가 그런 반응이 없거나 최소한 그 핵심에 대한 인식이 없어 보이는 것이 바울에게는 실패였습니다. 단순히 들어볼만한 옛날이야기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만 보이거나, 안 믿는 것보다는 믿는 것이 낫겠지, 혹시 천국이 있을지 모르니까 보험 들듯이 믿어 볼까, 하나님은 알겠는데 예수는 모르겠다, 다른 종교와 별로 차이가 없네 식의 반응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은 모든 상대는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아예 콧방귀도 안 뀌든지 둘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이 전하는 내용이 진짜라면 정말 두렵고도 심각한 내용이며 예수가 하나님임에 틀림없고 만약 가짜라면 이런 엉터리도 없으며 예수도 미치광이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은 이야기를 들었고 또 믿음은 좋은 것이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지라는 반응은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 본인이 살고 죽음의 경계선을 분명히 넘어선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회심 이전의 삶은 분명히 사망이었고 이후의 인생은 생명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매일매일 예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십자가 안에서 죽음을 뛰어넘어서 참 생명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남에게도 자기가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바울을 볼 때에도 실제로 매일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생명을 온전히 누리고  있음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방이 막힌 환난에서 구사일생으로 건짐을 받는 모습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의 태도, 인생의 목적, 존재의 가치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예수 중심으로 바뀌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영역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의 십자가 메시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바로 살고 죽는 문제 두 가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오늘날 교회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너무 혼잡해졌습니다. 생명과 사망의 분명한 향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순전한 복음이 선포되어 그리스도가 승리하든지 외면당하든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함에도 신자와 교회가 승리하는 일에만 급급합니다. 세상 사람들로 생명과 사망 둘 중 하나의 냄새를 십자가를 통해 분명히 맡게 해주어야 하는 일은 교회 스스로 고리타분한 일로 뒤 쪽으로 제쳐놓았습니다. 대신에 처세 성공 철학과 다른 종교보다 약간 고상한 도덕을 가르치고 영적 전쟁이라는 미명으로 심리치료만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신자가 세상에서 앞장 서는 기술을 리더십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히 체계적으로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1,12)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바울의 삶과 그가 설파한 복음의 진리에 과연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리더십의 유형이 나타납니까? 오히려 전혀 반대의 모습 아닙니까? 겉 사람이 후패한다고 합니다. 속이 날로 새롭다고 하니까 겉 사람도 날로 더 후패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선 항상 자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새로워지기에, 그를 보는 자마다 그 생명의 냄새를 맡든지 아니면 그 냄새가 싫어서, 즉 겉 사람이 후패하는 모습이 싫어서 사망의 냄새 쪽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칠 유일한 영적 리더십은 오직 그 리더가 십자가 복음 안에 얼마나 더 녹아져 있어서 자기의 전 존재와 삶과 인생을 거기에 걸고 있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신자와 교회가 그리스도의 참 향기를 회복하여 항상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 한 복판에 십자가를 바로 세우지 않는 한, 아무리 우리가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인 선한 향기를 피우더라도 바로 그것이 오히려 사망의 냄새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지금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5/16/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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